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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876년 프랑스 선교사의 재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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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19 ㅣ No.799

[한국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876년 프랑스 선교사의 재입국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와 조선

 

지난 2016년은 병인박해 1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행사를 통해 150년 전의 박해를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였다.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각 교구에서는 학술회의와 전시회, 순교자 현양대회 등을 개최하여, ‘병인년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였다.

 

병인박해(1866년)는 8년 가까이 지속되었고, 그 기간 동안 수천 명의 신자가 순교하였다. 순교자는 대부분 한국인이지만, 그 가운데 9명은 프랑스 선교사였다. 병인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순교한 것은 아니다. 이에 앞서 1839년 기해박해 때에도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렇다면 외국인인 프랑스 선교사들은 어떻게 조선에서 살게 되었을까?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진출한 것은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조선 선교를 담당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처음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는 모방 신부였다. 모방 신부에 앞서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도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1835년 중국의 마가자(馬架子)에서 선종하였다.

 

모방 신부는 1836년 1월에 입국했다. 이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조선에는 20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입국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는 조선에서 사교(邪敎)로 낙인찍혀 금지하는 종교였다. 그리고 외국인이 조선에 입국하여 거주하는 것도 불법이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몰래 잠입하여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남의 눈을 피하려고 숨어 지내거나 이동할 때는 상복을 착용하였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스무 명의 선교사 가운데 다섯 명은 병사하였고, 열두 명은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리고 병인박해 때 살아남은 리델, 칼레, 페롱 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이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이 진출한 지 30년 만에 조선에는 한 명의 선교사도 남지 않게 되었다.

 

 

조선 입국을 위한 노력

 

중국으로 탈출한 선교사들은 상해에 머물며, ‘병인박해 보고서’와 ‘순교자들의 약전’을 작성하거나, 조선어 문법책과 조선어 · 프랑스어 사전의 편찬에 힘을 쏟았다. 박해와 관련된 기록은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행동이 잊히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사전 편찬은 신임 조선 선교사들의 조선말 공부를 위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조선에 입국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재입국은 1867년부터 시도되었다. 칼레 신부는 그해 5월에 조선 신자들과 함께 상해를 떠나 요동으로 갔다. 요동을 거쳐 육로로 입국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국경의 경비가 삼엄하여 육로 입국이 불가능하자 바닷길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867년 8월에 황해도 옹진 부근에 상륙했으나 안타깝게도 자신은 입국하지 못하였다. 

 

칼레 신부에 이어 조선 입국을 시도한 사람은 리델 신부였다. 그는 1869년 5월에 블랑 신부와 함께 요동의 차쿠를 떠나 조선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6월에 대동강 어귀에 있는 초도(椒島) 근처에 도착했으나, 풍랑이 거세지고 또 조선인들이 배를 집중적으로 수색하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한국교회에는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곧 1869년 4월 27일 자로 리델 신부가 제6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이로써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가 순교한 지 3년 만에 조선교회는 다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리델 주교의 서품식은 1870년 6월 5일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교회의 변화와 함께 조선 사회에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곧 1873년 박해를 주도하던 흥선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리델 주교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874년 3월 북경으로 가서 프랑스 공사를 만났다.

 

리델 주교는 자신의 이름으로 조선 정부에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하고, 이 청원서를 중국 정부를 통해 조선 사신들에게 전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중국 정부가 거절하면서 실패하였다. 북경에서의 교섭이 무위로 끝나자, 리델 주교는 1875년 9월에 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선 신자들을 만나지 못해 입국이 좌절되었다.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의 입국

 

이처럼 여러 번의 입국 시도가 실패하는 가운데,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이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면서 조선 사회는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항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는 쇄국정책과 맞물려 있었다.

 

 

그런데 조선이 쇄국정책을 버리고 대외 개방을 선택했다는 것은,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그리하여 리델 주교는 1876년 4월 29일 블랑 신부, 드게트 신부와 함께 다시 차쿠를 떠나 조선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5월 8일 서해안 대청도에 닻을 내린 뒤 권치문 등 신자들의 영접을 받았다.

 

그런데 신자들은 리델 주교에게, ‘조선과 일본이 조약을 맺었지만,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면 주교가 중국에 남아서 활동하는 편이 낫고, 머지않은 장래에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 개항장을 통해 공개적으로 입국하는 편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만이 조선에 입국하기로 결정되었다.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는 ‘성 미카엘호’를 타고 1876년 5월 9일 한강 연안에 다다랐다. 그리고 교동도, 강화도, 한강을 거쳐 5월 10일 서울에 도착했다. 병인박해 뒤 10년 만에 이루어진 성직자의 입국이었다. 그리고 5월 13일 10년이나 단절되었던 미사가 조선에서 봉헌되었다.

 

‘폐허가 된 조선교회의 복구’, 이것이 바로 여러 번의 실패에도 선교사들이 조선 입국을 시도한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조선은 여전히 박해 중에 있었다. 따라서 선교사의 파견은 그들의 목숨을 담보한 위험한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리델 주교는 목자를 잃은 양들을 더는 방치할 수 없었다. 주교는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리하여 신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며, 성사를 통해 그들을 강하게 만드는 일을 미룰 수 없었던 것이다.

 

선교사들의 입국에는 조선 신자들의 역할도 컸다. 신자들은 중국을 왕래하며 조선의 사정을 전해 입국 계획을 도왔고, 서해안에서 신부를 맞이해 서울까지 모시는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서울에 성직자들이 거처할 안전한 장소를 마련하는 것도 신자들의 일이었다. 신자들과의 약속이 어긋나서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돌아간 사실은, 선교사의 입국에서 신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게 한다.

 

 

한국교회 500만 시대의 출발점

 

블랑 신부는 조선에 도착한 뒤 리델 주교와 프랑스에 있는 여동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처음으로 순교자들의 땅인 조선에 도착했을 때, 감격스러워 가슴이 뛴다.”고 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 대해, 행복하며 자랑스럽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난과 위험이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만, 주님이 우리 편이니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조선의 신자들에게도 선교사의 입국은 감격 그 이상이었다. 그리하여 블랑 신부 일행을 맞이한 집주인 신자는 기쁨에 넘쳐 울면서 “가련한 조선 땅에서 신부님을 다시 보다니 무슨 행운입니까?”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블랑 신부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내려준 사명을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이들을 맞이한 조선 신자는 신부의 존재를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1876년 선교사의 재입국 사건’은 하느님을 믿고 의지한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선사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이 선물은 오늘날 한국교회를 있게 했다.

 

1876년 이후 선교사들은 단절 없이 계속 조선으로 파견되었고, 1886년에는 한불조약으로 선교사들이 정착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때 재건된 교회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1876년 선교사의 재입국 사건’은 오늘날 한국교회 500만 시대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2017년은 140년 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해 보면 좋겠다. 아울러 이 선물은 죽음을 무릅쓰고 입국을 시도했으며, 신앙을 지킨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방상근 석문 가롤로 -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와 고문서 전문가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까?」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1월호, 방상근 석문 가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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