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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 교육과 신앙: 보는 것 아는 것 그리고 믿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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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21 ㅣ No.309

[과학 교육과 신앙] 보는 것 아는 것 그리고 믿는 것

 

 

눈으로 보지 않고 알기는 어렵지만, 보고도 알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이라도 알고 보면 더 잘 보고 깊이 알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한편, 무엇이든 알지 않고는 믿기 어렵다고 하지만, 알면서 또는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믿지 않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믿으면 더 잘 알 수 있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일 수도 있을까요?

 

 

보아도 알기 어렵고 믿기지 않는

 

두 눈 크게 뜨고 세상만사를 잘 보아도 정말로 무엇이 어떻게 되어 그렇게 되는지 명확하게 잘 알기 어려운데, 더구나 왜 그러한 만물이 있고 다양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인지 알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다음 그림의 가로 두 줄은 나란하게 보이는지요?

 

아무리 보아도 위쪽의 두 줄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것 같고, 아래쪽 그림의 가로 두 줄의 중앙은 좀 오목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자를 대고 보면 두 줄은 어떤지요?

 

보통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말은 내가 본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입니다. 정말로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본 것이라도 정확한 것인지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위 두 그림에 자를 대고 보면 두 개의 직선이 나란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알고서 다시 ‘보아도’ 나란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결국 보기만 하면 다 안다는 것도 아니고, 알고 보아도 아는 대로 보이지 않으니, ‘내가 보면 안다.’는 주장은 ‘내가 보고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고 싶어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나처럼 알았다 하고 그렇게 믿을까요?

 

우리는 자주 내 생각이 옳다고 믿으며 되풀이해서 주장하고 싶어 하지만, 정말 내 생각이 언제나 옳고 좋은 것일까요?

 

더구나 ‘왜’ 나란한 두 선이 나란하지 않게 보이는지의 문제는 재미있을 것 같지만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러저러해서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왜’ 그럴까요?

 

요즘 세상을 ‘보면’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텔레비전의 화면을 믿기 어렵다 하고, 어떤 사람은 신문의 글자를 그대로 읽기보다 ‘행간을 읽는다.’고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행간을 읽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요? 보고 듣고 읽는 것으로 무엇을 얼마나 알고 믿을 수 있는지, 더구나 왜 그런지는 정말로 알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안 보아도 알고 믿을 수 있는

 

더구나 보이지 않거나 보지 않은 것은 알고 믿을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할는지 모르지만, 정말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고조할아버지를 뵙지 못했다고 그런 분은 계시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위 현장에 가지도 않고 텔레비전 뉴스만 보고 오늘 시위가 있었던 것을 안다고 생각하며 다음 주 토요일에도 있을 것이라고 믿으려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양자역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어려운 2계의 편미분방정식을 풀어서 10-10cm 정도의 원자 모형을 상상하며 알게 된 것 같이 믿고 있지요.

 

어떻게 보지도 못했는데, 또는 영상을 보고 알았다고 믿으며, 수학 관계식을 풀어 원자의 세계를 보고 아는 것같이 믿고 있을까요?

 

보고도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이 있고, 안 보았어도 믿고 알 만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보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말이 참 재미있는데, 이를테면, 즐거운 노랫소리 ‘들어보자’, 친구를 ‘믿어보자’, 단꿈을 ‘꾸어보자!’ 여기서 무엇을 ‘보자’는 것입니까? ‘…행동’을 하자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왜 ‘하자’라 하지 않고 ‘보자’라고 했는지, 그 속에 우리 생각과 말과 행동에 숨은 그 어떤 무엇(code)이 있는지 연구해 보면 참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보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참됨을 알며 값진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래도 세상 만물을 ‘보면’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과학을 통해 변덕스럽지 않은 이 우주 질서에 매혹됩니다. 연구하면 할수록 더 그런 것 같습니다(「물리 돋보기」 조성호, 아카데미아, 2006년 참조). 우리는 허황한 ‘기적’을 바라기도 하지만, 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운 질서보다 더 멋진 기적이 있을까요?

 

무거운 물체를 놓으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누구나 보고 안다고 하지만, 어떻게 해서 고무풍선을 놓으면 위로 올라가나요? 이러한 현상에서 본 것은 무엇이고 아는 것은 무엇인지요? 어떻게 해서 어떤 것은 떨어지고 어떤 것은 위로 올라가나요? 왜 그런지요?

 

물체와 물체가 당기는 힘은 물체 간의 거리가 멀어지면 약해지는데, 그 약해지는 정도가 거리의 2승에 반비례한다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내세워 위와 같은 많은 현상을 그럴듯하게 설명하지만, 왜 하필이면 만유인력의 세기가 2승에 반비례할까요?

 

인공위성은 계속 휘발유를 공급하지 않는데, 어떻게 계속 지구 주위를 도는지에 대해 뉴턴의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멋있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하지만, 왜 두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어 있을까요? 일반상대론이 더 멋지다고요?

 

그뿐 아니라, 도대체 자연의 세계는 왜 존재하는지, 이 광활하고 다양한 자연의 세계가 저절로 생겼는지, 만유인력의 세기가 2.1승이나 1.9승에 반비례하면 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영 다른 세상이 되리라는 것은 과학자들의 주장이지요. 그런데 왜, 무엇이 어떻게 되어서 이렇게 아름답고 조화로운 자연세계가 만들어졌을까요?

 

이런 물음에 과학자들은 모른다 하며 (과학)철학자들의 과제라 하지만, 이들은 무어라 알아듣게 설명하기보다 모르는 질문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상재상서(上宰相書)」에

 

“사람들은 한 편의 걸출한 문장과 한 폭의 이름난 그림을 보고는 흠모하고 찬탄하는데, 반드시 어떤 사람이 재주를 발휘하였는지를 묻지, 일반적으로 소홀히 보아 넘기지 않습니다. 

 

우주 만물이 다채롭고, 다양하며, 풍성하고, 뚜렷하면서도 무성한 것은, 또 하나의 걸출한 문장과 뛰어난 그림인데, 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주 조금이라도 … 지은 자를 물어보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상재상서(上宰上書)」, 정하상,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1863년)

 

정하상 성인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이었을까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할 때, ‘알기 위해서 산다.’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사람은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아는 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고 믿으며,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믿고 있지 않은지요?

 

우리는 무엇을 믿는지요? 믿는 것 없이 알 수 있을까요? 믿지 않고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과학을 통해 많이 아는 것 같지만

 

과학은 무엇이 어떻게 해서 그런지 많이 관찰하고 실험하며 따지고 수량화하지만, 자꾸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왜 그런지 아직 모른다고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곧 이 자연현상의 ‘규칙성’ 또는 ‘원인’을 연구한다고 하지만, 왜 삼라만상이 있는지, ‘궁극적인 원인’을 모르며, 연구하려 하지 않는 것은 ‘과학적 방법’으로는 연구할 수가 없어, 이런 질문에는 모른다 하며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하기도 하지요. 누구의 일일까요?

 

보면 아는 것 같지만 보아도 모르는 경우가 많고, 안다고 해도 아주 조금 알 수 있지만, 좀 알고 보면 더 잘 깊이 알게 되니 계속 공부해야 하지요. 그래서 좀 더 많이 알아야 믿는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믿으면 더 잘 알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신앙과 이성」).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 박승재 데시데라도 - 과학문화교육연구소 소장. 대구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미국 노던콜로라도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 한국과학교육학회 회장, 국제물리교육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7년 1월호, 박승재 데시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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