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29: 새로운 세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19 ㅣ No.418

[추기경 정진석] (29) 새로운 세계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그 감격의 현장에 함께

 

 

- 1968년경 로마 우르바노대학에서 성베드로 대성전을 배경으로 한국 신부들과 함께한 정진석 신부(왼쪽에서 두 번째).

 

 

로마! 

 

정진석 신부는 드디어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정 신부의 로마행에는 작은 행운도 따랐다. 때마침 로마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한국 교회 역사상 43년 만의 시복식인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전세기를 빌려 역사적인 시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정진석 신부는 이 비행기로 함께 가기로 했다. 혼자서 여러 번 갈아타는 비행편에 비하면 시간도 절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또 그 긴 여행을 같은 동포 신자들과 같이 가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정진석 신부의 입학이 결정된 학교는 로마의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였다. 우르바노대학은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소속 신학교로 선교 지역에서 온 신학생, 신부들을 주축으로 지역 교회에서 헌신할 사목자를 양성하는 데 교육의 중심을 둔 역사 깊은 신학교였다. 세계 곳곳의 선교지에서 학생들이 오기에 나라와 인종이 매우 다양했다. 아프리카만 해도 수십 개나 되는 나라에서 학생들이 왔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외국의 신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를 바치거나 미사를 하면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 모두가 하나의 언어(라틴어)로 기도와 노래를 하는 것은 보편 교회에 대한 연대를 생각하게 했다. 문화와 언어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것 자체가 정진석 신부에게는 공감과 유대의 큰 체험이었다.

 

 

공의회가 가져온 변화

 

당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고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 가톨릭 교회에 많은 변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세계 교회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무엇보다 ‘평신도의 교회 참여’였다. 공의회는 평신도를 “각기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시는 은혜의 분량대로 교회의 사명을 완수하는 도구요 증인”(「교회헌장」 33항)으로 인정하여 세속의 복음화와 성화를 위한 고유의 사도직 임무를 수행할 것을 권고했다. 

 

또 하나의 큰 흐름은 전례의 토착화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전례에서도 혁신을 일으켰다. 미사를 모국어로 집전토록 하고, 성경과 교회법전 등의 자국어 번역을 장려했다. 그리고 성당 제단 벽면에 붙어 있던 제대가 사제와 신자들 가운데로 옮겨졌다. 제단과 신자석을 가로막던 난간도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일치 운동과 비그리스도교 문화 혹은 타 종교와의 관계 개선을 권장해 각 지역 교회들이 이를 위해 노력하도록 했다. 이 모든 것은 공의회가 변화시킨 교회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나라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한국도 큰 변화가 시작되고 있던 터였다. 정진석 신부는 그 변화의 흐름 한가운데 있었다.

 

- 1968년 10월 6일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한국 순례단과 함께한 정진석 신부.

 

 

베드로 대성전에서의 시복식

 

1968년 10월 6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시복식은 한국 교회 역사상 두 번째 시복식이었다. 1차 시복식은 1925년 7월 5일 거행됐다. 당시 시복식에는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 두 분이 참석했다. 조선의 두 주교는 수행원도 없이 부산에서 출발해 고베, 상해, 홍콩, 싱가포르, 사이공, 수에즈 등을 거쳐 마르세유에 닿는 여정으로 로마에 당도했다. 당시 「경향잡지」 편집을 맡고 있던 한기근 신부는 조선인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렵게 여비를 마련해 5월 11일 로마를 향해 떠났다. 그리고 7월 1일에는 뉴욕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 중이던 장면ㆍ장발 형제가 로마에 당도했다. 이로써 1925년 첫 시복식에는 단 3명의 한국인이 참석했다. 

 

1968년 10월 6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두 번째 시복식에는 많은 신자가 참석했다. 한국에서 민간인 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전세 냈다. 두 번째 시복식에는 20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한국인 순례단 136명,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 65명, 그리고 유럽에 사는 유학생 등이 참석했다.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시복 미사는 그야말로 감동의 연속이었다. 미사의 여러 부분에 한국어가 사용됐다.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1969년 추기경 서임)가 교황을 대리해 미사 주례를 맡았다. 김수환 대주교가 입장하자 ‘칙서’가 낭독됐다. 라틴어 원문 낭독에 이어 이인하 대전교구 부주교가 한국어로 낭독했다. 김수환 대주교의 선창으로 ‘떼 데움(Te Deum)’이 시작될 때 성당 전면에 걸려 있는 복자들의 초상화 가림막이 걷혔다. 이어 대미사가 봉헌됐다. 

 

미사 마지막에는 교황청 성가대가 이문근 신부가 작곡하고 최민순 신부가 작사한 ‘장하다 복자여~’로 시작하는 ‘복자 찬가’를 합창했다. 웅장한 한국어 성가가 성 베드로 대성전 가득 울리자 이내 성당은 울음바다가 됐다. 이날 오후 성체강복에서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날 시복된 새 복자들에게 경배한 후, 한국의 24위 순교자들을 현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신앙의 귀감’이라고 극찬하며 한국이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전했다. 한국에서 온 신자들은 교황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다.

 

다음날 한국 신자들은 김수환ㆍ노기남ㆍ장병화 주교와 함께 교황을 특별 알현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신자들이 바티칸을 순례하는 것도 어려웠고, 교황 알현은 더더욱 어려웠다. 교황은 거듭 한국 교회에 특별한 애정을 표하며 성작을 선물했다. 한국 교회와 순교자의 후손, 신자들의 선물에도 일일이 감사를 표했다. 시복식은 당시 교회뿐 아니라 국내 일반 매체에서도 호응이 높았다. 이후 교회에서는 엄청난 순교자 현양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시성식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학생 정진석 신부

 

정진석 신부는 시복식 당일 성 베드로 대성전 옥상에 올라가 시복식을 생중계하는 데 참여했다. 정 신부의 로마 생활은 한국 신앙 선조들의 시복식으로 시작한 셈이었다. 시복식 사흘 뒤인 9일 우르바노대학에 입학했고, 수업은 15일 뒤에 시작됐다. 그러다 보니 눈코 뜰 새 없이 학기에 들어갔다. 

 

강의는 라틴어로 진행돼 강의를 듣는 데 별 무리가 없었다. 3년간 라틴어 교사로 지낸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유학생활에서 어려운 것으로 식사와 언어를 꼽을 수 있는데, 다행히 이탈리아 음식이 입맛에도 잘 맞았다. 언어도 말하고 듣고 쓰는 데 문제가 없으니 정 신부의 유학 생활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만에 책을 보고 강의를 들으니 공부도 재미있었다. 

 

공부하다 지칠 때면 학교 옥상에 올라갔다. 우르바노대학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정 신부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바라보며 지난 시복식의 감동을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한국 교회를 향한 주님 은혜에 감사함을 느끼며 마음을 다잡았다. 가끔 주말이 되면 로마에 있는 후배 신학생들과 함께 장을 보고 한국 음식을 해먹으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감사하게, 쉼 없이 열심히 공부한 덕에 1년 반 만에 교회법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18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1,81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