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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 사각지대의 감정 노동자: 감정 노동의 시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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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28 ㅣ No.1454

[경향 돋보기 - 인권 사각지대의 감정 노동자] 감정 노동의 시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고객이 조금 전에 구매해 간 제품 세 개 중 두 개가 없어졌다고 매장으로 전화해서 두 시간 동안 전화도 끊지 못하게 하고 욕설과 막말을 했어요. 제품을 포장해 준 직원은 분명히 세 개를 챙겨 드린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점장이 제품을 다시 보내 주기로 하면서 겨우 상황이 종료되었죠.

 

힘든 하루를 마치고 퇴근하려는데, 그 고객이 다시 전화했어요. 딸이 들어오면서 현관에 떨어뜨린 제품을 발견했다며 찾았다고요. 딸 같은 애들한테 너무 막말을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이에요. 그러나 이미 저희는 마음의 상처를 심하게 입었고, 다음 날 직접 찾아와서 안아 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고맙기보다는 오히려 그마저도 사람을 지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례는 우리 주변의 백화점에서 실제로 발생한 일이다.

 

 

감정 노동의 시대

 

‘땅콩 회항’, ‘라면 상무’와 같이 단어 한마디로 상황 설명이 가능한 사건도 있다. 그 외에도 주차장 직원이 따귀를 맞거나, 백화점 직원이 무릎을 꿇은 채 사과하고, 대형 할인점 계산대에서 폭행이 벌어지기도 한다. 시청 민원실에서는 협박이 빈번하고, 은행 창구에서는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다. 보상금을 빌미로 보험사의 보상 담당 직원을 감금하거나 폭행하는 무시무시한 일도 벌어지고, 간호사에게 환자라는 핑계로 성희롱을 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 나열한 몇 가지 사건이 남의 일처럼 여겨진다면 당신은 정말 다행스럽게 살고 있는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린다.

 

‘감정 노동’(emotional labor)이라는 말은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생소하지 않다. 필자는 이 단어가 그냥 학술적으로만 회자되는, 마치 ‘양자 역학’과 같은 어려운 물리학의 단어처럼 일상생활에서나 기사에서는 접하기 힘든 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앞에서 확인한 것과 같이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감정 노동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감정 노동은 미국의 여성 사회학자인 러셀 혹쉴드의 저서 「통제된 마음」(Managed Heart)에서 처음 사용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학자는 감정 노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상대방인 소비자가 친절함과 보살핌을 느낄 수 있도록 노동자의 표정을 관리하고, 실제 감정과는 다르게 조직이 요구하는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는 등 자신의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노동.’

 

다시 말해, 인간의 감정을 노동의 수단으로 활용하게 되는 새로운 유형의 노동을 구분해 낸 것이다. 평상시에 일을 하면서 경험하는 스트레스나 감정의 소진이 아니라 정해진 표현의 규칙에 따라 일정하게 감정을 통제하거나 조절해야 하는지가 판단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감정 노동에 대한 연구가 있었기에 감정 노동 문제가 비단 우리 사회의 일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양자의 차이를 짚어 보자면, 외국의 경우에는 감정 노동의 원인과 결과를 발견하거나 구조를 분석하는 등 연구와 이론적인 검증이 중심이 된다. 그 반면, 우리나라는 감정 노동과 관련한 사건과 피해가 더욱 부각된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외국과 우리나라는 앞에 소개한 부당한 상황에서 개인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기업과 조직은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어떻게 예방하는지, 그리고 국가의 제도는 어떻게 구축되어 있는지 등에서 큰 차이가 있다. 곧, 사회적인 인식이나 보호 체계, 기업과 조직의 대응 등에서 우리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우리 사회에서 감정 노동이 왜 중요한가

 

우리 사회는 매우 빠른 성장을 거듭해  왔다. 불과 60여 년 전까지는 농업이 생활과 경제의 중심이었다. 이후에 중화학 공업을 필두로 한 제조업이 뒤를 이어 한국 경제의 핵심이 되었지만 갈수록 그 비중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201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통계 자료에 따르면, 서비스업 총고용 비중이 69.7%나 될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를 차지하게 되었다.

 

서비스업은 감정 노동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서비스업의 증가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거나 조절하면서 일을 하는 사회 구성원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뜻이다. 그중에서도 감정 노동과 관련한 업종에서 일하는 대다수는 여성이고, 그나마 좋은 일자리도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아웃소싱’(외주화)의 대표적인 형태인 ‘콜 센터’(전화 상담실)직원, 백화점과 대형 할인점에 파견되거나 제조업체 소속으로 계약된 판매원. 계약직으로 채용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개인 사업자로 분류되어 노동법 보호의 사각지대에 몰려 있는 보험 설계사. 학습지 교사. 골프장 캐디…. 그리고 요양 보호사와 사회 복지사처럼 사적 돌봄 영역에서 일하는 직군에 이르기까지 감정 노동과 관련한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열악한 상태다. 이는 사회 양극화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감정 노동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감정 노동과 관련한 문제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부상하였기 때문이다. 장기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든 경기 상황과 세계화 등으로 말미암아 기업 간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진다.

