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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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성사, 은총의 표징: 고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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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4 ㅣ No.187

[성사, 은총의 표징] 고해성사 (1)

 

 

세례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성체성사로써 영적으로 양육되고 신앙이 성장합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우리를 죄로 이끄는 경향이 우리 안에 남아있습니다. 그런 경향에 동조하여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되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영적으로 허약하게 하여 영적 건강에 해를 입힙니다. 영적인 병은 그것의 원인인 죄를 용서받아야 나을 수 있습니다. 죄의 용서를 위해 있는 것이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으면 내적인 치유가 이루어져 영적 건강을 회복하게 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루카 15,11-24)를 통해서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는 자비로운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유산을 미리 타내어 집을 떠나 흥청망청 다 쓰고 알거지가 된 다음 비로소 정신이 들어서 돌아온 못된 아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은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죄인을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는 분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를 실제로 베풀어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마르 2,10)고 하시면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루카 7,48)는 말씀으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또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죽음의 위험에서 구해주시고 용서해주십니다(요한 8,10-11). 예수님은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똑같은 자비와 용서를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자주 잘못을 범하고 삽니다. 비록 행동으로 드러나게 죄를 범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보이지 않게 마음으로, 의식하지 못한 채 말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에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계속 누적된 허물과 잘못의 짐을 지고 허덕이면서 힘겹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너그러운 용서로써 우리가 이런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가벼운 몸으로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십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사제를 통해 전달됩니다

 

‘하느님이 죄를 용서해주시는데, 왜 인간인 사제에게 죄를 고백해야만 하느냐?’ 개신교 신자들이 많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하느님께 직접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으면 됐지 왜 인간인 사제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는가?’ 천주교 신자들 중에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중간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직거래 할 수 없을까?’ 물론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고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예수님은 성부께로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의 사죄권(赦罪權)을 당신 제자들에게 위임해주신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위임된 사죄권은 다시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그의 협조자인 사제들에게 계승됩니다. 가톨릭교회는 바로 이 성경구절에 근거해서 하느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공적(公的)으로 죄를 사하는 권한은 교회를 이끌고 대표하는 사도들과 그의 후계자들에게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죄를 짓게 되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죄의 용서는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또 다른 이유는 죄의 특성에 있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딸로 새롭게 태어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은 우리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하느님과 교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신자가 드러나게 죄를 지어서 다른 이들에게 악한 모습을 보이게 되면 그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신뢰성을 손상시킵니다. 천주교 신자가 큰 잘못을 저지르면, 주위에서 ‘성당 다녀봐야 뭐하냐?’ 비난을 듣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죄는 다른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더라고, 죄를 지은 당사자의 신앙을 약화시킵니다. 그럼으로써 그 사람의 신앙적 투신이 마비되어 그가 속해 있는 교회 공동체에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이렇게 개인의 죄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교회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하느님만이 아니라 교회와의 화해도 필요합니다. 바로 이런 이중의 화해를 이룩하기 위해서 참회자는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대리하는 동시에 교회를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학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이유에서도 고해성사는 인간에게 진정 도움이 됩니다. 죄를 짓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누구에겐가 얘기함으로써 후련함을 느끼게 됩니다. 경찰을 피해서 도망 다니던 살인범이 자수를 해서 모든 것을 다 실토하고 난 다음에야 불안에서 해방되어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었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혼자서 가슴 속에 묻어두고 괴로워하던 죄를 사제에게 고백하면 내적인 해방감을 얻게 되고, 사제의 사죄경을 통해서 정말로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 중에는 가톨릭의 고해성사 제도가 심리적으로 아주 훌륭하다고 인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은 어느 정도 죄를 예방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제에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재차 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알게 된 모든 내용에 대해서 절대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을 ‘고해의 비밀’이라고 하는데, 교회 역사를 보면 이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제도 있습니다. 체코의 성 요한 네포묵 사제(+1393)가 대표적인 분입니다. 그는 왕비의 고해사제였는데, 고해성사를 자주 보는 왕비를 의심한 왕이 집요하게 고해에서 들은 내용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끝까지 거절하여 결국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사제는 고해의 비밀을 철저히 지켜야 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신부님이 혹시 나의 죄를 기억하고 나를 꺼려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 고해성사를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런지 전화나 인터넷으로 고해성사를 볼 수 없는지를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비밀 보장이 어렵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일이고 중대한 일은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을 할 때 인터넷이나 전화를 이용한다면 성의가 없다고 하지 않을까요?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마주 하고서 비록 더듬거리는 말로라도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사랑을 고백하는 데에 가장 성실한 방법입니다. 그리스도께 죄를 고백하고 그분에게서 용서를 받는 고해성사의 경우도 이와 비슷합니다. 

