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31: Omnibus Omnia(모든 이에게 모든 것)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01 ㅣ No.424

[추기경 정진석] (31) Omnibus Omnia(모든 이에게 모든 것)


청주교구장 착좌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 1970년 10월 3일 청주교구 내덕동성당 주교좌에 착좌한 정진석 주교.

 

 

주교 서품식과 청주교구장 착좌식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교구의 큰 행사를 준비하느라 교구 신부들과 평협 회장단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다. 정진석 주교는 가능한 한 행사 준비는 준비위원회에 맡기고 내적으로 기도하는 데만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교구에서 처음하는 주교 서품식이니만큼 챙기고 지시할 일이 많았다. 정 주교가 세운 행사 원칙은 단순했다. 교구 사정에 맞게 소박하게 치르되, 한국인 교구장 주교를 처음으로 맞는 교구민들과 축제를 하는 의미로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행사를 맡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간소하게 한다 해도 신경 쓸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정진석 주교는 큰 원칙과 틀만 전해주고 책임을 진 사람들이 각자의 권한을 갖고 최선을 다하도록 배려했다. 정 주교는 작은 것까지 자신이 챙기다 보면 책임을 맡은 이들이 눈치를 보고 일을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책임자가 최대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지켜보기로 했다. 이러한 정 주교의 사목 스타일은 이후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어떤 사람이라도 모두 다른 탈렌트가 있고 능력이 있기에 그것을 잘 활용하도록 도와주고 지켜보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정 주교는 자신의 주교 사목표어를 정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 이 대목은 사도 바오로의 서한(1코린 9,22)에서 선택한 것으로 교구장의 사목 지침을 밝힌 셈이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 

 

라틴어 ‘Omnibus Omnia’는 ‘모든 것을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모든 것으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모든 이에게’ 등 여러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정진석 주교는 ‘주교로서 모든 사람을 대등하게,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맞이하겠다.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놓겠다. 내가 가진 시간, 생명, 사랑, 능력, 정성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뜻으로 ‘Omnibus Omnia’라고 정했다. 

 

주교 서품식을 앞둔 어느 날, 정진석 주교는 일정을 다 마치고 자리에 누웠는데 바로 잠이 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묵주를 손에 잡았다. 의자에 앉아 묵주기도를 다 바치고 다시 자리에 들었는데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일은 별로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은 더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창문으로 달빛이 스며들어 방은 마치 빛을 비추는 것처럼 환히 보였다. 정 주교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지난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 그날은 또한 마리아 고레티의 축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 주교 임명에 관한 서신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하느님께서 나를 이끌고 계셨다. 그것을 생각하니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서류나 정리할 참으로 책상에 앉아 스탠드 불을 켰다. 책상 모퉁이에 쌓여 있는 편지들 속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편지가 눈에 띄었다. 지난 8월 30일에 쓰신 것으로 정진석 주교에게 보낸 답장이었다.

 

정 주교는 당시 교구의 명령대로 미국에서 모금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이경재 신부 숙소에 함께 살았다. 주교 임명 소식을 접한 후, 경황없이 바로 교구장인 김 추기경께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보내준 것이다. 정 주교는 편지에서 맡고 있는 모금 임무를 마저 마치고 들어가겠다고 했고, 김 추기경은 답장에서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주교 임명을 받은 정 주교에게 다시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모금으로 모은 돈 중 일부를 경비로 사용해도 좋다고 세심하게 이야기했다.

 

- 청주교구장 착좌식 후 축하연이 열린 수동성당에서 모친 이복순 여사와 함께한 정진석 주교. 이복순 여사는 아들의 사제 서품식 때 사진기가 고장나 제대로 된 사진이 없다며 아쉬워하다 이날 모처럼의 기념촬영에 환하게 웃었다.

 

 

정진석 주교는 그 편지를 다시 들고 읽어 내려갔다.

 

“주의 평화! 경애하올 주교님, 보내준 서신 잘 받았습니다. 이미 축전을 보냈지만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동병상련의 주의 인정을 금할 길 없습니다. … 주교님 스스로 결정해야겠지만 다만 생각에 참고될 수 있을까 해서 몇 말씀 드립니다. 주교님이 로마나 또는 미국 등에서 주교품을 받고 오시든지, 한국에 오셔서 받으시든지 주교님의 의중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시기적으로 9월 이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 학교에 있는 숙소는 학교 사정으로 9월 10일 전으로는 가서 지내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시는 모금 활동에 당장 주교님 아닌 다른 사람으로 대치하기 힘들다는 것도 말씀드립니다. 이상의 이유로 9월 10일까지는 미국에 체류하시고 그곳 미국 교구들의 사정도 보고 들으시고, 앞으로 미국인 신부님들과 형제로서 함께 일해야 하니 그 생활에 익숙하게 하시고 다양하게 이 기회를 활용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는 로마에서 늦어도 9월 하순에는 떠나서 오시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교품은 로마나 한국에서 받으시든지 결정은 주교님이 하셔야 할 것입니다. 로마에서이면 9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에, 한국에서이면 9월 말 10월 초순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주교님이 서울교구에 마지막 봉사하시는 의미로 모금을 끝까지 해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주교님께서 수단 준비 등 필요하신 경비를 모금 경비에서 일부 쓰셔도 좋습니다. 나중에 이경재 신부님께도 따로 편지 쓰겠습니다…. 김수환.”

 

김수환 추기경의 후배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세심한 배려와 작은 것 하나하나 형님처럼 챙겨주시는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드디어 정진석 주교의 성성(서품) 및 착좌식의 날이 밝았다. 신자 2000여 명이 청주 시내 내덕동성당에서 거행되는 청주교구 제2대 교구장 정진석 주교의 성성과 착좌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주교 서품식은 청주교구에서는 처음 있는 행사라 모든 신자와 사제들은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또 교구 설정 12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교구장을 맞이한다는 기쁨에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노기남 대주교, 파디 야고보 주교, 한공렬 주교 등이 공동 집전한 주교 서품식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전국의 주교들과 신자들이 성령 강림의 기도를 올렸다. 성인호칭기도가 시작되자 정 주교는 바닥에 엎드렸다. 성가대의 아름다운 기도 소리가 성당을 가득 채워 마치 천사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이 들렸다. 정 주교는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청을 드렸다. 

 

“하느님! 우리 청주교구에는 한국인 사제가 부족합니다. 저희 교구에 한국인 사제를 100명만 보내 주세요!”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월 1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2,51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