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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성교리증(聖敎理證)의 서지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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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8 ㅣ No.896

《성교리증》(聖敎理證)의 서지 연구

 

 

1. 문제 제기

 

1893년 3월(음) 대구에서는 보기 드문 사건이 발생했다. 유학자 이기(李沂, 1848~1909)와 대구 본당의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신부가 교리 논쟁을 벌인 것이다. 이 논쟁은 이기가 로베르 신부를 방문해서 얻어 본 책이 계기가 되었는데, 이때 이기가 본 책이 바로 《성교리증》(聖敎理證)이다. 이기는 《성교리증》을 읽고 천주교 교리를 비판하는 《천주육변》(天主六辨)을 지었다. 이에 대해 로베르 신부는 <이석사여헌하>(李碩士旅軒下)와 <답영남유자이기서>(答嶺南儒者李沂書)를 지어 반박했고, 로베르 신부의 반박에 대한 답이 <여법인김교사보록서>(與法人金敎士保祿書)와 <답법인김교사보록서>(答法人金敎士保祿書)이다.1)

 

조선의 유학자와 프랑스 선교사 사이에 천주교 교리를 두고 논쟁이 붙은 것은 흥미롭다. 아마도 한불조약 이후 변화된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박해시대에는 천주교에 대한 비판이 일방적이었지만, 1886년 이후 선교의 자유가 묵인되면서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기와 로베르 신부의 논쟁은, 조선 사회 안에서 유학자와 선교사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교리 논쟁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2)

 

이기와 로베르 신부의 논쟁을 야기한 《성교리증》은, 천주의 존재를 증명하고,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선(全善)한 천주의 속성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고 미신 타파를 주장하면서, 천주교를 믿어야 하는 이유들을 설명한 책이다. 저자는 평소 외교인들이 천주교에 대해 궁금해하는 내용들을 문답 형식으로 구성하고, 이를 통해 신자들이 외교인들의 질문에 대응하게 하는 한편, 그들을 천주교로 이끌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한문 교리서는 로베르 신부가 유학자들을 개종시킬 때 활용되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와 경쟁하는 가운데, 한문으로 된 교리서의 배포에 힘을 쏟았고, 이를 통해 일정한 성과도 거두었다.3) 따라서 로베르 신부가 이기에게 《성교리증》을 준 것은 유학자들에 대한 전교 활동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성교리증》의 한글 번역본(필사본)4)도 존재하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 책은 일반 신자들에게도 읽혀 그들의 전교 활동에 도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5)

 

그런데 오늘날 《성교리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게다가 알려진 내용도 잘못된 것이 있다. ‘저자가 미상이라는 것, 예수회의 서적이라는 것, 조선에 전래된 시기’ 등이 그런 문제들이다. 따라서 《성교리증》의 서지 사항을 밝히는 작업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일부를 밝히는 작업임과 동시에 이후 《성교리증》 연구의 기초 작업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6)

 

 

2. 《성교리증》의 저자

 

《성교리증》의 저자는 미상으로 알려져 있다. 책 자체에 저자 표시가 없다. 예수회 중국 선교사 샤바냑(沙守信, Chavagnac)이라는 설도 있지만,7) 연구자의 착각임이 지적되었다.8) 《성교리증》의 저자가 미상이라고 알려진 데에는, 쿠랑(M. Courant)의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eenne)와 서종택(徐宗澤)의 《明淸間耶?會士譯著提要》의 영향이 컸다. 즉 쿠랑은 한글 필사본을 소개하면서, “저자 미상의 중국어 본문을 번역한 것이다.”라고 했고,9) 서종택은 《성교리증》에 대해 “저자의 성씨는 쓰여 있지 않다. (不書著者姓氏)”고 했다.10)

 

