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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협ㅣ사목회

한국평협 창립 50주년 맞이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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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5 ㅣ No.52

한국평협 창립 50주년 맞이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1968년 7월 23일. 대전 대흥동주교좌성당. 당시 전국 12개 교구 가운데 원주교구를 제외한 11개 교구 평신도 대표와 8개 단체 대표 등 27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의 전신인 ‘한국가톨릭 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가 창립총회를 열고 한국 교회 안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역사적 장면이다.

 

한국 교회 속에서 한국 교회와 함께해 온 지 반세기. 이 땅의 평신도들은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가. 역사는 기억의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역사는 우리들 가운데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분에게 다가가는 길이다. 한국 교회 역사는 평신도의 손을 빌린 하느님의 역사하심이다. 평신도를 통해 당신의 뜻을 펼쳐오신 주님의 여정을 열두 마당으로 나눠 연재한다.

 

- “평신도 사도직 전국협의회 창립”을 보도한 1968년 당시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하느님 얼굴을 보는 길」

 

누구도

하느님 얼굴을 본 사람 없습니다

 

살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하느님, 당신 얼굴을 뵐 수 있다면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주님 얼굴 말갛게

당신에게 미소 지을 것입니다

 

서로 화해하십시오

화해보다 큰 사랑은 없습니다

 

화해의 찰나

자비의 주님 얼굴 맞대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 자비의 얼굴 만나는 길

참으로 쉽고도 힘겹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걸어가야 할 길임을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신 얼굴임을 믿기에…

 

이제 다시 한 마음으로

주님 당신 얼굴 만나려

나서고자 합니다

 

 

1 첫째 마당 - 평신도들의 손으로 마련한 한국 교회 초석

 

정조 7년(1783년). 영조의 부마 황인점이 동지사 겸 사은사로 청나라 수도 연경(燕京 : 지금의 북경)에 간다는 소식이 세간에 전해졌다. 그의 연경 행에는 사행의 기록을 담당하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이동욱(李東郁)이 동행키로 결정됐다.

 

당시 개인이 국경을 넘거나 북경에 가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매년 한 차례씩 이뤄지는 동지사 파견은 국가 간 무역의 통로뿐 아니라 문화의 이동 경로로 중요성을 띠었다.

 

정약용의 누이(妹)를 아내로 맞은 이가 이동욱의 아들 이승훈(李承薰 : 1756~1801)이었다. 그런 그에게 사촌이자 사돈 관계인 이벽이 찾아왔다.

 

“이번에 자네가 북경에 들어가게 된 것은 참으로 하늘이 우리들에게 성교(聖敎)의 참된 뜻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천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좋은 기회일세. 이 교리만이 성현의 도(道)이며, 만물(萬物)을 만들어낸 주인인, 오직 하나뿐이고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천주에게 봉사하는 참된 교(敎)이므로 구라파 사람들은 이것을 가장 높이 받든다네. (중략) 이번 자네가 북경으로 가게 된 것은 참으로 천주께서 우리 이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구하고자 하시는 섭리네. 북경에 들어가거든 곧 천주당에 가서 구라파의 교사(敎師)를 만나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물어서, 교의(敎義)의 깊고 참된 뜻을 밝히며, 천주교리의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피고, 또 필요하고 중요한 교리에 관한 책을 모두 가지고 돌아오게. 인간이 죽느냐 사느냐, 그리고 영원토록 행복하느냐 불행하느냐가 달린 큰 문제가 자네 손에 매여 있으니, 경솔히 행동하지 말고 몸가짐을 특히 주의하게.”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천주교 교리에 밝지 못했던 이승훈은 이벽의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한다. 그때부터 이승훈은 교리서적을 얻어 읽고 기뻐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고 결심한다.

 

1783년 음력 10월 14일. 이승훈은 아버지인 서장관 이동욱을 따라 서울을 떠나 북경으로 향한다. 12월 3일 심양(瀋陽 : 지금의 봉천)을 거쳐, 12월 21일 드디어 북경에 도착한다. 그 후 그에게 주어진 40여 일의 시간은 한국 교회는 물론 보편교회의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분수령이 된다.

 

친구 이벽의 부탁을 떠올린 이승훈은 북경에 머무는 동안, 당시 프랑스에서 온 예수회 신부들이 맡아 사목하던 ‘북당’을 자주 찾아갔다. 그는 외국인 신부들과 필담(筆談)을 통해 교리를 배우고 세례 받을 준비를 해나갔다. 난생 처음 만나는 이국의 사람들이지만, 하느님의 진리를 향한 불타오르는 열정은 모든 장벽을 허물어냈다. 한문을 빌려 오가는 필담이었지만 주님께서 열어 보여주시는 진리에 다가설 때마다 북받치는 감동이 함께한 이들을 휘감았다.

 

동지사 사행이 다시 본국으로 출발하기 며칠 전인 1784년 음력 정월 그믐께(양력 2월 하순경), 이승훈은 북경의 북당에서 드 그라몽(Louis de Grammont : 예수회)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당시 북경에 있던 예수회 관구장 드 방따봉(de Ventavon : 汪達洪) 신부는 이승훈의 세례 소식을 프랑스에 있는 친한 벗에게(1784년 11월 25일자) 이렇게 알렸다.

 

“아직 어떠한 성직자가 한 사람도 발을 들여놓지 못한 한 왕국에서 복음의 빛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쓰시려고(使用) 하신 바 한 사람이 개종(改宗)하게 된 이야기를 그대는 위안과 즐거움으로써 들으리라고 믿는다. 그 왕국은 중국 동쪽에 있는 반도의 나라 조선이다. (중략) 작년 겨울에 들어온 조선의 사절과 따라온 사람들이 우리 성당을 구경하러 왔으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종교 서적을 주었다. 그들 중 나이가 27세로 귀족의 아들이며 학식이 많은 한 청년은, 즐겨 이 종교 서적을 읽고 진리를 믿었다. 그는 성총(聖寵)으로 마음이 움직이게 된 결과, 깊은 연구를 거듭하여 우리 종교를 믿고 그것에 의지(依持)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세례를 주기 전에 우리는 여러 가지로 물어보고, 충분히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다. (중략) 마침내 돌아가기 전에 그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드 그라몽 신부께서 그에게 세례를 주고 베드로라는 본명(本名)을 주었다.”

 

이승훈은 1784년(정조 8년) 음력 3월에 수십 종의 교리서를 비롯해 십자고상(十字苦像), 성화(聖畵), 묵주 등 성물은 물론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을 숨겨 서울로 돌아왔다.

 

이승훈은 염초교(焰炒僑: 지금 서울역 북쪽) 부근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신앙생활을 실천에 옮기는 한편, 중국에서 가져온 교리서를 이벽에게 넘겨주었다.

 

친구를 통해 소중한 신앙의 선물을 받은 이벽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교리 연구를 마친 이벽은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이승훈과 정약종, 정약용 형제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도리이고 참된 길이요, 위대하신 천주께서는 우리나라의 무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들에게 구속의 은혜에 참여케 하기를 원하시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오.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

 

복음 전파에 대한 열망으로 끓어오른 이벽(李檗 : 1754~1786)은 1784년 음력 9월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던 자신의 집 대청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신기원을 이루게 된다, 평신도들의 힘으로. 당시 이벽의 나이 30세, 이승훈은 28세의 청년이었다.

 

이벽은 망설임 없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섰다. 그는 중인 계급의 친구들 가운데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이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들 중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을 비롯해 많은 양반들이 하느님을 알고 믿게 되었다.

 

 

2 둘째 마당 - 평신도, 한국 교회를 다시 열다

 

1800년 정조 임금이 병으로 승하하자, 이듬해인 1801년 1월 10일 사학금지령이 선포되면서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이 일로 300명이 넘는 희생자가 생겨났고, 최필공, 이존창,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 최창현, 강완숙 등 초기교회 신앙선조들 대부분이 순교하거나 유배됐다.

 

1801년 4월 19일.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로 1795년 조선에 들어와 복음화의 기틀을 마련해 가던 주문모 신부마저 순교하자 한국 교회는 이후 34년간 목자 없는 교회로 남아야 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평신도들은 사제 영입 운동과 선교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신유박해로 아버지 정약종과 형 정철상(카롤로)을 잃고 백부와 숙부인 정약전, 약용마저 유배에 처해지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음에도 일곱 살 정하상(바오로 : 1795~1839)의 마음에서는 도리어 주님의 일꾼이 되겠다는 다짐이 강해졌다.

 

가산이 몰수당해 갈 곳이 없어 남은 가족들 모두 다시 고향인 경기도 마재로 내려갔으나 문중 사람들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갖은 냉대와 멸시뿐이었다. 청년으로 자란 정하상은 친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813년 홀로 서울로 올라온다. 그는 조증이(바르바라) 집에서 머물면서 교리를 배우고 교회 일을 열심히 했다. 그 후 더욱 깊이 교리를 공부하기 위해 함경도 무산에 귀양 가 있던 한학자 조동섬(유스티노)을 찾아가 천주교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한다.

