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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조선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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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1 ㅣ No.1129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조선(朝鮮) 인식

 

 

제2대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1830년대 말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면서 조선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기록하여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전달했다. 이러한 정보들은 동아시아와 조선에 관심이 있는 서양인들에게 매우 유용했고, 이후 조선에 대한 서양세계의 전반적 인식(이미지)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앵베르 주교가 작성한 서한 기록들을 통해 그가 조선에 입국하기 전에 어떠한 사전 정보를 입수했으며, 입국 후 실제로 접하게 된 조선 국가와 조선 정부(지배층)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 입국 전에 앵베르 주교가 접했던 자료로는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 제5권 조선 관련 서한들과 샤를르부아 신부의 《일본 역사》가 확인된다. 그는 중국과 일본을 통해 전해진 왜곡된 정보를 선지식으로 삼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조선에 대해 편향적이고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앵베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한 후 조선의 서책과 조선 신자들을 통해 직접적이고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한된 활동 범위와 짧은 활동 기간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었고, 박해받는 조선천주교회의 장상으로서 주요 사안을 긍정[선교]과 부정[박해]으로 판단하는 이분법적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주교가 조선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선입견은 더욱 심화되었고 또 다른 왜곡된 정보와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주교에게 조선의 국가와 정부는 청일 양국에 속박된 나약한 나라였고, 동시에 죄 없는 천주교회를 박해하는 잔인한 존재였다.

 

이러한 앵베르 주교의 조선 인식은 19세기 이래 확산되고 있던 서구중심주의적 사고(동아시아에 대한 부정적 입장)와 문명화=복음화라는 사명 의식의 흐름[오리엔탈리즘] 속에 위치하고 있다. 앵베르 주교가 작성한 서한의 내용이 전교회[전교후원회]의 기관지인 《전교회 연보》와 조선교회사 개설서인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그러한 부정적 인식이 서양세계에 더욱 확산될 수 있었다.

 

 

Ⅰ. 머리말

 

16세기 이래 서양 제국들은 통상의 이익과 그리스도교의 전파라는 목적을 가지고 동아시아1)로 ‘진출’하였고, 중국 · 일본과 함께 조선도 그 대상이 되었다. 일본과 중국에 진출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대상지로서 조선을 주목하고 중국이나 일본의 자료를 통해 조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서양세계에 전달했다. 또한 동아시아 무역에 종사하다가 조선에 표착했던 서양인들이 있었고, 이들 중 하멜 같이 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경우도 있었다.2)

 

1830년대 이후 조선 선교를 맡았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기존의 조선 관련 정보를 어느 정도 습득했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자기가 직접 보고 듣고 수집한 정보를 서한 형식으로 전교회 본부에 보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선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축적되었는데, 선교사들이 보낸 서한들은 천주교 관련 내용 외에 조선의 정치, 경제, 외교, 풍습, 전통종교 등 다양한 방면을 다루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선교사들의 서한 자료들은 조선 선교를 희망하는 예비 선교사들[개신교도 포함] 이외에도 동아시아와 조선에 관심이 있는 서양인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주었고, 이후 서양세계의 조선에 대한 전반적 인식(이미지)을 형상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3)

 

로랑 조제프 마리 앵베르(Imbert, Laurent-Joseph-Marie, 1796~1839) 주교는 제2대 조선대목구장으로서, 조선에서 실제로 활동한 기간은 21개월(1837.12~1839.9) 정도로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일찍부터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 선교의 책임자라는 위치 때문에 조선 사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5년 이상 베트남과 중국 사천성에서 사목활동을 했기 때문에 한문에 익숙하여 조선의 서책을 직접 볼 수 있었고, 대목구장으로서 조선인 교회지도자나 다른 선교사들의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정보 수집이 비교적 수월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앵베르 주교는 조선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 · 기록하여 선교회 본부에 전달할 수 있었다.4) 또한 선교잡지인 《전교회 연보(APF)》5)와 조선교회사 개설서인 《한국천주교회사》6)에도 그 내용이 편집되어 실림으로써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본 논문은 1830년대 앵베르 주교가 조선 파견 선교사이자 프랑스인(서양인)의 시각에서 작성한 서한 기록들을 분석함으로써, 앵베르 주교의 조선 인식을 구체적으로 규명하고 그것이 이후 ‘서양의 조선 인식’에 하나의 원형이 되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Ⅱ장에서는 조선으로 파견되기 전부터 앵베르 주교가 선교지 조선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어떤 정보를 습득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이후 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앵베르 주교의 조선 인식을 분석할 것인데, Ⅲ장에서는 동아시아세계 속에 위치한 조선 국가에 대한 인식을, Ⅳ장에서는 조선 정부(지배층)에 대해, 특히 천주교회에 대한 정책을 기준으로 내린 평가에 대해 정리하고자 한다.

 

이러한 본 논문의 성과를 통해 앞으로 한국-서양의 상호인식에 대한 연구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도 작으나마 이바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Ⅱ. 선교지 조선에 대한 관심과 사전 정보 습득

 

앵베르7)는 1819년 12월 18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사제 서품 후 중국의 사천(四川)대목구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1820년 3월 20일 파리를 떠나 페낭(신학교)과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 통킹[베트남 북부]을 거쳐 1825년 3월에 목적지인 사천성에 도착하였다. 앵베르 신부는 이곳에서 12년 동안 사목하면서 목평(穆坪) 신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앵베르 신부는 사천대목구에서 활동하면서도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다. 이에 로마교황청 포교성(布敎省)은 그를 초대 조선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1792~1835) 주교의 부주교(副主敎)8)로 임명하였고, 1837년 5월 14일 앵베르는 주교로 서품되는 동시에 1835년에 이미 서거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이어 제2대 조선대목구장이 되었다. 1837년 8월 16일 사천성을 떠나 자신의 선교지를 향해 출발한 앵베르 주교는 1837년 12월 16일 변문(邊門)에서 조신철, 정하상을 만났고, 그들의 안내로 의주를 거쳐 12월 31일 서울 도착함으로써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하게 되었다.

 

초대 조선대목구장이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동아시아 전교, 특히 일본 선교의 교두보로서 조선을 주목하였고 자원하여 조선 전교를 지원하였다.9) 앵베르 주교 역시 브뤼기에르 주교처럼 조선 선교를 자원한 경우였고, 신학교 신학생 시절부터 조선과 일본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10)

 

(브뤼기에르) 주교님께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님으로부터 새롭고 매력적인 조선 선교를 출범시키는 일[조선대목구 설정, 1831년 9월 9일]에 선택되신 행운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1819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부터, 우리 주님의 포도밭 중에 이 주목을 끄는 곳[조선]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저는 1830년부터 저의 의향을 알고 계시는 우리의 훌륭한 (마카오 대표부의) 경리부장인 르그레주아 신부님이 주교님께 저에 관해서 말씀을 드릴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저는 주교님께서 제 의향을 들으시어 저를 주교님의 새로운 선교지에 불러주시리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11)

 

1819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저는 이미 조선과 조선을 거쳐서 갈 일본에 대한 저의 관심을 표명하였기에 (교장신부인) 랑글루아 신부님께서 저를 꾸짖었습니다.12)

 

앵베르 주교가 조선과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1819년 당시 유럽에서는 로마가톨릭[천주교]의 세력이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특히 1810년대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교황권이 추락하고 물적 인적 피해를 복구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해외 선교는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고 19세기 내내 프랑스가 주도하는 해외 전교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13)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앵베르 주교도 파리외방전교회에 가입하여 선교사의 길을 가게 된 것이고,14) 특히 ‘세상의 끝’이라 여겨지던 ‘극동’(極東) 전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15)

 

앵베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라든가 조선에 대해 어떤 지식을 사전에 습득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주교가 작성한 서한을 통해 그가 읽었던 책들의 제목을 확인할 수 있다.

