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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제10권 인간, 하느님을 담을 수 있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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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25 ㅣ No.345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10권] 인간, 하느님을 담을 수 있는 존재

 

 

밀라노 회심으로 「고백록」은 정점을 지났고 아우구스티노의 여울졌던 감정은 고요한 흐름으로 바뀐다. 그 뒤 10여 년이 흐르고 히포의 신자들은 자기네 주교한테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져 왔다. “당신의 과거는 그랬다 치고 지금의 당신은 어떤 심경이오?” 그래서 「고백록」 제10권은 세태를 관찰하고, 자기 정신을 분석하며, 자기 양심을 성찰하고 하느님을 탐구해 온 한 인간의 여정을 돌이켜 “진리시여, 어디인들 당신께서 저와 함께 걷지 않으신 적이 있습니까?”(10.40.65)라고 차분히 말씀드리는 글이다.

 

“제가 누구였던가를 두고서가 아니라 제가 아직도 누군지를 두고 고백을 하는 이 시점에서 제가 누구인지, 이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10.3.4). 당신께서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바를 제 안에서 발견하고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께서 마음 아파하라고 가르치시는 바를 제 안에서 발견하고 아파했으면 좋겠습니다”(10.4.5).

 

나이 든 독자가 「고백록」 제10권 후반부(28.39─39.64)를 읽노라면 젊어서 읽었을 「준주성범」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 요한 사도가 경고한 삼중의 욕망,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속의 야심”을 어떻게 이겨 내는 중인지 참 솔직하고 세세하게 풀어 낸다. 그래도 가장 힘든 것은 학자의 호기심과 성직자의 명예욕이더라는 자백은 온전한 정화에 이르는 “오직 한 가닥 희망, 하나의 믿음, 하나의 든든한 언약은 당신의 자비뿐입니다.”(10.32.48)라는 탄식으로 끝맺는다.

 

 

‘무척이나 하느님을 탐하는’ 인간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 동시대 코르넬리우스 얀센이 가톨릭에 퍼뜨린 염세주의는 원죄론, 예정설, ‘믿음으로만’ 또는 ‘은총으로만’ 같은 표어를 아우구스티노의 저술에서 끄집어냈다. 이 때문에 교부는 인간 신체와 성생활, 인간 존엄성과 자유 의지, 인생의 현세적 차원과 역사적 사명에 관해 비관론을 퍼뜨렸다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고백록」 제10권의 전반부(6.8-27.38)를 새겨 읽는 독자라면 그의 사상이 참으로 현실감 있는 인간론일뿐더러 아마도 철학사상 가장 위대한 ‘인간 예찬론’이라는 견해에도 공감하리라 본다.

 

아우구스티노의 평생 작업은 하느님을 알고 인간을 알아 가는 탐구였다. 인간이 참으로 위대한 ‘수수께끼’(4.4.9)이자 바닥없는 ‘심연’(4.14.22)임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죽을 운명을 메고 다니며, 자기 죄의 증거와 당신께서 오만한 자들을 물리치신다는 그 증거를 짊어지고 다니면서도”(1.1.1) ‘하느님 더구나 삼위일체를 닮았고’, ‘하느님을 파악하고 사랑하며’, ‘하느님으로 채워지기까지는 만족을 모르고 마냥 행복을 추구하는’ 신비로운 존재로 보였다.

 

“존재하는 무엇이든지 당신 없이는 존재 못하는 까닭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든 당신을 담기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까?”(1.2.2)라는 물음이 거기서 나오고, ‘하느님을 담을 수 있는 존재’(homo capax Dei)라는 인간 정의를 아우구스티노가 철학사에 남겼다. 세계를 ‘피조물’로 정립하면서 「고백록」 첫 구절부터, “사람 곧 당신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가 당신을 찬미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 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1.1.1)라면서 말이다.

 

인간이란 하느님에게서 오고(작용인), 하느님께 향하는(목적인)존재임을 알아보았다. 그럼 왜 “우리 마음은 애초부터 안달하며 존재를 시작하였을까?” 먼지만도 못한 인간이 애초부터 무한한 선, 영원한 삶, 절대 행복을 탐할 만큼 야심에 찬 까닭이 무엇일까? “당신께서는 온갖 탈법한 저의 쾌락에다 쓰디쓴 거리낌을 뿌리시면서 제가 거리낌이 들지 않는 쾌락을 찾아 나서게 만드셨습니다”(2.2.4). 이러한 원망대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하찮은 행복에마저 초를 치시고, 죄와 타락, 유한성을 자꾸 들여다보게 만드시는 연유가 무엇일까?

