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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진리를 찾아서: 소명에 관하여 -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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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22 ㅣ No.1969

[진리를 찾아서 - 소명에 관하여]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

 

 

새로운 한 해를 「천주교 요리문답」에 나오는 첫 질문과 함께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에 관한 것입니다. 문답식으로 구성된 「천주교 요리문답」은 한국 천주교회가 최초로 채택한 공식 교리서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 경험

 

나는 어떤 사람이 될는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 운명에 대해 어떤 힌트라도 얻고 싶었기에, 아버지께 저의 태몽에 대해 여쭤본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때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태몽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이야기는 대충 이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길을 걷고 계셨습니다. 기어가던 지렁이를 주변에 있던 부러진 나뭇가지로 톡톡 치셨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지렁이가 점점 자라 뱀이 되었고, 아버지께서는 계속해서 그 뱀을 툭툭 건드리셨습니다. 그러자 뱀이 이무기가 되었고, 잠시 뒤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고 하네요.

 

아버지께서는 이 태몽을 ‘아들내미를 회초리로 다스릴수록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고 해석했다고 하시더군요. 그 덕분에 아버지의 엄하신 면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비단 태몽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단순하고 굳건한 신앙이 지금의 저를 빚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는 ‘나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 세상에 생겨났을까?’라고 바꿔 물을 수 있겠죠.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나면 내 삶도 조금은 더 분명해질 테고, 그만큼 정리된 삶을 잇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행복을 보장한다고는 할 수 없겠죠. 그 삶이 내게 버거운 것이면 어찌해야 할까요?

 

조금은 힘에 부치더라도 저는 희미한 삶보다는 선명한 삶이 더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만이 아니라 적잖은 사람들이 삶의 모호함 때문에 번민하느니 조금이라도 명확한 삶을 원할 것이라고 어림해봅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세상의 어지간한 이치는 다 알고 계신다고 믿었기에, 한번은 조금 더 직접적으로 제 삶의 이유에 대해서도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너는’이 아니라 ‘사람은’이라고 운을 떼면서 설명하셨습니다. 제 개인적인 존재 이유에 대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어떤 이치였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의 글을 조금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 글은 1967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펴낸 「성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 23항의 ‘원리와 기초’라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우리 주 천주를 찬미하고 공경하고 그분께 봉사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이다.

 

그 외에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사람을 위하여, 곧 사람이 조성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면 그만큼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또 방해가 되면 그만큼 배척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에 대해서, 만일 그것이 우리 자유에 맡겨졌고 금지되지 않았으면, 중용을 지녀야 할 것이니, 곧 우리는 질병보다 건강을, 빈곤보다 부귀를, 업신여김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함을 원하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모든 다른 것에서도,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을 최고 목적으로 더욱더 인도하는 사물만을 원하고 선택해야 한다.”

 

 

둘, 성찰

 

저는 예수회에 입회하고 나서, 아버지께서 어린 제게 들려주신 그 ‘인간의 창조 목적’이 바로 「성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에 나오는 한 대목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회원이 되어서야 그 책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따져 보면, 제 태몽과 관련된 사연이 온전히 실현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용이 되어 날아간다는 게 도무지 어떤 의미인지 모르니 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찬양하고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삶에 투신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보편적 소명을 이루려면 ‘원리와 기초’가 제시하는 길을 더욱 잘 이해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리와 기초’에는 사람이 생겨난 이론적 배경, 곧 ‘원리’와 이것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행동 양식인 ‘기초’가 담겨 있습니다. 원리의 요지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봉사하여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또한 그것이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가 생겨난 이유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것들과 나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주위의 존재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가 영혼의 구원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이런 원리를 구현하도록 이끌어 주는 행동 양식, 곧 실천을 위한 기초가 있습니다. 기초의 요점은 먼저 내 주위의 사물들을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쉽게 단정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기준은 오로지 원리를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원문에 나오는 ‘Tantum quantum’은 도움이 된다면 ‘그만큼’ 이용하는 것이고, 아니라면 ‘그만큼’ 멀리함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중용(中庸)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그만큼’이 가능하게 되려면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내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중용은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마음을 뜻하는 ‘불편심’(不偏心, indifference)이란 의미로도 종종 쓰입니다. 모든 사물 앞에서 내 욕구나 본성에 맞춰 움직이지 않고 나의 창조 목적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불편심의 상태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이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로 더욱더 인도하는 것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택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건강보다 질병을, 부귀보다 빈곤을, 명예보다 업신여김을, 장수보다 단명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건강과 부귀, 명예, 장수 등을 선택하려고 하지 질병과 빈곤, 업신여김, 단명 등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전자들에 집착하면 결국 불편심을 잃게 됩니다. 불편심이 있다면, 후자를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후자는 오히려 우리의 영혼이 빛나도록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셋, 실천

 

하지만 불편심을 가지고 우리의 현실을 보자니 오히려 불편함이 밀려옵니다. 부유한 사람은 그 부유함 때문에 마음이 불편할 것이고, 가난한 이는 그 가난으로 말미암아 현실적인 불편과 불만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정작 중요한 점은 하느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이라는 보편적인 소명과도 관련 있으며, 한 개인에게 주어진 고유한 소명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뜻에서도 드러나듯이, 소명(召命, vocation)이라는 말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담겨 있습니다. 보편적인 소명은 ‘원리와 기초’를 통해서 알더라도 개인의 고유한 소명은 여전히 그 뜻을 헤아려 따라가야 합니다. 여러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원리와 기초’의 행동 양식에 근거를 두어야겠습니다.

 

이렇게 심사숙고하고 식별하여 나아가려는 이가 악을 꾸밀 리 없습니다. 행여 실수할까 두려워할 리도 없습니다. 그는 여러 좋은 선택지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릴 수 있을지를 식별하여 선택하고자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의도와 결정을 존중하고 축복하시겠지요.

 

개인의 고유한 소명을 찾는 데 참고 자료로 쓸 수 있는 정보는 자신의 경험에 관한 기억입니다. 또는 내게 지대한 영향을 준 인생 스승입니다. 무엇을 할 때 가장 생동감이 있었는지를 기억한다면, 그런 일을 통해 보람을 느낄 가능성이 큽니다. 내게 영향을 준 어른은 나의 앞날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수도원 안에서 모범적인 삶을 보여 주신 선배 수도자들을 본받아 나 자신도 그렇게 살려고 소망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올해도 우리는 보편적 소명을 이루려고 열심히 뛸 것입니다. 이 글의 맥락에서 보면 이는 삶에 보람을 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공동선에 이바지되도록 노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반면, 개인의 소명은 바로 보편적 소명이라는 밭에서 키우는 열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새해 농사 잘 지으시기를 기원합니다.

 

* 박종인 요한 - 예수회 신부. 청소년 사목을 맡고 있으며, 서강대학교에서 ‘성찰과 성장’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교회상식 속풀이」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8년 1월호, 박종인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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