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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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그륀 신부의 계절 편지: 은총으로 바뀌는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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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31 ㅣ No.1231

[그륀 신부의 계절 편지] 은총으로 바뀌는 과거

 

 

많은 사람들이 저녁에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곱씹으며 후회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그런 결정을 하는 게 아니었어. 아들과, 딸과 이야기할 때 좀 더 다정하고 주의 깊게 대해야 했어. 고객에서 좀 더 친절하게 대해야 했어. 그 말은 하지 말 걸.” 그들은 과거에 골몰하면서 과거의 일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저녁에 해야 할 좋은 의식(儀式)이 있습니다. 두 손을 하느님께 내밀며 움켜쥐고 있는 과거의 날들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과거를 은총으로 바꾸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날은 지나갔습니다. 나는 그 날을 바꾸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과거를 은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나는 아주 좋은 대화가 아니더라도 하느님께서 이를 은총으로 바꾸시리라 믿습니다. 이를 테면 감정적으로 내뱉은 말이나 말하지 않고 마음에 품은 말도 말이지요. 그러면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날 밤 하느님의 두 손이 나를 감싸 안습니다. 나는 고요히 잠들고 하느님의 따스한 손 안에서 보호받고 있음을 느낍니다.

 

매일 밤 하는 이 의식을 한 해의 끝, 한 주의 끝에도 해도 좋습니다. 나는 내 손에 쥐고 있는 한 해를 하느님께 바칩니다. 그러면 지난해 있었던 많은 일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일어난 일, 내가 한 일과 하지 않은 일, 내가 한 말과 하지 않은 말을 나는 평가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난해, 지난주를 하느님께 바치고 그분께서 과거를 은총으로 바꾸시리라 믿습니다. 나는 내가 범한 잘못 또는 다른 이에게 준 상처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 상처를 은총으로 바꾸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과거를 은총으로 바꾸실 거라는 믿음 안에서 나는 지난해와 지난주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나는 내 손이 한 모든 좋은 일에, 하느님께서 내 손에 쥐어 주신 모든 아름다운 것에 열리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 자책하는 마음도 내가 경험한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40년 전에 영성 상담을 막 시작했을 때, 대화를 마치고 나면 그때마다 내담자가 나에게 하는 이야기에 어떻게 하면 적절하고 나은 대답을 할까 하고 골몰했습니다. 내가 다른 이의 문제에 심리학적으로 더 적절하게 반응했는지도 따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것이 에너지 낭비처럼 느껴졌습니다. 대화는 이미 끝났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는 일은 가치가 없습니다. 물론 영적 상담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일종의 감독관이 되어 내담자와 영적 대화를 반추해 보는게 좋습니다. 그러면 내담자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시점이 되면 영적 대화, 의사와의 상담, 고객과의 대화, 동료와의 대화 또는 부부와의 대화를 되새기는 것은 에너지 낭비일 뿐입니다. 이렇게 되새길 때 내가 내 자아를 맴돌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앞에 좋은 모습으로 서기를 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이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능숙하지 않은 말을 통해서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대화 후에 나는 내가 한 말과 하지 않은 말을 통해 하느님께서 내담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를, 그분과 그분 사랑을 향해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은 배우자와 대화하면서 감정적으로 반응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경우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난합니다. 다른 사람이 오래전에 그를 용서했다하더라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자제심을 잃고 반응했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고해성사에서 하느님에게 용서받았음을 경험한 후에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이 가장 엄격한 재판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용서하는 것을 왜 그렇게 어려워할까요? 이는 분명히 자기상(像)과 관련이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나는 늘 완벽하고 싶고, 사람들에게 완벽하고, 신심 깊고, 침착하고, 친절하게 보이고 싶어 합니다. 무절제한 표현으로 약점이 드러나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판단합니다. 이런 자신 안의 내적 재판관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하느님보다 강한 ‘초자아’라고 명명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롭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자비롭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자비로운 성령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를 경험하게 해 주시고 일깨워 주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3). 예수님은 유다인의 학교 규율을 인용했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집에 가서 책상에 앉아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공부하라. 그것은 자비에 관한 것이다. 너는 이를 배워야 한다. 능력이 중요하지 않다. 완벽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자기 자신에게 자비롭고, 다른 사람도 자비롭게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를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멈출 때 우리는 지난날, 지난주, 지난해를 하느님께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한 모든 것은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때만 우리는 하느님이 그분의 자비로운 두 팔로 모든 것을 껴안았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7년 겨울호(Vol. 40), 글 안셀름 그륀 신부(성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번역 김혜진 클라라(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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