 

어엿한 재목으로 성장한 정하상은 시름에 빠져있는 이 땅의 신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선다. 성직자 영입을 위해 신분마저 숨기고 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간다. 1816년 동지사 일행에 섞여 북경에 간 그는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를 요청한다. 하지만 당장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한다.

 

이후 정하상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조신철, 유진길과 함께 아홉 차례나 북경을 오가면서 북경에 있는 주교와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마침내 1827년 조선 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교구가 설정되기에 이른다. 교회 재건을 위한 나선 지 10여 년 만에 유방제, 나 모방, 정 샤스탕 신부와 범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앵베르 주교는 정하상이 사제가 되기에 적당한 인재라고 여겨 이신규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다. 조선교회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 세력다툼으로 또다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는 등 교회를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하지만 1839년 7월 어머니 유 체칠리아, 여동생 정정혜(엘리사벳)와 함께 체포되고 만다. 그는 자신이 쓴 「상재상서(上宰相書)」를 대신에게 올려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다.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에 조선 조정에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하상은 서양에서 온 사제들의 은신처를 대고 배교하라고 강요당했으나 거절했다. 톱질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 나오는 고문이 이어졌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포청에서 여섯 차례의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로 넘겨져 다시 세 차례에 걸친 형문을 당한 그는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1839년 9월 22일, 정하상은 자신의 아버지 정약종이 순교한 서소문밖 형장에서 같은 죄목으로 참수되어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역사의 순간마다 복음화의 문을 열어 제친 평신도들로 인해 빛의 자녀로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평신도, 2017년 봄(계간 55호), 서상덕 편집위원]

 

 

한국평협 창립 50주년 맞이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신앙은 죽음까지 불사하며 주님의 길을 걷는 선택이다. 주님처럼 ‘세상을 이기리라’는 희망에 차서…. 주님을 향한 온전한 투신이 순교다.
 

 

Ⅱ. 순교 역사 속 평신도

* 가톨릭교회 역사는 순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가슴에 품고 있기에, 세상 너머에 눈을 두고 살기에…. 세상과의 불화가 낳은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순교로 이룩한 신앙의 역설은 바로 ‘세상’에 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세상임에도 주님에게서 멀어져 버린 세상. 그런 세상을 극복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 바로 신앙임을 순교 역사는 들려준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신앙은 죽음까지 불사하며 주님의 길을 걷는 선택이다. 주님처럼 ‘세상을 이기리라’는 희망에 차서…. 주님을 향한 온전한 투신이 순교다.

* 한국 교회 초창기 역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님에게서 멀어져, 당신의 숨결조차 느끼기 힘든 세상, 아귀다툼 속에 당신의 거룩함이 사그라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순교의 피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어느새 그 피가 내를 이루고 강을 넘쳐 바다로 흘러든다.

*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최초의 박해라고 할 수 있는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는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이 맞은 서설(瑞雪)이다.

이를 필두로 1801년 신유박해, 1815년 을해박해, 1833년 정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1879년 기묘박해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순교자의 피가 어려 있다. 초대교회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다. 하나뿐인 생명까지 내어놓지 않고는,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사랑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평신도의 걸음걸음에서 한국 교회의 오늘을 이룬 순교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3 셋째 마당 - 순교로 믿음의 씨 뿌리다 I 한국 교회 첫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1759~1791) 복자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꼽히는 윤지충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품행이 단정해 인근 마을에서까지 칭송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스물넷 되던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해 명성이 더 높아졌다.

이듬해 1784년 겨울 상경이 그의 인생행로를 바꿔놓았다. 천주교에 대한 얘기를 처음 접한 그는 명례동(明禮洞, 현재 서울 명동)으로 김범우(토마스)를 찾아갔다. 김범우의 집에서 나온 그의 손에는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이 들려있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윤지충은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갖던 이승훈을 비롯, 정약전(丁若銓) · 약종(若鍾) · 약용(若鏞) 형제, 권일신 부자 등 10여 명이 체포돼 형조로 끌려갔다. 이 소식을 들은 윤지충은 가지고 있던 교리서들을 모두 불태우거나 물로 씻어버렸다.

주님은 다시 그를 부르셨다. 1786년 고종사촌인 정약전이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했다. 이듬해 그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아 드디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

일가가 있던 전라도 진산으로 돌아온 윤지충은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프란치스코)은 물론 자신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외사촌인 권상연(야고보)에게 신앙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이도 윤지충이었다.

1790년 윤유일(바오로)이 중국에서 가져온 북경교구장 구베아(A. Gouvea, 중국명 湯士選 · 1751~1808) 주교의 사목서한이 조선 신자들에게 전해졌다. 이 서한에는 조상 제사를 금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때 많은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났다. 하지만 윤지충은 교회의 뜻을 충실히 따라 신주를 불태우고 신주를 넣었던 빈 궤만 사당에 세워 놓았다. 그만큼 윤지충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깊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791년 음력 5월 그의 어머니 권씨 부인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윤지충(바오로)은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과 신앙에 따라 외사촌 권상연과 장례를 치르지 않고 모친의 신주를 불태웠다. 당시로서는 사대부가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다는 것은 웬만한 각오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조상의 신주를 불태웠다는 것은 윤지충의 신앙이 매우 확고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저명한 선비가 신주를 불태웠다는 소문은 조선 사회를 커다란 충격에 빠뜨렸다. 더구나 이 사건은 조선 사회가 겪어보지 못했던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과 조선 사회를 유지해 오던 성리학적 질서가 본격적으로 충돌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윤지충에 대한 소문을 접한 진산군수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도록 명했다. 두 사람은 이미 피신을 했지만 윤지충의 삼촌이 대신 진산군 관아에 잡혀 들어가게 되자 1791년 10월 26일 진산 관아에 자진 출두했다. 10월 29일까지 진산군수에게 몇 차례 신문을 받은 후,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전라 감영에 압송된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의 심문을 받는다.

“천주(天主)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공경하고 높이는 뜻이 못됩니다. 그런데 사대부 집안의 목주(木主)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니,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집안에 땅을 파고 신주를 묻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갑니다. 죽은 이의 집에 남아 있을 수 없고 또 남아 있어야 할 영혼도 없습니다. 이는 제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증명된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위패 나무 조각 하나를 모셔두고 거기에다 제사를 지내며 음식을 바치는 것은 부모님께 거짓된 도리로써 효심과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윤지충이 전라 감영에서 고문을 받으며 진술한 내용을 보면 그의 신앙이 얼마나 확고한지 알 수 있다. 그의 삶에서 최고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군왕이나 부모가 아니라 ‘천주(天主)’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상의 위패를 거리낌 없이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윤지충은 “형문을 당할 때, 하나하나 따지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1791년 11월 8일 전주감영에서 순교의 관을 쓴다. 윤지충의 순교는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천주교는 단순한 이단 학문이 아니라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가치관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거대한 시대적 흐름에서 볼 때 윤지충이 신주를 불사르는 행위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상 변화를 야기하는 부싯돌이 되었다. 윤지충과 같은 평신도들의 과감한 도전이 있었기에 조선 사회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 것이다.


4 넷째 마당 - 순교로 믿음의 씨 뿌리다 II 한국 교회 첫 여성 회장 강완숙(골롬바, 1760~1801)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여섯 차례에 걸친 혹독한 형벌조차 아무 소용이 없자 그를 고문하던 나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한국 교회 최초의 여성 회장 강완숙(골롬바)은 그렇게 교회사에 아로새겨졌다. 그의 굳은 신앙심은 박해자들의 기마저 꺾어버릴 정도였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이를 널리 전파하였고, 6년 동안 주문모를 숨겨주면서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천주교에 물들게 하였다.”

사형 선고를 받은 강완숙에게 붙은 죄목이었다. 이에 대한 강완숙의 최후 진술은 이러했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1794년 12월 23일 조선 입국에 성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야고보, 周文謨) 신부. 그를 박해와 죽음의 손아귀에서 지켜내는 일이 여성인 강완숙에게 지워진 십자가였다.

숱한 어려움 속에 이 땅에 들어온 주문모 신부는 서울에 들어와,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숨어서 1795년 6월까지 전교에 힘썼다. 그러나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주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피신해 6년간 숨어 지내며 전교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강완숙이 없었더라면 이 땅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한순간에 말라버렸을지 모른다.

주 신부가 자신의 집으로 피신해 오자 그는 주 신부를 곳간에 숨겼다. 밖에서 볼 때는 평범한 광이었으나 안쪽에 숙식이 가능한 자리와 처소를 꾸며 주 신부가 숨어 지내게 했다. 남자들도 잡히면 죽을까봐 몸을 사리는 마당에 체포령이 내려진 신부를, 그것도 여인의 신분으로 숨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위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조심 주 신부를 보살폈다. 하루 세끼 음식을 대접하는 것 외에도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문밖에는 나졸들이 주 신부를 잡기 위해 잔뜩 독이 올라 있었으나 그렇다고 무작정 숨어 지내기만 할 수 없었다.