그런데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된 한글 번역본 《셩교리증》을 보면, 표지 다음에 “천주강생 일천팔백오십이년 감목 임 스더바노11) 교정”이라고 되어 있고, 서문(序文) 끝에도 “천주강생 일천팔백오십이년 주교 임 스더왕 교정”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서문에는 “내 이제 전루(?陋)함을 피하지 아니하고 모든 책 중에 가장 옅고 가까운 말을 널리 모아 한 책을 만드니 이름은 《셩교리증》이라 (吾今不避?陋 博採諸書中最淺近之詞 輯成一編名聖敎理證)”는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여러 책을 널리 모은 나(吾)’는 누구일까? 후술하겠지만, 서문 마지막에 교정자로 나오는 ‘주교 임 스더왕’이 바로 서문의 ‘나’이다.

 

기존의 연구자도 이 한글 번역본을 보았다. 그러나 ‘임 스더왕 주교’를 《성교리증》의 저자로 보지는 않았다.12) 아마도 ‘교정’이라는 표현을 저자와는 무관한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즉 ‘나’라는 사람이 쓴 서문을 교정한 사람으로만 간주한 듯하다. 그런데 《성교리증》의 편저자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즉 파리 외방전교회 ‘홍콩 나자렛 인쇄소의 1937년 서목(書目)’을 보면, “《성교리증》은 1852년 귀주(貴州) 대목구장 알브랑(Etienne Albrand, 1805~1853) 주교13)가 지었고, 1933년 예수회의 황 베드로(黃伯祿, Pierre Hoang, 1830~1909) 신부가 개정판을 냈다.”는 기록이 있다.14) 그리고 2000년에 북경대학종교연구소에서 간행한 《성교리증》15)의 해제에도, “《성교리증》은 1852년에 만들어졌고, 감목(?牧) 임사덕범(任斯德范)16)이 편저하고 서문을 지었다”고 했다.17) 뿐만 아니라 《성교리증》은 1863년에 호류사(胡類斯, Faurie)18) 주교가 중간하는데, 호류사 주교도 서문에서, “임감목이 세상을 구하려는 절실한 마음으로, 고충을 무릅쓰고 여러 책 속에서 쉬운 글들을 널리 뽑아 책 하나를 만들었다(任?牧救世心切, ?費苦衷, 博采???近之? ?成一?)”고 했다.19)

 

결국 이상의 자료에 의하면, 《성교리증》의 <서문>에서 ‘여러 책을 널리 모은 나(吾)’는 임 사덕범 주교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임 사덕범, 즉 임 스테파노’는 누구일까? 이와 관련해서 ‘홍콩 나자렛 인쇄소의 1937년 서목(書目)’을 다시 보자. <서목>에는 귀주 대목구장 알브랑 주교가 《성교리증》을 지었다고 했는데, 알브랑 주교가 바로 ‘감목 임 사덕범’이다. 즉 알브랑 주교의 세례명은 ‘Etienne'(스테파노)이고, 그의 중국성은 임(任)씨이다. 원래 백(白)씨였으나 1849년 이후에 임씨로 바꾸었다.20) 따라서 1852년 《성교리증》을 간행할 당시에는 임씨가 맞다. 그는 1853년 4월 22일에 사망했는데, 사망 1년 전에 《성교리증》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나 알브랑 주교가 《성교리증》의 편저자라면, 알브랑 주교는 왜 자신을 교정자로 소개했을까? 이 문제는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하겠지만, 《성교리증》의 제작 과정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성교리증》은 알브랑 주교가 편저했지만, 알브랑 주교가 혼자 이 책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성교리증》에는 중국의 고전인 사서오경(四書五經)은 물론, 중국의 역사, 풍속, 사상, 종교까지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성교리증》은 알브랑 주교가 단독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그를 도와 혹은 그의 지시로 이 책의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면, 《성교리증》은 여러 사람의 참여로 만들어졌고, 이것을 알브랑 주교가 최종적으로 점검했기 때문에 자신을 교정자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21)

 

 

3. 《성교리증》과 예수회

 

