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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64: 밤하늘의 작은 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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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03 ㅣ No.474

[추기경 정진석] (64) 밤하늘의 작은 별빛


로마에 울려 퍼진 ‘카디널 니콜라오 정진석’

 

 

- 추기경 서임식에서 베네딕토 16세가 정진석 추기경 머리에 비레타를 씌워 주고 있다.

 

 

2006년 3월 24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새 추기경 서임 예식이 거행됐다. 로마의 아침은 조금 쌀쌀했지만, 날이 밝자 이내 포근한 느낌이 드는 상쾌한 날씨가 됐다. 추기경 서임 미사가 진행될 성 베드로 광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인파가 몰려들었다. 각국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 국기를 들고 성가를 부르며 입장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유럽 등 각 대륙에서 온 순례객 대열에 한국 신자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한국인 순례단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현수막과 태극기를 연신 펄럭여 외신과 세계 각지 순례객의 이목을 끌었다. 한국인 순례단 중에는 평신도뿐만 아니라 신부도 있었는데, 그는 유학생 신분으로 37년 전 김수환 추기경 서임 미사 때도 참석했다. 그는 세월이 흘러 두 번째 추기경을 맞는 감격과 더불어 이 감격의 순간에 함께할 수 있는 한국인이 많아진 데 매우 놀라며 감격의 눈물을 훔쳤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광장에는 각 나라의 국기가 펄럭이며 축제의 장을 방불케 했다. 광장 앞 대형 화면은 주인을 기다리는 열다섯 개의 진홍색 주케토를 연거푸 비췄다. 다양한 나라에서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새 추기경이 임명되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광장은 한국인 순례단 700여 명을 포함해 1만여 명의 축하객들로 가득 찼다. 

 

오전 10시가 지나자 예식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성 베드로 광장에 울렸다. 이어 성가대의 웅장한 음악이 광장을 메웠다. 설레는 마음으로 앉아 있던 신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얼마 후 정진석 추기경이 새 추기경단과 함께 광장 사이로 입장했다. 신자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큰소리로 환호했다. 미사 도중 엄숙한 분위기로 소리를 내는 것은 상상도 못 했던 예전에 비해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고 정 추기경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환호와 함께 자신들이 들고 있는 국기를 흔들며 새 추기경단을 맞았다. 

 

새로 임명된 15명의 각국 추기경은 순교자의 피를 상징하는 진홍색 수단 위에 하얀 중백의를 입고 있었다. 정 추기경은 ‘경축 정진석 추기경 서임’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높이 치켜든 우리나라 신자들을 보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한국 신자들은 37년 만에 한국인 두 번째 추기경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한다는 자긍심에 눈시울을 붉혔다. 이윽고 ‘의로운 사람들은 노래하라’는 장엄한 노래와 함께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등장했다. 교황의 시작 기도가 끝나고 새로 서임된 추기경들의 명단이 발표됐다. “카디널 니콜라오 정진석.”

 

- 추기경 서임 후 한국에서 온 신자들에게 손을 들어 화답하는 정진석 추기경. 가톨릭평화신문 DB.

 

 

정 추기경이 여덟 번째로 호명됐다. 한국 신자들은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기쁨의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새 추기경 대표가 교황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교황의 강론이 이어졌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훈시로 추기경들에게 당부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체험함으로써 신자들에게 모범적인 모습을 권고하였듯이, 새로 서임된 추기경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던 그 모습을 본받아 신앙 공동체의 성장과 복음 선포와 교리 교육, 어려운 이들에 대한 배려 등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높이십시오.”

 

이어서 새 추기경들의 신앙고백과 교회에 대한 충성 서약이 진행됐다. 교황은 라틴어로 “추기경을 나타내는 진홍색은 추기경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표지로 자신을 용맹하게 헌신해 그리스도교 신앙과 평화, 하느님의 백성, 가톨릭 교회의 자유와 복음 선포를 위해 헌신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훈화한 뒤 15명의 새 추기경 한 명 한 명에게 진홍색 주케토(주교 이상이 쓰는 낮은 반구 모양의 머리 덮개)와 비레타(각진 모자)를 씌워 주며 포옹했다.

