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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맥: 탁월한 학승,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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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12 ㅣ No.458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맥] 탁월한 학승,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이번 겨울 호에 소개할 교부는 탁월한 학승(學僧)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345-399년)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사막교부들 가운데 한 분이지만 사막 수도승 영성을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키고 심화시킨 인물이다. 그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은 학문적 토대를 갖추고 그 위에서 점차 발전해 나간다. 그만큼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생활 역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삶의 여정

 

에바그리우스가 걸었던 삶의 여정을 들여다보면 그 역시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보게 된다. 평범하다는 말은 성공과 실패, 희망과 절망, 고뇌와 좌절 등 넘어짐과 일어섬을 반복했다는 의미에서다. 팔라디우스가 쓴 『라우수스의 역사』(Historia Lausiaca) 제38장을 보면 에바그리우스는 젊어서부터 총기를 드러냈던 탁월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교와 수도생활이 한창 번성하고 있었던 4세기 중엽에 태어나 반세기를 조금 넘게 살다 갔지만, 수도생활과 영성생활에 미친 그의 영향은 지대하다. 하지만 그가 걸어 온 삶의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매우 극적이었다. 54년의 일생 중, 수도승으로 살았던 16년을 빼면 38년을 세상에서 생활하며 여러 일을 경험했다.

 

에바그리우스는 오늘날 터키 북부에 있는 폰투스의 이보라에서 출생하여 바실리우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부제로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여 탁월한 지식과 지혜로 온갖 이단과의 싸움에서 혁혁한 공헌을 했다. 그의 명성은 콘스탄티노플 전체에 알려졌고, 그는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교만과 애욕의 노예가 되었고, 마침내 한 고관의 부인과 사랑에 빠졌다. 어느 날, 꿈속에서 이 일로 인해 자신이 처하게 될 온갖 곤경을 보고서 예루살렘으로 탈출하여 루피누스와 멜라니아의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도 악습을 끊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자 원인 모를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이집트로 가서 수도승이 될 것을 약속했다. 에바그리우스는 멜라니아에게 수도복을 받고 이집트로 가서 니트리아에서 2년을 생활한 후, 다시 켈리아 사막으로 가서 14년을 살았다. 이것이 한 위대한 교부의 파란만장 했던 삶의 궤적이었다.

 

 

평생의 화두

 

에바그리우스는 켈리아 사막에서 생애 마지막을 보내면서 이후 수도생활과 영성생활의 확고한 토대를 놓은 방대한 작품들을 저술했다. 아쉽게도 그의 사후 오리게네스 논쟁에 연루되어 많은 작품들이 유실되었지만, 우리에게 전해지는 작품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의 사상과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삼부작 중 하나인 『프락티코스』(Praktikos)는 수행생활에 관한, 그리고 삼부작의 또 다른 하나인 『그노스티코스』(Gnostikos)와 『기도론』(De Oratione)은 관상생활에 관한 전통적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에바그리우스가 전하는 가르침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다.

 

고대 다른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에바그리우스의 주된 관심과 가르침의 핵심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성생활에서의 진보’였다. 즉, 어떻게 영성생활에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회심 이후 그의 전 삶을 지배한 평생의 화두였다. 앞서 언급한 대표작들은 이 물음에 대한 에바그리우스의 대답을 전한다. 그것은 그의 개인적 체험과 깊은 통찰에서 나온 지혜의 산물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

 

에바그리우스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간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이 맨 처음 순수 정신(nous)인 이성적 존재들(logika)을 창조하셨는데, 그 목적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순수 정신들은 자기 역할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결국 육체에 결부된 영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순수 정신이 아니고 육체와 영혼이라는 또 다른 차원을 지니게 되었다. 타락의 정도에 따라 천사, 인간, 악령과 같은 세 범주의 타락한 정신으로 구분된다. 인간은 천사의 조건과 동시에 악령의 조건에도 연결되어 있다. 천사는 인간을 선으로 이끄는 친구인 반면, 악령은 인간을 악으로 이끄는 적이다. 따라서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서 끊임없이 싸우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인간 영혼에 대한 에바그리우스의 가르침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그리스 철학 전통을 바탕으로 인간 영혼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즉, 이성부(reasonable part), 정념부(irascible part), 욕망부(concupiscible part)이다. 이성부는 영혼의 가장 고귀한 부분으로 타락한 정신의 직접적 연장(延長)이다. 나머지 두 부분은 육체와 연결되며 욕정부(passionable part)로 통칭된다. 영혼의 욕정부에는 그에 해당하는 욕정들이 공격하여 영혼을 병들게 하고 영혼의 이성부가 본질적 인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욕정들과의 싸움을 통해 욕정부의 악을 제거하고 덕을 심고, 이성부가 무지에서 인식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의 인간학은 현대 교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는 많이 낯설 수 있다. 하지만 당시는 그리스도교 교의가 형성되는 과정이었고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공존했던 시대였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영성생활의 단계

 

