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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교회의 성지와 사적지(춘천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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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19 ㅣ No.1737

교회의 성지와 사적지

 

 

현재 전국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예비신자, 심지어는 신앙을 갖지 않은 분들도 한국 천주교에서 지정한 111곳의 성지를 돌아보기 위해 열심히 순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책 중에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인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라는 책자에 우리 교구 신앙의 터전은 다섯 곳이 지정되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섯 곳은 죽림동 주교좌 예수성심 성당과 강릉 대도호부 관아, 곰실 공소, 금광리 공소, 양양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성당인데 이 다섯 곳 중 안타깝게도 교구 내에서 성지로 선포된 곳은 한 곳도 없고 그나마 안타깝게도 2014년 9월 27일 교구에서 최초로 성지선포식을 가졌던 홍인 레오의 순교 터도 누락되어 있습니다. 교구 내 성지와 사적지에 관련한 사정은 이러하지만 가톨릭 신자라면 알아야 할 교회의 성지와 사적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그 개념을 정리해서 신자 여러분들과 나누고, 다음 순서 연재에서는 성지와 사적지의 일반적인 개념을 토대로 우리교구의 성지와 사적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2017년 2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의 성지’와 관련한 자의교서 「교회의 성지(Sanctuarium in Ecclesia)」를 통해 성지들은 “이 시대의 복음화를 위해 대체할 수 없는” 특징을 지닌 예배 의 특별한 장소들이라고 공인하면서 “새로운 복음화의 활력 있는 중심지”로서 성지들의 조직적 사목 활성화의 촉진을 요구했으며, 신자들의 신앙심과 신심의 장소들에 대한 순례의 사목적 재발견을 목표로 하는 지역적 모임의 활성화도 촉구하고, 순례자들에게 일관성 있게, 도움이 되는 영성적 · 교회적 도움을 제공하기 위한 사목적 배려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근래에 성지 보존과 개발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수원교구 성지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을 두고 있는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교구장 주교가 신자들의 영신적 이익을 위하여 정식으로 공문이나 혹은 교구장이 주례 하는 성사 거행으로써 어떤 장소를 성지로 공식 선언할 때, 신자들이 어떤 장소(성인, 복자, 순교자와 관련된 곳)를 자발적으로 순례하며 기도하는 장소를 교구장이 인정하여 성지로 공식적으로 선포할 경우를 ‘성지’라고 하나, 교회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분명히 있다하더라도 교회 소유의 토지나 교회 성물 혹은 기념물이 전혀 없고 따라서, 교구장 주교의 전례 거행이 관례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장소는 ‘사적지’일 수는 있어도 교회 성지는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식적인 예절 거행이나 순례행위 등을 전혀 행할 수 없지만 교회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라면 표지석을 세워 기념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본다면 우리 교구의 ‘성지’와 ‘사적지’는 어떻게 구분하고 정리할 수 있을까요? 다음 호를 기대해 주세요! [2017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일 춘천주보 2면,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춘천교구의 성지 (1) 죽림동 주교좌 예수성심 성당의 순교자 묘역

 

 

1984년에 거행된 103위 시성식과 2014년에 거행된 124위의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회의 큰 기쁨이자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124위 복자의 시복 후 시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절차인 기적 심사의 통과 절차가 남아 있어 아직도 시성을 위해 많은 기도와 노력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또한 제2차 시복 추진 대상자들인 근현대 신앙의 증인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안에 우리 춘천교구도 6·25 순교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분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교구 차원에서 그분들의 시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보아 아직도 잊혀지고 알아내지 못한 신앙의 선조인 순교자와 증거자들이 많기에 우리는 함께 기도하며 그분 들이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화관을 받을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죽림동 주교좌 예수성심 성당의 뒤뜰에는 교구순교자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춘천 교구에서 활동하다가 선종한 사제들이 잠든 곳인 동시에, 신앙을 증거하고 목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애쓰다가 희생된 6·25전쟁 순교자들이 함께 모셔진 곳입니다. 이 묘역에는 ‘죽음의 행진’ 속에서 살아남아 교황사절을 지내며 춘천교구의 첫 교구장을 맡아 교구의 초석을 놓으신 구인란 토마스(Thomas F. Quinlan) 주교의 묘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희생당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고 안토니오(Antony Collier) 신부, 라 파트리치오(Patrick Reilly) 신부, 진 야고보(James Maginn)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어있고, 북한지역에서 순교하여 유해를 모실 수 없었던 백응만 다마소, 김교명 베네딕토, 이광재 티모테오, 손 프란치스코(Francis Canavan) 신부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묘역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충실히 살다가 생을 마친 순교자들과 성직자들이 잠들어 부활을 기다리는 영원한 안식처로 자리 잡았으며, 이번 순교자 대축일에 교령에 의하여 교구의 성지로 선포된 신앙의 터전입니다.