주 신부는 강완숙과 자주 상의하여 사목 계획을 세웠다. 변장을 하고 강완숙을 따라 거리로 나오자 예상했던 것보다 검문검색이 심했다. 그때마다 강완숙의 기지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대담하게 주 신부를 수행해 지방을 순회하는 사제의 사목을 돕는 일도 강완숙의 몫이었다. 전국을 돌며 사목활동을 마친 주 신부가 지친 몸을 이끌고 무사히 서울로 숨어들어 올 수 있었던 것도 강완숙의 치밀한 계획과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완숙의 수완과 활약에 힘입어 주 신부 입국 당시 4,000명에 불과하던 신자 수가 5년 만에 1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중에는 머슴, 하녀들뿐 아니라 지체 높은 양반 부녀자들도 있었다. 왕실의 친척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받도록 주선한 것도 그였다. 처녀 교우들이 많아지자 ‘동정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다. 윤점혜 아가타가 동정녀 공동체를 이끌어 나간 곳도 강완숙의 집이었다.

강완숙은 주 신부를 모시면서 비밀 유지를 위해 이사를 여러 차례 하는가 하면 특히 신부를 찾아오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늘 경계하며 신경을 썼다.

천주교에 관대했던 정조가 승하하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강완숙이 주 신부를 숨겨온 사실을 알아낸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지만 이미 피신시킨 뒤였다. 포도청에 잡혀온 그는 온갖 고문을 받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강완숙은 신심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나가는 길에서도 강완숙은 다른 4명의 여교우들을 격려하고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였다. 즐거운 빛으로 제일 먼저 목숨을 바치니, 그때 나이 41세였다. [평신도, 2017년 여름(계간 56호), 서상덕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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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한국 교회를 보십시오. (초창기) 한국에서는 200년 가까이 평신도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됐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길을 내십니다. 역사를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7년 3월 25일 이탈리아 밀라노대교구(교구장 안젤로 스콜라 추기경) 사목 방문 중 ‘성직자 · 수도자와 만남의 시간’에 한 말이다. 사제 · 수도 성소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는 이탈리아 교회를 향해 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 어느 교회도 이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6년 5월 프랑스 가톨릭 신문 『십자가(La Croix)』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유럽 교회를 억누르고 있는 성소 위기와 관련해 얘기하면서 한국 교회 사례를 꼽았다.

“복음화의 원동력은 세례이며, 복음화를 위해 반드시 많은 사제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한국의 경우 지난 200년 동안 평신도들에 의해 복음화가 이뤄졌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급이 있기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복음화 사례로 꼽혀왔다. 한국을 “평신도에 의해 복음화가 이뤄진 나라”라고 칭하는 것은 한국 교회 평신도가 세계 교회에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의 주인은 절대자 하느님이시지만, 세상을 복음화로 이끄는 주역은 바로 평신도 그리스도인이다. 교회 역사에 빛나는 한국 교회 평신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순교’에 가닿게 된다. 한국 교회의 영성을 순교영성이라고 해도 조금도 과하지 않은 이유다.

2014년 8월 교황으로서는 세 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124위 가운데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제외한 나머지 123위 순교자들은 한국 교회의 초석을 놓은 평신도들이다. 이들은 제1세대 순교자들로, 앞서 시성된 103위 순교성인들을 길러낸 신앙선조들이다. 평신도 순교자들은 엄격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주님께서 심어주신 인간 존엄의 가치를 지키며 형제적 삶을 이루고자 했다.


5 다섯째 마당 - 순교로 믿음의 씨 뿌리다 III 황일광 시몬(1757~1802)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그 첫자리에는 황일광(시몬) 복자가 든다.

순교자들의 삶을 기록한 약전에 ‘천한 신분’ 출신이라고만 기록돼 있는 황일광. 하지만, 그는 당시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는 백정이었다.

황일광은 충청도 홍주(현 홍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 백정은 가축 도살과 육류 판매, 유기(鍮器) 제조 등과 같은 일을 하며 살던 계층이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세리’처럼 같은 민족, 같은 마을에 사는 이들로부터도 배척당하는 소외된 존재였다. 아니, 세리는 동족의 욕을 먹으면서도 세속의 ‘부’나 그로 인한 힘이라도 누릴 수 있었지만 백정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도 가질 수 없었다. 그런 만큼 살아생전 사람대접을 받았을 리 없다.

그의 어린 시절은 오늘을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우했다. 어린아이들한테도 반말을 듣고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대접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 풍토였다. 누구나 꺼리는 일을 하고 있음에도 그 땀과 노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하느님은 그에게 놀라운 은총을 베푸셨다. 그러한 삶에 좌절하지 않고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와 올바름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주셨다.

1792년 그의 나이 서른다섯 되던 해, 홍주를 떠나 홍산(현 충청남도 부여지역의 옛 지명)으로 이주하던 무렵 그는 삶에 있어 일대 전기를 맞는다. 우연한 기회에 이미 홍산을 주 무대로 활동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던 ‘내포(內浦)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 것.

하느님의 부르심이었을까, 황일광은 용기를 내 신분도, 나이도 다른 이존창을 찾아간다. 태어나서 배움이라고 없었던 백지장 같은 상태였기 때문일까, 교리를 접하자마자 그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가 받아들인 믿음은 그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 오롯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했다.

그를 맞은 신앙공동체에서 백정이라는 그의 신분은 아무 걸림돌도 되지 않았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통해 지금까지도 전해오는 황일광의 말이다.

경상도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신앙에 맛을 들여가던 그는 1800년 2월 경기도 광주에 살던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의 이웃집으로 이주한다. 이때 만난 이들이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 김한빈(베드로, 1764∼1801) 등이다. 당시 그의 신앙은 모든 교우들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정약종이 한양으로 이주하면서 함께 상경한 그는 아우와 함께 정동으로 이주해 땔감을 해다 팔아 생계를 꾸리면서, 힘닿는 대로 교회 일을 도왔다. 이때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여하는 기쁨도 누렸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체포된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다. 관리들은 비천한 신분의 황일광이 자신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회유마저 거부하자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고문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도 밀고하지 않고 이겨내다 이듬해 1월 30일 고향 홍주로 이송돼 참수됐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통해 “우리 교우들이 이 사람(황일광)을 공경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교황 성하께서 그를 제대 위에 올려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진정한 종교예식을 드리게 허락하여 주신다면 우리는 너무나 행복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황일광의 삶은 인간 존엄과 자유, 평등 가치를 담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지, 당시 사회 변혁에 얼마나 큰 동인으로 작용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6 여섯째 마당 - 순교로 믿음의 씨 뿌리다 IV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

이순이(루갈다)와 유중철(요한)은 세계 교회사에서도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동정부부(童貞夫婦) 순교자로서 ‘한국 순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진주’로 불린다.

유중철(요한, 1779~1801)은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영향으로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성장했다.

16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자신이 살던 초남 마을을 방문했을 때 첫영성체를 했다. 이때 그는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이후 유중철은 동정을 지키겠다고 한 이순이(루갈다, 1782~1802)와 동정서약을 하고 평생 오누이처럼 살겠다고 다짐하고 주 신부의 주선으로 혼인을 했다. 유중철은 동정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순이와 함께 기도와 묵상을 하며 이를 극복해 나갔다.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된 그는 전주 옥에 갇혀 동생 유문석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죽기 전에 아내에게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순이는 1782년 한양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당대 학자 이익의 외손으로 1784년 한국 교회 창설 직후 신앙을 받아들였다.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와 사상의 세례를 받은 이순이는 이미 십대의 나이에 세상의 삶에 연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마음속으로는 세상을 버렸지만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누구보다도 세상을 잘 살려고 했다. 천상을 지향하면서도 누구보다도 현실에 성실했다.

이순이는 179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와 함께 신앙을 지켜나가다 15세가 되던 1797년 동정생활을 결심했다. 딸의 결심을 들은 어머니는 주문모(야고보) 신부와 의논했고, 전주 유중철과 맺어질 수 있었다.

이순이는 다음 해 9월 남편 고향인 전주 초남으로 가서 살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하면서 시아버지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한양으로 압송되고 남편 유중철은 전주로 끌려갔다. 이순이도 가족들과 함께 전주로 압송됐다. 그는 순교를 원했으나 함경도로 유배를 떠나게 됐다. 다시 체포된 이순이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차분하고 담담하게 겪은 일을 전하고 자신의 죽음을 슬퍼할 이들을 위로한다.

“순교를 하게 되면 그 기이함을 어느 순교와 비교할 수 있겠어요. 다른 성인들이야 응당 할 일을 하신 것이겠지만, 감히 우러러나 볼 순교를 이 보잘것없는 생명에게 허락하시면 그런 황송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 내 죽은 것을 산 것으로 아시고, 산 것을 죽은 줄로 아시며, 나를 잃은 것을 슬퍼하지 마세요.”