 

제가 아주 열망하는 일은 방인 사제를 갖는 일입니다. … 이곳[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사제가 될 만한 중년의 신자 몇 명을 물색하게 했습니다. 첫째로는 42세 된 우리의 북경 파발꾼인데 여전히 독신으로 있으며 우리 세 (선교사를) 조선에 인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1801년의 박해 때에 자신을 천국으로 보낼 칼날이 떨어지는 것을 보겠다고 해서 (관례대로 엎드려서가 아니라 나무토막에 등을 대고 누워서) 눈을 뜬 채 참수를 당하고자 했던 영광스러운 순교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입니다. (정약종의 순교에 관하여는)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 제5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16)

 

앵베르 주교는 자신이 가르치는 신학생 정하상을 소개하면서 그의 아버지인 정약종의 순교 일화를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 제5권에서 인용하였다. 앵베르 주교가 언급한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Nouvelles Lettres edifiantes)》은 동아시아 지역[중국과 주변지역, 동인도 포함]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서한을 모아 프랑스어로 간행한 서한집 총서를 가리킨다. 이 서한집은 모두 8권으로 1818년에서 1823년에 걸쳐 파리에서 간행되었으며, 원제목은 ‘동인도와 중국 선교지에서 온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新編)’(Nouvelles Lettres des Missions de la Chine et des Indes Orientales)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서한집 총서는 1702년부터 1776년까지 총 34권으로 출간되어 널리 읽혔던 《감동적이면서 진기한 서한집(Lettres edifiantes et curieuses)》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17)

 

《감동적이면서 진기한 서한집》이 18세기까지 동아시아에서 활동한 예수회18) 선교사들의 서한을 모아 간행한 것이라면,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 19세기 초반까지 동아시아 지역에서 사목했던 선교사들의 서한을 모은 것이다. 따라서 예수회가 해체된 이후에 설립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해서는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에 관련 내용이 실리게 되었다. 특히 1820년에 간행한 제5권에는 사천대목구, 샴대목구와 함께 ‘조선’ 항목이 따로 분류되어 있고, 구베아 주교19)의 서한 2통[1797년 8월 15일자와 1801년 7월 23일자]과 1811년(신미) 조선신자들이 북경주교에게 보낸 서한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실려 있다. 앵베르 주교가 언급한 정약종의 순교 일화는 ‘신미년 서한’에 있는 내용으로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 제5권 327~329쪽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있다.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 제5권 ‘조선’ 항목에 실린 3통의 서한에는 1784년 조선교회의 창설부터 1801년(신유) 대박해까지 조선교회의 역사와 순교자들의 약전 등이 소개되어 있어 조선 선교지에 관심을 가지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특히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기 이전인 1829년에 조선 선교지를 파리외방전교회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의 조선 관련 서한들과 조선 신자들이 교황에게 올린 서한들도 함께 묶어 책자로 만들어 프랑스 전역의 신학교로 보내 조선 선교 지원자들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0) 따라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앵베르 주교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을 입수하여 조선에 대한 정보를 얻었던 것이고, 조선에 관심이 있는 다른 선교사들 역시 이 책을 일종의 필독서로 삼아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6년경 마카오에 있을 때 포교성 마카오 대표부의 움피에레스(Umpierres) 신부와 포르투갈 라자로회 소속 라미오(Lamiot) 신부를 통해 조선 선교지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21) 1825년 조선교회 대표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교황에게 보내는 서한이 마카오를 거쳐 1827년 로마교황청에 도착했는데, 마카오에 있던 움피에레스 신부가 라틴어 번역을 하고 다시 라미오 신부에게 번역문의 수정을 부탁했었다.22) 움피에레스 신부와 라미오 신부를 통해 조선 선교지의 상황을 알게 된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에 관심을 가지면서 《전교회 연보》에 원고를 투고하여 조선 선교지와 조선교회를 소개하였다.23)

 

브뤼기에르 주교가 《전교회 연보》에 게재한 내용을 앵베르 주교가 보았는지는 기록상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감동적인 서한집》 제5권이나 《전교회 연보》 게재 기사 모두 구베아 주교의 서한과 조선 신자들이 1811년에 작성한 ‘신미년 서한’에 근거한 것인 만큼 조선과 조선교회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 데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중국 파견 선교사인 구베아 주교나 조선 신자들의 서한 외에 앵베르 주교가 얻었던 또 다른 자료는 일본과 관련된 것이었다.

 

샤를르부아 신부가 저술한 《일본 역사》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손에 무기를 들고 불굴의 용기로 영주로서의 권한과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지방 영주가 있었는데, 신앙을 박해하던‘일본 국왕(empereur)’24)[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신자인 영주를 쳤으나 이기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국왕’은 그를 신임하는 척하며 조선을 정복하라고 조선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런 술책으로 ‘국왕’은 그 영주를 제거하고, 대다수가 신자였던 영주의 군대도 전멸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곳에서 읽은 이 나라의 역사책에도 (일본의) 침략에 관한 거의 같은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그 침략사건은 앞서 말한 그 해[1592년]의 일이라고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25)

 

여기서 앵베르 주교는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였던 샤를르부아(Charlevoix, 1682~1761) 신부의 저서인 ‘일본 역사’(Histoire du Japon)를 인용하면서 임진왜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819년부터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 선교에도 관심이 있었던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기 전 어느 시점에서 샤를르부아 신부의 저서를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와 캐나다에서 주로 활동했던 샤를르부아 신부는 활발한 저술 활동[교회사]으로도 유명한데, 일본 관련 저작은 분량과 질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717년 저술한 《일본 제국의 그리스도교 성립 · 발전 및 쇠퇴의 역사(Histoire de l’etablissement, des dt de la du christianisme dans l’empire du Japon)》는 일본 파견 선교사들의 서한 등을 자료를 취합하여 일본교회사를 정리한 거작이었다. 또한 샤를르부아 신부는 위의 책을 시대순으로 재편집하여 1736년 《일본의 역사와 일본 개론(Histoire et Description du Japon)》(9책)이란 책을 출판했다. 특히 1736년판 책은 여러 번 재편집이 되어 1754년 제2판은 《일본의 역사(Histoire du Japon)》(6책)로, 1842년 제3판은 《일본의 역사와 개론(Histoire et Description du Japon)》(1책)으로 간행되었다. 이 중 앵베르 주교가 읽었다는 ‘일본 역사’(Histoire du Japon)는 《일본의 역사(Histoire du Japon)》라는 제목으로 나온 1754년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6)

 

샤를르부아 신부의 저서는 일본(교회)사의 관점에서 서술했기 때문에 조선과 관련된 부분은 주로 임진왜란과 일본으로 끌려와 천주교 신자가 된 조선인 포로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27) 따라서 앵베르 주교 역시 샤를르부아 신부의 저서를 기본으로 삼아 조선 역사책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조선역사를 이해하고 있었다. 《일본의 역사》를 인용한 부분은 위의 자료 외에는 없기 때문에 앵베르 주교가 얼마만큼 일본(교회사)측 자료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음 장에서 더 논의하겠지만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침략을 받는 약자와 침략하는 강자라는 일본측의 시각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선 입국 전에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정보는 조선 신자들의 서한을 제외하고는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서한이 중심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 선교사들은 자신이 활동하던 중국이나 일본의 자료를 주로 참고하였고,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조선의 이미지를 그대로 투영시켜 서양에 전달하였다.

 

(조선) 조정의 대신들은 (1791년 진산사건 당시에) … 천주교를 완전히 뿌리뽑지 않을 경우 나라에 어떤 위험이 닥치게 될지에 대해서 국왕[정조]에게 아뢰었다. 국왕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천주교 신자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 전국의 관리들에게 아주 엄하게 지시하기를, 유럽 종교가 전파되지 않도록 아주 철저하게 감시하는 것은 물론 백성들이 자기 나라의 종교를 버리고 외국의 종교를 따르는 일이 없도록 백성들에게 이르라고 하였습니다. … 국경 지대에 배치된 관리들과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들에게는 단 한 사람의 천주교 신자도 나라를 빠져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물론 단 한 사람의 중국인도 조선에 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28)

 

조선 왕국은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나라입니다. … 조선 사람들이 쓰는 문자는 중국인들이 쓰는 문자와 같습니다. 하지만 발음은 다르게 합니다. … 조선 사람들은 중국인들의 후손인데다 중국의 속국이 되었기 때문에 중국인들과 같은 풍습과 관습을 갖고 있습니다.29)

 

위의 자료들은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 제5권에 실린 구베아 주교의 서한에 나오는 내용으로, 특히 뒷부분은 구베아 주교가 본문에 각주를 달아서 설명한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 파견 선교사인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국가(조정)를 선교사들의 입국을 막고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폐쇄적인 나라’로 인식하고 있으며, 중국측의 시각에서 ‘중국=종주국’, ‘조선=조공국=속국’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측과 일본측, 또는 피해자인 조선 신자가 기록한 자료들을 통해 앵베르 주교는 조선에 대한 사전 지식(정보)를 습득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전 정보를 통해 사제 없이 태동하여 질긴 생명력으로 존재하는 조선교회,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나라, 반대로 가혹하게 신자들을 탄압하는 야만스런 ‘조선’국가라는 인상이 강하게 심어졌을 것이고, 이는 천주교 사제로서 또 선교사로서 하루빨리 조선에 들어가 조선신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을 일으키게 하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반면 천주교를 탄압하는 조선 특히 정부와 지배층에 대한 부정적이고 적대적 인식을 심어주는데도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국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 중국과 같은 풍습과 관습을 가진 나라로 규정함으로써 조선국가=중국의 종속국이라는 인식을 심화시켰을 것이다.