지금까지 《성교리증》은 예수회와 관련된 문헌으로 알려져 왔다.22) 특히 서종택의 《明淸間耶?會士譯著提要》에 이 책이 소개되면서, 《성교리증》이 예수회 문헌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성교리증》의 편저자인 알브랑 주교는 예수회가 아니라,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이다. 그러므로 《성교리증》은 예수회 선교사의 저작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서종택은 왜 자신의 책에 《성교리증》을 소개했을까? 아마도 서종택은 알브랑 주교가 《성교리증》을 편저한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물론 이 책이 예수회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1852년 이후 중간된 《성교리증》 중에 예수회 신부가 개정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23) 즉 1884년에 상해 자모당에서 간행한 《성교리증》은 예수회 중국인 신부 황 베드로가 수정한 개정본이다. 그리고 이후 《성교리증》은 황 신부의 1884년본이 많이 유포된 듯하다. 예를 들어 1887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홍콩 나자렛 인쇄소에서 간행한 《성교리증》도 황 신부의 서문만 없을 뿐 내용은 1884년본과 똑같다. 특히 1893년에 이기가 보았던 《성교리증》이 1884년본24)이라는 사실은, 1884년본의 유포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예수회 신부의 1884년본이 광범위하게 유포되면서, 《성교리증》은 점차 예수회의 저술로 인식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서종택도 이책을 《明淸間耶?會士譯著提要》에 수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1884년본이 이처럼 널리 보급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 책이 활판본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1884년에 쓴 황 베드로 신부의 <서문>을 보면, “1878년 가을에 동지들의 청으로 조금 수정을 가하고 하나하나 고쳐 새겼는데, 1884년 여름에 회당에 있는 원판이 썩었다. 그래서 연활자를 사용하여 인쇄하려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25)

 

결국 1884년 이전의 《성교리증》은 목판본이었는데, 목판이 점차 훼손되면서 1884년 이후에는 활판으로 간행되었고, 활판 인쇄로 많은 책이 보급되면서 1884년본이 《성교리증》을 대표하는 책이 되었지 않았나 생각한다.26)

 

한편 1890년 한국에 진출한 성공회는 1898년에 한문본 《성교리증》을 간행했고, 1905년에는 한글본도 간행했다. 그런데 이들이 저본으로 삼은 것은, 1858년에 간행된 물리(Mouly, 孟振生, 1807~1868) 주교의 감준본(鑑准本)이다.27) 그렇다면 성공회에서는 왜 당시에 유포되던 1884년본이 아니라 1858년본을 대본으로 선택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한데, 먼저 자신들이 입국할 때 가져온 책이 1858년본일 수 있다. 그리고 1884년본에 성공회와 맞지 않은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초판본에 가까운 판본을 저본으로 삼고자 했을 가능성도 있다.

 

 

4. 조선 전래와 영향

 

《성교리증》이 조선에 전래된 시기는 언제일까? 1893년에 이기가 이 책을 로베르 신부에게 얻어 보았으니, 《성교리증》은 1893년 이전에 조선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기가 본 《성교리증》은 1884년본이다. 따라서 《성교리증》이 전래된 상한 시기는 1884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1884년 이전본은 한국에 전해지지 않았을까? 이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이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된 한글 번역본 《셩교리증》이다. 이 책은 “1852년 감목 임 스더바노(알브랑 주교) 교정”이라고 쓰여 있듯이, 내용적으로 1852년에 간행된 《聖敎理證》의 번역본이다. 따라서 《셩교리증》은 한국에도 1852년에 간행된 《聖敎理證》이 전해졌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한글 번역본은 존재하지만, 한문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1852년본은 언제 한국에 전해졌을까? 이 책의 전래 시기를 알려주는 단서가,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주교가 만주 대목구장 베롤(Verrolles, 1805~1878) 주교에게 보낸 1859년 8월 2일자 서한에 있다.

