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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ㅣ심리ㅣ상담

[상담] 낭패(狼狽) 관계를 만들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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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9-02 ㅣ No.861

[생명을 주는 가족] ‘낭패(狼狽)’ 관계를 만들지 않기 위해

 

 

학자마다 다양한 자녀 교육 방법을 제시하지만, 너무 강압적이거나 너무 허용적인 양육 방식 모두 자녀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는 일치를 보인다. 부모 가운데 한쪽은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한쪽은 지나치게 허용적이라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 다음 사례를 만나 보자.

 

제 막내딸이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가출했다가 1년 반 만에 집에 돌아왔거든요. 어릴 때는 별로 속 썩이지 않더니 뒤늦게 사춘기가 온 건지. 가출까지 했으니 마음 같아서는 진짜 없는 자식인 셈 치자 싶지만, 차마 그럴 수도 없고….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고 싶어요. 막내의 언니들도 자랄 때 속을 좀 썩였지만, 시집가더니 마음잡고 잘 살더라고요. 그런데 얘는 뭘 한다고 시작했다가 중단하거나 약속을 깨는 일이 부지기수고, 뭐라고 야단을 치면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막말을 하는데,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거 같아요.(장 안젤라, 60세)

 

가출 운운하시기에 청소년 자녀인가보다 생각했는데, 딸은 올해 서른 살이라고 했다. 만나 보니 딸(이영미, 가명)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려 보였다. 외모만 어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백화점에 혼자 가서 옷을 사 본 적이 아예 없을 정도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대답을 천연덕스럽게 했다. 하지만 이성 친구를 사귄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친구들도 여성보다는 남성이 많았고, 남자 친구도 여러 차례 사귀었다고 한다. 자기에게 필요하고 좋아하는 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도적으로 하고 있었다.

 

상담자 : 영미 씨는 가출했다기보다 독립한 거라고 봐야할 것 같은데요.

 

영 미 : 가출은 가출이었죠. 부모님 허락 없이 나갔으니까요.

 

상담자 : 죄송스럽게 생각하긴 하나 봐요. 어떤 생각으로 다시 집에 돌아오기로 했나요?

 

영 미 :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안전하게 독립하려면 결혼하는 게 낫죠. 지금으로선 결혼하기보다 취업 준비를 하려면 집에 들어가야겠다 싶었어요.

 

상담자 : 나가 있으면서 좋았던 점과 좋지 않았던 점을 말해 봐요.

 

영 미 : 솔직히 나가 살면서 좋은 점이 더 많았어요. 사실 집에 일하는 아주머니도 있고, 학교 다닐 때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엄마나 언니들이 다 나서서 해 줘 저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거든요. 친구 집에서 같이 지냈는데, 아르바이트해서 돈 벌어 쓰고, 세탁기 돌리는 일도 처음 해 보고, 새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어요.

 

상담자 : 영미 씨에게는 아주 새롭고 중요한 경험이었겠네요. 지금 영미 씨를 제일 힘들게 하는 건 무엇인가요?

 

영 미 : 엄마랑 자꾸 부딪히는 거예요. 집에 돌아온 바로 다음 날부터 엄마는 제가 가출한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된다며 고해성사를 보고, 예전 친구들과 관계도 모두 끊으라면서, 일거수일투족 감시하세요. 엄마랑은 전혀 대화가 안 되니 심하면 엄마에게 욕하면서 다투는 일이 많아진 거죠.

 

상담자 :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떤가요?

 

영 미 : 아버지랑은 너무 좋아요. 엄마가 저한테 뭐라 하면 아버지가 나서서 막아 주시고,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하게 해 주시고. 이번에 집에 들어왔을 때도 아버지가 제 편을 들어주셔서 그나마 잘 넘어간 거예요.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어머니는 하나부터 열까지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녀들을 이끌어야 직성이 풀리는 분으로, 그게 엄마로서 아이들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이렇게 극성을 부린 덕분에 아이들이 대학 문턱이라도 밟은 거라 말씀하시는 분이었다. 반면 아버지는 지나치게 허용적인 분이신 듯했다. 이런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막내딸 영미는 제대로 된 교육이나 훈육을 받지 못한 채 표류해 온, 한마디로 ‘낭패(狼狽)’의 형국이었다.

 

영미와 부모님과의 관계를 탐색하면서 계속 머리를 맴돈 것은 ‘낭패’라는 단어였다. ‘낭패’는 일이 기대에 어긋나 딱하게 됐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지만, 이 말의 기원을 살피면 색다른 의미를 깨닫게 된다. ‘낭(狼)’과 ‘패(狽)’는 상상의 동물이다. ‘낭’은 뒷다리가 없거나 아주 짧고, ‘패’는 앞다리가 없거나 짧다. 또 ‘낭’은 용맹하나 꾀가 없고, ‘패’는 꾀가 많으나 겁쟁이라고 한다. 그러니 둘은 걸을 때도 사냥할 때도 서로 의지해야 한다. 둘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아무 일도 못 한다. 영미와 부모님(특히 어머니)은 마치 ‘낭’과 ‘패’처럼 심리적으로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만큼 밀착되어 있으면서, 말로는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서로를 탓하고 있다.

 

부모님은 영미더러 나이가 서른이 되었건만 생각이나 행동이 너무 어린애 같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다고 불평하신다. 그러나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로부터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게 한 부모님과의 역동이 영미의 사고와 행동, 가치관 형성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어머니는 당신이 생각하는 틀에 영미가 맞추어 주기를 기대하셨고 그 기준에 맞추지 못한다고 엄청난 비난을 쏟아냈다. 하지만 영미는 아버지의 비호를 받으며 어머니의 눈을 피해 다양한 놀이를 찾아 나섰고, 그러다 보니 세상의 이치나 독립적인 삶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피터 팬’ 같은 ‘어른 아이’가 되고 만 것이다.

 

물론 앞으로의 삶의 계획을 세우는 일에 나설 사람은 부모님이 아닌 영미 자신이다. 부모는 영미의 삶에 개입하는 대신 뒤로 물러서서 지켜보아 주는 지지자가 되어야 한다. 부모가 강압적인 양육 방식을 사용한 결과 자녀가 완전히 무기력 상태에 이르러 부모를 힘들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자녀가 무의식적으로 부모에게 가하는 공격이기도 하다. 영미가 험한 어투로 말대꾸를 하여 어머니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영미가 심한 무기력 상태에 빠지지는 않았음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무기력에 비해서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다행스러운 상태다. 이제 영미에게는 표현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자기 자신의 삶을 위해 에너지를 집중하는 일이 필요할 뿐이다.

 

자녀의 행복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부모일 터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행여 부모의 기대치를 맞추기 위한 것은 아닌지, 자녀를 위해 바친 부모의 피땀 어린 수고가 부모 자녀 관계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낭패’ 관계로 귀결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살필 일이다.

 

[살레시오 가족, 2018년 7월호(151호), 박은미 품 심리상담센터(empark932@hanmail.net)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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