 

 

Ⅲ. 청일(淸日) 양국에 속박된 나약한 조선 국가

 

1837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한 앵베르 주교는 몇 개월간 조선말을 배운 다음 바로 사목활동에 나서게 되었는데 동시에 성인이 된 조선신자 4명을 신학생으로 받아들여 신학교육을 실시하였다.30) 주교의 주변에는 학식이 있는 신자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여러 조선의 한문 문헌을 구해보고, 조선의 정세나 기타 관련 자료, 일본, 유구에 대한 정보까지 얻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다음 앵베르 주교는 1838년 11월부터 1839년 순교하기 전까지 여러 통의 서한을 통해 조선교회와 조선 신자들의 상황, 조선교회에 대한 정부(지배층)의 정책, 조선을 둘러싼 국제관계, 동아시아 선교 전략 등을 기술하였다.31) 따라서 이들 서한을 분석함으로써 앵베르 주교가 가지고 있던 조선(국가)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고자 한다.

 

앵베르 주교가 직접 체험한 후 조선에 대해 가졌던 첫인상은‘작고 보잘것없는 나라’, ‘척박하고 내다 팔 것도 없는 가난한 나라’라는 것이었다.

 

높은 벼슬에 있는 어느 박식한 신자32)가 나에게 가르쳐준 이 나라의 종교와 역사에는 주목을 끄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지구의) ‘동쪽의 한 구석’(coin de l’orient)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서남) 3면이 바다인 이 작은 왕국에 별스러운 일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33)

 

지리적인 면에서 보나 토질 면에서 보나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 나라입니다. 지면은 고르지 못하고 산이 많습니다. 특히 동쪽에 산이 많은데, 얼마나 높은지 그 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지면이 매우 거칠기 때문에 평야라고 할 만한 곳은 전혀 없고 산과 산 사이에 끼어 있는 좁거나 약간 넓은 계곡이 있을 뿐입니다. … 본래 비옥하지 못한 조선의 땅은 농민들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더 비옥해지지 않습니다. … 이곳의 (겨울철) 추위는 프랑스의 추위보다 훨씬 더 혹독합니다. (지난 1838년) 1월 24일에 저는 미사 동안 제 성작(聖爵) 안의 포도주가 어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제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불운한 이 지역의 산에는 맹수들이 많습니다. 특히 호랑이가 이 지역에 넘쳐납니다. 해마다 적어도 천 명의 희생자가 그 이빨에 물려죽습니다.34)

 

너무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구리나 생사(生絲)를 팔 때에 이익이 날지 모르지만, 상인들은 큰 이익을 남길 만한 장사를 하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35)

 

앵베르 주교가 볼 때 고국인 프랑스나 오랫동안 사목활동을 했던 중국(사천성)에 비해 조선의 자연환경은 혹독한 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하여 외국과 무역을 제대로 할 수도 없는 나라라는 평가는, 외국과의 무역[외국인과의 교류]을 하지 않는 이유가 결국 조선의 가난함[후진성] 때문일 거라는 왜곡된 인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조선 국가에 대해 앵베르 주교가 주목했던 것은 인구가 적다는 점이었다. 그가 보기에 ‘보잘것없는 나라’인 조선에서 인구가 감소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 즉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 ‘임진왜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조선) 땅의 척박함도 놀랍지만 그다음으로 조선에서 가장 놀라운 일은 인구의 저밀도입니다. 이 나라의 인구가 감소하는 이유는 과거에 여러 가지가 있었고 현재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어떤 이유들은 기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전염병과 끔찍한 기아가 너무 자주 조선의 인구를 한꺼번에 앗아갑니다. 다른 이유들은 역사적 사건에 기인합니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일본인들이 많은 주민을 학살했고, 그 당시에 이 나라에 있었던 8개의 도(道) 중 5개의 도를 점령하고 통치했습니다. 그들의 지배는, 강력한 중국 군대의 지원을 받은 조선인들이 일본인들과 싸워 그들을 물리친 1597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패전하였으면서도, 승전한 조선인들에게 그 어떤 조공보다도 가장 야만적인 조공, 즉, ‘사람 가죽’[人皮] 30개를 매년 일본에 바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처음에 이 잔학한 조공에 동의했던 조선 국왕의 훗날의 간청으로 조공은 30명의 사람 가죽 대신 은, 쌀, 직물, 그리고 제가 잘 알지는 못하나 같은 근수에 금값과 같은 값으로 팔리는 어떤 약초[인삼]로 바뀌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수많은 전투와 (대량)학살이 따른 이 침략이 조선의 인구 저밀도의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36)

 

당시 조선의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였다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고,37) 임진왜란에 대한 앵베르 주교의 기술도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38) 엽기적인 ‘사람 가죽’ 조공39) 언급 자체가 이 기술의 사실성 자체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앵베르 주교는 이 모든 것을 역사적 사실로 소개하고 있으며, 자신이 읽었던 샤를르부아 신부의 《일본 역사》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했다.

 

임진왜란에 대해 일본측의 자료만 볼 수 있었던 일본 파견 선교사들이나 그 자료를 활용했던 샤를르부아 신부는 일본의 시각에서 왜곡된 조선 정보를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40) 하지만 앵베르 주교는 조선에 들어가 조선인과 조선 서책을 통해 직접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왜곡된 조선 인식을 시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인 선입견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41) ‘보잘것없는 나라, 조선’은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고 표현할 수도 없으며, 대신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 ‘강대국’이나 문명세계에 속한 서양인들(선교사)에 의해서만 보여지고 표현될 수 있다는 ‘오리엔탈리즘’적 사유방식이 앵베르 주교에게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42)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굴욕적인 패전국, 조공국 조선’의 모습을 여과 없이 사실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에서 퇴각했을 때에) 일본인들 모두가 조선에서 철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00명의 일본 군인이 조선의 남동쪽 끝에 있는 어느 마을[동래 왜관]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일본군들이 고집스럽게 그곳에 있으려는 목적은 두 가지인데, 첫째 목적은 수탈과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 땅에 일본군이 남아있어서, 일본은 조선이 해마다 해야 하는 조공을 보다 더 확실하게 받아가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역과 관련 있는 것입니다. 일본군들이 점령하고 있던 마을은 (낙동강) 강가에 위치해 있었는데, 훌륭한 포구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일본의 배들이 포구를 이용하도록 하고, 포구에 들어오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43)

 

약 200년 전부터 매 10년마다 조선은 사절을 일본으로 보내곤 했으나 약 30년 전부터 일본은 조선 사신의 입국마저 거부합니다. 일본인들이 조선 사신의 일본(본토)의 입국을 거부하는 이유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있는 대마도(對馬島)라고 하는 큰 섬의 통치자가 조선과 관련된 일본의 모든 일을 관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44)

 

(대마도라고 하는) 이 섬의 통치자는 조선이 일본에 내는 조공을 징수하는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800년도부터 일본인들이 10년마다 (조공을 바치러) 일본으로 가던 조선 사절단[통신사]을 맞아들이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조공을 바쳐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가 왔었으나, 너무 약소국인 조선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45)