 

추기경 석에 미리 앉아 있던 김수환 추기경은 마치 친동생이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상을 받는 모습을 바라보듯 흐뭇한 미소로 정 추기경을 바라봤다. 김 추기경은 서임 발표 당시가 떠올랐다. 서울에서 교황청의 소식을 접한 김수환 추기경은 “이제야 발을 뻗고 잘 수 있겠구나” 하며 안도했다.

 

새 추기경들은 로마에 있는 성당 중 한 본당의 명의 사제로 임명을 받았는데, 정 추기경은 로마 보체아에 위치한 ‘루르드의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 성당’의 명의 사제로 임명됐다. 

 

정 추기경은 오후 4시 30분 바티칸 주재 추기경과 주교, 한국인 순례객 등을 만나 인사를 주고받는 자리로 이동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한국 순례객들은 정 추기경에게 축하 인사와 함께 성가 등으로 진심 어린 축하의 뜻을 전했다. 정 추기경도 상기된 표정으로 축하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의 기도를 바쳤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던 다음날 25일 오전 10시 30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정 추기경과 새 추기경들과 함께 서임 축하 미사를 공동 집전했다. 강론에서 교황은 “친애하는 추기경님들,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의 색깔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붉은색은 인류를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라며 새 추기경들의 임무와 의무를 강조했다.

 

정진석 추기경 서임식 참가를 위해 로마에 온 한국 순례단이 태극기와 추기경 문장, 추기경 서임 축하 현수막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미사 후 로마에 있는 ‘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은 축하연을 열었다. 교민 신자 등 500여 명을 초대해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 탄생을 다 함께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는 일본 출신으로 교황청 이주사목평의회 의장을 맡고 있는 후미오 하마오 추기경도 참석했다. 비슷한 연배인 정 추기경과 후미오 하마오(76) 추기경은 같은 해인 1970년 주교로 서품됐고, 아시아 주교회의에 각각 한국 대표와 일본 대표로 참석하면서 특별한 우정을 쌓아 왔다. 정 추기경은 로마 한인본당이 전한 축하 꽃다발을 후미오 하마오 추기경에게 다시 전달하며 두 사람 간의 우정을 과시했다. 교민 신자들은 큰 박수로 두 추기경을 환영했다.

 

곧이어 로마 유학 사제와 수녀 등으로 구성된 풍물패의 공연이 열렸다. 공연을 관람하던 정 추기경은 풍물패에게 다가가 어깨춤과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돋웠다. 기쁨의 한마당이 펼쳐진 뒤 신학원 성당으로 자리를 옮긴 사제와 수도자, 교민들은 다 함께 감사 미사를 봉헌했다.

 

“오늘날 몸과 마음이 힘든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그들에게 영혼의 평화, 마음의 평화를 주는 밤하늘의 작은 별빛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주변 사람에게 작은 별, 작은 빛처럼 마음의 평화를 주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정 추기경의 강론에 신자들은 또다시 박수로 화답했다. 서임식 전날 정 추기경은 기자들에게 “영예로운 자리임이 틀림없지만 그 영예의 기쁨이 며칠을 가겠어요? 그 이후에는 무거운 책임감이 저를 짓누를 것입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 추기경은 서임 발표 며칠 후 사석에서 “두렵다”고 여러 번 말했다.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가 너무 지나쳐 어깨가 무겁고 두려운 감정조차 든다는 솔직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날 한인 신자들 앞에서의 강론은 사뭇 달랐다. 두려움 속에서 깊은 묵상을 한 끝에 깨달은 주님의 뜻이었다. 작은 별빛이 되겠다는 확고한 다짐을 신자들과 하느님 앞에 맹세하는 정 추기경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9월 3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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