 

[자료] 마침내 <성교리증>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흠숭하는 하느님이 고대 중국의 철학자들이 인식하고 있던 분이라고 저술하고 있는데, 저는 거기에 무척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 책을 번역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문제에 대한 로마의 법령을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이 책의 발행을 금지하는 것은 저보다 지식이 높은 분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그분들이 이 책을 발행 금지하도록 하면 저는 그분들을 따르겠습니다. 저자가 그 철학자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의 속성에 대한 개념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우리와 같이 그 교의는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에서 그쳤더라면 질타의 빌미를 주지 않고 목적을 이루었을 것입니다.28)

 

[자료]에 따르면, 베르뇌 주교는 조선에서 사목 중이던 1859년 8월 2일 이전에 《성교리증》을 읽었다. 따라서 《성교리증》은 1859년 이전에 이미 조선에 전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교리증》은 1852년에 간행되었고, 베르뇌 주교는 1856년 3월에 조선에 입국했다. 그리고 1859년 8월 2일 이전에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교리증》은 1856년 3월에서 1859년 7월 사이에 조선에 전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29)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성교리증》에 대한 베르뇌 주교의 태도이다. 즉 베르뇌 주교는 《성교리증》의 내용 중에 ‘천주를 상제(上帝)와 같은 존재라고 설명하는 것’30)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이에 이 책을 한글로 번역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이 책을 발행 금지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성교리증》은 베르뇌 주교대에는 조선의 신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31) 그러다가 1876년 이후 선교사들이 재입국하면서 다시 조선에 전해졌고, 그런 가운데 1852년본이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나 생각한다.32) 다만 1852년본이 번역되었다는 것은, 베르뇌 주교가 제기했던 문제가 이 시기에는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았다는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성교리증》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책이 김원영(金元永, 1869~1936) 신부의 《수신영약》(修身靈藥)이다. 김원영 신부는 1899년 5월부터 1901년 3월까지 제주 선교를 담당했는데, 이 책은 1900년 2월 4일~17일까지 14일 만에 제주 본당에서 집필한 호교서(護敎書)이자 전교서(傳敎書)이다.33)

 

《수신영약》은 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고,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천주의 존재 증명과 속성, 그리고 천주교의 특징을 서술한 부분, 둘째 천주교를 신봉할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한 해명을 통해 천주교 신봉의 당위성을 설명한 부분, 셋째 제주의 풍속, 관습, 토속 신앙을 미신 내지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의 타파를 주장한 부분이다.

 

그런데 《수신영약》의 이러한 구성은 《성교리증》과 매우 비슷하다. 문답 형식이라는 점, 천주의 존재 증명과 속성에 대해 언급한 점, 천주교 신앙의 당위성을 설명한 점, 현지의 풍속들을 타파 대상으로 간주한 점 등이 같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비슷한 표현들을 사용한 항목들이 있다.

 

[표]의 내용은 《성교리증》과 《수신영약》을 본격적으로 비교한 것이 아니라, 눈에 띄는 몇 가지 사례만을 정리한 것이다. 그러므로 논증 자료로는 부족하지만, 이를 통해 김원영 신부가 《수신영약》을 지을 때《성교리증》을 참조했을 개연성은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즉 김 신부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호교서인 《성교리증》의 내용과 형식을 참조하여 《수신영약》을 짓고, 이를 제주 선교에 활용하고자 헸던 것으로 생각한다.

 

요컨대 《성교리증》은 이기의 사례처럼 직접적으로 전교에 이용되거나, 김원영 신부의 경우처럼 새로운 ‘호교서’를 짓는데 활용되는 등, 개항 이후 한국 천주교회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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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기의 인물됨과 로베르 신부와의 교리 논쟁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에 잘 정리되어 있다. 정경현, <한말유생의 지적 변신 - 해학 이기의 경우>,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1982 ; 박종혁, <해학 이기의 천주교 비판>,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下》(벽사이우성교수 정년퇴임기념논총), 창작과 비평사, 1990 ; 최석우, <대구 본당의 설립과 정착과정>, 《신부 전달출 회장 화갑 기념 논총》, 매일 신문사, 1992(《한국교회사의 탐구Ⅲ》,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재수록) ; 금장태, <海鶴 李沂와 佛人 神父 로베르의 儒學 · 西學 論辨>,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2) 금장태, 앞의 논문, 305쪽.

