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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63: 돌쩌귀,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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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8-27 ㅣ No.473

[추기경 정진석] (63) 돌쩌귀, 추기경


꿈에도 생각 못한 임무, 기대하지 않은 은총의 십자가

 

 

- 2006년 2월 22일 서울대교구청에서 열린 추기경 서임 기자회견에서 정진석 추기경과 김수환 추기경이 두 손을 맞잡고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 탄생을 기뻐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DB.

 

 

2006년 2월에 들어서며 각 언론에서 새 추기경에 대한 예측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통상 2월 말 추기경 임명이 있었기 때문에 내ㆍ외신을 통해 한국에서도 새 추기경이 임명될 것이란 이야기가 쏟아졌다. 

 

2월 22일 저녁 8시,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니콜라오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언론사에는 몇 시간 전 엠바고를 전제로 이미 고지가 된 상태여서 오후가 되자 서울대교구 주교관 마당은 언론사 취재 차량과 기자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신문은 “정진석 대주교, 한국 두 번째 추기경으로 임명”이라는 머리기사로 장식됐다. 정진석 추기경은 1969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임명한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이 됐다. 그의 나이 만 74세에 받은 은총이었다.

 

37년 만의 새 추기경 임명은 한국 교회 경사였다. 그동안 한국 교회 교세 성장에 따른 아시아 선교에서의 주도적인 위치,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 발전 등으로 매번 추기경 임명 때마다 두 번째 한국 추기경이 나올 것이란 소문이 떠돌곤 했다. 또 통상 주교직의 은퇴 나이가 75세인 것을 감안하면 만 74세인 정진석 대주교를 추기경에 임명한 것 또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 추기경의 임명을 가장 크게 기뻐한 사람은 선배인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김 추기경은 발표 직후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했다.

 

“한국에서 새 추기경이 탄생해서 정말 기쁩니다. 매번 추기경 발표 때마다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는데 이제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게 됐습니다. 혹시 내가 아직 살아 있어서 두 번째 추기경 임명이 늦어지는 것은 아닌가 해서 자책감과 부담이 있었습니다. 정 추기경이 직무를 잘 수행하도록 기도로 뒷받침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와 한국 천주교회가 주님의 은총 속에서 더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추기경 서임 기자회견에서 추기경으로 임명된 소회를 밝히는 정진석 추기경. 가톨릭평화신문DB.

 

 

2월 22일 오후 8시 새 추기경 임명이 공식 발표되자 주교관 마당에 모인 군중은 박수로 환영했다. 이어진 간단한 임명 축하식에는 많은 교회 인사들이 함께하면서 축하 분위기를 이어갔다. 서울대교구 총대리 염수정 주교는 감사 메시지를 준비해 낭독했다.

 

“한국 교회, 나아가 아시아 교회의 새 시대를 이끌어 나갈 새 추기경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새 추기경의 탄생은 교회 쇄신, 타종교와의 일치와 화합을 통해 평화와 정의와 사랑에 더 정진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새 추기경을 위해 마음을 모아 기도와 희생을 봉헌합시다.” 

 

1970년 39세로 최연소 주교품을 받을 때 정 추기경이 정한 사목표어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었다. 바오로 사도의 서한(1코린 9,22)에서 선택한 성구였다. 정 추기경은 추기경으로서 사목표어로 이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라틴어 ‘Omnibus Omnia’는 ‘모든 것을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모든 것으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모든 이에게’ 등 여러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 말은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용한 말이다. 

 

추기경 발표 이튿날 아침, 정 추기경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를 조용히 맞았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오전 5시에 일어난 정 추기경은 6시 서울대교구청 주교관 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후 서울대교구청 국장 신부들과 아침 식사를 했다. 하지만 집무실에서의 일정은 그동안과 조금 달랐다. 오전에 교회 인사들이 축하 인사차 집무실로 그를 찾아온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정 추기경은 청와대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3분가량 이어진 통화에서 노 대통령은 추기경 서임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고, 정 추기경은 정부의 관심에 감사하다고 답했다. 

 

오후에는 기자 간담회가 있었다. 정 추기경은 여기서 자신의 심정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나는 지도자로서 모든 것을 혼자 이끌어 갈 능력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좋은 뜻을 한곳으로 모아주시면 앞으로 좋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자들에게 기도와 협조를 가장 먼저 요청한 정 추기경은 추기경 임명의 의미도 함께 설명했다.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 탄생은 서울대교구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 추기경도 이를 절실하게 느끼며 강한 책임감이 들었기에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추기경에 임명된 것은 저 자신의 개인적 자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위상,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국민 전체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입니다. 추기경의 추가 임명은 한국 교회가 아시아 선교를 위해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교황님의 뜻이라 생각됩니다.” 

 

‘추기경’이라는 말은 ‘돌쩌귀’라는 뜻의 라틴어 ‘카르도’(Cardo)에서 유래했다. 세상과 교회, 한국과 교황을 잇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추기경은 교황 자문에 응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자리다. 교황이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을 드릴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세계 평화를 지키는 문제에 여러 국가 지도자들의 협조가 필요한데, 교황이 하느님 뜻에 따라 말씀하는 것을 세계 지도자들이 경청하고 그 뜻을 존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며, 힘이 닿는 데까지 협조하는 임무도 각국 추기경의 소임 중 하나다. 정 추기경은 자신이 사제의 삶에서 이제 또 한 걸음 다른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주님 부르심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위해 기도했다.

 

분주한 하루였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업무를 정리하고 숙소에 들어서자 함께 생활하는 사제들과 마주쳐 자연스레 추기경 임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사제관 입구에서나 저녁 자리에서 동료 사제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그는 습관처럼 말했다.

 

“추기경이 될 줄 정말 몰랐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임무, 기대하지 않았던 큰 은총의 십자가가 자신에게 주어졌음을 정 추기경은 비로소 실감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8월 27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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