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강론자료

마태오복음 11,25-30 하늘의 지혜 (2017. 7. 9. 연중 1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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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7-07-08 ㅣ No.2178

그때 예수가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당신께서는 지혜롭고 유식한 사람들에게 감추신 것을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바로 이것이 당신께서는 바라시는 일입니다.”

 

하늘과 땅은 예수의 제자가 하느님과 일치하여 세상을 사랑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하늘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며, 땅은 아들과 세상의 사랑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의 제자를 통하여 인류와 우주만물을 다스리신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본인 스스로 분명히 자각할 수 있다. 별 의미 없이 엮어낸 문학적 수사(修辭)가 결코 아니다.

 

지혜롭고 유식한 사람이란 세상의 지혜, 곧 사람의 권위(권력)를 지닌 스승이며 어리석은 사람이란 성령에서 오는 믿음의 지혜, 곧 하느님의 권위를 지닌 사람이다. 세상의 지혜는 욕망을 채우는 일에는 엽렵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믿음의 지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을 낳는다. 믿음의 지혜는 이토록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 없이는 믿음이 있을 수 없다.

 

! 예수가 지금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마음을 툭 털고 생각해 보자. 하느님께서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보여주시는가? 세상의 기준으로 나는 지혜로운 사람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사람인가? 그렇다면 예수의 기준으로 나는 지혜로운 사람인가 어리석은 사람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말하는 회개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이것은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진부한 윤리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을 가르는 절체절명의 주제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아버지 이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모릅니다. 아들과 아들이 계시하려는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릅니다.”

 

동서고금에 걸쳐서 세상에는 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 교주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무조건 믿는 것을 두고 어지러울 ()’를 붙여서 미신(迷信)이라고 한다. 미신에 빠진 사람은 이성을 잃고 갈팡질팡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 남편에게는 불충하면서 교주에게 충성하고, 가족은 돌보지 않고 종교 단체에 매달려서 세월을 보내는가 하면, 헌금은 뭉텅뭉텅 내면서 가까운 친구, 친척, 이웃에게는 인색하다. 이렇게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품위를 잃고 있으면서도 본인은 마치 비밀스러운 행운을 잡은 것처럼 득의에 차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의 말은 예수 자신의 삶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제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이때 제자들은 스승이 누리는 똑같은 지위와 권능을 누린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형제이며 친구라고 부른다. ‘아들이 계시하려는 사람들이란 물론 예수의 제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의 제자는 회개한 사람, 곧 세상에서 벗어나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예수는 바로 그런 사람과 일치하여 하늘나라로 동행하는 주님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을 아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바꾸어 말하면, 아들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생명의 지혜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아는 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이다. 아버지를 아는 것은 오로지 성령에 의해 거듭남으로써 이루어진다. , 누구든지 그 자신의 영적 탄생과 쇄신을 통하여 하느님을 안다. 철학, 신학, 과학 등 학문에 의해서는 하느님을 결코 알 수 없다. 하느님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가 선택한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가 없다. 소위 예정설은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제멋대로 상상하여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며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들로 선택하신다.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회개함으로써 하느님에 의해 선택될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회개하지도 않고 선택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므로 그 능력을 발휘할지 여부는 개개인의 책임에 속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시오. 내가 편히 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쉴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씌워주는 멍에는 편하고 내가 얹어주는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성령에 의해 를 알고, 예수를 알고, 아버지를 안다. 성령은 만병통치약이며 모든 것을 다스리는 지혜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성령을 조금도 알 수 없다. 성령은 학문의 대상이 아니어서 성령에 대하여 개념적인 규정을 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어야만 한다. ‘무거운 짐은 욕망을 쫓는 인생살이이다. 쾌락, 재물,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온 우주만물과 온 천하를 연구하고 정복해야만 한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소유하려다가 온 세상을 짐으로 지고 가는 처지가 되어 있다. 그래서 세상이 무겁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며 인생길을 걸어간 결과는 어이없게도 허무한 죽음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성취하는 어떤 업적도 죽음 앞에서 빛을 잃는다.

 

사람은 회개함으로써 를 회복한다. 회개는 세상을 벗어나 광야에서 홀로 하느님 앞에 서는 일이다. 는 예수와 일치한 자아이다. 이때 사람은 성령에서 오는 안식을 누린다. 예수가 말하는 편히 쉼은 심신의 안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지혜에 근거하여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고 안심하는 것이다.

 

온유는 욕정(육체적 욕구=쾌락과 재물)에 초연한 것이며 겸손은 욕망(정신적 욕구=명예와 권력)에 초연한 것이다. 온유와 겸손은 마치 멍에처럼 육정을 거스른다. 예수는 스스로 겸손과 온유의 멍에를 메고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며 아무 조건 없이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예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본받아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성령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사실 멍에 자체는 불편하지만 소는 그 멍에 덕분에 무거운 짐도 편하게 나를 수 있다. 이처럼 성령은 사람을 욕망의 집착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인생살이의 무게를 가볍게 해준다. 이때 인생은 짐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증진시키는 농사일, 또는 새 생명을 낳는 출산의 과정과도 같다. 나중에 보니 온유와 겸손은 귀찮은 멍에가 아니라 삶을 자유롭게 하는 양 날개로 변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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