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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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신앙교리: 사랑의 실천으로 알게 되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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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09 ㅣ No.1746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사랑의 실천으로 알게 되는 하느님

 

 

성경을 통하여 드러나신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느님’

 

우리에게 알려지신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잘 알게 해 주는 중요한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성경이지요.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은 세상 안에서 인간과 함께 현존하는 분, 세상을 창조하신 분,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분, 그리고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우리 인간의 구원을 바라시며 늘 우리 인간을 위해 계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은 당신 자신이 먼저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알 수 있는 분명한 것은 사랑의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시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결코 그분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지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시고, 그리하여 당신 자신을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시고 알려주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오신 것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자신을 알려주시고, 그래서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참으로 엄청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하느님, 신학사의 하느님은 한마디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신앙하는 우리가 늘 하고 살아야 할 질문은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고, ‘그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에게 바라시는 바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뜻대로 사랑의 삶을 통해 구원의 길을 걷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연구하고 탐구하며 질문하는 자세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을 믿는 우리의 신앙을 사랑의 삶을 통해 실제로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신앙의 성장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우리가 신앙하고 따르는 하느님에 대하여 질문하는 자세를 가져야하며, 나아가 그 신앙을 살아가고 또 키워나가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 인간의 신앙은 저절로 키워지고 자라날 수가 없는 성격의 것인 까닭입니다.

 

먼저 우리 인간의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우리 인간의 노력이 있어야 성장합니다. 즉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우리 인간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신앙의 성숙을 위한 노력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성격의 것이기도 합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일찍이 “신앙고백에 있어서의 나는 교회이다. 개인은 자신의 힘으로 믿지 않고 교회와 함께 믿는다.”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교회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빌헬름캠프(Wihelm Kempf)는 신앙은 공동의 길이기에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를 존중하고 그들로부터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취지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앙은 길이다. 더욱이 공동의 길이다. 신앙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는 다른 이를 필요로 하고 믿는 이의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그때그때 다른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어서 알기를 배워야 한다. 더구나 그 다른 이들이 우리와 같은 가톨릭 신자들이고 우리 공동체에 속한다면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장하는 것인데, 그 교회 공동체의 삶의 제1수칙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답게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우리는 하느님을 찾으며 내 자신을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분께 대한 나의 신앙도 성장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내 신앙의 성숙과 더불어 하느님과 내 자신도 더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질문과 탐구는 그저 신학적인 연구에 그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먼저 신앙하는 것이고, 또 그 신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어느 노인의 유언”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수필이 있습니다.

 

팔순을 넘긴 한 부자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었고, 재산도 많았던 그는 일흔이 넘어서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평소 봉사 활동으로 사회적 명망을 얻었었고, 성공한 서넛의 자녀까지 두었던 그였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아내와 사별한지 몇 달도 지나지 않아 30세의 젊은 여자를 후취로 맞아들이자, 이를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살던 그가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이 가진 대부분의 유산을 후처에게 주고, 집에서 기르던 개에게도 상당한 재산을 남겼는데, 자녀들에게는 별로 남겨 준 것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자녀들과 주위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말로써 세상을 떠난 노인을 비난하였습니다. 망령이 들었나, 후처에게 쏙 빠진 것이냐, 젊은 여자 수에 홀딱 넘어간 것 아니냐, 자식들이 개만도 못하게 되었네, 라면서.

 

하지만 그 노인은 이런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고 합니다. “내가 괴로울 때 누가 진실로 나를 위로해 주었던가? 내가 아플 때 누가 나를 지켜보며 함께 아파했던가? 내가 울적할 때 누가 내 마음을 풀어주고, 심심할 때 누가 나와 함께 놀아 주었던가? 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 나에게 사랑을 보여준 사람이 내 가족 아닌가!”

 

잘 찾아오지도 않는 친자식보다도 외롭고 병든 자신의 곁에서 함께 해준 사람이 참된 가족이고,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재산을 남기고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죠. 예수님께서는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 바로 참된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성 골룸바노 아빠스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본질을 탐구해 낼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하느님의 오묘한 신비를 꿰뚫어 볼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참모습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도 탐구해낼 수 없는 하느님 존재의 성격과 양식과 원인을 탐구해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들은 말로 형언할 수 없고, 탐구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은 단순하게 그러나 견고히 이것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에 대한 최고의 지식을 논쟁을 통해서 찾지 말고 선행의 완성으로 찾으십시오.”

 

성 골룸바노 아빠스의 말씀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과 선행, 무엇보다도 사랑의 실천을 통해 찾아야 하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 하느님께 대하여 아는 것은 실천을 요구함을, 하느님을 제대로 알려면 먼저 사랑의 실천이 따라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아는 만큼 그분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결코 제대로 아는 신앙인이 아닌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3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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