 

근현대 신앙의 증인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에 대한 약전 작성이 완료되고 보고서가 마무리된 후, 시성성으로부터 ‘장애없음’(Nulla Osta) 답변을 받아 시복 법정이 개정되고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우리 교구 순교자 묘역에 안치되어 있거나, 가묘로 조성되어 있는 분들의 시복재판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증거하다가 거룩하게 순교하신 이분들이 흘리신 피가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는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를 함께 바치고, 이분들이 묻히신 성스러운 터전을 방문하여 순교의 삶을 기억하고 우리의 신앙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2017년 9월 1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이동 춘천주보 2면,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춘천교구의 성지 (2) 양양 아기예수의 성녀 데레사 성당과 38선 티모테오 순례길

 

 

양양성당은 1921년 4월 영동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본당으로, 최문식 신부가 상도문리에 천주당을 세운 것이 기초가 되어 설립되었다. 1922년 2월 양양읍 서문리로 본당을 옮겼다가, 1936년 대홍수로 성당이 침수되어 1937년 현재의 위치로 이주하여 성당을 신축하였다.

양양성당의 주임사제였던 이광재 신부는, 1909년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냉골에서 태어나 1936년 3월 이천본당 출신으로 사제품을 받은 후, 1939년 7월 양양본당에 부임하였다. 38선과 가장 가까운 성당이었던 양양성당에서 사목하던 이광재 신부는, 해방 후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남쪽으로 내려가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무사히 월남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이 함께 하던 “양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 며 월남하지 않았다. 또한 평강과 이천에서 사목하던 신부들이 체포되자 그 지역을 오가며 사목활동을 하였고,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끝까지 남아 교우들을 돌보며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광재 신부는 1950년 10월 9일 새벽, 원산 방공호에서 인민군의 총탄을 맞아 순교하여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 가 되었다.

‘38선 티모테오 순례길’ 은 신앙과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어 남하하는 북녘 동포들의 피난길이었으며, 이광재 신부가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북녘의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을 도와 38선 이남으로 내려갈 수 있게 한 생명의 길이다. 춘천교구에서는 이광재 신부의 순교일인 10월 9일을 교구 성직자 추념의 날로 정하고,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의 삶을 묵상할 수 있도록 매년 ‘38선 도보순례’ 를 실시하고 있다. 현재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대상자인 이광재 신부의 사목지였던 양양성당은 지난 9월 17일 순교자 대축일에 교구장의 교령선포로 성지로 선포된 신앙의 터이며, 그의 헌신과 희생의 발길이 묻어 있는 티모테오 길은 교구의 사적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춘천주보 3면,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춘천교구의 성지 (3) 홍인 레오 순교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중 한 분으로서 복자품에 오르신 홍인 레오 순교복자의 순교터는 우리 교구에서 가장 먼저 성지로 선포된 곳입니다. 교구에서는 2014년 9월 27일 최초로 순교 성지 선포식을 하였고 이곳에는 현재 순교현양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여타의 성지처럼 훌륭하게 조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성지를 방문하는 교우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전례를 할 수 있는 곳이며, 교구에서 성지담당사제를 임명하여 관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순교자 홍인 레오와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부자지간입니다. 이 두 분은 포천지역의 부자사도(父子使徒)라고 할 수 있는데 홍교만은 한양에서 태어났으나 포천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면서 경기도 양근과 광주에 살던 남인계열의 양반들과의 교류를 통해 천주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교리를 배우며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습니다. 이들의 권면으로 1794년 주문모 신부에게 정식으로 세례를 받은 후에는 하느님께로 향한 사랑으로 신앙을 실천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여 포천지역에 신앙이 널리 퍼지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체포되어 서울 서소문에서 순교하였습니다.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아들인 홍인 레오는, 1791년 아버지로부터 천주교에 관해 전해 듣고 적극적으로 교리를 배우고 익혀 신앙을 키워나가면서 아버지와 함께 1794년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이후 황사영 등과 교류하면서 포천지역의 천주교 전파에 주력하였으며, 1801년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당시 부자를 함께 처형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포천의 감옥으로 옮겨졌고, 수차례 종용되던 배교에 대한 유혹을 이겨내며 신앙을 지키다가 결국 1802년 포천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저잣거리에서 순교하였습니다.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홍인 레오는 2014년 8월 16일 교종 프란치스코에 의해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로 시복되었으며, 포천성당에서는 홍인 레오의 순교 터가 교구성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될 그날을 위해 교우들이 하나 되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7년 10월 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춘천주보 3면,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춘천교구의 성지 (4) 소양로 성 파트리치오 성당

