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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미니멀 라이프, 버리기 또는 가치 있게 채우기: 가지려는 자와 버리려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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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15 ㅣ No.1476

[경향 돋보기 - 미니멀 라이프, 버리기 또는 가치 있게 채우기] 가지려는 자와 버리려는 자

 

 

소비 사회의 ‘호모 콘수멘스’

 

오늘날 인간은 ‘소비하는 인간’, 곧 ‘호모 콘수멘스’(Homo Consumens)다.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심리 치료사이던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사람들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기본적인 생물학적 욕망을 위해 소비하는 정도를 지나 탐욕 때문에 물질과 서비스를 지나치게 소비한다.

 

사람들은 일하려고 사는 게 아니라 오로지 소비하려고 일한다. 소비재의 유형과 소비 수준이 우리의 자아를 규정하고 자아 이미지를 생성하며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를 우리는 ‘소비 사회’라고 부른다. 소비 사회에서는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으며,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자동차를 타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지위와 취향, 심지어 성격까지 가늠할 수 있다.

 

누군가가 소비하는 물건과 무관하게 그 사람을 판단할 자신이 있는가? 학생들에게 식빵과 믹스 커피, 양배추, 카레를 사러 시장에 가는 주부 A와 식빵과 원두커피, 양배추, 카레를 사러 시장에 가는 주부 B를 묘사하게 하면, 주부 B보다 주부 A를 나이가 많고 게으르며 뚱뚱하게 묘사한다. 주부 A는 양배추를 삶아 쌈을 싸 먹을 것으로 예상하고, 주부 B는 양배추로 샐러드를 만들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는 믹스 커피와 원두커피라는 두 소비재에 투영된 이미지 때문이다.

 

그뿐인가? 서울 강남의 고급 대형 아파트에 사는 5학년 동수를 생각하자마자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리게 하면 얼굴이 희고 갸름하며 수학 시험을 잘 본 아이를 그린다. 반면, 수도권 외곽 지역의 연립 주택에 사는 동수를 소개하면 얼굴이 둥글고 시험 성적은 좋지 않으나 열심히 뛰어노는 아이를 그린다.

 

논리적인가? 물론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 판단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어떤 소비재에 대해 특정 이미지를 떠올리게끔 세뇌된 사회에 살고 있다.

 

소비 사회의 현상은 산업화의 진전으로 물질이 풍부해지고 시장이 확장되면서 나타났다. 공급이 수요를 추월하면서 기업은 잉여 상품을 팔고자 시장에서 거래되는 경제재의 종류를 끊임없이 늘려야 한다. 음식이나 텔레비전, 자동차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시장에서 사고파는 대상이 아니었던 ‘아름다움’이나 ‘친절함’ 같은 요소까지도 경제재로 만들어 거래한다.

 

‘아름다움’이 예전에는 상당 부분 타고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멋진 옷을 입고 머리를 손질하며 화장과 성형 수술로써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경제재가 되었다. 소비 사회에서 소비해야 할 대상은 무궁무진하다.

 

 

필요 이상으로 가지려 하는 이유

 

우리는 왜 필요 이상으로 가지려 하고 소비하려 할까? 영양 결핍이 아닌 영양 과잉의 시대에 살면서, 쓸데없는 옷들로 평당 천만 원이 넘는 아파트의 옷장을 몇 평이나 채우면서 말이다. 인간의 욕구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생존이나 안전의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다음 단계의 다양한 상위 욕구를 발전시킨다. 배부른 인간에게는 사회적으로 소속감을 느끼거나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 또는 아름다움을 감상하거나 성취감을 느끼려는 욕구 등이 나타난다.

 

여기서 타인의 인정이나 성취감 등은 상대적 욕구이다. 내가 가지고 있어도 상대가 더 많이 가지고 있다면 인정 욕구나 차별화 욕구가 충족되기 어렵다. 심미적 욕구나 정서적 욕구 등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욕구이다. 어제의 아름다움이 오늘날 더는 아름답지 않고, 어제의 새로움이 이제는 새롭지 않다. 20년 전 유행했던 것들을 떠올려 보라.