남편 유중철이 순교한 후 1년 뒤인 1802년 1월 31일 친척들과 함께 전주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향년 20세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인 평신도들로 인해 조선사회는 새로워진다. 다시 태어난다. 천민들도 같은 인간이라는 평등사상이 전파되고, 이로써 신분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또, 당시까지 한낱 남성의 부속물쯤으로 여겨지던 여성과 아동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생겨났다.

신앙에 눈을 뜬 평신도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한가지로 여기고 이를 위해 목숨마저 초개처럼 버릴 수 있었다.

2014년 8월 124위 순교자 시복식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들의 모범은 막대한 부유함 곁에서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 많은 일깨움을 준다.”고 했다. [평신도, 2017년 가을(계간 57호), 서상덕 편집위원]

 

 

한국평협 창립 50주년 맞이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예수님에 대한 진리는 한국 땅에도 왔습니다. 그것은 중국에서 가져온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매우 신기하게도 하느님 은혜는 여러분의 선조들을 당초에는 하느님 말씀의 진리에 대한 지성적 탐구로 이끌었다가 그 다음에는 부활하신 구세주에 대한 산 믿음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에 더 깊이 들어가기를 갈망하던 여러분의 선조들은 1784년에 자기들 가운데 한 사람을 북경으로 보냈고 그는 거기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좋은 씨앗으로부터 한국에 첫 그리스도공동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평신도에 의해서만 세워졌다는 점으로 보아 교회 역사에서 유일한 공동체였습니다.

 

이 신생 교회는 아직 어리면서도 믿음에는 그토록 굳세어 몹시 사나운 군란을 거듭거듭 견디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세기도 채 못 되어 1만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를 자랑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가톨릭신문 1984년 5월 13일자에서).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식 때 거행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을 주례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목소리는 감격에 겨워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이 아닌 곳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시성식. 그 자리에서 교황은 ‘평신도’, ‘순교’라는 말을 수없이 입에 올렸다. 그만큼 한국 교회는 이 두 단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을 지낸 고(故) 최석우 몬시뇰은 “순교자 성인은 그 시대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답”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대답, 응답을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 모두가 순교 성인들의 참다운 삶·순교정신을 공부하면서 우리의 삶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고도 했다.

 

 

7 일곱째 마당 - 순교로 믿음의 씨 뿌리다 Ⅴ 유대철 베드로(1826-1839)

 

1839년 4월 18일(음력 3월 5일)에 시작돼 그해 11월 23일까지 이어진 기해박해는 4대 박해 중 가장 많은 70명의 성인을 낸 역사로 신앙 후손들에게 아로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 유대철 베드로는 이 시기 70위 성인 가운데 백미 같은 존재다.

 

“이런…? 이런 정신나간 놈!”

 

숯을 입에 처넣겠다는 엄포를 놓고 부젓가락으로 시뻘건 불똥이 튀는 숯덩이를 집어들던 옥사장은 유대철이 태연하게 입을 벌리자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에이, 독한 놈. 꿈에 볼까 두렵네.”

 

흙을 털고 일어선 옥사장은 유대철을 뚫어지도록 쳐다보다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자리를 피했다.

 

‘뭔가 잘못된 게야, 뭔가…….’

 

옥사장의 머리에서는 이런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대철은 열셋이라는 어린 나이로는 상상도 못할 고문을 여러 차례 견뎌낸 터였다.

 

문초 14회에 14차례의 고문을 당하는 동안 태형(笞刑)을 600대도 넘게 맞고 곤장 가운데 가장 크다는 치도곤(治盜棍)도 마흔 대 넘게 맞았으니 제자리에 붙어 있는 뼈가 없고 살이 헤어질 대로 헤진 몸은 그야말로 피투성이였다.

 

또다시 형리들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고 허벅지살을 뜯어내는 고문을 해댔다.

 

“이놈,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

 

“믿고말고요. 그런다고 제가 천주님을 버릴 줄 아세요.”

 

아무리 고문을 해대도 대철의 얼굴에서는 평화스런 표정이 스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철이 제 몸에 헤어져 매달려 있던 살점을 떼어내 관장 앞에 던지자 이를 지켜보던 관원들 사이에는 두려운 기색이 떠올랐다.

 

지난여름, 역관이던 아버지 유진길이 잡히자 자청해 포도청을 찾은 후 이어지고 있는 고문은 그렇게 한철을 넘기고 있었다.

 

관헌들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군중이 자극을 받을까 두려워 감히 공공연하게 처형하지 못했다. 대철이 고문을 못 이겨 죽을 줄 알았던 것이다.

 

가을조차 한 고비를 넘기려는 10월 31일, 대철의 가련한 몸뚱이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던 옥사 안으로 검은 그림자가 쑥 들어왔다. 형리는 이내 대철의 목에 줄을 감아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아물아물해져 가는 대철의 눈앞에는 숱하게 그리던 나라가 다가오고 있었다. 줄에서 풀려난 그의 얼굴에서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갖은 고문과 회유를 기적과도 같은 용기로 이겨낸 유대철은 한국이 낳은 성인 중 가장 어린 13살의 나이로 성인 반열에 들게 됐다.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에 앞서 1984년 5월 4일 광주를 방문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강론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한국 천주교 신자로서 이 사명을 다하는 데 있어 여러분을 받쳐주고 이끌어주고 고무시킬 훌륭한 유산을 이어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조상은 숱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신앙을 찾았을 뿐더러 많은 경우 유민으로 살면서도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이를 남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정하상 바오로의 지칠 줄 모르는 사도직 수행이나 어린 유대철 베드로의 순전한 용기를 보면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교황에게도 그리스도에 대한 꺾일 줄 모르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겨낸 유대철 베드로의 삶은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8 여덟째 마당 - 순교로 믿음의 씨 뿌리다 Ⅵ 이성례 마리아(1801∼1840)

 

한국 교회가 길러낸 여성 평신도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이를 꼽는다면, 그 가운데 빠지지 않을 이가 이성례 마리아일지 모른다.

 

이성례 마리아는 충청도 홍주현에서 태어났다.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사촌 누이인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총명했던 그는 17세 때 최경환과 혼인해 홍주 다락골 새터에 살면서 21세 때 최양업을 낳았다. 그 뒤로도 슬하에 다섯 자녀를 뒀다. 나이 어린 남편을 공경하고 순종하면서 지혜롭게 가정을 꾸렸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한양으로 이주했으나, 박해의 기미가 보이자 강원도 금성현(현 김화군), 경기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일대) 등지로 옮겨 다녀야 했다. 그동안 맏아들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났다.

 

신앙 때문에 모든 재산과 고향마저 버리고 낯선 타향으로 전전하며 궁핍한 삶을 살았지만 이성례는 기쁘게 이겨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 칭얼거릴 때면 요셉과 마리아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난하던 이야기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른 이야기를 들려주며 인내의 덕을 갖추도록 독려했다.

 

수리산에 정착한 뒤로는 남편을 도와 교우촌을 일구는 데도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1839년 닥친 기해박해는 피하지 못했다. 박해가 본격화되자 남편 최경환은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했고 그는 그런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자녀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중 포졸들이 수리산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부부는 음식을 준비해 포졸들을 대접한 뒤 어린 자녀 다섯을 데리고 교우 40여 명과 함께 한양으로 향했다. 포도청에 압송된 이성례는 젖먹이와 함께 갇혀 고문을 당해야 했다. 300대 이상의 곤장을 맞으며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지는 고통을 견뎌냈다. 하지만 굶주리는 갓난아이를 지켜보는 고통은 그를 흔들리게 했다. 배교를 선택해 집으로 돌아가고 만다.

 

하지만 장남이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다시 체포돼 형조로 압송된다. 함께 갇힌 교우들의 권면으로 용기를 낸 그는 배교를 거두고 젖먹이를 하느님께 바치고 순교의 길을 걸어간다.

 

1840년 1월 31일 서울 만초천 하류 당고개. 칼앞에 선 이성례는 그 순간 무엇을 떠올렸을까. 당고개로 끌려오기 직전 젖도 물리지 못한 채 죽은 막내 스테파노였을까? 이국땅에서 사제가 되기 위해 정진하던 맏아들 최양업(토마스)이었을까?

 

최양업이 마카오로 떠난 뒤 둘째 최의정(야고보) 등 자녀들에게 남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전」을 통해 전해온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님과 성모님을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처음부터 굶주리는 젖먹이를 뿌리치고 순교했다면 그는 일찌감치 성인이 됐을 뿐 아니라 ‘위대한 순교자’로 남았을 것이다. 젖먹이 막내아들 때문에 배교까지 할 정도로 모진 육정을 끊지 못했던 복녀 이성례 마리아는 그 모정까지 하느님께 봉헌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신앙선조들의 열절한 순교의 삶은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벅찬 감동을 전해준다. 순교자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믿음은 사랑이 헤퍼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일깨움을 준다.