 

앵베르 주교가 ‘일본군대의 주둔지’라고 생각했던 곳은 동래(東萊)에 설치했던 왜관(倭館)이었다. 동래 왜관은 일본군의 주둔지가 아니라 대일본 교역의 창구였고, 일본(대마도)과 정기적인 교역이 있었는데, 이 무역은 조선 정부와 맺은 조약에 따라 엄격히 제한되고 통제되었다. 하지만 앵베르 주교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군이 계속 주둔하면서 조선에게 조공을 받아내고 있다고 보았고,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동래 왜관이 바로 일본군의 주둔지, 조공 징수관청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일본에 보내는 조선 사신, 즉 통신사(通信使)를 조공 사절로 오해하고 있었다. 역사적 사실로 보면, 임진왜란 이후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로 조·일간에 화의가 성립되었고 19세기 초반까지 양국은 대등한 교린외교(交隣外交)를 펼쳤기에 ‘조공’이란 없었다. 다만 일본 내부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통신사를 ‘조공사’로 변질시켜 선전했으므로 일본에 머물렀던 서양인들도 조선=‘일본의 조공국’이란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샤를르부아 신부의 저서 등을 통해 앵베르 주교까지도 그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30년 전에 조선 사절단을 일본에서 거부했다는 내용은 1811년 일본 내부의 사정으로 통신사가 중지된 사실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앵베르 주교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조선 사절단을 거부하고 대마도를 통해 조공을 징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일본 종속국의 위치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면서 ‘약소국 조선’을 한탄하였다.

 

앵베르 주교가 조선, 일본관계에 대해 언급한 사안들, 즉 조선=일본 종속국, 대마도의 조선 조공 징수와 동래 군대 주둔 내용은 프랑스의 선교회 본부에도 알려졌고, 19세기 후반 대표적인 조선 소개서로 역할을 한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1874년 간행] ‘서설’46)에도 실려47) 서양인 독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즉 서양인들이 부정적인 조선 인식을 가지고 확대하는데 앵베르 주교의 서한 기록이 일조했음을 알 수 있다.

 

앵베르 주교 서한 외에도 다른 조선 파견 선교사들이 보낸 서한과 자료들을 검토할 수 있었던 달레 신부는 동래 왜관에 대해 조선측 기록을 입수할 수 있었다. 즉 조선 정부에서 왜구 진압과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 왜관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달레 신부는 조선측의 사료가 일본에 종속된 현실을 부끄러워하여 거짓으로 꾸며진 것이라고 치부하여 각주로 서술하고, 앵베르 주교 서한에 나오는 조선=일본 종속국, 대마도의 조공 징수, 사람가죽 조공 등을 ‘역사적 사실’로 기술하였다.48) 이를 통해 앵베르 주교 서한에서 드러나는 왜곡된 조선 인식이 19세기 후반 서양 세계에 더욱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앵베르 주교에게 조선은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당시 만주족의 청나라에 종속된 나라였다. 그 계기는 역시 1636년에 일어난 전쟁, 병자호란이라고 인식했고, 그 전쟁의 참화가 조선 인구의 감소와 국력의 퇴화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중국인들도 1636년에 조선을 침략했는데, (일본인에 의한 조선 점령기간보다 중국인들에 의한 조선 점령)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명 살상은 덜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인들이 조선의 북부지방에서 서울까지 점령하여 사방에 유혈의 참극이 빚어졌습니다. 그때에 이 나라가 입은 손실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생명력을 거의 고갈시킨 이런 (잇단) 외국의 침입은 조선의 정치적 위상을 땅에 떨어지게 하였고 나라의 자주성도 파괴하였습니다. …

 

이 가련한 나라는 일본에 종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종속되어 있습니다. 조선 정부는 중국 황제에게 해마다 충성을 서약해야만 하며 이를 위해 고위직에 있는 사신들을 해마다 북경으로 보내야 합니다. 다행히도 중국에 바치는 조공은 일본에 바치는 것만큼 부담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담스러운 것이며 특히 굴욕적인 것입니다. 조공을 바침으로써 조선은‘대국’의 속국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가장 비통한 일은 이 종속이 끝나는 날이 있으리라는 희망도 없이 이러한 굴종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49)

 

전쟁은 수개월 만에 끝났지만 병자호란의 참화와 후유증은 7년간 진행된 임진왜란 못지않았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는 조선을 굴복시키고 점령한 지역을 무자비하게 파괴했으며,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조선인을 노예로 끌고 갔다. 하지만 전쟁의 피해가 200년이 지난 앵베르 주교 당시까지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대부분 조선 파견 선교사들은 조선과 중국의 조공 관계를 조선의 자주성이 결여된 채 굴욕적인 종속관계로만 치부했을 뿐, 강대국인 중국과의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조선이 외교와 무역을 결합한 사대(事大)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1825년 조선 신자 대표로 교황에게 탄원 서한을 올린 유진길 등이 “조선이 중국에 속해 있지만 풍속과 지역[나라]이 다르고 옛날 중국의 제후처럼 예속된 것은 아니다.”라고 분명히 언급50)한 것처럼 앵베르 주교와 만났던 조선 신자들은 중국과 조선의 실제적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앵베르 주교는 자신의 선입관을 수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에 부합한 정보만을 받아들여 부정적 인식을 더욱 강화했다.51)

 

가련한 조선왕국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강대국의 속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속박을 벗어날 형편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조선에 있는 군대는 그 수효가 적은데다 가진 무기는 성능이 떨어지는 화승총 몇 자루뿐이기 때문입니다.52)

 

이처럼 미약한 (군사) 장비밖에 가지지 못한데다가 활력도 없는 (조선) 백성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강대국이 채운 족쇄를 어떻게 부수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53)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서 이득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 조선의 무능하고 약한 정부는 입항하는 외국 선박을 보게 되면 의심을 하기 쉬울 것입니다.54)

 

앵베르 주교가 본 조선(조선인)은 200년 전에 잇달아 일어난 전쟁의 결과로 중국과 일본이라는 주변 강대국에 종속되어 조공을 바치는 나약한 나라였다. 또한 전쟁 이후 ‘정체된 상태에서’ 인구는 감소하는데다 보잘것없는 무기밖에는 없고 예속을 벗어나겠다는 의지마저 보이지 않는 무기력한 나라(백성)였다. 나약하고 무기력하기 때문에 종주국 외에 다른 나라와는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폐쇄적인 나라였다. 이러한 인식은 일찍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서도 나타나는데,55) 가난하여 외국과 교류가 없는 나라라는 인식은 더 나아가 ‘폐쇠적이고 숨어있는 은둔의 나라’라는 선입견을 고착화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56)

 

앵베르 주교가 입국 전에 조선에 대해 가졌던 지식이나 입국 후 자신이 ‘체험’하고 수집한 정보 모두 단편적이고 사실여부가 부정확한 경우가 많았다. 그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굴복하여 조선이 취한 조처라고 언급한 내용 역시 역사적 사실과 달랐다. 앵베르 주교는 조선 국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온 중국 장군을 신처럼 숭배할 사원을 서울 문밖에 짓기로 하고, 과거에 3년마다 중국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러 보내던 사절단을 이후 해마다 파견하기로 약속했다고 서술했는데, 이는 조선이 이전보다 더 굴욕적이고 예속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려는 것이었다.57) 그런데 여기서 말한 중국 장군을 숭배할 사원은 관왕묘(關王廟)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전쟁의 수호신으로 중국에서 추앙받던 관우의 사당이 조선에 세워지게 된 것은 병자호란 때문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참전했던 명나라 군사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또한 조선이 중국에 매년 사절단을 파견한 것도 청나라 때가 아니라 명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그것도 실리적 목적을 추구한 조선의 요청으로 매년 2~4회 사절단을 파견했던 것이다. 관왕묘에 대한 앵베르 주교의 잘못된 정보는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서설’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58)

 

앵베르 주교는 같은 서한에서 조선의 군사력이 약하다는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에는 대포가 1문밖에 없다고 했는데,59)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 초기부터 국방을 위해 각종 대포의 수입과 제작에 힘을 기울였고 이러한 대포들은 강화도를 비롯한 중요한 군사 요새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왜란과 호란 이후에는 서양의 대포가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홍이포(紅夷砲)와 불랑기포(佛郞機砲)였다.60) 이처럼 앵베르 주교는 정확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나약하고 굴욕적인’ 조선의 이미지에 부합한 정보를 수집하여 기록했던 것이다.