 

우리는 새로운 무엇이 끊임없이 필요하고 그래서 소비한다. 이런 의미로 따지면 필요한 것 이상으로 소비하는 사람은 없다. 필요한 것이 계속 생길 뿐이다. 캐나다의 경제학자 갈브레이드는 이를 ‘창출된 욕구’라고 불렀다. 20여 년 전에 누가 스마트폰이나 디지털카메라가 필요했겠는가? 소비 사회가 그것을 만들고 갖고 싶게끔 욕구를 창출해 냄으로써, 비로소 오늘날 소비자들이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창출된 욕구에 세뇌된 소비자들은, 고민하고 숙고하며 자아를 계발하기보다 해당 소비재를 소비함으로써 그 재화의 의미를 자신의 자아와 쉽게 동일시해 버린다. 명품 가방이나 멋진 자동차를 산 소비자는 자신의 자아도 화려하다고 착각한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멋진 여행 사진을 누리 소통망(SNS)에 올리는 사람은 아름다운 경치를 소개하기보다 자신의 경제적 여유와 심미적 취향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멋진 옷이나 가방이 없는 사람이 모임에서 자신의 자아에 자부심을 느끼고 당당하기는 쉽지 않다. 입을 옷이 없어 동창회를 포기한 주부의 이야기는 아주 흔하지 않은가? 상품으로 포장된 가짜 자아는 유동적이어서 상품이나 브랜드의 의미와 위상이 변하면 자아도 따라서 변한다. 소비 사회가 설정해 준 가짜 자아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려면 소비자들은 끊임없이 시장이 제시하는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할 수밖에 없다.

 

 

버리려는 사람들: 왜 미니멀리즘인가

 

그런데 왜 미니멀리즘이 등장하는가? 소비 경향으로서 미니멀리즘은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만 소유하고 소비하면서 생활하자는 소비 운동이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에 나타난, 간결함과 단순함을 추구하는 예술이나 문화적 흐름을 나타내는 단어를 일상 소비의 영역에 적용한

것으로, 우리의 삶에서 욕심을 버리고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만을 소비하자는 이념이다.

 

소비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스트(최소 주의자)들은 과도한 상품 소유가 사람들이 참자아를 잊게 만들고 정말로 중요한 것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므로 물질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확대된 1960년대 이후 일찌감치 등장한 이들의 주장이 최근 다시 주목받는 데에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

 

하나는, 환경 문제에 대한 대중적 자각이다. 환경 오염과 기후 변화는 끊임없는 소비가 가져올 부작용을 보여 준다. 지금 북미와 유럽, 그리고 아시아 일부 지역의 선진국들이 누리는 수준의 물질적 부를 지금 도약 중인 제3세계가 모두 공유하려면 일곱 개의 지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중국의 16억 인구와 인도의 13억,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브라질의 4억이 넘는 인구가 가구당 2대의 자동차를 운행하면서 날마다 석유를 소비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 현재 선진국들의 물질 지향적인 소비 사회의 모습이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의 많은 저개발국의 발전 모델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소비 미니멀리즘은 늦었지만, 발전의 개념을 재정립하려는 하나의 운동이다.

 

두 번째는, 소비자들이 타인의 인정이나 정서적 욕구, 차별화 욕구와 같은 고차원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물질의 보유와 소비가 더는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 소비자가 50인치가 넘는 평면 텔레비전과 자동차, 거위 털 점퍼와 명품 가방 한 개쯤 소비할 수 있는 상황에서 물질의 보유와 과시는 예전만큼 효력이 없다.

 

물질적 풍요를 경험한 소비자들은 물건보다는 서비스와 경험을 소비하려고 돈을 쓴다. 자동차 살 돈을 아껴 해외여행을 떠나고, 멋진 가방보다 캠핑용 텐트를 산다. 많은 선진국에서 1인당 국민 소득이 2만 달러를 넘을 때쯤, 해외여행과 캠핑, 아웃도어 활동이 증가하는 이유다. 이 서비스와 경험의 소비는 매우 개별적인 체험이어서 차별화에 효과적이다. 서비스와 경험을 과시할 공간도 충분하다. 누리 소통망(SNS)은 타인과 대면하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도구다.

