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11 ㅣ No.487

[레지오 영성] “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

 

 

“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

 

조선시대의 사극을 보면 임금과 신하의 대화에 신하가 임금에게 응하는 구절입니다. 신하가 임금의 하명에 대한 고귀한 뜻을 고이 간직하고 이를 반듯이 실천하겠다는 의미를 가득 담은 응답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만일 일상의 삶 안에서 가족과 직장 동료들에서 이 문장을 쓰게 되면, 과히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가득 묻어남을 느낍니다. 우리 조상들이 사용한 이 문장을 성서의 인물들에 비추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창세 1,1.4)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 분부를 받잡겠습니다.” 라고 미지의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마리아가 천사의 알림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고 말씀하시며, 하느님의 요청에 “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라고 응답하며 수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하며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의지를 일치시키며 아버지의 뜻을 받듭니다.

 

 

“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

 

이렇게 “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는 응답은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 신앙의 응답입니다. 또한 현재 우리들 상호간에는 “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 라는 응답으로 상대의 기대와 요청에 부응하기에 서로간의 사랑을 증대시킵니다. 실제로 일상의 관계 안에서 형제나 동료들의 요청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는 응답은 서로에게 수용되는 기쁨과 그 에너지로 일을 신명나게 만들어 줍니다.

 

가정 안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요청할 때, 자녀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응답하는 것은 부모에게 커다란 기쁨이 됩니다. 반대로 자녀가 부모에게 요청했을 때도 “응, 그랬구나! 그렇게 하면 좋겠네.” 라고 응답하면, 부모 자녀 간에 일치의 기쁨을 공유하게 됩니다.

 

“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 라는 이 표현 안에는 상호간의 요청에 대한 수락과 그 뜻을 존중하는 공경의 의미가 가득 들어 있어, 생명의 에너지를 서로에게 가득 선사합니다.

 

 

“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

 

“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 라는 문장 안에는 진정 “일치”의 의미가 가득 묻어납니다. 상대가 요청하는 뜻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온 힘을 다해 그것에 충실하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 드러납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또 다른 차원의 의미로는 서품식 때의 응답입니다. 이는 자립 곧 “자아실현”의 욕망을 근본적으로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서품 청원자가 자신의 의지를 바로 하느님 의지에 일치시키는 원의입니다. 그래서 서품식 때에 발한 이 위대한 “예”의 응답은 매일 매일 사소한 “예들(yeses)”과 작은 희생들을 통하여 온전히 실천되어 지고 있습니다. 사제로서는 매일의 미사성제를 통해 이 “예”를 신자들과 함께 봉헌하며 실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드리는 이 미사에서 바로 하느님의 현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르게는 하느님을 우리 가운데 모셔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상대의 요청에 응답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일치의 응답이 바로 우리 가운데 하느님께서 가득 현존하시게 한 것입니다. 이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응답이 바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모셔 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일치의 모습입니다.

 

 

“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

 

성모님의 “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라고 하느님께 드린 응답이 바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모셔다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사이에 거주하게 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현존하시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신앙하는 모범으로 최고가는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께 응답하는 “예” 라는 신앙의 응답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두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촛불을 켜고 묵주기도와 까떼나를 드리는 것에서 “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라고 하느님께 응답을 제일 먼저 드리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미 하느님과 첫 번째 연결 고리를 걸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베푸신 그 축복의 은총 안에서 가족들과 수많은 이웃들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곧 나의 인사와 내가 내민 손이 바로 하느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의 이름 안에서 주님과 일치되어, “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 라는 응답으로 주님을 우리 가운데 모십니다. 아멘.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11월호, 강형섭 미카엘 신부(마산교구 가정사목국장)]



2,38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