3) 최석우, 앞의 논문(2000), 185~186쪽 ; 《대구의 사도 김보록 신부 서한집 - 1》, 영남교회사연구소, 1995, 81쪽.

 

4) 한국교회사연구소에는 《聖敎理證》의 한글 번역본(필사본)이 두 종류 있다. 하나는 《셩교리증》으로 1852년본의 한글 번역본이며, 다른 하나는 《해초》(복사본)로 1884년본의 한글 번역본이다.

 

5) 《성교리증》의 저술 목적은, “외교인이 평소에 하는 질문에 답을 해서, 그가 마음으로 복종하고 의심을 풀어 그의 훼방함에서 벗어나고, 혹 그를 이끌어 성교를 받들게 하는 것이다.”(答外敎素常之問 以服其心解其疑 免其毁謗 而或引其奉敎也) [《聖敎理證》原序]

 

6) 《성교리증》에 대해서는 ‘백과사전’이나 ‘이기와 로베르 신부의 논쟁’을 다루는 글에서 언급되기는 했지만, 이 책 자체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그러다가 2016년 4월 서신혜의 연구가 처음으로 나왔다. (서신혜, <성공회의 ‘성교리증’ 간행과 교리서의 현지화>, 《한국기독교신학논총》100집, 한국기독교학회, 2016)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다방면에서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7) 금장태, 앞의 논문, 306쪽.

8) 서신혜, 앞의 논문, 66~67쪽.

9) 모리스 쿠랑, 이희재 역, 《韓國書誌》, 일조각, 1994, 679쪽.

10) 徐宗澤 編著, 《明淸間耶?會士譯著提要》, 중화서국, 1958, 125쪽.

11) 스더바노와 스더왕은 모두 스테파노 성인을 가리킨다.

12) 서신혜, 앞의 논문, 85쪽.

 

13)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이다. 1832년 3월 12일 시암(태국) 선교지로 파견되었고, 1846년에는 중국 귀주 대목구로 보내졌다. 1849년에 귀주 대목구장으로 주교품을 받았으며, 1853년 4월 22일에 사망했다.

 

14) "558. 聖敎理證 Chen kiao li tchen. Preuves de la sainte Religion, par Mgr Albrand, Vicaire Apost. du Kouytcheou. (1852). Edition revue par le P. Petrus Houang, S. J. I vol. in-12 de 59pages. (1933)." (Imprimerie de Nazareth pokfulum HongKong, Cataloque 1937, p. 40).

 

15) <明末淸初耶??思想文獻匯編> 제50책.

16) 任斯德范에서 斯德范은 ‘스테파노’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任斯德范은 ‘임 스테파노’이다.

17) 《??理?》作于1852年, 由?牧任斯德范編著, 幷作《??理?小引》(一).

 

18) 胡類斯에서 類斯는 ‘루도비코’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胡類斯는 ‘호 루도비코’이다. 호 루도비코는 1860년부터 1871년까지 귀주 대목구장을 지낸 포리(Faurie, Louis-Simon, 1824~1871) 주교를 말한다.

 

19) (二),《??理?》(明末淸初耶??思想文獻匯編, 제50책), 北京大學宗敎硏究所, 2000, 18쪽.

 

20) Pere Joseph de Moidrey, La Hierarchie Catholique en Chine, en Coree, et au Japon, Imprimerie de l'Orphelinat de T'ou-Se-We, 1914, pp. 111~112.

 

21) 알브랑 주교가 이 책의 편찬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교구장으로서 책의 발간을 승인한다는 감준(鑑准)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감준이 아니라 교정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자신이 이 책의 편찬에 직접 관여했음을 드러낸 것으로 생각한다.