 

“한국 순교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11)”(1984년 5월 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 강론). [평신도, 2017년 겨울호(VOL.58), 정리 서상덕 편집위원]

 

 

한국평협 창립 50주년 맞이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원컨대 우리 대한의 모든 동포와 형제자매들이여, 크게 깨닫고 용기를 내어 지난날의 죄와 허물을 깊이 참회하여 천주님의 아들로서 현세를 도덕시대로 바로잡고, 더불어 태평을 누리면서 죽어서는 천당에 가서 상을 받아 다 같이 무궁한 영복을 누리기를 천만 바라는 바입니다.”(안중근 의사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서)

 

외세의 침탈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반도에서는 민족의 혼과 함께 복음의 빛도 사그라지는 듯 보였다. 악한 세력의 침범과 탄압을 물리쳐 온 한민족의 역사는 그대로 이 땅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역사가 되었다. 그러한 역사가 또 한 번 분수령을 맞은 것이 일제강점기였다. 면면히 이어져 오던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신앙마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때, 믿음으로 한반도를 지탱해 온 두 기둥을 지켜낸 이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민족’은 둘이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함께 누려야 할 한 형제였다.

 

외세에 맞서 독립을 지켜낸 혁명가이기에 앞서 주님이 보여주신 평화의 길을 좇아간 ‘평화의 사도’ 안중근(토마스)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기쁜 소식이 무엇인지 들려준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 그 진리가 당신 뜻대로 실현되는 평화로운 세상이 바로 그가 간절히 소망하고 함께 누리고자 했던 이상향이다. 그를 오늘에 되살리는 길은, 목숨마저 초개처럼 가벼이 여기며 그가 걸어간 평화의 길을 복원시키는 것뿐이다.

 

 

9 아홉째 마당 – 순교로 믿음의 씨 뿌리다 Ⅶ 안중근 토마스(1879-1910년)

 

개인 · 사회 총체적 구원 바란 선각자, 온전한 평화 갈구한 ‘평화주의자’

 

안중근(토마스) 의사에게는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중근은 여전히 의사(義士) 안중근일 뿐이지 신앙인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아직도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중근 의사가 신자였어?”라고 되묻는다. 안 의사가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물론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음에도 그간 무관심 속에 방치하다시피 해온 현실을 잘 보여준다.

 

한국교회사연구소 노길명 고문(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은 “안중근 의사는 신앙심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노 교수는 “안 의사는 인간의 영혼과 육신, 현세와 내세, 그리고 개인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구원시키고자 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던 선각자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간 한국 교회 차원에서 신앙인 안중근에 대한 연구와 현양이 지속적으로 이뤄지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실제 안중근 의사의 뜻을 기리는 추모미사도 안 의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79년 9월 2일 서울대교구 명동 주교좌대성당에서 봉헌된 것이 처음이다.

 

신앙인 안중근을 학문적으로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도 1990년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이 ‘안중근 의사 추모자료집’을 간행한 것이 기점을 이룬다. 이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1993년 ‘안중근의 신앙과 민족 운동’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간헐적인 노력이 있어 왔지만, 신앙인 안중근의 상을 한국 교회의 토양과 영성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안 의사를 모범적인 신앙의 사표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황종렬(레오) 대구가톨릭대 신학과 겸임교수는 “안중근 의사의 신앙과 민족의식의 통합, 아시아의 평화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가는 흐름이야말로 이 시대 한국 교회의 신앙살이 방식을 보다 더 건강하게 구축해 나가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의 의인’ 안중근

 

안중근은 고려 후기 충렬왕 때 성리학을 전래한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26세손으로 1879년 9월 2일(음력 7월 16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首陽山) 아래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성녀 마리아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兒名) 겸 자(字)는 응칠(應七)이다. 7세 때(1885년) 부친 안태훈을 따라 일가 70~80명과 황해도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淸溪洞)으로 이주했다. 16세 때(1894년) 1살 위인 김아려(金亞麗, 1878-1946년)와 혼인해 2남 1녀를 두었다.

 

1897년 1월 11~12일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 한글명 홍석구) 신부로부터 도마(Thoma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당시 안중근 일가는 물론, 청계동 주민 모두가 한꺼번에 천주교에 입교해 산간의 이 마을은 한날한시에 교우촌으로 거듭나게 됐다.

 

천주교 입교 후 안중근은 홍 신부로부터 열심히 교리를 배우는 한편, 불어도 익혀 누구 못지않은 독실한 신앙인의 길을 걸어갔다. 청계동 본당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면서 홍 신부를 수행해 황해도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활동에 투신하였다. 그 무렵 안중근은 청계동을 사목 방문한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를 해주까지 수행하는 역할을 맡는 등, 누구나 인정하는 돈독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였다.

 

안중근은 1906년(28세 때) 가족을 데리고 청계동을 떠나 평안도 진남포로 이주했다. 이 무렵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아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진남포 본당에서 운영해 오던 돈의학교(敦義學校) 재정을 부담하며 제2대 교장에 취임해 교육을 통해 민족의 길을 밝히려 애썼다. 또 본당에 설치한 야학교인 삼흥학교(三興學校)의 재정도 맡았다. 이러한 노력 모두 신앙을 통해 민족의 미래를 열어가려는 모색으로 읽힌다.

 

1907년 1월 31일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자 이 운동의 관서지부(關西支部)에서 활동하며 민족의 삶을 옥죄어 오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 평화적인 모색을 통해 민족의 미래에 평화를 맞아오려는 그의 모색은 끊임없이 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러한 거듭된 좌절 끝에 그는 무력 투쟁의 길에 나섰다. 신앙에 바탕한 인간적 고뇌 끝에 다다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907년 겨울, 안중근은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로 건너가 그곳 한인사회의 유력자들을 대상으로 의병부대 창설을 위한 설득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이범윤(李範允)의 동의를 받아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했다. 1908년 초에는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무기, 자금 등을 확보해 국외의병부대(國外義兵部隊)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총독에는 이범윤, 총대장에는 김두성(金斗聖)을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중장(參謀中將)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의병과 무기 등을 비밀리에 수송해 두만강 근처에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도모했다.

 

이 시기 안 의사는 수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 군경과 싸우는 등 독립투쟁을 벌였다. 그런 중에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민족의 원수, 동양 평화의 적 이토를 몸소 처단하고자 결심했다. 1909년 10월 21일 동지 우덕순·유동하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하얼빈에 도착해 거사를 준비했다. 그는 거사에 앞서 원흉에게 안길 총알에 십자가 표시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하느님께 거사의 성공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드디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동양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렸다.

 

의거 후 안중근은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서 검찰관의 심문을 받으며 당당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죄로 고종 강제 폐위와 명성황후 시해,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 등 15개 항목을 열거했다. 옥에 갇혀 심문을 받고 있을 때, 이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감사 기도를 드렸다.

 

1909년 11월 3일 안 의사는 한겨울 삭풍이 매서운 뤼순(旅順) 감옥으로 옮겨져 수감됐다. 1910년 3월 15일, 다가오는 죽음을 직감한 안 의사는 3개월 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서둘러 마무리하였다. 특히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기 위해 상고도 포기하고, 사형 집행을 보름 정도 연기해 달라고 탄원했으나 묵살됐다.

 

이 무렵 안 의사가 갇혀 있는 감옥에 관계하던 많은 일본인이 그에게 붓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해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등의 유묵 200여 점을 남겼다. 사형을 앞둔 시점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장엄한 처신이었다.

 

1910년 3월 26일. ‘하얼빈 의거’ 5개월 만에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는 날, 뤼순 감옥 형장은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조선인과 중국인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형장으로 나서기 전 일본 검찰관이 안 의사에게 마지막 유언을 물었다.

 

“당신들이 동의한다면, 이 자리에서 ‘동양 평화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오.”

 

그러나 일제는 그의 마지막 요청마저 묵살했다. 오전 10시 사형 집행을 알리는 신호가 울렸다. 신앙인 안중근은 하루 전날 동생 정근(定根)과 공근(恭根)이 면회할 때 건네준, 어머니와 아내가 밤새 지은 한복을 입고 의연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성녀 마리아가 아들 안 의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한 대목이다. 신앙 안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자신들이 걸어갈 길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유해는 끝내 유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안 의사의 죽음이 민족 독립운동의 새로운 도화선이 될 것을 염려한 일제가 몰래 빼돌린 것이다. 100년이 지난 세월,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서울 효창공원엔 그의 가묘만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의연히 죽음을 향해 걸어간 신앙인 안중근 토마스가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어 한 소망이 ‘동양 평화’다. 그가 갈구한 평화가 이뤄진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걸어간 평화의 길이 하느님께 바치고자 한 길임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믿음의 등불이 사그라져 가던 시대, 신앙인 안중근은 평신도 사도직의 전망을 새롭게 열어젖힌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그의 신앙 실천과 고통 받고 있던 민족에 대한 사랑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소중한 신앙 자산이 될 것이다. [평신도, 2018년 봄호(VOL.59), 정리 서상덕 편집위원]

 

 

한국평협 창립 50주년 맞이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지도가 있다. 이 지도에는 주님이 통치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생생한 모습부터 그분의 나라에 이르는 길이 자세하게 담겨 있다.

 

 

성경!