 

고해성사는 그리스도와 참회자와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나 본당에서 판공 때나 주일에 많은 신자들이 제한된 시간 내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하기에 성사가 형식적, 기계적으로 이루어져서 인격적인 만남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상설고해소를 찾아가거나, 신부님과 개별적으로 시간 약속을 해서 좀 더 여유를 갖고 상담방식으로 고해성사를 받는 것도 권장할 만합니다. 

 

사제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성실하게 고백하는 신자를 만나면 사제 자신을 되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됩니다. ‘신자들이 저렇게 진지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사제인 나는 과연 얼마나 열심히 살고자 했는가?’하고 말입니다. 또한 고해성사를 보기 전에는 자신의 죄의 무게에 눌려서 침울한 얼굴을 하고서 축 처진 모습이었던 신자가 사죄경을 받고나서 기쁜 얼굴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사제는 하느님이 주시는 용서의 은총을 생생하게 체험합니다. 판공 때와 같이 고해자가 많을 때는 힘이 들기도 하지만, 사제에게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손길을 구체적으로, 그야말로 피부로 느끼게 하는 은총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을 많이 부담스럽다면, ‘내가 성실하게 성찰해서 고해성사를 본다면 고해사제 자신이 사제직의 보람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부담이 덜어버리면 좋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7월호, 손희송 베네딕토(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서울 Se. 담당사제)]

 

 

[성사, 은총의 표징] 고해성사 (2)

 

 

죄의 고백은 정직하게!

 

고해소에서 죄를 고백할 때 우선 명심해야 할 사항은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고백한다면서 남 탓을 한다면 곤란합니다. ‘나는 잘 하려고 했는데 다른 이들이 잘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다’는 식의 고백은 옳지 않습니다. 또 죄를 짓게 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좋지만, 죄를 극구 변명하려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두 경우 다 성찰과 통회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해소에서는 성찰을 통해서 알아낸 자신의 죄를 모두 고백합니다. 중대한 죄, 즉 대죄는 반드시 고백해야 하고, 가능한 그 죄의 종류와 횟수까지 고백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고해사제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만일 누가 자신의 중대한 죄를 알아내고서도 일부러 숨긴다면 자신이 범한 죄의 중대성을 올바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께 불성실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잘못으로서, 모고해(冒告解)라고 합니다. 

 

사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죄의 고백은 하느님께 모르는 사실을 알려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내적으로 제대로 치유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자신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은 인정할 때 비로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도 사람은 자신이 중대한 잘못을 범했으면, 그것을 솔직하게 죄라고 인정하고 고백할 때 비로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수렁에서 벗어나서 다시 행복해지기를 원하시기에 고해성사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죄를 고백하는 것이 ‘두렵다’, ‘창피하다’고 하면서 죄에서 벗어날 기회를 자꾸 미룬다면, 하느님께서는 매우 안타까워하시지 않을까요?    

 

대죄를 지은 것을 미처 알아내지 못해서 고백하지 못한 경우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 죄고백이 끝난 다음에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통회하오니 사하여 주소서.”라는 기도문을 바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백하기 버겁고 꺼려지는 죄를 고백하지 않은 채 이 기도문과 함께 얼버무리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글자 그대로 “알아내지 못한 죄”만 이 기도로써 용서받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잘못, 즉 소죄는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고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미사를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바치는 데, 이때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면 죄의 사함을 받습니다. 또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서 회개의 마음을 갖는다면, 소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소죄도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받는 것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의무는 아니라고 해도 소죄를 고백함으로써 악으로 흐르는 나쁜 경향과 싸우며 양심을 더 건강하게 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꼭 중병에 걸려야만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감기와 같은 가벼운 병에 걸린 경우에도 병원에 가서 의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일상에서 자주 반복되는 소죄라도 고해하는 것이 좋다는 교회의 권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속은 죄가 남긴 흔적을 지우기 위한 노력입니다

 

죄를 고백하면 사제는 그에 상응한 보속을 줍니다. 왜 보속을 해야 할까요? 죄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흔적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죄는 죄를 범하는 사람 자신에게 내적으로 상처를 입히고 나약하게 하며, 하느님께 대한 관계, 이웃에 대한 관계에 해를 끼칩니다.

 

죄는 용서를 받더라도 죄의 결과로 생긴 폐해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벽에 잘못 박은 못을 빼내더라도 못이 박혔던 자국이 남아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죄가 남긴 부정적인 결과를 적절한 방법으로 보상하거나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이 갚음을 보속(補贖)이라고 합니다.

