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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유럽 수도원 기행: 마레쭈 수도원(Abbaye Mareds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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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21 ㅣ No.591

[유럽 수도원 기행] 마레쭈 수도원(Abbaye Maredsous)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을까, 아니면 위가 어떻든 풀뿌리 운동을 통해 아래에서 전반적으로 의식을 높여야하는 걸까. 이상적이라면 위아래를 따질 일이 아니지만, 사회나 교회를 이끌어갈 훌륭한 지도자가 더 중요한 것이 현실이다. 아무튼 깨끗하고 투명한 지도자가 배출되도록 사회 구성원의 전반적 수준이 올라가면 좋겠다. 우리는 윗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아랫물이 어떻든 상관없이 제멋대로 놀며 물 전체를 오염시켰던 전직 대통령과, 아래로 향하는 물꼬 자체를 막아버린 전전직 대통령이라는 반면교사를 목격했다. 한편 풀뿌리에서 올라 온 천만 촛불의 힘으로 새로운 지도자를 뽑았다.

 

 

변화의 기로에 선 수도공동체

 

슈브또뉴 수도원을 떠나 방문한 둘째 벨기에 수도원은 마레쭈(Maredsous). 슈브또뉴보다 남쪽인 이쪽 동네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이다. 미리 방문한다고 연락을 해놓고도 많이 불안했다. 네덜란드어 지역에서는 내가 못 알아들을지언정 내 독일말은 알아들었는데 다행히도 나를 맞이하여 안내해 준 분이 이곳 아빠스였다. 독일말을 하는 베르나르(Bernard) 아빠스는 처음 만나자마자 대뜸 말을 했다. “어서 짐 풀고 내려와. 수도원 별장에서 그릴파티 할거야. 저녁기도는 미리 당겨서 바쳤어.” 수도원을 둘러보기도 전에 차로 약 40분 정도 떨어진 별장으로 이동했다. 아빠스가 손수 운전한 차에는 아프리카 출신 수도형제 세 명이 함께 탔다. 그 중 둘은 르완다에 있는 분원 출신이었고, 한 형제는 우간다에서 온 형제였는데 혼자 영어권 출신이라 아빠스가 자주 농담을 걸었다. 우간다 형제는 이참에 나를 따라서 자기도 놀러나 다니겠다며 아빠스의 농담을 받아치기도 했다. 저녁식사 시간에는 아빠스가 형제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포도주를 종류별로 하나하나를 설명하며 따라주고, 후식으로 먹을 까망베르 치즈를 구워오기도 했다. 그러면서하는 얘기, “아타나시오, 넌 어떻게 독일에서 살 수 있냐. 우린 따뜻한 음식을 먹는데. 저녁식사를 차가운 음식(검은 빵과 치즈)으로만 해결하는 독일 사람들은 우리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유럽의 여느 수도원들이 그렇듯, 마레쭈 수도원도 지원자가 끊겨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마레쭈 수도원이 속한 성모영보 연합회(Congregatio Annuntiationis B.M.V.)는 우리 연합회만큼이나 아프리카에 진출해 있어서 그런지 아프리카 형제들이 공동체의 빈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우리 연합회보다 훨씬 더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놀랍게도 아프리카 출신 형제가 연합회의 모원인 이 수도원의 부원장을 맡고 있었다. 아프리카 형제들과 벨기에 형제들 사이의 벽이 보이지 않는 점도 특별했다. 서로 스스럼 없었고, 자연스러웠다. 우리 연합회였으면 아프리카는 여전히 도와줄 대상이지 그들 중 누가 유럽 수도원의 장상이 되는 걸 용납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특히 베르나르 아빠스가 큰 역할을 한 듯 했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왜관에 골롬반 수사 있지? 우리 연합회 수도원들이 아프리카 중부에 좀 있어서 토고 악방 수도원과 교류가 있는데, 골롬반 수사에게 관심을 두었지. 왜관에 가지 않았으면 우리가 데려 오려고 했는데. 우리도 금속공예실이 있으니까. 많이 아쉬웠지.”

 

 

 

고명한 아빠스들과 유명한 특산물

 

마레쭈 수도원의 전통 가운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빠스들이 돋보인다. 보이론 연합회의 창립자 중 하나인 플라치두스 볼터(Placidus Wolter, 베네딕도회 총연합의 초대 수석 아빠스인 힐데브란트(Hildebrand de Hemptinne), 1900년대 초반 베네딕도회가 배출한 뛰어난 저술가이자 영성가인 복자 골룸바 마르미옹(Columba Marmion). 마레쭈 수도원에는 고명한 아빠스들 말고도 유명세를 떨치는 특산품이 있다. 수도원 목장에서 만든 치즈와 듀벨(Duvel)이라는 회사가 수도원의 허락을 받아 마레쭈(Maredsous)란 이름으로 생산하는 세 종류의 맥주(에일맥주, 마레쭈 블론드(Blonde 6%), 마레쭈 브라운(Bruin 8%), 마레쭈 트리플(Triple 10%))가 그것이다. 이 맥주는 한국에서도 유명한데, 간혹 상표를 마레드소우스라고 읽는 사람들이 있다. 방문객들은 잘 꾸민 수도원 방문 센터에서 수도원 안내 영상을 시청하고, 성물방에 들러 구경한 뒤, 이동식 가판대에서 판매하는 젬멜(Semmel, 소시지가 든 빵)을 먹거나 식당에서 식사를 시켜 먹는다. 아니면 비어가르텐(Biergarten)에 앉아 세 종류 맥주를 한꺼번에 맛 볼 수도 있는데 수도원에서 만든 치즈가 안주로 곁들여 나온다. 벨기에는 인심이 후해 어디가나 맥주를 시키면 덤으로 치즈를 준다. 마지막으로 카페에 들러 커피와 케익을 후식으로 먹고, 입구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성당을 구경하러 가면 수도원 관광이 끝난다.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아빠스한테 연간 방문객 숫자를 듣고 너무 놀라서 어딘가에 적어놨는데, 그 쪽지를 잃어버려 정확한 숫자는 기억나지 않는다.

