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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3: 포교성성과 선교 보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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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25 ㅣ No.793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3) 포교성성과 선교 보호권


조선대목구 설정은 중국 선교 위한 교황청 전략

 

 

- 북경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성당이 있었는데 청나라 도광 황제 때 남당을 제외하고 모든 성당이 헐렸다. 이곳에 머물고 있던 남경교구 총대리 카스트르 신부는 선교 보호권을 유지하기 위해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철저히 방해했다. 사진은 남당성당 전경.

 

 

중국 선교에 대한 교황청의 역할은 미비했다. 16세기 이후 중국과 아시아의 선교 책임은 포르투갈 왕에게 있었다. 포르투갈 왕이 파견한 수도회들이 중국 교회를 관할했다. 중국에 관한 모든 것에 포르투갈이 교황청보다 우선했다. 

 

가톨릭 교회의 수장은 교황이다. 하지만 국제 정치 질서는 늘 힘의 논리에 좌우된다. 15세기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의 중심축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로 기울어 있었다. 두 나라 왕은 식민지로 개척한 새 영토에 가톨릭 교회를 세우는 것을 의무라고 여겼다. 교황청은 아시아와 신대륙에 선교사를 파견하거나 교회를 세울 여력이 없었다. 해외 선교사들을 지원할 배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신변을 보호할 군사력도 전무했다. 교황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에게 식민지 개척의 독점권을 인정하면서 그 식민지에 대한 선교 활동도 병행할 권한과 의무를 허락했다. 교회는 이를 ‘선교 보호권’(宣敎 保護權, Padroado)이라 불렀다. 선교 보호권을 받은 두 나라 왕은 자국 관할 영토 지역에서 교구 설립, 주교 추천 및 임명, 선교사 파견, 교회 운영 및 관리에 관한 모든 권리와 책임을 졌다. 

 

비오 2세 교황(재위 1458~1464)은 1461년 포르투갈 아폰수 5세 왕에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선교 보호권’을 줬다. 이후 포르투갈 왕은 두 대륙 가톨릭 교회의 실질적 책임자가 됐다. 이때부터 19세기 초ㆍ중반까지 포르투갈 왕과 그의 선교사들은 중국과 아시아 가톨릭 교회를 좌지우지했다.

 

- 교황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의 폐단을 막고 선교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포교성성을 설치했다. 사진은 오늘날 인류복음화성으로 개편된 포교성성 건물로 로마 주 교황청 스페인 대사관 옆에 자리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자료 사진.

 

 

포르투갈은 1557년 마카오를 중국과 유럽을 잇는 무역 거점으로 건설했다. 그리고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에 중국 선교를 맡겼다. 1565년 마카오에 가장 먼저 진출한 예수회는 성 바오로 신학교와 성 요셉 신학교를 세워 성직자를 양성하고, 중국과 일본 선교에 힘을 쏟았다. 

 

선교 보호권은 처음부터 교황청이 목적한 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폐단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두 나라 왕들이 선교 보호권을 제한 없이 남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선교사들을 마치 자국 관리처럼 통제했다. 국가 통치 정책에 순응하는 성직자와 수도자만이 주교와 장상으로 임명됐다. 선교사들은 마치 십자군처럼 한 손엔 성경을, 다른 손엔 칼을 들고 식민지 개척에 따라 나섰다. 

 

선교 보호권은 선교의 도구가 되기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이민족 정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됐다. 예수회가 본토민 보호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으나 현지에서는 구원을 명목으로 원주민의 강제 개종이 성행했고, 노예제를 인정하기까지 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왕들은 자신이 파견한 선교사 외에는 누구도 선교 보호권 관할 내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교황청조차 두 나라의 양해를 얻지 않고서는 선교 보호권 지역에 대한 선교 정책 수립이나 선교사 파견을 독자적으로 할 수 없었다. 설상 양해를 얻어 신임장을 받은 교황청에서 파견됐다 하더라도 선교지 현지에서는 갖은 방법으로 이들을 방해했다. 

 

그중 가장 비열하고 악랄한 방법은 ‘신앙과 구원’이라는 문제를 걸고 본토인 신자들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 희생자가 바로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 포르투갈 대표부의 신임장을 갖고 중국으로 갔음에도 현지 포르투갈인 선교사들로부터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중국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신자들에게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음식과 잠자리, 길 안내 등 그 어떤 도움을 제공하는 자는 파면에 처한다’고 공지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사목하는 지역에서 중국인 신자들에게 물 한 모금조차 얻어먹을 수 없었다. 오히려 폭행당하고, 감금되고, 내쫓기는 수모를 당했다.

 

교황청은 두 나라의 전횡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또 17세기부터 영국과 네덜란드가 동양 무역권을 차지하면서 개신교의 진출이 빈번해지면서 선교 업무를 총체적으로 관장할 필요성이 대두했다. 이에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재위 1621~1623)은 1622년 선교 업무를 총괄하고 지도, 감독하는 교황청 포교성성을 신설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중국 교회에 대한 선교권을 주도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성직자가 단 한 명도 없는 조선에 1831년 9월 9일 대목구를 설정한다. 사진은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조선대목구 설정 칙서.

 

 

포교성성은 선교 보호권과 수도회의 특권을 축소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이를 위해 교구 사제들의 해외 선교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포교성성은 선교사들에게 선교 활동에만 전념하고 선교지의 관습과 전통문화를 존중하라고 지시했다. 또 본토인 성직자를 양성해 토착 교회를 세울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포교성성은 선교사들이 정치에 간여하고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을 일절 금했다. 포교성성의 이러한 선교 지침은 직할 선교 조직인 파리외방전교회의 기본 정신으로 발전했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선교 지침을 실현하고 선교 보호권을 무력화하기 위해 ‘대목구’(代牧區, Vicariatus Apostolicus) 제도를 시행했다. 대목구는 교황이 직할하는 교구를 설정하고, 명의 주교를 대목구장으로 임명해 교황을 대신해 교구를 사목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재위 1830~1846)은 1831년 9월 9일 세계 교회가 깜짝 놀랄 칙서를 반포한다. 성직자가 단 한 명도 없는 조선에 대목구를 설정한다는 칙서였다. 교회사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현재까지도 유일한 파격적 조치였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과 교황청 포교성성의 이 조치는 조선 신자들만을 위한 결단이 아니었다. 조선대목구를 통해 중국 교회에 대한 선교권을 주도적으로 행사하려는 교황청의 선교 전략이 깔려 있었다.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던 조선 교회가 중국과 아시아의 선교 무대에 새로운 핵으로 떠오르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25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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