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강론자료

마태오복음 17,1-9 변모 (2017. 3. 12. 사순 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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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7-03-08 ㅣ No.2166

엿새 후에 예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바라보는 동안 예수의 모습이 변하여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눈이 부시도록 희게 되었다. 그러자 모세와 엘리아가 나타나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베드로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에게 말하였다. “주님, 우리가 여기에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내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당신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동안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내리덮고 구름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은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니 내 마음에 든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엿새 후는 당일을 포함하여 7일째이다.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과 예수의 변모 사건이 7이라는 숫자로 연결된다. 7은 하느님의 경륜을 상징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구원경륜에 따라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차지하고 있다.

 

은 하느님의 현존, ‘얼굴은 자아의 정체성, ‘은 지혜를 상징한다. ‘해처럼 빛나는 얼굴은 세상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아들, ‘눈이 부시도록 흰 옷은 하느님의 지혜(믿음)를 나타낸다.

 

세 제자는 신망애 삼덕을 상징하며,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는 율법과 예언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를 예언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초막은 이 세상이 거쳐지나가는 곳임을 상징한다. 베드로는 영광스러운 예수를 이 땅에 붙잡아두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의 영광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육정의 눈으로는 그것을 볼 수 없다. 사실 베드로의 소원은 늘 성취되고 있지만 그는 아직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메시아가 하늘에서(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그가 땅에서(세상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이는 고난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빛나는 구름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한다. 성령의 지혜는 육정의 어두움(=욕망의 否定)으로부터 드러난다. ‘세 제자(신망애)와 모세(아버지), 엘리야(성령), 예수(아들=인류의 스승), 하느님으로 7이라는 숫자를 이루어 다시 하느님의 경륜을 상징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았을 때에 들었던 말씀에(마태오복음 3:17)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문장이 추가되어 있다. 여기에서 은 예수의 삶 자체를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말을 들어라는 예수의 삶을 본받으라는 뜻이다. 이 환시는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가 하느님의 영광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그 목소리를 듣고 너무 두려워서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예수가 다가와 그들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일어나시오!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예수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예수가 그들에게 명령하였다. “사람의 아들이 죽음에서 일으켜질 때까지 여러분이 본 환시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하느님과 사람의 절대적 차이로 인하여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두렵다. ‘두려움은 미지의 위험성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을 해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무상으로 내려주시는 분이다. 그러나 육신을 지닌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현존은 너무나 낯설다. ‘얼굴을 땅에 댐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무가치함을 인정하는 행위로서 겸손을 나타낸다. 예수는 회개한 사람을 위로하면서 두려움을 없애준다. ‘일어남은 하느님의 아들이 지닌 영적 생명을 표현한다. 사람은 하느님의 현존(現存) 안에서 자기부정(自己否定)과 영적자아의 깨달음의 사건을 일으킨다. 하느님은 에 보이지 않으신다. 제자들이 본 환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가 그분을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 땅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예수는 다시 함구령을 내린다. 기적적인 환시를 기대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뵐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내려주시며, 사람은 누구나 성령을 받아들이는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을 뵙는다. 이로써 하늘나라가 이 땅에 나타난다.

 

예수는 수시로 말하지 마시오.’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이것을 흔히 예수의 함구령(緘口令)’이라고 한다. 빈도의 차이는 있지만 네 복음서가 모두 예수의 함구령을 보도한다. 상식적으로는 함구령을 내리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복음을 세상에 전하려면 예수가 한 일이나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을 널리 알려야만 할 것만 같다. 그러나 복음을 말로 설명하고자 하면 복음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다. 복음은 이론이 아닌 실천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촉구하며, 하느님과의 사랑은 반드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통달하는 지혜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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