 

그런데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대해 가진 ‘(자주성이 없이) 나약하고 무기력하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사실’로 받아들이게 한 계기는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가 보기에 조선이 일본에 종속된 것은 임진왜란 때문이었고, 조선이 만주족의 청나라에 종속된 것도 병자호란이라는 전쟁 때문이었다. 이처럼 전쟁이 조선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고착화시키게 된 것은 앵베르 주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두 전쟁이 일어난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기록에서 비롯되었다.61)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전쟁이 선교사업에 미칠 영향에 주목하던 중국과 일본의 선교사들은 전쟁의 소식과 함께 조선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였고, 이를 통해 조선이 단편적이나마 서양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62)

 

앵베르 주교가 이런 기록들을 직접 보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주교의 조선 인식 틀이 이전의 중국과 일본 선교사들의 것과 유사하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16세기 후반 이후 형성되었던 서양인들의 조선 인식 틀에서 앵베르 주교가 그리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한 인식이 생성되는 원형 단계에서 이미 ‘전쟁의 참화를 겪고 굴욕적인 패전을 한 나라’, ‘(자주성 없이) 주변의 강대국에 예속된 나라’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지 200년이 지난 뒤에 조선에 입국한 앵베르 주교도 기존의 고착화된 조선 이미지를 가지고 조선 국가와 조선인들을 바라보았고, 19세기 중반 조선사회에 나타나고 있던 부정적 측면이나 자신이 입수한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전쟁의 후유증’을 증명하는 ‘사실’로 확인했던 것이다.63)

 

 

Ⅳ. 천주교회를 박해하는 잔인한 조선 정부

 

엥베르 주교가 조선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던 그 이면에는 조선의 정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깔려 있었다. 즉 주변 강대국에는 ‘무능하고 나약한 정부’가 천주교회와 천주교 신자에게는 잔인하다는 점을 비난한 것이다. 여기에는 ‘무기력한 조선인 신자’에 대해 안타까운 감정도 섞여 있었다.

 

만일 국제 사회적으로 볼 때 몹시 비천한 형편이 된 것을 종교적 긍지로써 극복하여, 정치적으로 (타국에) 종속되었어도 천주님의 자녀들이 가진 내적 자유를 누리는 나라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이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종주국에 굴종하는 그 만큼 우리에게는 잔인한 나라입니다. 이곳의 통치자들은 나라를 짓밟는 일본과 중국의 속박을 소리 없이 견디면서도 자기들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는 신자들을 박해합니다.64)

 

성교회[천주교]는 30여 년 전부터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신자들을 처벌할 목적으로 1801년에 공포된 가혹한 법령[토사반교문]들은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그 법령에 따라 신앙을 지키겠다는 신자는 사형을 받고, 배교자들은 북동부 지방이나, 대륙에서 약 20리외[약 80Km] 떨어진 남쪽의 넓은 섬에서 20년의 귀양살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65)

 

신자들이 법에 명시된 벌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받은 포졸들이 임의적으로 자행하는 학대는 신자들에게 훨씬 더 고된 시련이 됩니다. 어느 ‘교우촌’에 쳐들어가기만 하면 포졸들은 닥치는 대로 아무나 체포하고, 도주하여 피신한 주민들이 자기들의 집에 놓아둔 물건들을 몽땅 훔쳐갑니다. (그리고) 집의 건축 자재가 값어치가 좀 있어 보이면 그들은 집을 부숴 건축자재를 팔고, 값어치가 없어 보이면 그 집을 불태워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가엾은 '새 신자'들은 박해자들을 피하려고 높은 산이나 깊은 산골에 피난해야 하는데 거기서는 머지않아 빈곤으로 죽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수백 명씩의 신자가 영양실조로 죽는 것을 봅니다.66)

 

이 나라의 신자들은 법의 보호를 조금도 받지 못하고 무조건 흉악범으로 간주됩니다. 게다가 포졸들은 신자들에게 인간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가혹하고 모욕적인 일을 임의적으로 자행합니다. 중국에서는 시골 사람들조차도 그와 같은 부당한 가혹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하려고 무장 봉기를 할텐데...67)

 

선교사이자 조선대목구의 장상이었던 앵베르 주교의 입장에서 조선 정부는 천주교회와 천주교 신자에게 가혹한 박해자였다. 1802년 1월 25일(음력 1801년 12월 22일)에 반포된 ‘토사반교문(討邪頒敎文)’은 유교의 옹호와 천주교 배격이라는 조정의 입장을 표방하면서 일상적인 박해와 처형의 정당성을 확인시켜주는 ‘법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68) 이 ‘법률’을 실제로 집행하는 포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임의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괴롭히고 재산을 강탈하곤 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들은 법률에 규정된 처벌로 목숨을 잃을 뿐 아니라 포졸들의 횡포에 시달리다가 굶주림으로 죽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앵베르 주교는 천주교 정책 전반을 좌우하는 조선의 집권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집권자에 대한 기본적 판단 기준은 그가 조선교회에 대해 ‘박해자’인가 아닌가 하는 여부였다.

 

비신자들 가운데 우리를 기쁘게 해 주는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김유근이라는) 이 나라의 제1 ‘섭정’[세도가]은 우리를 보호해 주지는 않으나 해치지도 않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가차 없는 처벌을 정하는) 법령의 적용이 완화되도록 언제나 나섭니다. 조선에서 천주교에 밝은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우선적으로 천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겠지만, 둘째로는 그 ‘섭정[세도가]’의 호의 때문이겠습니다. … 우리 (교회)에 대한 그의 호의는 그 아버지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셈입니다. (김조순이라고 하는) 그의 아버지는 … 신자들을 보호해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신자들에게 관대하였습니다. (1801년 박해 때에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 신자들을 고맙게 생각해서 그 신자들의 후손들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위 서한에서 앵베르 주교는, 1801년 천주교 박해 당시 안동 김씨 가문의 김조순이 반대파에 의해 천주교 신자로 몰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심문을 받던 신자들이 끝까지 김조순의 이름을 대지 않아 무사했기 때문에 이를 감사히 여긴 김조순이 자신이 집권할 때 힘써서 천주교인들을 보호해주었고, 그의 아들 김유근도 아버지의 방침을 계승하여 천주교회의 보호자 역할을 했다고 기술한 것이다.69) 실제 김조순이 천주교 신자로 고발된 적도 없고 김조순이나 김유근 등의 안동 김씨 세도가 역시 기본적으로 천주교 금압(禁壓) 정책을 유지했다. 다만 정권 안정을 위해 천주교 문제가 대규모 옥사나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소극적 내지는 방관적인 자세로 천주교 신자를 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던 앵베르 주교는 당시 정권을 담당했던 안동 김씨 세도가에 대해 그들이 천주교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를 반대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해 주고 있다고 ‘희망’ 섞인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반면 1801년 박해 당시 임금이었던 순조나 1827년 박해의 ‘주모자’로 인식했던 효명세자(뒤에 익종으로 추존됨)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특히 부왕을 대신해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효명세자에 대해서는 그의 죽음이 박해에 대한 ‘천벌’일 것이라고 할 정도로 ‘박해자’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박해자들의 면모를 차례로 살펴보면, 한 사람[순조]은 (1801년에 신자들을) 박해하다가 (정신이) 백치 상태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효명세자]은 (신자들을) 박해하다가 비참하게 요절했습니다. 그리고 현재에 몸이 매우 약하고 건강이 위태로운 11살짜리의 어린 아이[당시 국왕 헌종]가 그 유일한 희망이 되는 자손이 너무 없는 왕가(王家)를 볼 때에 “천주님께서 (이 가문을) 채찍질하시는구나!” 하는 말을 어떻게 하지 않겠습니까? ‘섭정’[세도가]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 김유근)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하늘의 벗들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 덕분으로 우리는 비교적 평온하게 지냅니다. 천주님께서 그를 장수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70)

 

이러한 앵베르 주교의 판단은 정확한 정보에 근거했다고 보기 어렵다. 효명세자는 부친인 순조나 외가인 안동 김씨 세도가와 마찬가지로 천주교에 대해 적극적인 탄압정책을 취하지는 않았다. 1827년(정해)에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에 거쳐 일어났던 박해는 효명세자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지방관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전국적인 박해로 번지지는 않았다.71) 다만 국왕을 대신하는 대리청정의 담당자였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박해자의 주동자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앵베르 주교 역시 이러한 신자들이 제공하는 정보에 의거해 ‘안동 김씨=보호자’, ‘국왕(순조, 효명세자)=박해자’라는 이분법적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안동 김씨 세도가가 정권을 잡고 있는 비교적 평온한 상황 속에서 앵베르 주교는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활발한 사목활동을 벌여 교세를 확장시켰다. 하지만 천주교회에 우호적인 정세는 언제 변할지 알 수 없었고 대규모 박해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했다. 따라서 앵베르 주교는 조선의 천주교회가 박해에서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결국 조선 국왕의 개종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했다.