 

환경 문제에 대한 자각은 명분상으로는 분명하지만 많은 소비자를 움직이게 만드는 효율적인 개념은 아니다. 소비자가 미니멀리즘에 공감하는 이유는 환경에 대한 인식에 눈떠서라기보다는 물질적 풍요가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생존에 충분한 정도의 물질 소비가 가능하게 되면 그 뒤 행복은 상대적이라는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의 주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물질 소비와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물질의 지나친 보유는 그것을 사용하고 지키며 불리는 것에 대가를 요구한다. 집에 쌓인 옷과 가구, 자동차, 심지어 은행에 쌓인 채 갈 곳 없는 돈을 관리하는 일은 몸보다 마음이 고된 노동이다. 그래서 소비자는 물질을 대신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다른 대안을 찾는다. 이로써 물질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자는 소비 미니멀리즘이 호응을 얻는 이유다.

 


생산적 미니멀리즘 :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미니멀리스트들은 적게 소유하고 적게 소비하자고 주장한다. 가령 ‘100개 이하의 물건만 가지고 살아가기’와 같은 제목을 단 체험서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더 적은 것으로 꾸려 가는 의미 있는 삶’(Minimalism: Live a meaningful life)이라는 주제의 저술과 강연으로 400만 명 넘는 독자를 가진 조슈아와 라이언에 따르면 소비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물건을 적게 소유하자는 운동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을 위해 더 많은 여지를 만들어 내자는 운동이다. 더 많은 자유 시간과 열정, 경험, 성장, 기여, 행복감 등등 말이다.

 

이들은 미니멀리즘 실행 방안의 하나로 과거를 돌아보고 놓쳐 버린 중요한 것들을 재인식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제안한다. 예컨대, 새 책을 사기보다 가진 책을 반복해서 다시 읽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소비 미니멀리즘은 이념상으로는 분명하지만, 소비자들이 실제로 어디까지가 ‘최소한의 소비인지’, 무엇이 ‘정말 내게 중요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어렵다. 특히 소비 미니멀리즘을 무조건 소비 축소로 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현재의 선진국 시장은 한 개의 필수품이라는 기둥과 세 개의 선택재라는 기둥이 받치고 있는 지붕과 같다. 극단적으로 필수품 외의 소비가 축소된다면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지붕이 무너질 것이다.

 

소비 미니멀리즘은 ‘무조건적인 소비 축소’보다는 ‘소비의 방향 재고’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지속 가능한 환경과 상생이 가능한 시장을 만들려면 소비자들이 돈을 쓰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가령 새 옷을 사기보다 옷 수선에, 소모적인 용도보다 배우고 성장하고자 하는 서비스에 돈을 쓰는 것이다.

 

오늘날의 소비자들이 상품과 서비스로 포장되지 않은 ‘참자아’를 찾고, 본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필요와 욕구를 깨닫기란 매우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라 소비 사회에 세뇌된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그런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누군가는 소비자들이 자아를 찾고 그들이 가치 있게 생각하며 돈을 써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해 주어야 한다.

 

자신들의 소비 행동의 결과가 본인과 사회, 자연환경, 나아가 후대에 어떤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끼칠지를 생각해 보게 해야 한다. 이에 대한 성과가 없으면 수십 년 전 풍요를 경험한 서구의 일부 소비자들이 주도했던 ‘자발적 간소화’ 운동처럼 소비 미니멀리즘도 다시 일시적 유행(fad)으로 끝나 버릴 수 있다.

 

* 김경자 헨리카 -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부 소비자주거학전공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에서 소비자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소비자 트렌드, 소비자 조사, 소비 심리, 상품 기획 등을 강의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8년 2월호, 김경자 헨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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