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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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레지오, 그리고 성모님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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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03 ㅣ No.497

[허영엽 신부의 ‘나눔’] 레지오, 그리고 성모님과 어머니

 

 

‘레지오’는 한 마디로 ‘성모님의 군대’에 비유된다. 특히 성모님께 봉헌된 한국 교회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까지 레지오의 역할이 상당했다고 생각한다. 군대같은 강한 조직력을 가지고 신심 중심의 활동을 하며, 교회에 순명하는 레지오는 사제들에게 사목의 큰 협조자이다.

 

‘레지오’를 떠올리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머니는 생전에 열심한 레지오 협조단원이셨다. 어머니와 레지오가 함께 생각나는 것은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벌써 15년이 흘렀지만 그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 집 아래쪽에는 축대 밑에 쓰러져가는 움막집이 있었다. 그 움막집에는 언어 장애를 가진 할아버지와 지체 장애를 가진 손녀가 살았다. 그들이 사는 움막 근처에 가기만 해도 악취가 심해 동네 사람들조차 지나가기를 꺼려했다.

 

어느날 집으로 가는 길에 어머니가 그 움막에서 사람들과 함께 나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 그 움막에는 왜 가셨어요? 사람들이 나쁜 병 옮는다고 근처에도 가지 말라 하던데…” 어머니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못 쓴다. 할아버지가 며칠 몸이 아프셔서 일을 못하셨는데, 손녀도 몸이 불편하여 두 식구가 식사도 못하고 있더구나. 그래서 죽을 좀 가져다 드렸어. 내일은 빨래를 해 드리려고 해” 다음 날 어머니는 신자 몇 분과 함께 그 집을 다시 찾아가 청소와 빨래를 해주셨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그 움막집에 성당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몸이 불편한 손녀가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그날 대세를 받은 것이었다. 대모는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날 본 성당 사람들은 레지오 단원들이었다. 그 후 어머니는 그 손녀딸과 할아버지를 더 열심히 돌보아주었다. 식사도 챙겨주고 대소변도 받아주고 청소도 해주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그 손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 전날 어머니는 손수 데운 물을 가져다가 대녀를 깨끗하게 목욕시키고 새 옷을 갈아입히시며 하느님 나라에 갈 준비를 해주셨다. 대녀가 세상을 떠난 후 성당에서는 사흘 동안 레지오 단원들이 와서 계속 기도를 해주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연도소리를 들었다. 또한 성당에서 묘지도 제공해주고 장례식도 잘 치러주었다. 그 모든 것들을 레지오 단원들이 자기 일처럼 나서서 해준 것이다. 나는 그때 레지오를 처음 알게 되었고 그들의 활동을 접하게 되었다. 나중에 레지오가 성모님의 군대라는 말을 듣고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머니는 신앙의 길을 가르쳐주신 스승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겠다던 어머니는 혼자 오랫동안 사셨다. 우리가 집을 찾았을 때 어머니는 마치 깊은 잠을 주무시는 것처럼 반듯하게 누워 계셨다. 머리맡엔 마지막으로 혼자 드신 밥상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들 신부들이 집에 가면 한사코 고기반찬을 마련해주시던 분, 그러나 혼자서는 김치만 드시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더 못 주어 애태우는 것이 어머니이리라. 그렇게 조용히 하느님 곁으로 떠나신 어머니 손에는 묵주가 쥐어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어머니는 기도할 것이 많았을까. 어머니는 수십 년 동안 본당 레지오 단원들을 기도로 후원하는 협조단원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셨을 것이다.

 

나에게 어머니는 신앙의 길을 가르쳐주신 스승이셨다. 또한 그 믿음의 열매를 어머니는 희망의 보증으로 남겨주셨다. 그랬던 어머니의 죽음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몹시 힘들었다. 마치 나를 지탱해 주던 이 세상의 마지막 끈이 끊어진 느낌이었다. 이 넓은 세상에 나 혼자 덩그러니 던져진 느낌이 들어 무섭고 두려웠다. 그래서 일부러 어머니가 사시던 집에 가질 않았다. 어머니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니는 내 안에 살아계심을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성모님께 묵주기도를 드리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묵주를 손에 놓지 않고 늘 기도하셨다. 어느덧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은 나의 것이 되었다. 특히 어머니가 그토록 소중히 간직했던 신앙이 내 안에서도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하느님 향한 여정 중에 성모님 닮고 따르고자 노력해야

 

가톨릭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 신앙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다. 성모님을 교회의 가장 으뜸 성인으로 존경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분의 신앙 때문이다. 성모님의 신심은 모든 신앙인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었던(루카 1,45) 마리아의 믿음이 그분을 교회의 어머니로 존경하게 하는 것이다. 신앙이란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잘 받아들이기 어려운 하느님의 역사(役事)를 오롯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성모님처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을 준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온전히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었다. 나의 어머니의 일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성모님을 생각할 때 어머니가 떠오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성모 마리아는 자신의 삶, 특히 고통과 수난의 삶 속에서도 하느님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자신을 봉헌하고 투신했다. 자녀가 어머니를 기억하고 본받고자 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도 하느님을 향한 여정 중에 성모님을 닮고 따르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1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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