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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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 선언이 이루어진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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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486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 선언이 이루어진 ‘산’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마태 5,1). 대부분의 종교는 산이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았고 그 주위가 신비로운 대기에 둘러싸여 있어 산을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메소포타미아인은 산의 높이와 힘을 인식했고, 그리스인은 올림포스 산을 신들의 집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 산

 

성경에서 산은 계시의 장소로 나타납니다. 시나이에 있는 하느님의 산 호렙은 모세가 소명을 받은 곳이며(탈출 3,7-12 참조), 하느님께서 율법을 선포하고 영광을 드러내신 곳입니다(탈출 24,12-18 참조). 또 이스라엘이 아말렉족과 전투를 벌일 때 모세는 언덕 위에서 손을 들어 기도했습니다(탈출 17,8-16 참조).

 

나아가 산은 예배의 장소로 나타납니다. 높이 솟은 산은 하느님의 현존과 연결되어 주님을 만나는 곳이자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은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산에서 번제물로 바쳐져야 했습니다(창세 22,2 참조). 사무엘기 상권에는 주님의 궤가 언덕으로 모셔지는 장면이 나옵니다(1사무 7,1 참조). 기드온, 사무엘, 솔로몬, 엘리야 등은 높은 장소(1열왕 3,4 참조)에서 백성과 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자주 올라가신 점을 전하면서(마태 14,23; 마르 6,46; 루카 6,12 참조), 산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임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곳도 산이었고(마르 3,13 참조),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며 거룩하게 변모하신 곳도 높은 산봉우리였습니다(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 참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되신 곳도 골고타 언덕이었고(마태 27,33; 마르 15,22; 루카 23,33; 요한 19,17 참조), 승천한 곳 역시 올리브 산이었습니다(사도 1,12 참조).

 

 

예수님께서는 왜 산으로 올라가셨을까?

 

산은 우리가 순례의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께서 베푸신 수많은 은혜를 헤아릴 거룩한 곳이고, 일생 동안 주님과 더불어 사는 희망으로 끊임없이 올라야 하는 곳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더 높은 삶으로 데려가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아퀼레이아의 크로마시오 성인은 예수님께서 거룩한 자비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곧 속된 것을 떠나 이미 높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 숭고함을 추구하는 제자들에게 거룩한 계명을 가르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있도록 자신을 들어 높여 세상일에 초월하자고 권고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산이 지닌 등반(登攀)이라는 이미지에 ‘안전한 곳’과 ‘그리스도의 상징성’을 첨가합니다. “산에 접근하십시오. 산으로 올라가십시오. 여러분이 올라갔으면, 내려오지 마십시오. 거기서 여러분은 안전하게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보호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피신하는 산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암브로시오도 산은 인간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곳이며 안식과 평화의 곳이고, 육신과 헛된 쾌락을 멀리하는 피난처라고 말합니다. 또 그리스도는 우리가 올라가야 할 산이며, 그분은 당신의 가르침을 세상 어느 한 장소에 국한하지 않고 당신의 인격과 결합시키신다고 밝힙니다.

 

더욱이 아우구스티노는 산이 큰 계명, 곧 복음의 높은 의로움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유다인에게는 작은 계명, 곧 낮은 수준의 의로움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두려움에 싸인 백성에게 예언자와 직무자들을 통해 작은 계명을 주셨는데, 이는 그들에게 세상 복락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풀려나기에 마땅한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를 선사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 높은 수준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행복 선언을 따르면 사람의 생활이 완전해진다고 봅니다. 암브로시오 역시 “우리 영혼이 믿음으로 예수께서 강생 구속하신 분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산에 오른다”고 말하면서, 산이 믿음의 성숙과 상승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면서 그분의 은혜를 청하고 선한 생활을 갈구하며 선행의 발걸음으로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이름 모를 저자가 저술한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에서는 예수님께서 산으로 올라가신 이유가 두 가지라고 주장합니다. 첫째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이사 40,9)는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신비를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곧 하느님의 의로움을 가르치고 듣는 이는 누구든지 가장 높은 영적 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신비를 배우고자 하는 이는 누구든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드높은 산’(시편 68,17 참조)인 교회로 올라가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모든 이가 초대된다고 아퀼레이아의 크로마시오는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백성이 산에 오르는 것을 금지하시어 계명의 엄격함과 공포 분위기를 드러냈다면, 모든 백성이 초대되어 행복 선언이 이루어진 산에는 복음의 은혜로움과 자비로움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간 것처럼, 그분의 계명을 준수하면서 영신으로 더욱 가까이 결속된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도록 초대됩니다. 암브로시오는 이 초대에 응답하여 우리도 산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네게 오시도록 또 그리스도의 그늘이 너를 덮어 보호해 주시도록 너도 산이 되어라.”

 

하느님의 아드님이 병든 인류를 치유하기 위해 당신을 낮춰 우리에게 오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그분께 들어 올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새들의 제왕으로서 태양에서 뿜어 나오는 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드높은 창공을 날아다니는 독수리처럼, 우리 영혼 역시 지상에서 들어 올림을 받으신 분인 그리스도를 향해 날아가도록 합시다.

 

* 변종찬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부학과 고대 · 중세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 이 글은 ‘하느님께 오르는 사다리 - 진복팔단’이라는 제목의 강의 내용을 편집부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4월호(통권 457호), 변종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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