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그륀 신부의 계절 편지: 분노 다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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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1-07 ㅣ No.1280

[그륀 신부의 계절 편지] 분노 다루기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늘 자신이 옳다고 하는 사람, 늘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납니다. 물론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보아도 화가 납니다. 4세기 사막 교부들이 말했습니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우리 책임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는 우리 책임이다.” 분노에도 이 말이 적용됩니다. 저녁 내내 구시렁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속에서 화가 더 부글부글 끓어오르지요. 그러고는 자신을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희생자로 느끼게 됩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막 교부들에게 중요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변화시켜야 피해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우리 스스로 적극적으로 각자의 감정 안에 숨어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긍정적인 에너지는 자신의 감정과 대화하고 그 감정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물음으로써 스스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노는 다음의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분노는 누군가 우리의 경계를 침범했음을 알려 줍니다. 그는 나의 경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때 분노는 자신의 경계를 더욱 잘 지키라는 신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과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부인은 상사가 자기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한탄합니다. 퇴근 후 매일 저녁 남편에게 상사가 얼마나 나쁜지 불평합니다. 남편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남편은 부인이 직장에서 가져온 쓰레기를 버리는 쓰레기통이 된 기분이 듭니다. 두 사람 모두 나에게 와서 같은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직장 상사를 집에 들여놓지 마세요. 다시 말해, 집에서 더 이상 그 상사 이야기를 하지 마세요. 가족끼리 하는 저녁 식사를 당신 상사가 망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금방 잘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 상사가 가족의 대화 주제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당장 그를 집에서 쫓아내세요. 당신들 집은 당신들 것입니다.” 나 스스로 거리를 두면 더 이상 분노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를 분노하게 만든 사람은 더 이상 나에게 힘을 쓰지 못합니다. 분노는 나 자신 그리고 내가 사용하는 에너지와 만나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면 분노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는지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려고 했을 때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에게는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셨다”(마태 3,5).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에게 호통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분노는 더욱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완고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내가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옳은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분노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힘과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을 배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완고함에 슬퍼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어 슬픔 syllypousthai는 연민 또는 연민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사이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했습니다(마태 3,6 참조). 그러나 그들이 그분 육식을 죽일지언정 그들에게는 그분 영혼을 지배할 권한은 없었습니다.

 

분노는 나를 괴롭히는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것이 분노의 둘째 의미입니다. 제가 수도원 재정을 관리할 때 무엇가 잘 풀리지 않으면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화를 낸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노를 이용했습니다. 그 문제와 관련 있는 수도 형제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고는 좋은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분노는 더 잘 조직화하고 더 분명하게 체계화하라는 자극이었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움켜쥐고 한탄하는 대신 해결해야 합니다.

 

분노의 셋째 의미는, 분노가 자기 인식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독일 시인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화나게 하지 않는다.” 내가 감히 하지 못하는 금지된 일을 자유롭게 행하며 사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나곤 합니다.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내가 들어야 보아야 할 거울과 같습니다. 그러면 자신을 더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늘 자기만 아는 사람에게 화가 난다면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도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는가?’ 자기 이익만 따지는 사람에게 화가 난다면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내게도 그런 면이 있는가?’

 

분노에는 항상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그 의미를 인식하면 분노는 나에게 긍정적인 작용을 합니다. 분노는 나를 더 이상 꼼짝 못하게 하지 않고, 나 자신과 거리를 두게 하거나 나를 더 잘 통제하게 하여, 나를 더욱 정직하게 인식하도록 이끕니다. 내가 분노를 억압하면 분노는 언젠가 원한으로 변합니다. 또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대로, 분노는 불평이 됩니다.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불평을 큰 죄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 전체에 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노를 다 표출하고 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람에게 소리를 지를 때 분노는 해가 됩니다. 분노가 우리를 해치고, 분노가 우리를 지배합니다. 분노는 좋은 관계를 파괴합니다. 따라서 분노를 책임감 있게 다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분노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합니다. 사막 교부들은 분노를 어떻게 좋은 에너지로 바꾸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사막 교부들에게서 어떻게 하면 부정적인 감정을 잘 다루고 그 감정들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지 한 번 배워 보십시오. 그러면 분노가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방해하지 않고, 그분과 관계를 깊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분노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활기와 끈기를 줍니다. 자신의 감정을 무조건 억압하는 사람의 영성은 지루하고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감정과 욕망을 변화시킬 때에만 우리 영성은 열정적이고 강력해집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8년 겨울호(Vol. 44), 글 안셀름 그륀 신부(성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번역 김혜진 클라라(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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