에바그리우스는 영성생활을 크게 수행(praktike)과 관상(gnostike) 두 단계로구분하고 있다. 관상은 다시 자연학(physike)과 신학(theologike) 두 단계로 나뉜다. 자연학은 오늘날의 물리학이나 자연과학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대한 관상 혹은 영적 인식’을 뜻한다. 신학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사변학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관상’을 뜻하는데, 곧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온 존재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수행이란 “영혼의 욕정부를 정화하는 영적 방법”(『프락티코스』 78)이고, 관상이란 영혼의 이성부가 본질적 인식에 전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생활은 영혼의 욕정부와 관련된 ‘악’과 이성부와 관련된 ‘무지’를 제거하여 영혼 안에 ‘덕’을 쌓고 ‘인식’을 얻기 위한 전적인 투쟁이다. 영성생활은 바로 수행적(금욕) 차원과 관상적(신비적)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행 없는 관상도 관상 없는 수행도 참된 영성생활이 될 수 없다. 영성생활은 수행을 통해 관상으로 나아가는 과정과도 같다. 영성생활의 진보를 이처럼 단계적으로 구분한 것은 에바그리우스의 공헌 중 하나이다.

 

 

수행생활(bios praktikos)

 

그리스도교 수행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악한 생각들 혹은 욕정들과의 내적 투쟁이다. 악한 생각은 악령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수단이다. 그들은 우리 안에 악한 생각을 불러 일으켜 우리 마음과 정신을 흩뜨려 순수한 기도를 방해한다. 따라서 수행이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는 악한 생각들과의 싸움이다. 결국은 악한 생각들을 일으키는 악령들과의 싸움인 셈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최초로 여덟 가지 악한 생각 목록을 제시했다. 그는 말한다. “모든 생각을 포함하는 발생학적 생각은 모두 여덟 가지다. 바로 탐식 · 음욕 · 탐욕 · 슬픔 · 분노 · 아케디아 · 헛된 영광 · 교만이다.”(『프락티코스』 6) 육체와 관련된 탐식, 음욕, 탐욕은 영혼의 욕망부를 공격하고, 마음과 관련된 슬픔, 분노, 영적 태만(akedia)은 영혼의 정념부를 공격한다. 그리고 헛된 영광과 교만은 영혼의 이성부를 공격한다. 영혼의 각 부분을 공격하는 이런 악한 생각들로 인해 영혼은 병들게 되고 결국 본질적 인식, 곧 관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수행이란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다. 영혼이 건강을 회복한 상태는 아파테이아(apatheia)의 상태, 즉 내적평정 상태이다. 이 상태에 이른 영혼은 더 이상 악한 생각들에 동요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늘 평온하다. 이 평정심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아파테이아가 사랑(agape)이라는 자손을 낳고, 사랑은 관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한다(『프락티코스』 머리말 8 참조). 사랑의 구체적 모습은 온유이다. 온유는 수행의 정점에 도달한 수행자가 드러내는 고유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관상생활(bios gnostikos)

 

수행을 통해 내적평정 상태에 도달한 수행자(praktikos)는 사랑을 통해 이제 관상(gnostike)으로 나아간다. 관상가는 먼저 우리 감각으로 인지되는 가시적 피조물을 통해, 그런 다음 불가시적 피조물인 영적 존재(천사와 성인들)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간접적으로 인식(자연학)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인식(신학)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관상생활의 핵심 내용은 기도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당신이 신학자라면 당신은 참되게 기도할 것이며, 만일 당신이 참되게 기도하면 당신은 신학자다.”(『기도론』 61) 신학자는 무엇보다도 기도의 사람이다. 신학자는 관상가이고, 관상가는 순수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과 일치와 친교를 누리는 사람이다. 에바그리우스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격정적인 생각에서 돌아서면서 자기 아버지께 하듯 그분과 더불어 이야기한다.”(『기도론』 55)고 말한다. 기도는 하느님과 영혼의 대화이고, 이 대화를 통해 영혼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게 된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온갖 악한 생각들이라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온갖 악한 생각에서 자유로워진 관상가는 이제 하느님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게 된다.

 

에바그리우스는 관상가(gnostikos)의 가장 큰 적을 분노라고 말한다. “모든 덕이 관상가에게 길을 활짝 열어주지만 무엇보다도 분노의 억제를 쉽게 해준다. 사실 인식에 도달했지만 쉽게 분노하는 사람은 철침으로 자기 눈을 찌르는 사람과 비슷하다.”(『그노스티코스』 5) 에바그리우스는 어떤 악도 분노만큼 우리 정신을 악령으로 변형시키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관상가의 탁월한 덕을 온유로 제시한다. 이처럼 분노는 관상가가 끝까지 경계해야 할 유혹으로 분노의 다스림은 중요하다.

 

 

마무리 하며

 

에바그리우스는 철저한 수행자이자 위대한 관상가였다. 영성생활과 수도생활에 대한 그의 수행적(금욕적) · 관상적(신비적) 가르침은 전통적 가르침으로 자리매김했다. 에바그리우스의 가르침은 이후 수도영성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에도 항구한 가치를 지닌다. 한 해가 끝나면서 이처럼 중요한 교부를 소개하게 되어 뜻깊게 생각한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5년 겨울호(Vol. 32),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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