 

주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저마다 하느님 나라 지도를 지니고 있다. 우리를 당신 ‘친구’로 부르신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 내내 우리와 동행하신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4-15)

 

 

성전(聖傳)!

 

성경과 함께 ‘교회에 맡겨진 하느님 말씀의 유일하고 거룩한 유산’을 이루는 전통. 종교개혁의 불길이 유럽 사회를 휩쓸고 있을 때,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에서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진리와 가르침이 기록된 책들과 기록되지 않은 성전들 안에 들어 있음을 안다.”고 결정했다. 구원에 관한 모든 진리와 실천규범이 성서와 성전 안에 ‘들어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성경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그 전통의 진행 과정에서 산출해낸 산물이다. 억압받던 히브리 민족과 사도들의 전통이 낳은 문학적 산물이 바로 성경이다. 따라서 면면히 내려온 전통이 없었다면 성경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전통이 성경을 형성시켰다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고 여러 가지 구체적인 상황에 적응해서 현실화시키는 단계에서도 그 공동체의 전통이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을 성전이라는 본래의 배경에서 분리하여 독립시켜 버리면, 실제에 있어서는 성경이 갖는 본래의 가치와 생명력을 없애버리는 결과가 된다.

 

이처럼 성전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길을 보여주는 나침반과 같다. 한민족이 격변기를 맞을 때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과 심성을 바탕으로 한국교회의 새로운 ‘성전’의 기틀을 마련한 이들이 있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이들의 걸음은 그대로 한국교회의 역사, 한민족의 역사가 되었다.

 

 

10 열 번째 마당 – 이 땅에 뿌린 하느님 나라의 꿈 (1)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0-1913년)

 

국채보상운동 선구자 새로운 성전(聖傳)을 세우다. 쌀밥 보면 눈물부터 흘려

 

‘아무리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쌀밥을 먹지 않겠다.’

 

당대 대구뿐 아니라 영남 최고 부자였던 서상돈(아우구스티노)은 쌀밥이 놓인 밥상을 보면 눈시울부터 붉혔다. 어린 시절 아픈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서상돈은 백부 서인순, 숙부 서익순, 서태순 등을 친아버지처럼 여기며 따랐다. 그가 16세 되던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서상돈은 어린 나이에 백부의 옥바라지를 자처했다. 모진 고문에 지칠 대로 지친 큰아버지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피고름이 엉겨 붙은 멍석을 뜯어 먹는 모습을 눈물로 지켜봐야 했다. 막내 삼촌 서태순이 감옥에서 순교하자 피눈물을 삼키며 그의 너덜너덜해진 시신을 지게로 옮겼다.

 

그처럼 강렬한 원체험이 또 있을까? 그때의 기억이 그의 삶을 위대하게 재탄생시켰다. 어린 상돈은 모진 박해의 한가운데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골고타 언덕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으로 점철된 박해의 와중에 어린 상돈은 결심한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 이 땅에 주님의 집을 짓겠다고, 그리고 아무리 돈을 많이 벌더라도 절대로 쌀밥은 먹지 않겠다고….

 

 

신앙이 신앙을 낳아

 

서상돈은 1850년 10월 17일(음) 부친 서철순(徐哲淳)과 모친 김 아가타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상돈 집안의 신앙은 4대조 서광수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서울에서 살던 서광수는 1784년 이승훈이 중국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었을 때 여섯 아들과 함께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이듬해인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 때 연루돼 문중으로부터 파적당하면서 그의 가정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3남 서유오(徐有五, 1760-1807)의 가정이 충청도 장원을 거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들 서치보(徐致輔, 1791-1840)와 손자(인순隣淳, 명순明淳, 철순哲淳, 익순翼淳, 태순泰淳)들이 경북 문경 여우목 교우촌에 들어와 살게 됐다. 박해에 쫓기고 쫓겨 다니다 자리 잡은 터이다 보니 서상돈 가정은 극도의 가난에 주려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선조들이 순교로 지켜낸 신앙은 그의 삶에 오롯하게 새겨져 있었다.

 

집안 어른들의 순교를 직접 지켜봐야 했던 소년 서상돈은 일찍 철이 들었다. 1859년 9세 때 부모님을 따라 대구로 이사 온 서상돈은 이미 13세 때 가게 점원으로 취직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을 꾸리기 시작했다. 18세 때는 그의 됨됨이를 알아본 이들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거쳐 경제인으로 성장해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대구 지역에 가톨릭 신자라고는 몇 집밖에 되지 않을 때였다. 대구는 물론 영남지역에서 손꼽히는 부호가 된 그는 자신의 독실한 믿음과 인격으로 많은 이들을 하느님의 길로 이끌었다. 특히 그는 자선사업에 헌신해 봄과 가을이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수백 석의 곡식을 기꺼이 내놓았다. 가난을 누구보다 잘 알게 한 어릴 적 기억이 배경이 됐다. 그의 이런 자선에 감동해 입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 땅에 새로운 성전(聖傳)을 세우다

 

서상돈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새겨진 소명이 있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소명은 김보록(Robert, A. J. 金保祿) 신부와의 만남을 통해 본 궤도에 올랐다. 1885년 서상돈의 나이 35세 때 대구지역 전교 책임을 맡은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 교우촌으로 왔다. 상돈은 서태순의 딸인 사촌 여동생 서 마리아와 함께 교회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888년 겨울, 김보록 신부는 신나무골에서 대구와 가까운 죽전 새방골로 옮겨 3년간 은신하며 전교활동을 펼쳤다. 낮에는 바깥출입을 삼가고 밤이면 상복으로 변장하고 신자가정을 찾아가 성사를 주다가 5년 뒤 대구로 거처를 옮겼다.

 

서상돈은 김보록 신부를 통해 근대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김보록 신부는 조선에 대한 사랑이 유별해 바쁜 사목 중에도 학교를 개설하여 많은 이들에게 배움을 길을 열어 놓았다. 1899년을 전후하여 대구읍내 새방골 · 대어벌 · 영천 등지에 학당을 설립할 때, 서상돈은 교회 내 신자들의 힘을 모아 재정 지원과 학교 운영을 도왔다.

 

계산동본당 부속인 한문서당 해성재(海星齋)도 그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날로 발전을 거듭하던 해성재는 1908년 4월 1일,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립학교(聖立學校)로 탈바꿈했다. 이 학교는 2년 뒤 부속으로 야간부인 성립여학교를 설치하는 등 여성 교육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서상돈은 1905년 달서여학교 설립에도 적극 관여했다. 달서여학교는 1909년 학부대신(대한제국 때에 학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으로부터 정식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며, 합리적인 가정생활을 위한 부인 야학회를 운영하는 등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여학교로 발전을 거듭했다.

 

서상돈이 대구대교구 설정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큰 공헌을 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1911년 교황 성 비오 10세는 이 나라에 하나밖에 없던 교구를 하나 더 늘리기로 했다. 조선교구를 서울교구와 전주교구로 나누고, 서울교구는 충청도 이북을, 경상 전라는 전주교구가 관할토록 할 계획이었다. 서상돈은 이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를 찾아갔다.

 

“내 나이 갑년입니다. 평생을 교회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생전 꿈이 있다면 프랑스 루르드 지방의 성모를 모신 마사비엘 동굴과 꼭같은 성모당을 주교당 앞에 짓고 싶습니다. 부디 새 교구를 대구에 설립하도록 해주십시오.”

 

서상돈의 진심 어린 간청에 감복한 뮈텔 주교는 쾌히 승낙했다. 지금 남아있는 대구 성모당은 서상돈이 프랑스 루르드 지방의 마사비엘 동굴과 같은 모양으로 건립하는 데 이바지한 곳으로 교회에 대한 그의 사랑이 담겨 있다.

 

이후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안세화) 주교가 대구에 부임해 오자 서상돈은 계산동 성당 앞에 있던 누이의 집을 주교 관저로 제공했다. 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수만 평에 달하는 남산화원 전부를 교구 사업에 기꺼이 내놓았다. 이곳에 대구대교구의 중추라 할 주교관, 신학교, 수녀원, 고아원, 성모의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 등이 들어서게 됐다.

 

서상돈은 자신의 집 사랑채에 모인 식객들을 수시로 만나 복음을 전하는 등 직·간접적인 전교활동에도 나섰다. 그는 대구 중구 계산동에 집을 지어 많은 식객에게 편의와 안식처를 제공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다. 이에 많은 사람이 감화를 받아 천주교에 입교했다.

 

서상돈이 우리나라 역사에 새롭게 세운 성전(聖傳)이 있다. 바로 국채보상운동이다. 서상돈은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나라 지키는 일에 앞장선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약했다. 독립협회 제4기 민중투쟁기에는 그가 재무부 과장 및 부장급의 일원으로 눈부신 활약을 했음을 알려준다.

