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수도 ㅣ 봉헌생활

수녀원 창가에서: 그냥 사는 것이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1-18 ㅣ No.613

[수녀원 창가에서] 그냥 사는 것이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벌써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1월의 문턱이다. 교회는 이달의 전례력을 통해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죽음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사실, 죽음은 산 이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요즘같이 돈만 있으면 살기 좋은(?) 세상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위령 성월을 통해 죽음을 덮어둔 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슬며시 두드려 보는 게 아닌가 싶다. 교회가 마련한 삶의 지혜요 넛지(nudge, 어떤 일을 강요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더 좋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방법 - 편집자 주)라고나 할까?

 

 

마치 한 가족처럼

 

어떤 사람은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고유한 색채를 드러내던 잎사귀들도 결국 한 줌의 재로 사라지듯 우리도 죽음 앞에서 그렇게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상념 뒤에는 왠지 “그래, 사는 게 뭐 별건가, 죽으면 우리도 결국 그렇게 사라지고 마는 것을….”이라는 허무주의적 느낌이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럼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장례 미사 때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듣는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5). 바오로 사도의 이 고백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닌 이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끝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는 것임을 말해 준다.

 

우리 수도 공동체에서는 입회 동기 수녀님의 가족 특히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마치 한 가족처럼 장례 일정에 함께하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대부분 각자의 시간을 조정해서 그분의 장례 미사에 참석하곤 한다. 이렇게 돌아가신 분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노라면 마치 내 부모나 형제가 돌아가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리고 장례 미사에 참여한 모든 수녀님은 영성체 후 묵상으로 복음 성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함께 부르곤 한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 주셨네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을 막으나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새 희망 주심을 믿사옵니다

 

그 미사에 참석한 유가족들은 수녀님들의 합창에서 깊은 위로를 받았다는 말씀을 건네곤 한다. 아마 우리의 마음이 그분들께 전해지고 또 사랑의 영이 우리 모두를 감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신앙을 지닌 우리는 앞의 노래 가사처럼 “이 세상 사는 길이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신앙 안에서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에로 건너가리라는 희망을 안고 오늘을 살아간다.

 

 

삶을 마무리하면서 드리는 감사

 

우리 수도회의 미국 관구 수녀님들은 평균 연령이 80세가 넘어 해마다 여러 분이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다. 총원에서는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전자 우편을 각 회원에게 보낸다. 그 전자 우편에는 돌아가신 수녀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도 함께 적혀 있다. 여기 몇 수녀님들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남기신 말씀을 소개한다.

 

“수도 성소라는 선물과 하느님 백성을 섬기도록 많은 기회를 제게 주신 데에 감사드립니다”(노라 마리 디긴 수녀님, 향년 89세).

 

“우리 공동체 안에서 저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제가 살아온 모든 순간이 참 좋았습니다”(메리 리처드 릭스너 수녀님, 향년 88세)

 

“저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사도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현존을 표현하는 데 제가 받은 선물과 재능을 나누도록 재촉받았습니다”(실라 마리 쿠퍼 수녀님, 향년 87세).

 

이렇듯 많은 수녀님께서 함께 살아온 이들과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남기신다. 삶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죽음을 기억하라

 

일생 동안 죽음에 대해 사색을 많이 한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죽음이 생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그리고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 잡은 선이 죽음을 끝낸다.”고 했다. 곧 우리 안에 내재된 선이 죽음을 끝낸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불어 넣으신 선하심을 살 때 비로소 죽음을 넘어 서게 된다는 의미겠다.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한 농부를 통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한 가지 단초를 알려 준다. 그건 놀랍게도 아주 단순하다. “그냥 사는 것이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알아들으려고 그 말을 한 농부의 삶을 그려 본다. 농부는 때가 되면 씨를 뿌리고, 때가 되면 일하고 추수할 때가 되면 거두어들인다. 이렇듯 농부는 각각의 때에 맞추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간다. 농부가 말한 ‘그냥 산다.’는 건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것이며 그게 선하게 사는 길이리라. 그러나 그냥 사는 것 뒤에 붙은 선하게 사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선하게 사는 것과 관련하여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양파 한 뿌리’라는 우화가 떠오른다. 톨스토이가 말한 것과 연관 지어 보면, ‘양파 한 뿌리’를 거지에게 건넨 보잘 것 없는 선행이 평생 어떤 선행도 한 적이 없던 할머니의 사후를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톨스토이는 죽음을 삶의 한 과정임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건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리라. 이렇듯 죽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주어진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살게 되지 않겠는가!

 

죽음은 사랑하는 이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분명 크나큰 상실이다. 그러나 그건 믿는 이들에겐 죽음의 일면일 뿐이다. 신앙은 우리에게 죽음의 또 다른 면이 있음을 말해 준다. 바로 죽음이 ‘선물’이라는 점이다. 세상을 떠난 사람이 남긴 사랑은 그와 관계 맺었던 모든 이 안에서 또 다른 사랑의 열매로 남는다. 그 사랑의 선물이 죽음을 기억하는 이 순간 나에게 감사함으로 다가온다.

 

내 주변에서 돌아가신 분들과 그분들이 남기신 사랑을 떠올려 본다. 그 사랑의 선물이 오늘 나에게서 너에게로 전해지기를 희망하며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바친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은 어디 있느냐”(1코린 15,55).

 

* 최현민 엘리사벳 - 사랑의 씨튼 수녀회 수녀. 종교대화씨튼연구원장이며 「영성생활」 편집인이다. 일본 난잔대학 종교문화원과 벨기에 루뱅대학교에서 연구원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8년 11월호, 최현민 엘리사벳]



2,62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