 

 

웅장한 성당과 흥미로운 전례

 

성당을 비롯한 수도원 전체적인 외관은 신고딕 양식으로 어마어마하게 크다. 봉쇄구역 내부도 천장이 꽤 높아서 내가 머물던 3층에서 수도원 안정원을 내려다보면 아찔했다. 수도원 내부에는 수도원이 보이론 연합회에 속해 있을 당시에 그린 보이론 화풍의 그림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수도원 전례가 흥미로웠다. 그레고리오 성가 부흥 운동이 활발했던 만큼이나 오히려 빠르게 잊히는 곳이 프랑스어권과 이탈리아 지역인데, 이곳 수도원도 떼제 공동체에서 부르는 노래가 수록된 전례서를 사용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죠셉 젤리노(Joseph Gelineau SJ) 신부와 쟈끄 베르띠에(Jacques Berthier)의 곡들도 기도책에 들어 있었다. 브뤼셀에서 화성학 교수로 교회 음악을 가르쳤던 성가대 담당 신부의 네덜란드어가 섞인 독일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정확하진 않지만, 곡을 그대로 가져온 것은 아니고 공동작업을 한 것 같다. 프랑스어 특유의 부드러우면서 콧소리가 섞인 발음과 어울리게 2-3성부로 시편을 부르도록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작곡된 곡을 보니 조금 묘했다. 독일에서는 오히려 교회선법을 재발견하고 더 강조해서, 미사 화답송집이나 시간전례서들이 다들 교회선법을 따른다. 그러고 보니 이 년 전에 방문한 이탈리아 산타 쥬스티나 수도원에서 희한한 선법을 차용하여 부르던 시편성가가 생각났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 정서에 맞는 가락, 우리말에 맞는 선율이 무엇인지 많은 고민을 하게 했다.

 

 

다정한 아빠스, 우애 좋은 공동체

 

수도원을 떠나기 전날, 베르나르 아빠스가 같이 산보나 하자며 나를 불렀다.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나지막한 산 정상에 올라갔는데 오래된 성이 있었다. 당신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러니까 아주 먼 조상이 여기서 기사(騎士)로 복무했다고 들었는데 당신도 여기 처음 와 본다고 했다. 함께 산 정상에서 경치를 구경하고 아랫마을로 내려가 맥주 한 잔 하면서 우리 아빠스의 안부를 묻는다. “너희 얼마 전에 아빠스 새로 뽑았지? 괜찮은 사람이니?” “응, 2013년에 새로 뽑았어.” “2013년? 아직 신참이네.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닌데 나는 벌써 15년차야. 2002년부터 아빠스를 하고 있지. 이번에 전세계 아빠스 회의하러 가면 너희 아빠스에게 네 안부 전해줄께.” 나중에 박 블라시오 아빠스께 안부인사 잘 받았다고 전해 들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작년 수석아빠스를 새로 뽑는 자리에서 독일어권 장상들이 베르나르 아빠스를 많이 밀었던 모양이다. 결국 미국인 그레고리 폴런(Gregory Polan) 아빠스가 수석아빠스로 뽑혔지만.

 

 

이날 끝기도 끝나고 베르나르 아빠스가 집무실을 구경시켜주었다. 우리 연합회 창립자인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Andreas Amrhein)가 집무실 벽화를 그렸다고 했다. 독일 보이론 수도원 소속이던 암라인 신부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로서 선교사라는 두 개의 이상을 꿈꾸었지만, 아빠스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더 수도승답게 살도록 갓 설립된 마레쭈 수도원으로 보낸다. 이후 암라인 신부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을 창설했고, 마레쭈 수도원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벨기에 지역의 수도원들과 함께 다른 연합회를 결성하게 된다. 당시의 아빠스는 프랑스 솔렘(Solesmes)의 정신을 독일에 심은 보이론 연합회 창설자 마우루스 볼터. 지도자와 구성원이 하나의 고민을 두고 서로 다른 결정을 한다 해도 결론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다행히도 지도자는 사리분별이 밝은 이였고 암라인 신부의 이상도 꽤 수준이 높았다. 연합회 초창기 암라인 신부가 상트 오틸리엔을 떠났을 때 우리를 지탱해 준 곳이 보이론 수도원이었다. 마찬가지로 마레쭈 수도원도 멋지고 다정한 아빠스와 아프리카의 형제들이 지금과 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금까지 쌓아온 수도공동체의 명성과 전통을 유지하기 바란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7년 여름호(Vol. 38), 글 · 사진제공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 마레쭈 수도원 누리집 http://www.maredsous.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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