 

1907년 2월 16일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국채보상운동을 제안했다. 담배를 끊는 등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에 지고 있던 국채 1300만원을 갚자는 것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800원을 의연금으로 내놓았다. 200여 명의 다른 회원들도 만장일치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뜻을 모으고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하였다.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등과 함께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皇城新聞)』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제국신문(帝國新聞)』 등을 비롯한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서상돈이 앞장선 대구 지방의 국채보상운동은 전개 방법이나 열성 면에서 단연 돋보였다. 나라를 살리자는 일에 공감한 이 운동은 나라와 국적마저 뛰어넘는 바람을 일으켰다.

 

국채보상운동에는 양반·부유층은 물론 노동자 · 농민 · 부녀자로부터 상인 · 군인 · 학생 · 기생 · 승려 등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은 계층이 없을 정도였다. 유아나 초등학교 학생들도 용돈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특히 여성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반찬값을 절약하거나 비녀·가락지·은장도 등을 의연품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일본 유학생들과 멀리 미주 사회에 있던 교포들도 의연금을 보내왔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참여하는 등 열기를 고조시켰다. 어느 서양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라고 감탄하면서 4원을 내놓았고, 평남 영유군 이화학교(李花學校)의 일본인 교사 정유호빈(正柳好彬)도 2원을 기탁하는 등 외국인의 동참도 꾸준히 늘어났다.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와 친일 세력의 거센 반발과 방해공작이 있었지만 이 운동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로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그때 모인 자금은 그 뒤 전개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쓰였다. 국채보상운동은 비록 미완성으로 막을 내렸지만, 우리 민족의 힘과 의지를 만천하에 과시한 민중의 교향곡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으로 다시 살아나 세계인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평상시 서상돈은 기회가 닿는 대로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과 성모님의 것이다. 내가 모은 재산을 성당에 바치려 한다. 세 분 조상들의 순교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서상돈은 자신이 바치는 재산은 세 분 순교자 대신 바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마사비엘 동굴과 주교당 건립 작업이 시작됐다. 건립에 10년 세월을 작정한 서상돈은 매일같이 공사장을 찾았다. 3년이 지날 무렵 건강이 악화됐다. 그는 아들 병조를 불러놓고 유언을 남겼다.

 

“남산고개 성모당을 꼭 이룩해야 한다. 내 뜻이 아니라 성모님의 뜻이다. 내 재산도 성모님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염원하던 성모의 루르드 동굴이 화원 언덕에 건립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13년에 선종,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필리 1,21-23)

 

이처럼 서상돈은, 사람은 믿음만으로가 아니라 믿음을 실천함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야고 2,17)을 그대로 실천하여 믿음이 척박한 이 땅에 새로운 성전(聖傳)을 세웠다. 그가 이 땅에 세운 거룩한 전통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평신도, 2018년 여름호(VOL.60), 정리 서상덕 편집위원]

 

 

한국평협 창립 50주년 맞이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교회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다. 교회의 일원이자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이들은 평신도다. 평신도들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은 세상이다. 여기서 평신도들의 소명이 비롯된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다. 이 선포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고 한 말씀과 이어진다. 이 말씀을 통해 ‘모든 것’(요한 1,3)이 생겨났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하느님 창조 역사에 함께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사업으로 부름 받은 것이다. 이렇듯 세상 끝 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어질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평신도들이 행하는 온갖 형태의 활동을 평신도사도직이라고 한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은 특히 “복음 선포와 인간 성화에 힘쓰며,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현세 질서를 완성하는 활동을 통하여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인간 구원에 이바지함으로써”(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평신도사도직 교령> 2항) 사도직을 수행한다.

 

평신도사도직은 세상을 시작과 끝으로 한다.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복음의 씨앗은 세상 속에서 발아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평신도, 그리고 평신도사도직은 집 안에만, 교회 안에만 머무를 수 없다. 아니,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 평신도들의 사도직분이다.

 

 

11 열한 마당 – 이 땅에 뿌린 하느님 나라의 꿈 (2) 운석(雲石) 장면(요한, 1899-1966년)

 

조국에 ‘복음화·민주화’의 빛을 비추다 근현대 한국교회 대표적 평신도 지도자 투철한 신앙심으로 교회의 부름과 시대적 요청에 응답

 

“발전된 민주국가를 세워주기 바란다.”

 

5·16 군사쿠데타로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 장면(요한, 1899-1966년)이 자신의 사퇴 성명에서 몇 번이고 강조한 말이다. 그가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부서진 안경태를 추스르며 삼엄하게 둘러싼 군인들과 함께 뒷문으로 사라지는 장면 총리의 모습은 한국, 또 한국교회가 걸어간 질곡의 길을 그대로 상징한다. 장면의 퇴장은 한국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복음화 여정에 있어 크나큰 훼절이자 손실이었다. ‘부패’, ‘무능’으로 덧씌워진 장면의 좌절은 한국교회, 그리고 이 땅 신앙인들의 좌절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한국 근현대 역사가 가질 수 있었던 최고의 민주주의자, 민주투사였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만큼 그에게는 많은 거짓이 덧씌워져 있다. 5·16 군사쿠데타를 막지 못한 책임이 대표적이다.

 

 

“무수한 시민들이 피를 흘리게 할 수야 없지….”

 

장면은 자신의 정치적 좌절보다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먼저 떠올렸던 것이다. 그토록 믿었던 미국마저 등 돌리고 몰라라 하는 마당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무엇이었을까. 쿠데타 후 서슬 퍼런 군부세력이 장면 총리가 이끌던 제2공화국 각료들의 집을 뒤져 부정부패의 꼬투리를 잡으려 했지만, 나온 것은 한 장관 집에서 찾아낸 아이스박스 한 개가 다였다.

 

장면은 총리가 된 후 모든 공무원들에게 점심 때 외식하러 나가지 말 것을 주문했다. 자신도 도시락을 싸 와 집무실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이 때문에 야당과 각종 언론에서조차 민주당 내각을 ‘도시락 내각’이라고 비꼴 정도였다. 한마디로 부패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권력이었던 것이다.

 

 

신앙인 장면

 

장면은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장기빈(레오)과 황 루치아의 3남 4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1899년 9월 12일 서울 종현(현 명동) 본당에서 주임 빅토르 신부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는 국무총리가 되고 나서도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정도로 기도와 순종, 인내가 몸에 밴 인물로 성장한다.

 

이후 아버지의 근무지인 인천 전동으로 이사해 1906년 8월 4일 인천 성당 부설 박문학교(현재 박문초등학교)에 입학, 한학과 수학 등을 공부했다. 박문학교 보통과(1910년)와 고등과(1912년)를 졸업한 그는 학창시절 내내 공부와 신앙 활동에만 전념했다. 15살 되던 해 뒷날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인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했다. 1917년 3월 농림학교를 졸업한 장면은 편하게 살 수 있는 관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그해 9월 경성 중앙기독교청년학관(현 서울 YMCA) 영어학과에 진학했다. 청년학관 졸업반 재학 중인 1919년 3월 1일 3·1 만세 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열혈청년이었다.

 

1920년 3월 청년학관(YMCA)을 졸업한 그는 한국에 진출해 있던 메리놀 외방선교회의 후원으로 그해 10월 한국 천주교 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동생 장발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21년 9월 미국 뉴욕의 맨해튼 가톨릭대학교 영문학과에 진학해 부전공으로 교육학을 공부했다. 1925년 6월 맨해튼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국 복음화에 뜻을 두고 귀국을 결심한다. 그해 6월 30일 이탈리아에 도착, 7월 5일 로마 바티칸에서 열린 ‘한국인 79위 순교자’ 시복식에 한국인 신자 대표로 참석하고, 7월 6일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1세를 알현한 후 8월 29일 귀국했다.

 

귀국 후 그의 평신도사도직 활동이 본격화된다. 평안남도에 있던 메리놀센터 하우스의 어학교수가 그에게 주어진 첫 십자가였다. 1927년부터는 메리놀신학원의 당시 은사였던 패트릭 번 신부가 있던 평양 성당에 근무하며 평양교구 사목을 도왔다. 1931년 서울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초빙돼 1936년에 교장이 되어 해방 때까지 근무했다. 그는 당시 서울교구장이던 원 라리보 주교의 사목을 적극적으로 돕기도 했다. 서울교구에서 원 라리보 주교와 주간 윤형중(尹亨重) 신부를 중심으로 잡지 『가톨릭 청년보』를 발간하자 장발(張勃) · 이동구(李東九) · 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편찬위원으로 활약했다.

 

1939년 4월부터 경성 계성국민학교 교장을 겸임하였고, 1939년 9월 천주교 청년회연합회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조국의 신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영·한 천주교회 용어 사전인 『The Summary of Religious Terms』를 비롯해 『교부들의 신앙』 등의 번역과 『구도자의 길』, 『조선천주공교회 약사』 등의 출간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장면은 평신도사도직 실현에 일찍부터 다방면에서 선구자 역할을 했다.