 

가련한 국왕이요, 가엾은 국민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이라도 한다면, 그들은 저승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악마의 영원한 속박에서 벗어날 텐데!72)

 

1392년부터는 현재의 송(Song, 조선의 오류) 왕조의 시대이지만, 이 왕조는 오래지 않아 그 최후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사랑하올 주님께 현재의 왕조를 보살펴 주시고, 특히 국왕들을 신앙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간구합니다. 왜냐하면 반란이나 내란이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73)

 

아, 안타깝구나! 이 가련한 조선국왕이 우리 교회의 신자가 되려고만 한다면, 내가 그에게 (현지에 있는) 대부(代父) 대리가 필요하겠지만 프랑스 국왕을 세례 대부로 세우라고 기꺼이 권유할텐데... 그러면 (자기 조선의 형편을 알게 된) 프랑스 국왕은, 대자(代子)[조선 국왕]를 일본에 바치는 그 악명 높은 조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한 척이나 2척의 군함을 보내줄텐데.74)

 

조선 선교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앵베르 주교가 보기에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 정책을 바꿀 수 있는 주체는 잔인한 박해자에 저항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조선인 신자들이 아니라 지금은 박해자의 위치에 있지만 개종만 하면 천주교의 보호자가 될 수 있는 국왕이었다. 또한 국왕의 개종이 가능하다면 대목구장인 자신이 조선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매개자가 되어 프랑스의 힘을 빌어 ‘나약한 조선’의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이다.75)

 

1830년에 랑글루아 신부님께 보내드린 편지에서 (조선 입국로에 대한) 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 바닷길은 더 안전하고 더 빠른 길입니다. … 그런 사실을 근거로 하여 신앙심이 깊은 (프랑스의) 우리 착한 샤를르(Charles) 10세 국왕께 바다를 종횡으로 누비는 프리깃 함76)(의 선장들) 가운데 한 명에게 페낭이나 마카오로 가도록 지시해 줄 것을 간청했으면 합니다. 그곳에서 조선으로 갈 선교사와 통역할 (조선인) 신학생을 승선시킨 다음 선장은 조선 연안을 따라 항해하다가 … 해변에서 천주교적인 몸짓을 하는 사람들이 보이면 작은 배를 바다에 띄우고 그 사람[신자]들과 대화해보도록 그들에게 신학생을 보낸 다음에 선교사도 상륙시킬 수 있겠습니다.77)

 

앵베르 주교는 1830년 당시 선교사의 조선 입국 방법을 구상할 때도 프랑스 국왕의 힘을 빌려 군함을 파견하자고 제안했다. 이 때 군함 파견은 공식적인 외교 경로가 아니라 프랑스 국왕의 명을 받은 군함이 비밀리에 선교사와 조선말을 통역해줄 조선인 신학생을 조선 땅에 상륙시킨다는 것이었다.78) 이러한 앵베르 주교의 구상은 1830년대 상황에서 현실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아편전쟁이 끝날 무렵인 1842년 프랑스 해군의 세실 함장은 조선 탐험을 위해 당시 마카오에 있던 김대건 신학생과 메스트르 신부를 통역사 자격으로 군함에 태우기도 했다. 앵베르 주교 당시에는 현실성이 별로 없어 보이던 프랑스 군함 파견이 1840년대 이후 본격적인 서양제국주의의 중국 침략 과정에서 현실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국왕의 개종이라든가 프랑스 군함의 파견이라는 앵베르 주교의 구상에는 평화적인 방법이 제기되었고 어떤 무력행사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밖으로 중국과 일본에는 무기력하고 나약하지만, 안으로 천주교에게 잔인한 나라’ 조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국왕 개종을 포함한 천주교의 전파와 천주교 ‘종주국’인 프랑스의 힘이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79)

 

 

Ⅴ. 맺음말

 

앵베르 주교는 중국과 일본을 통해 전해진 왜곡된 정보를 선지식으로 삼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조선에 대해 편향적이고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고, 박해받는 조선 천주교회의 장상이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로서 조선정부나 지배층에 대해 박해자냐 아니냐의 여부로 판단하는 이분법적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에 입국한 뒤에도 제한된 활동범위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한계 문제가 겹쳐 조선에 대한 기존의 선입견을 더욱 심화시키거나 또 다른 왜곡된 정보와 인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이는 앵베르 주교가 타자(他者)인 조선 국가와 조선 사회가 가지는 고유성과 독특성을 존중하거나 객관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긍정[선교]과 부정[박해]의 익숙한 구도 속에 용해시켜 버리는 태도를 취했으며, 결국 타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80)

 

앵베르 주교에게 조선 국가(정부)는 두 가지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즉 대외적으로는 청일 두 강대국의 침략(전쟁)을 받아 속박된 나약한 나라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천주교회를 박해하는 잔인한 나라라는 것이다. 이러한 앵베르 주교의 조선 인식은 19세기 이래 확산되고 있던 서구중심주의적 사고(동아시아에 대한 부정적 입장)와 문명화=복음화라는 사명 의식의 흐름 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작성한 서한의 내용이 선교잡지인 《전교회 연보》와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서설 등을 통해81)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그러한 부정적 인식이 서양세계에 더욱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선교사는 종교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유럽인으로서 자의식을 약간 유보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는데, 영영 자기 고향을 떠나 새로 주어진 고향에서 살기 위해 떠나는 자라는 특수한 경우가 적용되기 때문이다.82) 조선 파견 선교사들도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살면서 조선인들의 생활방식에 적응하고 조선사회를 차분히 관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짐으로써 기존의 선입견이나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나는 모습도 보이게 된다. 대표적 경우가 22년간 조선에 살았던 다블뤼 주교라 할 수 있다.83)

 

21개월에 불과한 조선 거류 기간 동안 앵베르 주교도 나름대로 조선 관습과 문화에 적응하고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미 15년간 베트남과 중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좀 더 유화적인 태도로 조선 신자를 대했고 그리스도교 교리와 정면충돌하지 않는 한 조선 문화를 나름대로 받아들이려고 했다.84)

 

1830년대 이후 조선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조선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 기록하여 유럽 세계에 알렸고, 이 정보들이 서양세계의 ‘조선 인식’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조선 선교사들이 가졌던 조선 인식에는 공통적인 특성을 보이는 한편 각 개인의 독자적인 이해 방식도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앵베르 주교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브뤼기에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페레올 주교 등의 조선 인식을 비교 검토하는 것도 주요한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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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세기 후반 이래 서양에서는 조선(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을‘극동’(極東, Far East[영어], extremite de l'Orient[프랑스어])이라 불렀다. 유럽을 중심으로 가깝고 먼 차이를 가지고 아시아 대륙을 극동 · 중동(中東) · 근동(近東)으로 크게 구별했던 것이다. 지역범위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내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극동’의 범위는 편차가 크다. 가장 한정적이고 일반적인 범위는 동부 시베리아 · 몽골 · 중국 · 한국 · 일본을 포함하는 지역이나, 필리핀 ·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 반도 · 말레이 제도 등 동남아시아 지역을 포함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인도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 역시 ‘극동’이란 지역개념을 사용하였는데, 본 논문에서는 ‘동아시아’로 표기하겠다.

