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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42년 한국인 주교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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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8-18 ㅣ No.918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42년 한국인 주교의 탄생

 

 

한국인 성직자 양성사(史)

1833년부터 조선 선교지를 담당한 파리외방전교회의 첫 번째 목표는 파견된 지역에서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여 자립 교회를 세우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한국에 진출한 직후부터 한국인 사제를 양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836년 1월에 입국한 모방 신부는 2월부터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신학생을 차례로 모집하여 12월에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그리고 앵베르 주교는 국내에서 정하상 등을 교육시켜 사제품을 주려고 계획했으며, 1845년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1850년 이전부터 신학생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페레올 주교의 선종 이후 잠시 조선 교회를 맡았던 메스트르 신부는 1854년에 충북 진천의 배티에서 교육받던 임 빈첸시오, 김 요한, 이만돌 바울리노를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고, 1855년에는 충북 제천의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했다.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 노력은 개항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877년에 입국한 로베르 신부는 리델 주교한테서 신학생 교육을 위임받아 1879년까지 실시하였고, 1882년부터는 페낭 유학도 재개되어 1884년까지 21명의 신학생이 페낭으로 보내졌다.

블랑 주교는 국내의 신학교도 다시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에는 경기도 여주의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개교하였고, 1887년에는 부엉골의 신학교를 서울의 용산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교육받은 강도영 마르코,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강성삼 라우렌시오가 1896년 4월 26일에 약현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세 명의 신부는 김대건 신부 이후 50년 만에 탄생한 한국인 사제였다.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1845년에서부터 97년이 지난 1942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주교가 탄생했다. 주인공은 명동본당의 노기남 보좌 신부였다.

그런데 노기남 신부의 주교 임명은 일제의 교회 탄압이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시작했고, 한국도 전시 체제에 편입되었다. 1938년 4월에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이 한국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은 점차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가 되었고, 한국인들에게는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 신민화(皇國臣民化)가 강요되었다.

전시 체제 아래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었다. 특히 1940년부터 일제가 내세운 ‘대동아 신체제 건설’은 서양인 주교들이 책임자였던 한국 교회에 커다란 변화를 예고했다. 그리스도교에서 운영하는 단체의 책임자를 일본인으로 대체하려는 방법들이 강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 천주교회의 경우 1941년 말까지 16개 교구의 교구장이 모두 일본인 성직자로 교체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 천주교회도 교구장이 일본인으로 교체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졌다. 이에 서울대목구의 라리보 주교는 일제의 직접적인 압력이 있기 전에, 자신의 사임 의사와 후임자 추천이 담긴, 1941년 12월 20일 자 서한을 주일 교황 사절 마렐라 대주교에게 발송했다.

라리보 주교는 자신의 사임과 후임 대목구장 임명 문제를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이 일이 미리 알려졌을 때 일제의 반발을 의식한 듯했다. 라리보 주교는 서한을 발송함과 동시에 자신의 비서인 오기선 신부를 동경으로 파견하여 교황 사절에게 자신의 뜻을 확실하게 전달했다.

이때 라리보 주교가 후임으로 추천한 사람이 바로 노기남 신부였다. 교황청에서는 라리보 주교의 뜻에 따라 노기남 신부를 서울대목구장으로 임명하고, 동시에 평양대목구와 춘천지목구도 관리하게 하였다.


최초의 한국인 주교 노기남 바오로

노기남 주교는 1902년 1월 22일(양력)평안남도 평양군 율리면 무진리에서 태어났고, 1911년 이후 황해도 신계군 고면 화개리 내동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하는 한편, 포내본당의 부이수 신부에게 교리를 배웠다.

노기남 주교는 1917년 9월 신학교에 입학했고, 1930년 10월 26일 명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명동성당에 부임하여 1942년 1월까지 보좌 신부로 활동했다.

명동성당 보좌 신부로 사목하던 11년 동안, 노기남 신부는 고령이었던 비에모 주임 신부(1869-1950년)를 대신하여 많은 사무를 수행했다. 본당 일은 물론, 계성보통학교와 동성상업학교의 운영과 교육에 참여하였고, 재단 법인 경성구 천주교 유지 재단 이사,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 부총재 등 각종 단체에도 관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939년 5월에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이사장 라리보 주교)에는 명동본당을 대표하여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 단체가 1940년 11월에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으로 개편된 뒤에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1년 12월 라리보 주교가 노기남 신부를 후임으로 추천하며 사임하였다. 노기남 신부가 추천된 이유에 대해, ‘노 신부가 일제에 협력적이었기 때문’이라든지, 라리보 주교가 자신과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입지에 유리하도록 ‘가장 순하고 말 잘 듣는 며느리와 같았던’ 한국인 신부를 선택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11년 동안의 활동을 근거로 노기남 신부가 서울대목구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천되었다는 주장이 좀 더 합리적이다.

1942년 1월 11일 라리보 주교는 휴가차 평양에 머물던 노기남 신부를 급히 호출했다. 그리고 서울에 온 노기남 신부에게 대목구장 임명 소식을 전했다. 새 대목구장의 착좌식은 1942년 1월 18일 명동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0일에는 콜바사의 명의주교로 임명되었고, 12월 20일에 명동성당에서 주교 서품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노기남 주교는 한국인 최초의 주교가 되었고, 서울대목구는 이제 한국인 주교가 책임지는 한국인의 자치 교구가 되었다.


위기가 기회로, 새로운 페이지의 시작

노기남 주교의 착좌식을 소개하는 「경향잡지」에는 당시 라리보 주교의 사임 이유를 ‘선교지가 자립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현지인 성직자에게 양도한다.’는 파리외방전교회의 목적과, 일제가 내세운 ‘대동아 신체제 건설’에 대한 라리보 주교의 현명한 통찰의 결과라고 하였다. 시기적으로 서양인 교구장이 물러날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와 함께 노기남 주교의 회고록 「당신의 뜻대로」(1978년)에는 ‘일본인에게 한국 교회를 넘겨줄 수 없다는 한국인 신부들의 반발’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노기남 신부의 서울대목구장 임명은 서양인 주교가 물러나야 할 시점에서, 한국인 신부의 입장 등 여러 사항을 고려한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나 노기남 신부의 대목구장 임명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인 신부를 후임으로 생각한 라리보 주교의 결심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사임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일본인 성직자가 대목구장에 임명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내려진 결단이었다.

실제 대구대목구에는 1942년 8월 30일 무세 주교의 후임으로 일본 센다이 교구의 하야사카 규베이 신부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광주지목구도 1942년 11월 21일 일본 나가사키 교구의 와키다 아사고로 신부가 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서울의 경우도 라리보 주교의 사임이 늦었다면 일본인 교구장이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라리보 주교의 빠른 결단에 따라 대구대목구와 광주지목구와는 달리 한국인 최초의 대목구장과 한국인 최초의 주교가 탄생할 수 있었다.

박해 시대에 순교자의 피가 믿음의 씨앗이 되어 새로운 교우촌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듯이, 일제가 한국 교회를 일본인 교구장의 책임 아래 두려던 시도는, 오히려 한국인 주교와 한국인 자치 교구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위기가 한국 교회에는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천주교회에 대해서는 민족사의 관점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에 대해 한국 교회는 2000년 12월 3일 주교회의에서 ‘쇄신과 화해’라는 한국 천주교회의 과거사 반성 문건을 통해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한 바 있다.

어떤 시대, 사건,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점과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1942년 한국인 주교의 탄생도 교회사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페이지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방상근 석문 가롤로 -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 위원으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와 고문서 전문가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까?」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8월호, 방상근 석문 가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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