 

 

투철한 수덕생활

 

장면은 세속적 지위가 어떻게 바뀌든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함없는 모습을 보였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입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면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미국 유학 중이던 1921년, 장면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재속 프란치스코 국제형제회(성프란치스코회 제3회) 회원이 됐다. 이후 동생 장발을 비롯해 가족과 지인들을 차례로 입회시키고, 귀국 후에는 재속회 서울형제회 발족에 나섰다. 서울형제회 초대 회장에 이어 1961년에는 재속회 한국연합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장면의 삶은 무엇보다 순교자적 영성과 수도자적 복음 삼덕의 실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수도 삼덕 중 ‘청빈의 덕’은 정치인이 된 후에도 부정부패를 근절해 나가는 데 밑거름이 됐다. 삶의 단 한순간에도 ‘정결의 덕’을 어기지 않고 살며 자녀들에게도 그러한 행동을 굳건히 가르쳤다. 또한 ‘순명의 덕’으로 교회 일에 헌신하는 생을 보냈다.

 

 

소명에 충실한 참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장면의 면모는 세상 한가운데서 교육자로, 외교관으로, 또 정치인으로 유감없이 드러났다. 장면의 온 생애를 통해 가장 큰 화두는 조국의 복음화를 통한 독립정신 고취와 자유민주주의 확립이었다. 장면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며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독립운동에 참여한 신학생들을 퇴교 조치하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 맞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일깨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독립투사들의 진정한 지도자는 오직 한 분이 계신다. 천주님이야. 맨주먹으로는 왜놈들의 총칼을 당해내지 못하지만, 신앙심과 천주님 앞에서는 무기란 무력한 것이지. 모든 동포가 천주님을 믿도록 우리가 노력해야겠는데….”

 

장면은 민족의 복음화가 독립에 기여하는 길임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의 미국 유학도 결국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앎을 넓히고자 하는 모색의 결과였다. 미국 유학생활을 통해 장면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배우고 맛보았으며, 언행을 종교적 양심에 비추어보고 행동하는 습성을 길렀다.

 

해방은 교육과 종교 운동을 통해 민족의 미래에 투자해온 그의 역량을 외교와 정치로 돌리는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당시 장면은 민족의 최대 당면 과제를 자주 · 자립과 문화 · 교육 정책의 강화로 판단했다. 해방이라는 복음화의 여정에 분수령을 맞은 한국교회는 복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길에 장면을 내세웠다. 장면은 교회의 권고에 따라 1946년 2월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 의원으로, 같은 해 12월에는 입법의원 의원으로 활동한다.

 

“가톨릭교도는 그 국민의 번영을 위해 저마다 그 책임을 져야 한다. … 가족 또는 그가 접하는 집단과 단체를 그리스도교화함으로써 … 이 감화는 더 넓게 그 나라의 온 사회적 및 정치 생활에까지 미칠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제헌국회 의원이 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정치 이념과 제도의 보편화 작업에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제1·2공화국 시기에는 국무총리와 부통령 등을 역임하며 부정부패 청산과 반독재 투쟁에 나섰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교회는 민주주의 정신의 보편화와 민주세력의 보루라는 평가를 얻게 된다.

 

“종교 및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민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생활의 민주적 발달을 도울 수 있는 … 그리스도교 원리를 따라 깊은 지혜와 굽힐 줄 모르는 결심으로 장애와 싸워야 한다. 정당에서 지도하는 자리를 차지하는 그리스도교도도 정당의 정책에 그리스도교 원리를 침투시키고 정부에게 그 실시를 촉구함으로써 나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국가 · 신앙 재건을 위한 외교 노력

 

장면은 외교에 있어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이는 그의 굳건한 신앙이 바탕이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계는 나날이 좁아져 가고 모든 종족과 모든 국민 사이의 접촉은 더욱 친밀하게 되어간다.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일치와 참된 평등을 구하는 소망은 당연한 것이며 정당한 것이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형제라는 이 교회의 가르침은 피부의 색깔, 인종, 사회적 지위의 구별 없이 인격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평등한 존엄을 각자에게 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우리 형제, 특히 지식인에게 교회의 이 가르침을 열심히 또 절실하게 알려야 한다.”

 

1948년 12월 12일 열린 제3차 유엔 총회가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도록 한 데에는 장면을 수석대표로 한 한국 유엔 대표단의 활약이 컸음은 잘 알려져 있다. 1949년 당시 한국의 재외 공관은 장면이 대사로 있던 주미대사관뿐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승인 외교는 전적으로 미국 워싱턴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장면은 중추적 역할을 했다.

 

6·25전쟁은 장면의 존재가치를 다시 한 번 드러나게 했다. 전쟁이 터지고 남한의 존립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는 또다시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유엔 안보리에서 연설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군사적 원조를 호소했다. 6월 27일 안보리 결의를 이끌어낸 것은 그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함께 그는 트루먼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6월 30일 저녁에 미국이 한국전 참전을 발표하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제24사단을 한반도에 투입하게 하는 결정을 내리게 함으로써 한국을 지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장면의 또 하나의 공헌은 전쟁으로 파괴된 한국 재건의 기초를 확립한 것이다. 주미대사로 있던 장면은 동분서주 노력해 유엔 총회가 1950년 10월 7일자 결의로 유엔 한국위원단을 개편해 7개국(호주, 칠레, 네덜란드, 파키스탄, 필리핀, 태국, 터키)으로 구성된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을 신설하도록 해 전후 복구사업에 착수할 수 있게 했다.

 

장면은 이렇게 외교가의 변방이었던 한국 문제를 한반도의 틀을 넘어 세계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한국을 국제 사회 속에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 속에서 국가와 인종, 종교를 초월한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참 그리스도인, 참 평신도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2 열두 마당 – 이 땅에 뿌린 하느님 나라의 꿈 (3)


한국. 2018. 평신도.

 

신앙선조들이 그랬듯 2018년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평신도들에게도 하느님께서 주신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있다.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이 씨앗은 세상 속에서 발아하고 생장해 나간다. 복음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뿌려진 조선시대부터 근현대 역사를 거치며 신앙 선조들이 몸소 보여주고 살아간 믿음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목소리를 전해주고 있을까. 그것은 태초부터 있었던 그 ‘말씀’을 화석화하거나 박제화하지 말라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교회는 그 시작부터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마태 12,46-50)임을 가르쳐왔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작부터 ‘순교’라는 가장 고귀한 실천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믿음의 씨앗을 뿌려왔다. 주님께서 심어 놓으신 ‘복음의 씨앗’을…. 피를 흘리는 적색순교든, 그렇지 않은 백색순교든…, 죽음조차 마다하지 않고 신앙선조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말씀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이 땅에서 열매 맺어 온 신앙의 역사는 말씀을 가리고 숨기려는 행위와 맞서 순교라는 실천으로 드러났다.

 

순교영성을 모태로 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 ‘말씀’과 그 말씀의 ‘실천’을 자랑으로 여긴다. 한국 평신도들의 정신과 활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 정신과 가르침에 따라 1968년 7월 현재의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이하 한국평협)의 전신인 한국가톨릭 평신도사도직 중앙협의회(The Korean Catholic Central Council for the Lay Apostolate)가 창립되면서였다. 평신도사도직의 활성화를 위해 발족한 한국평협은 이후 한국 사회에 안에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첨병 역할을 해왔다.

 

그 첫걸음은 1970년 9월 6일 한국교회 주교단의 모자보건법안 반대 성명에 대한 지지로 드러났다. 이후 1976년 3월 구속 사제와 고통 받는 형제를 위한 ‘사순절 평신도 기도 운동’, 1976년 12월 13일 명동 3·1절 기도회 사건 관련 ‘평신도 여러분에게 고함’ 성명 발표, 1978년 10월 22일 ‘추곡수매가 인상 건의’, 1979년 8월 16일 ‘안동 오원춘 사건에 대한 대정부 건의문’ 채택, 1982년 12월 3~4일 ‘제1회 여성문제 심포지엄’ 개최 등 세상 속에서 진리의 빛이 사그라질 때마다 당당히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 같은 발걸음을 밑거름 삼아 1983년에는 대사회운동으로 신뢰회복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신뢰회복운동은 1989년부터 ‘내 탓이오 운동’으로 이어졌고, 이후 ‘우리상품 쓰기와 우리농산물살리기 운동’, ‘평신도 제자리 찾기 운동’ 등으로 전개됐다. 2001년에는 도덕성 회복을 위한 ‘똑바로 운동’으로 새롭게 신뢰회복의 불을 지폈으며, 2004년부터는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세상’ 구현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특히 2015년부터는 사회 전반의 의식개혁을 돕는 ‘답게살겠습니다’ 실천운동을 교회 안팎에 제안해 그리스도의 정신과 가치를 사회 전체로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

 

세계 교회는 교회 역사에서 유례없이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이 땅에 가톨릭 신앙의 싹을 틔우고 키워가고 있는 한국교회에 갈수록 큰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다. 그 배경에는 순교영성을 밑거름으로 하는 한국교회 평신도들이 있다. 평신도사도직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통해 더욱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복음화의 길을 걸어 나갈 때, 평신도는 이 땅의 새로운 복음화의 주역으로 거듭날 것이다.  [평신도, 2018년 가을호(VOL.61), 정리 서상덕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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