 

2)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은 중국이나 일본 자료에 주로 의존했으므로 간접적이고 제한적인 정보인데다가 중국과 일본의 시각을 그대로 투영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하멜의 기록 역시 이전시기부터 훨씬 풍부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했지만, 조선에 대해 야만과 미개의 이미지를 심는데 일조했다. 더욱이 여러 가지 편집본이 나돌면서 잘못된 정보가 삽입되어 왜곡된 조선 이미지를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정성화, 〈16세기 유럽 고서에 나타난 한국 : 이미지의 태동〉, 《역사학보》 162, 1999 ; 프레데릭 불레스텍스 지음, 이향 · 김정연 옮김, 2001,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 청년사, 제1장 ; 이지은, 《왜곡된 한국 외로운 한국 - 300년 동안 유럽이 본 한국》, 책세상, 2006, 제1장 참조.

 

3)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조선 인식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김용구, 〈서양 선교사들이 본 한국인상〉, 《국제문제연구》 9,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1985 ; 김정숙, 〈깔래 신부 활동을 통해서 본 1860년대 조선 가톨릭 문화〉, 《구곡 황종동 교수 정년기념 사학논총》, 1994 ; 김정옥, 〈박해기 선교사들의 한국관〉, 《한국교회사논문집》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 여동찬, 〈개화기 불란서 선교사들의 한국관〉, 《교회사연구》 5,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 최석우, 〈재한 천주교 선교사의 한국관과 선교정책〉, 《한국근대종교사상사》, 원광대학교출판국, 1984 ; 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제2부 ; 조광, 〈19세기 중·후반 프랑스 선교사의 한국인식 - le Pere Calais, M.E.P.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景仁文化社, 2010.

 

4) 앵베르 주교는 동아시아 선교를 위해 프랑스를 떠난 1820년부터 조선에서 순교하는 1839년까지, 선교지로 가는 여행 도중이나 사목 활동을 하는 선교지에서 많은 서한을 썼다. 앵베르 주교가 순교한 이후 파리외방전교회에서는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주교의 서한들을 뽑고 또한 다른 곳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한들[포교성성, 개인 소장]도 필사하여 책으로 묶었는데, 그것이 ‘앵베르 주교 서한집’(A-MEP, Vol.1254, Lettres de Mgr Imbert)[총 45통]이다. 국내에서는 이 서한의 역사적 가치에 주목한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한국 관련 서한을 추리고 몇몇 서한을 덧붙여 1998년에 《앵베르(L. Imbert, 范世亨) 문서》라는 제목으로 판독본 책자를 발간했다. 그리고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 2011년 판독본 자료를 참조로 2통의 서한을 추가하여 새로 대조 판독 역주한 《앵베르 주교 서한》을 간행하였다. 본 논문에서 참조, 인용한 앵베르 주교 서한은 이 역주본을 따랐다.

 

5) 《전교회 연보(APF)》는 1822년 프랑스 리옹에서 결성된 선교후원 단체인 ‘전교회[전교후원회]’(L’CEuvre de la Propagation de la foi)의 기관지(소식지)이다. 1830년에 조선 관련 기사가 처음 실렸고 1834년부터는 ‘조선 선교지’ 고정란이 생겼다. 앵베르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도 이 잡지에 게재되었다. 《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 - Articles sur la Coree -》(전교회 연보 - 한국 교회 관련 기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08, ‘해제’ 참조.

 

6)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de l’Eglise de Coree)》(상하권)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달레(Dallet, 1828~1878) 신부가 1874년에 쓴 한국천주교회 역사서인데 특히 ‘서설’은 조선의 역사, 제도, 언어, 풍속, 종교 등에 대해 서술하고 있어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조선에 관심 있는 서양인들에게 조선 입문서로 많이 활용되었다. 조광,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서양과의 관계〉, 《한국사 32 - 조선 후기의 정치》, 국사편찬위원회, 1997, 512쪽. ; 김은영, 〈서양인이 읽은 조선 - 조불조약 체결(1886) 전 프랑스에서 생산된 출판물을 중심으로〉, 《서양사론》 99, 한국서양사학회, 2008, 224~226쪽 참조.

 

7) 앵베르는 1793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Province) 지방에 속한 액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 앵베르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그의 부모가 카브리에(Cabrie)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여 앵베르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07년경 그리스도교 은수회에서 운영하는 성 요아킴 기숙 학교에 들어갔고, 1812년에는 액스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일찍부터 해외 전교에 뜻을 두었던 앵베르는 1818년 10월 8일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갔다.

 

8) 교구장 또는 대목구장 밑의 부주교(副主敎, coadjuteur)는 계승권을 가진 주교로서 교구장(대목구장)이 유고시에는 자동적으로 교구장직(대목구장직)을 승계하였다.

 

9) 이석원, 〈1830년대 로마가톨릭의 동아시아 선교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활동〉, 《교회사학》 8, 수원교회사연구소, 2011, 98~100쪽.

 

10) 앵베르 주교는 조선과 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지역의 전교에 관심이 높았다. 그는 마카오 극동대표부의 르그레주아 신부와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동아시아 선교지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전교회[전교후원회]나 극동대표부의 선교 정책에 대해 질의를 하거나 자신의 구상을 제시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조선, 일본은 물론 유구 열도, 대만, 싱가포르, 페낭(신학교), 티베트, 부탄까지 논의의 대상에 포함될 정도로 범위가 넓었다. 이석원, 위의 논문, 108쪽.

 

11) 앵베르 주교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1833년 8월 10일자 서한(A-MEP, Vol.1254, f.73)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43~45쪽.

 

12) 앵베르 주교가 마카오 극동대표부의 르그레주아 경리부장 신부에게 보낸 1835년 8월 1일자 서한(AMEP, Vol.449, ff.1409~1410)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77쪽.

 

13) 김은영, 앞의 논문, 2008, 219쪽.

 

14) 앵베르 주교는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프로방스 지역 출신으로 대혁명이나 계몽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가톨릭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또한 해외 선교의 붐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성장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선교사의 꿈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프랑스의 종교적 환경과 선교사들의 성향에 대해서는 조현범, 위의 책, 2008, 제2장과 제3장 참조.

 

15) 서양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서양중심주의적 시각에서 ‘극동’이란 말을 광범위하게 사용했고, 이 말의 연상작용으로 조선과 일본은 ‘지구 동쪽 끝의 땅’이란 이미지가 강했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지상명령으로 삼았던 선교사들은 세상 동쪽 끝인 조선과 일본의 전교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매우 중시했다. 앵베르 주교가 가졌던 ‘극동’ 선교사로서 자부심은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1839년 3월 30일자 서한(A-MEP, Vol.1254, ff.139~140)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도 잘 드러나 있다. “저에게 한 가지의 큰 기쁨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매일 봉헌되는 미사 가운데서 첫 번째로 지내지는 미사는 바로 제가 (세상의 동쪽 끝[‘극동’]이자 해가 뜨는 이곳에서) 봉헌하는 미사라는 생각에, 따라서 오늘 그들을 시원하게 할 은혜를 곧 받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가장 먼저 알리는 사람이 바로 저라는 생각에 기뻐합니다.”《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485~487쪽.

 

16) 앵베르 주교가 피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30일자 서한(A-MEP, Vol.1254, f.120)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321쪽.

 

17) 김은영, 〈예수회 서한집 『교훈적이고 호기심 어린 편지』(1702~1776)와 조선〉, 《신학과철학》17,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2010, 5~9쪽.

 

18) 1540년 정식으로 설립한 예수회는 중국과 일본, 인도 등에서 활발히 선교활동을 하다가 1773년부터 1814년까지 반대파의 압력에 의해 일시 해체되었다. 1814년 복구된 이후 예수회는 선교활동을 재개했지만 세계 전교의 주도권은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로 넘어가게 되었다. 김은영, 위의 논문, 2010, 13~14쪽.

 

19) 구베아 주교는 북경교구의 교구장으로서 조선교회도 1792년 이래 그의 관할 아래 있었다. 따라서 북경을 방문한 조선교회의 파발꾼이나 조선 파견 선교사 주문모 신부를 통해 얻은 조선교회 관련 정보를 유럽세계에 소개할 수 있었다.