 

22) 금장태, 앞의 논문, 305, 322쪽.

 

23) 《성교리증》은 1852년에 초간된 이래, 1858년에는 라자리스트회(선교수도회) 소속으로 북직예대목구장이었던 물리 주교가 중간하였고, 1863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귀주 대목구장 포리[胡類斯] 주교가 중간하였다.

 

24) 《質齋藁》, 9쪽(박종혁, 《海鶴 李沂의 思想과 文學》, 아세아문화사, 1995 수록).

25) 戊寅秋, 余因同志之請, 曾稍加釐訂, 逐一補刊, 今夏, ?堂以原板朽蝕, 擬用鉛字排印.

 

26) 1884년본은 한글로도 번역되었다. 《해초》(필사본)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이 번역본은 절두산 순교성지에 소장되어 있으며, 한국교회사연구소에는 복사본이 있다.

 

27) 서신혜, 앞의 논문, 70쪽.

 

28) J’ai lu enfin d’un bout a l’autre le chang kiao li tcheing ; ce qu’y dit l’auteur que le Dieu que nous adorons est celui que reconnaissaient les anciens Philosophes Chinois m’a fortement choque et pour cette raison, je ne le fais pas traduire. Mais je ne connais pas assez les decrets de Rome sur cette matiere, pour prononcer sa condamnation, ce que je laisse au jugement de ceux qui sont plus instruits, tout dispose a m’unir a eux, s’ils condamnent cet ouvrage. Il me semble que l’auteur aurait obtenu le meme but sans donner prise sur lui, en se bornant a dire que ces philosophes ont connu comme nous le dogme de la Divinite, sur les attributs de laquelle nous avons des notions qu’ils n’avaient pas… (《베르뇌 문서》(판독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242쪽)

 

29) 베르뇌 주교가 입국 때 이 책을 소지하지 않았다면 입국 후에 구입한 것이므로, 《聖敎理證》이 조선에 전래되는 상한 시기는 1856년 3월보다 조금 내려갈 수 있다.

 

30) 《셩교리증》의 <사서오경 안에 천주 이름이 없음을 의논함이라> 항목에서는 천주가 곧 상제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 공경하는 천주는 곧 사서오경 안에 일컫는바 상제니, 천주는 상제와 더불어 음이 비록 같지 아니하나 의리는 분별이 없으니, 천주는 천지의 주재오 상제는 천지의 임금이니 임금은 또한 주재라.… 천주는 곧 상고적 대현이 공경한 상제니라.” ‘천주가 상제’라는 인식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입장이었으나, 의례논쟁이 끝난 1742년 이후 ‘천주’만이 그리스도교의 신의 이름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최기복, <조상 제사 문제와 한국 천주교회>,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76~82쪽) 이런 상황에서 1852년에 초간되고 1863년에 중간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가 간행한 책에 ‘천주가 상제’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당시 중국의 전교 상황과 관련해서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 아닌가 생각한다.

 

31) 1864~1865년 조선에서 간행된 서적 중에 《성교리증》이 없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32) 《셩교리증》의 번역 시기는 알 수 없지만, 《聖敎理證》에 대한 베르뇌 주교의 태도를 고려할 때, 1866년 이전에 번역된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에 이 책이 소개된 것으로 보아, 그가 한국을 떠난 1892년 2월 이전에 한글로 번역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3) 방상근, <한말 천주교와 제주교안>, 《교회사연구》17, 한국교회사연구소, 2001 ; 방상근, <修身靈藥 해제>, 《교회사연구》20, 한국교회사연구소, 2003 참조.

 

[교회사 연구 제48집, 2016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방상근(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 성교리증 원본 그림 파일은 교회사연구 제48집 pdf파일을 참조하세요.

http://www.history.re.kr/kyo/kyo_48/kyo_4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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