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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인간과 세상: 거인 혹은 소인을 상상을 하는 이유, 마이 리틀 자이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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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5 ㅣ No.999

[영화 속 ‘인간과 세상’] 거인 혹은 소인을 상상을 하는 이유


마이 리틀 자이언트

 

 

가족, 판타지 / 2016. 08. 10 / 117분 / 전체관람가 /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세상 어디엔가 우리와 똑같은 존재이지만 크기가 다른 거인 혹은 소인의 세계가 있다.”

 

이런 상상은 인간의 환상과 모험, 호기심과 공포의 산물이다. 공포는 거인의 물리적 힘과 야만성에 근거를 두고, 호기심은 모든 것이 축약된 소인들의 유사성에 있다. 아마 ‘인형’이 그 변형일 것이다.

 

이런 것들 역시 인간이 제멋대로 설정한 ‘편견’이다. 실제 거인의 존재와 야만성에 대한 어떤 근거도 없다. 소인 역시 마찬가지다. 상상으로 그들의 존재를 설정하도는 거인에게 가지고 있는 인간 자신의 공포심을 그들에게 떠넘기고, 대신 거인이 가진 강자로서의 희열과 우월감을 맛보려 한다.

 

그러므로 상상과 허구인 동화나 소설일망정 인간은 거인보다는 소인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게 훨씬 즐겁고, 안심이 되고, 존재감도 커지니까.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는 이 두 세계에서 공포와 환상을 모두 경험했다. 영국 동화작가 메리 노튼의 판타지 소설 《바로우어즈》가 원작인 일본 애니메이션 <마루 밑 아리에티>에서 소년 쇼우는 엄지만한 소녀 아리에티를 만났다.

 

거인과 소인을 만나는 이야기는 단순한 모험이나 호기심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것을 통해 인간세상을 비춘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소인국 ‘릴리퍼트’의 인재등용은 18세기 영국이고, 거인국의 이성적 능력은 있지만 결코 이성적이지 않은 추악한 행동들 또한 인간의 오만과 이기심과 독선의 풍자이다.

 

<마루 밑 아리에티>에서 아리에티 가족은 진심으로 돌봐주고 지켜주려는 쇼우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뿌리치고 강 건너 인간의 눈에 띄지 않은 곳으로 떠난다. 우리는 사랑이란, 보호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다른 생명체의 자유를 빼앗고 삶을 파괴했는가. 그들을 울타리에 가둬놓고는 그것이 문명이고, 안전이며,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거인이나 소인을 만나는 환상의 여행이 신나고, 스릴 넘치고, 즐겁지만은 않은 이유다.

 

로버트 달의 동화 <마이 리틀 자이언트>의 주인공인 고아 소녀 소피에게도 거인과의 만남은 공포로 시작해 모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세상을 비판하고 풍자한다. 처음 다른 거인들에 비해 키가 작은(그래도 7미터) 꼬마 거인이 소피를 잡아온 이유부터 그렇다. 인간은 입이 싸다. 그래서 거인을 보면 소문내 사람들로 하여금 잡으러 오게 만든다. 숨어 사는 이유 역시 인간들은 단지 덩치가 큰 거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마치 신기한 동물 취급을 해 우리에 가두어 놓고는 구경거리로 삼는다. 인간은 유일하게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이상한 동물이다.

 

꼬마 거인은 강조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인간세상과 귀신 세상이 다르지 않듯이, 거인세상도 마찬가지라고. 오히려 인간보다 더 나은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꿈’을 선택했다. 유일하게 사람을 잡아먹지 않고, 큰 귀로 세상소리를 다 듣고, 아이들을 사랑해 소피가 ‘선꼬거(선량한 꼬마 거인)’라고 부르는 그는 꿈을 채집해서 밤마다 몰래 창문으로 다가가 아이들에게 그것을 불어넣어 준다.

 

꼬마 거인이 아이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주기 위해 채집한 꿈들, 그것을 담은 유리병에 맞춤법도 맞지 않게 써서 붙여놓은 짧고 단순하면서도 흐뭇하고 감동적인 설명이야말로 이 작품의 백미다. 로버트 달을 왜 ‘20세기 위대한 동화작가’라고 일컫는지 알게 해준다. 그 꿈이 없었다면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향기도, 생명도 없는 뜬구름 같은 상상으로 끝났을 것이다. 인간세상에 희망을 비추는 환상과 모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꿈으로 소피는 ‘깜찍한 계략’을 세워 식인거인들이 잡아먹으려는 아이들을 구하고, 소피는 새로운 가족을 만나고 행복한 삶을 시작한다. 이 기발하면서도 재치 넘치는 동화를 상상력, 판타지, 그리고 휴머니즘의 대가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섬세하고 창의적인 영상언어와 감동적인 스토리로 재창조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스필버그는 글로 구체화한 꿈의 세계와 꼬마거인의 마음을 자기만의 다양한 빛의 언어로 시각화한 환상과 느낌으로 바꾸었다. 휴머니스트답게 동화가 말하고 싶었던 인간세상에 대한 풍자와 비판보다는 기존의 외계인에 대한 인식을 송두리째 바꾼 가 그랬듯이, 서로 다른 세상인 거인과 소녀의 착하고 아름답고 애틋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원작에 없는 선꼬거(마크 라이런스)와 한 소년의 과거 슬픈 만남과 이별을 만들었고, 소피의 작지만 간절한 꿈도 넣었다.

 

동화와 달리 식인거인들이 소피의 존재를 눈치 채자 ‘소문의 위험성’까지 감수하면서 고아원으로 돌려보내는 선꼬거, 그러나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알고 있기에 잡아먹힐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선꼬거에게 돌아가는 소피. 이런 반전이야말로 그랬듯이 차이와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우정과 사랑, 소통의 감동을 어느 감독보다 잘 아는 스필버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선꼬거는 글을 제대로 배우고 엄청난 독서를 통해 작가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마이 리틀 자이언트’란 동화로 쓰면서 소피의 이웃으로 살아간다. 상관없다. 동화니까. 그러나 영화는 다른 선택을 한다. 소피와 애틋한 작별을 한 선꼬거가 거인의 나라,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차별과 배타가 아니라 서로의 삶과 존재방식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그것을 무너뜨리는 관계는 강요나 억압이라는 사실을 스필버그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영화로 이야기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아무리 컴퓨터합성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극단적 대비의 캐릭터들과 그들의 행동은 물론 동화가 묘사를 생략한 주변 하나하나까지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역시 스필버그이다. 거인의 마을과 집, 집안 물건들, 다양한 꿈의 존재와 그 꿈이 있는 동산 등을 상상력을 발휘해 기발한 시각물과 환상적 이미지로 창조해냈다. 그가 없었다면 어떻게 배우들의 연기가 살아 숨 쉬고, 거인과 인간이 자연스럽게 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었으랴. 그것도 애니메이션도 아닌 실사 영화로.

 

[평신도, 2016년 가을(계간 53호), 이대현 요나(국민대 겸임교수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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