 

모친과 함께 겪은 오스티아의 신비 체험(9.10.23-26)은 “인간은 무척이나 하느님을 탐한다.”( 「서간」 137.3.12)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아우구스티노는 먼저 주위를 둘러보고 삼라만상에서 창조주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세계라는 덩어리에게 저의 하느님에 관해서 묻자 제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니다. 오히려 그분이 나를 만드셨다.’ 바다와 심연, 생혼이 있는 길짐승들에게 물었으나 ‘우리는 너의 하느님이 아니다. 우리 위에서 찾아라.’ 하늘, 태양, 달과 별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도 네가 찾는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10.6.9). 이런 대답을 듣고 “나는 바로 내 영혼을 통해 그분께로 올라가겠다, 내 영혼의 머리 위에 계시는 분을!”(10.7.11)이라고 다짐하며 “이성적 영혼 위에 있는 불변의 본성이 곧 하느님”( 「참된 종교」 31.57)이라는 신념이 생겼다.

 

 

‘기억’, 하느님을 만나 뵙는 지성소

 

인간은 하느님을 발견함으로써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분석함으로써만 하느님을 인식한다. 무한하고 영원하며 절대 존재인 분이 창조한 영혼이기에, ‘무한’과 ‘영원’과 ‘절대’의 잔상이 영혼에 새겨져 있으리라는 직감이다.

 

제10권 전반부에서는 이 기억을 분석하여 하느님께 다가가는 사다리를 찾아낸다. ‘기억’이라면 그에게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 말하는 ‘지성’ 자체를 가리키기도,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맞닿아 있는 ‘존재의 뿌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기억의 위력, 바닥 모르고 한정이 없는 그 다면성, 바로 이것이 영혼이고 바로 이것이 나 자신입니다”(10.17.26).

 

진선미의 여러 가지 경험을 두고서 긍정 판단을 내리는 능력도 또한 기억이다. “그것들이 언급될 적에 ‘그렇다. 참말이다.’는 말을 제가 했는데, 이미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면 어디서 혹은 어째서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까?”(10.10.17)

 

그리스도교의 가장 심오한 교리를 사변적으로 확립한 아우구스티노의 「삼위일체론」(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2016년)도 ‘기억’을 매개로 한다. 삼위일체 신비는 사후에도 영원히 탐구해야 할 대상일 텐데 무슨 수로 이 교리에 접근할지 궁리하던 교부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인간의 ‘기억’을 분석하여 모습의 원형인 하느님의 ‘구조’를 추정해 보겠다고 나섰다. ‘기억하는 나’, ‘기억되는 나’, ‘그 사이에 오가는 내 기억’이 온전히 하나면서도 구분이 되더라는 착상이다.

 

“기억의 저 능력은 참 크기도 합니다. 너무 큽니다. 광활하고 무량한 지밀입니다. 과연 누가 그 밑바닥에까지 이른 적 있습니까? 엄연히 제 정신의 능력이고 제 본성에 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저 자신마저도 저를 전부 못 차지합니다”(10.8.15).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 뵙는 지성소가 기억이라는 이 심연이었다. “어디서 당신을 만나 뵐 수 있습니까? 제 기억 밖에서 당신을 뵙는다면 당신을 제가 기억 못 한다는 말입니다. 또 당신을 제가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면 어디서 어떻게 당신을 만나 뵙겠습니까?”(10.17.26)

 

현대 천문학 개념으로 130억 년의 지름을 가진 우주도 인간 의식 속에서는 한낱 동그라미일 뿐 지성은 그 동그라미 바깥에 서서 바라본다. 무량하고 영원한 하느님마저도 개념상으로는 동그라미에 가두고서 신학을 편다. 그래서 교부는 다짐한다. “저는 기억이라고 불리는 저의 이 힘마저 통과해 넘겠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저의 영혼을 통해서 당신께로, 까마득하게 멀리 제 위에 머무시는 당신께로 오르면서 기억이라 불리는 저의 이 힘마저 통과해 넘겠습니다”(10.17.26).

 

사람이 사물을 사유하면서 자기가 인식 주체로서 지금 사물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데 교부는 인간 의식이 모든 인식 대상을 부단히 초월하면서 절대 지평을 향해 시선을 확대시키는 어떤 추동력을 ‘기억’이라고 부른다(10.22.32-23.34).

 

“제가 당신을 배워 알게 된 그것으로부터 당신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진리를 찾아 만난 곳에서 진리 자체이신 저의 하느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당신을 배워 알았을 그것으로부터 당신은 저의 기억 속에 머물러 계시며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을 두고 기쁨을 느낄 적마다 거기서 당신을 만나 뵙습니다”(10.24.35).

 

이처럼 난해한 인식론적 사색을 개진하면서도 한때 자력 구원과 진리 터득을 자신하던 지성인이 지금은 소박한 그리스도교 신자요 설교가로 돌아와 있음을 끝기도가 잘 보여 준다. “좋으신 아버지, 당신께서 저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당신 외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셨고 저희 불경한 자들을 위해서 그를 넘겨주기까지 하셨습니다! 당신의 저 외아드님,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10.43.69-70).

 

* 성염 요한 보스코 - 「신국론」과 「삼위일체론」을 번역하고, 최근 「고백록」을 펴냈으며, 지금도 지리산 자락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원전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1986년 교황청립 살레시오 대학교에서 라틴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교황청 한국대사(2003-2007년)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7년 11월호, 성염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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