 

서비스 업종을 통해 공급되는 재화나 서비스는 그 품질이 대동소이한 경우가 많다. 예컨대, 저축은 어느 은행에서나 동일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고, 무선 전화나 인터넷도 생산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품질이 비슷하다. 할인 판매점이나 백화점에서 팔고 있는 물건도 성능은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자나 전략을 수립하는 전문가들은 물건을 더 많이 팔거나 가입된 상품(금융이나 통신 서비스)을 유지하고자 차별화된 서비스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서비스는 ‘친절’로 나타난다고 판단하였다. ‘손님은 왕’이라는 오래된 표어나, ‘고객이 짜다고 하면 짜다.’라는 웃지 못할 식당의 안내문까지, 우리의 생활 속으로 침투한 과도한 친절은 어느새 사회적인 문제로 이어져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근로 환경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전국에서 감정 노동을 하고 있는 임금 노동자는 대략 740만 명으로 전체 임금 노동자의 42%에 이른다. 이 통계가 2011년도 조사 결과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전문가들은 현재 전국의 감정 노동자 수를 대략 800만 명으로 추산한다. 서비스업이 밀집한 서울에서만 약 260만 명이 감정 노동 관련 업종에서 일을 하고 있다(2017년 서울시 보도 자료).

 

2016년도에 실시한 연세대학교 윤진하 교수 연구 팀의 자료에 따르면, 감정 노동자가 느끼는 자살 충동은 전체 노동자의 평균에 비해 남성이 4.6배, 여성이 2.8배 높다. 최근에는 감정 노동으로 말미암은 우울증과 적응 장애를 산업 재해로 인정한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신체적인 발병에서도 감정 노동 관련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이 뇌 또는 심혈관 질환에 걸리는 비중이 9.8%로 전체 평균인 7.7%보다 높았다(2012년도 산업 재해 분석 자료).

 

이와 같이 규모의 측면에서나 정신적, 신체적인 건강의 측면에서 볼 때, 지나친 감정 노동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파장은 상당하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과도한 감정 노동을 예방하거나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소비자와의 관계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감정 노동 보호를 위한 노력과 성과

 

우리나라에서 감정 노동과 관련한 연구와 논의는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증가하였다. 그 이전에는 ‘그저 참고 견뎌야 하는 일’로 여겨서 개인적으로 문제를 덮어 버리는 경향이 컸지만, 점차 문제의 심각성이 사회 곳곳에서 제기되면서 문제 해결의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시민 단체와 노동조합, 소비자 단체, 종교 단체(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도 참여하고 있다.)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감정 노동 전국 네트워크’를 꼽을 수 있다. 이 네트워크는 감정 노동 보호와 관련한 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법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실태 조사를 비롯하여 입법 촉구 서명 운동, 다양한 캠페인, 공모전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분위기를 환기하면서 소비자의 행동 변화를 요구하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중앙 정부가 뜸을 들이고 있는 사이, 지방 정부가 먼저 움직였다. 2016년 1월에 서울시(의회 입법안)가 전국 최초로 감정 노동 보호 조례를 만들어서 구체적인 보호 방안과 모범 사용자로서의 시의 역할과 책임을 천명하였다. 서울시를 시작으로 경기도, 안양시, 광주광역시, 전주시, 수원시 등에서도 차례로 유사한 조례가 제정되어 지역별로 감정 노동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금융 관련 다섯 개 법률에 감정 노동자에 대한 보호 조항 삽입이 통과되어 금융 기업에게 해당 노동자를 보호할 의무를 부과하였다. 이번에 출범한 새 정부도 ‘100대 국정 과제’에 감정 노동 보호법안의 제정을 포함하여 발표한 바 있다.

 

서울시는 시와 산하 기관이 지켜야 할 ‘공공 부문 감정 노동 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개발하여 배포하였다. 고용노동부에서도 전국에 배포할 가이드라인을 제작하는 등 다양한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감정 노동 문제의 해결을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부 기업에서는 전화 상담원이 욕설과 폭언을 들었을 때 ‘전화를 먼저 끊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고, 부당한 민원의 제기에 대해서 직원을 먼저 보호하는 방침도 수립하였다. 감정의 소진으로 지친 직원을 대상으로 ‘힐링’ 프로그램이나 심리 상담을 지원하는 기업도 늘었다. 이는 기업이 내부 고객인 직원을 합리적으로 보호하고 피해를 예방하는 제도를 마련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기업에 앞서 제도를 도입한 기업은 직원의 자존감을 높이고 이직률을 낮추어 직원의 전문성을 향상시키는 선순환이 가능하며, 결국 기업의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와 같은 선순환의 구조가 구체적으로 확인될수록 더 많은 기업과 기관이 감정 노동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피해를 예방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감정 노동으로 지친 많은 노동자가 마땅한 예방과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숨어 있다. 대변해 줄 수 있는 단체도 부족하고, 언제 그만두라고 할지 몰라 혼자 노심초사하며 ‘진상 손님’을 상대하고 있다.

 

큰 물줄기는 마을을 관통해서 흘러갈 수 있지만 마을 곳곳에 작은 물줄기가 닿으려면 세세한 곳까지 조금 더 길고 깊게, 오래 흘러야 한다. 법과 제도는 물길이 더욱 깊게 만드는 도구가 되어야 하고, 시민의 관심과 공동체라는 인식은 물줄기에 힘을 더해 주는 바람이 되어야 한다. 합당한 서비스를 주고받는 ‘제대로 된 감정 노동의 시대’가 오길 기대한다.

 

* 이정훈 - 서울노동권익센터 연구위원으로 감정노동보호팀장을 맡고 있으며, 정부의 공공 부문 정규직화 중앙컨설팅단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노사관계전문가과정 주임교수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7년 12월호,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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