 

 

1950년 1월 5일 죽림동 주교좌 성당에서 분가, 설립된 소양로 성당은 한국 전쟁에서 순교한 고 안토니오(Anthony Collier) 신부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진 성당이다. 고 안토니오 신부는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위험한 상황이 닥칠 것을 대비해 성체를 옮겨 놓고 신자들에게도 피신하기를 권고하고 사태를 지켜보다가, 전쟁의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6월 27일 죽림동 성당으로 이동하던 중 공산군에게 잡혀 총살당하였다.

본당 설립 당시부터 계획하고 있던 성전 신축은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1956년 3월 착공하여 그해 9월 3일 낙성식을 하였다. 당시 구인란 토마스 신부(Thomas F. Quinlan)는 6·25 당시 순교한 사제들을 기념하기 위해 교구 내 세 곳에 성당 신축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 중 소양로 성당이 첫 번째로 건축되었다.

당시 건축한 대부분의 성당이 고딕양식이었던 것에 반해 소양로 성당은 반원형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건축되었는데, 부채꼴 형태의 구조는 신자들 모두가 제대와 사제를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전례에 임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이다. 이러한 건축 구조는 유럽에서도 1960년대 이후에 드물게 적용된 건축 구조의 한 형태인데, 한국 천주교회 건축물로는 처음으로 시도된 형태이다. 한국 최초로 지어진 근대양식의 성당이라는 건축사적 의미가 반영되어 2005년 4월 15일 등록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춘천교구에서는 고 안토니오 신부의 순교지 확인과 발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여러 구술과 기록에 의해 정확한 위치를 찾고 있는 중이다.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대상자인 고 안토니오 신부의 최후 사목지인 소양로 성당과 향후 밝혀지게 될 순교터에 많은 이들의 순례가 이어진다면 교구의 성지로 선포 될 수 있는 중요한 신앙의 터가 될 것이다. [2017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일 춘천주보 3면,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춘천교구의 성지 (5) 묵호 바다의 별 성당 - 6·25 순교자 라 파트리치오(Patrick Reilly) 순교터

 

 

묵호 성당은 한국전쟁 중에 라 파트리치오 신부가 순교의 시련을 겪은 곳이다. 1940년 임당동 본당의 관할 공소로 지정되어 시작된 묵호성당은 해방 후 묵호 해군 사령부의 군종 신부가 부임하여 사목을 하기도 했는데 1948년에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 라 파트리치오 신부가 부임하여 사목하였다. 전쟁 중에 사목하던 신부가 순교하자 본당은 거의 폐쇄되었으며, 1954년부터 삼척 성내동 본당(1965년 교구분리에 따라 현재는 원주교구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가 1957년 6월 현재의 성당 건물을 건축하면서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이곳 묵호성당도 소양로 성 파트리치오 성당과 함께 구인란 주교가 설립하고자 했던 한국전쟁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한 세 성당 중에 한 곳이다.

라 파트리치오 신부는 1940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고 1947년 입국, 1949년 묵호본당 사제로 부임하였다. 사목을 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자, 교우들이 배를 마련하여 피난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양들을 버리고 목자가 혼자 도망갈 수 없다”라고 거절하였다. 공산군이 쳐들어오자 당시 전교회장의 권유로 그의 집 뒷방으로 피신하여 몰래 미사를 봉헌하였으나, 자신으로 인해 교우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을 염려하였고 결국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매질을 당하며 끌려갔다. 다른 포로들과 함께 묵호에서 강릉으로 이송되던 중, 공산군에 의해 밤재굴에서 총살당하였다. 라 신부의 유해는 본당 교우들에 의해 수습이 되어 묵호에 가매장되었다가 1951년 10월 11일 죽림동성당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이후 묵호 성당의 신자들은 라 파트리치오 신부의 순교와 얼을 기리기 위하여, 신부의 유해를 수습한 장소인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 산 16-2번지에 순교비를 설치하고 도보순례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순교비 소재지가 영동선 철도의 선상에 있는 한 터널 입구인 관계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어, 대안으로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 산 47-3번지에 대체 순교 성지를 조성할 계획을 하고 있다.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대상자인 라 파트리치오 신부의 최후 사목지인 묵호 성당과 순교터인 밤재굴에 많은 이들의 순례가 이어진다면 교구의 성지로 선포될 수 있는 신앙의 터이다. [2017년 10월 15일 연중 제28주일 춘천주보 3면,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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