 

부부싸움을 했을 경우, 나중에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고 용서를 받더라도 서로 간에 감정의 응어리는 남아있기 쉽습니다. 이 감정의 응어리를 풀고서 다시 부부 간의 신뢰를 튼튼하게 하려는 노력, 이를테면 기도, 희생 등이 보속입니다. 

 

물론 우리가 행하는 보속의 대가로 죄를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용서는 인간이 행한 보속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보속은 죄가 남긴 어두운 자취를 조금이라고 지워보려는 노력이고, 이 노력은 하느님 은총에 힘입어서 결실을 거둘 수 있습니다.

 

 

일괄 사죄는 제한적으로 허용됩니다

 

통상적으로 대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개별적으로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중대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는 개별 고백 없이 한꺼번에 여러 참회자들에게 일괄적으로 사죄가 베풀어질 수 있습니다.

 

현재 일괄 사죄는 두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첫째로 죽을 위험이 임박한데 한 사제나 여러 사제들이 참회자들의 개별적인 고백을 들을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경우입니다. 둘째로 참회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적절한 시간 안에 각자의 개별 고백을 올바로 듣기에는 고해사제의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참회자들이 자기들의 탓 없이 고해성사나 영성체를 오랫동안 못하게 될 경우에도 가능합니다(『교회 법전』961조 ①항).

 

두 번째 경우와 관련애서 일괄 사죄가 베풀어질 수 있는 상황인지의 여부는 교구장 주교가 판단합니다. 교구장이 결정한 경우 외에 여러 참회자들을 한꺼번에 공동으로 사죄해 주어야 할 다른 큰 필요성이 생기면 가능한 먼저 교구장에게 문의해야 합니다. 교구장에게 문의하지 못하고 사죄해 주었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중대한 이유를 교구장에게 속히 보고해야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부활, 성탄 판공이 일괄 사죄의 이유에 해당되는 상황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일괄 사죄를 허락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큰 축제나 순례 때 있을 수 있는 참회자들의 회중이 많다는 이유만으로는 고해 사제들이 부족하더라도 충분한 필요로 간주되지 아니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입니다(『교회 법전』961조 ①항 2호).

 

일괄 사죄를 유효하게 받기 위해서는 참회자가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즉 각자 자기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작정하며 혹 남에게 끼친 손해가 있으면 보상하기로 다짐하는 것은 물론 “당장은 개별적으로 고백할 수 없는 모든 중죄를 적절한 때에 개별적으로 고백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교회 법전』962조 ①항). 일괄 사죄로 중죄를 사면 받은 교우들은 또 다시 일괄 사죄를 받기 전에 되도록 빨리 기회가 있는 대로 개별 고백을 받아야 하고, 불가능 상태가 아닌 한 1년 안에 실천해야 합니다. 

 

개별고백보다 일괄 사죄가 심리적 부담이 덜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죄를 인정하지 않고 감추고 회피하는 경향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일괄 사죄를 선호하는 것이 혹시 이런 위험한 경향에 편승하는 것은 아닌지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일괄 사죄는 비상시에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고해성사를 선물로 느끼는 이들이 좀 더 많아져야 합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이 주시는 용서의 은총을 전해주는 예식으로서, 하느님의 큰 선물입니다. 하지만 죄를 고백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감을 줍니다. 감추고 싶은 자신의 잘못과 죄를 낱낱이 고백하려면 수치심과 두려움이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고해사제는 신자들이 필요이상의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괴로워하지 않도록 잘 배려해야 합니다. 고해사제가 그리스도의 뜻과 사랑에 결합되어 인내와 포용적인 자세를 보인다면 죄 고백에 수반된 수치심과 두려움이 많이 감소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 신자들 측에서는 죄 고백에 따른 부담은 기꺼이 감수하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인데, 어찌 부담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죄 고백에 따라오는 부담감은 감수할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담은 그 더 큰 것, 곧 죄의 용서를 통해 얻게 되는 내적인 자유와 기쁨에 이르기 위한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은 고해성사에도 해당됩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 16,21) 두려운 진통의 시간 다음에는 새 생명을 맞이하는 기쁨이 오듯이, 고해성사에서 죄 고백의 두려움을 넘어서면 죄에서의 해방과 기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해성사 때문에 냉담한 분들, 냉담을 풀려고 해도 고해성사가 너무 부담이 된다고 하는 분들, 용기를 내면 좋겠습니다. 고해성사를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보물로 받아들여서 내적인 평화를 누리는 분들이 좀 더 많아지기를 기원합니다. 그런 분들이 많아질 때 고해성사 보기를 어려워하는 신자들, 특히 청년들에게 ‘아,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요? 신앙이 삶을 통해 전달되듯이 고해성사의 중요성도 삶으로 전달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8월호, 손희송 베네딕토(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서울 S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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