 

20) 브뤼기에르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1929년 5월 19일자 서한 ; 샤를르 달레 원저, 安應烈 · 崔奭祐 역주, 《韓國天主敎會史》 中,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225쪽.

 

21) 정양모 · 윤종국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83~85쪽, 137~138쪽.

 

22) 달레 원저, 위의 책, 1980, 212쪽, 각주 9번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역주본), 137~138쪽에 의하면 라미오 신부는 1811년 신미년 서한의 번역을 담당했었다고 한다.

 

23) 《전교회 연보(APF)》 Vol.3(1828), pp.234~242; Vol.4(1830), pp.203~206; Vol.6(1833), pp.543~551, pp.552~587.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역주본), 82~95쪽, 189~229쪽 참조.

 

24) 여기서 일본 국왕(empereur)는 천황(天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지배자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를 가리킨다. 서양 선교사들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가리킬 때 태합(太閤 : 은퇴한 섭정)의 일본식 발음인 ‘타이코(tayco, taiko)’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일본 국왕(empereur)이라고도 하였다.

 

25) 앵베르 주교가 앙리 볼로에게 보낸 1838년 12월 1일자 서한(A-MEP, Vol.577, ff.513~514)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397~399쪽.

 

26) 김은영, 앞의 논문, 2008, 208쪽.

 

27) 김은영, 위의 논문, 2008, 208~209쪽 참조.

 

28) 구베아 주교가 사천대목구 대목구장 대리 마르탱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서한. 역주본은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 자료집》 제4집,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 시성 추진 위원회, 2000, 39~41쪽, 71쪽 참조.

 

29) 위의 서한.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 자료집》 제4집(역주본), 87쪽 참조.

 

30) 4명 신학생 중 2명은 이름이 확인된다. 한 명은 정약종의 아들인 정하상(바오로)이고, 또 한 명은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토마스)이다. 둘 다 남인시파 양반가의 후손으로 비록 그 가문은 몰락했지만 교회 지도자이자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앵베르 주교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배우는 동시에 주교에게 조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앵베르 주교가 피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30일자 서한(A-MEP, Vol.1254, f.120)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321쪽.

 

31) 앵베르 주교의 동아시아 선교 전략에 대해서는 이석원, 앞의 논문, 2011, Ⅲ장을 참조할 것.

 

32) 유진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진길은 역관 집안 출신으로 1807년 역과(譯科)에 합격하였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의 당상관 품계)까지 올라갔다. 그는 상통사(上通事, 북경사신단의 통역관)로 북경에 수차례 갔다 왔다.

 

33) 앵베르 주교가 앙리 볼로에게 보낸 1838년 12월 1일자 서한(A-MEP, Vol.577, f.517)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411쪽.

 

34) 앵베르 주교가 파리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APF 13권 75호[1841년], 157~158)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281~283쪽.

 

35) 앵베르 주교가 파리신학교 지도신부들과 사천, 통킹, 코친차이나대목구에 보낸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A-MEP, Vol.1254, 서한 4번째 쪽)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259쪽.

 

36) 앵베르 주교가 파리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APF 13권 75호[1841년], ff.158~159)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283~285쪽.

 

37) 인구가 감소한다는 앵베르 주교의 말이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는 아니다. 조선 정부의 호구 통계 자료에 의하면 19세기 내내 인구는 정체와 감소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는 실제 인구 현황을 반영했다기보다는 제도의 문란과 조사의 부실에 기인한 것이다. 당시 인구를 추산한 근래 연구에 의하면, 전반적으로 조선 후기에는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였다. 17세기 중엽에 800만~900만 정도에서 19세기 말엽에는 1,700만으로 서서히 증가했다고 추정된다. 한영국, 〈인구의 증가와 분포〉, 《한국사 33 - 조선 후기의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7, 13~20쪽 참조.

 

38) 일본은 전쟁 초반(1592년)을 제외하고는 조선의 5개도를 지배한 적이 없다. 1592년 명(明)나라 군대가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참전하자 일본군은 1593년 화의조약을 맺고 경상남도 해안으로 모두 철수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년) 때 잠시 일본군이 충청도까지 북상했으나 조선·명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다시 경상도 해안으로 후퇴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선이 유지되었다. 다만 1593~97년까지 진행된 명(明)과의 강화 협상에서 일본이 조선의 3개도(충청 · 전라 · 경상)를 할양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39) 조선 후기에 쓰여진 군담소설인 《임진록(壬辰錄)》에는 오히려 이와는 상반된 내용이 나온다. 《임진록》에서는 사명당(四冥堂)이 조선의 사신 자격으로 건너가 일본과 강화 조약을 맺을 때 일본에게 사람가죽 300장을 매년 조선에 바치도록 요구한 것으로 나온다. 달레 원저, 위의 책 상권, 1979, 41쪽, 각주 15번 참조.

 

40) 정성화, 앞의 논문, 1999, 189쪽 참조.

 

41) 앵베르 주교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목격과 관찰에도 불구하고 서양인 자신의 문화적 이질감과 종교적 신념 때문에 조선과 관련된 왜곡되고 부정확한 정보가 해소되기는커녕 객관적인 사실로서 고착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김상민, 〈서양문헌에 나타난 한국 - 정형화된 이미지와 사실의 간극 -〉, 《동국사학》 49, 2010, 189쪽 참조.

 

42) 조현범, 《문명과 야만 - 타자의 시선으로 본 19세기 조선》, 책세상, 2002, 12~14쪽 참조.

 

43) 앵베르 주교가 파리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APF 13권 75호[1841년], 159)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287쪽.

 

44) 앵베르 주교가 파리신학교 지도신부들과 사천, 통킹, 코친차이나대목구에 보낸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A-MEP, Vol.1254, 서한 4번째 쪽)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255~257쪽.

 

45) 앵베르 주교가 앙리 볼로에게 보낸 1838년 12월 1일자 서한(A-MEP, Vol.577, f.517)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413쪽.

 

46) 비숍 여사가 자신의 책 서설에서 언급했듯이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서설은 1890년대까지도 조선을 알 수 있는 유용한 책이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이인화 옮김, 1994,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원저 1897년 간행), 살림, 17쪽 참조. 또한 서설에서 조선의 역사, 지리 외에 문화와 풍속, 언어까지 폭넓게 다룸으로써 서양의 ‘조선학’ 연구와 조선 인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레데릭 블레스텍스, 앞의 책, 2001, 106~111쪽 참조.

 

47) 서설 2장. ‘조선의 역사’에 위의 내용이 실려 있다. 역주본은 달레 원저, 위의 책 상권, 1979, 41~42쪽 참조.

 

48) 위의 달레 역주본 41~42쪽, 각주 17번과 18번 사이 *표시 이하 내용[달레 각주] 참조.

 

49) 앵베르 주교가 파리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APF 13권 75호[1841년], 159~160쪽)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287~289쪽.

 

50) 1825년 서한의 한문 원본은 유실되었고 라틴어 번역본만이 남아 있다. 본 논문에서는 달레 원저, 《한국천주교회사》(역주본 중권 215쪽)와 최석우 지음, 조현범 · 서정화 옮김,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1592~183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부록 Ⅵ, 207쪽을 참조했다.

 

51) 앵베르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20년 넘게 조선에서 사목했던 다블뤼 주교는 조선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종속국임에는 분명하지만 단순히 강자에 굴복하는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생존 전략이 아니라 지속적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능란한 외교정책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조현범, 앞의 책, 2008, 224~226쪽

 

52) 앵베르 주교가 앙리 볼로에게 보낸 1838년 12월 1일자 서한((A-MEP, Vol.577, f.514)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399쪽.

 

53) 앵베르 주교가 파리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APF 13권 75호[1841년], 160)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289쪽.

 

54) 앵베르 주교가 파리신학교 지도신부들과 사천, 통킹, 코친차이나대목구에 보낸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A-MEP, Vol.1254, 서한 4번째 쪽)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259쪽.

 

55) “조선은 멀고 숨겨진 나라입니다. … 조선과 통상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조선은 가난하고 조선인들의 생산품은 형편없으므로 외국인들이 조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전교회 연보(APF)》 Vol.6(1833), ff.543~551;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역주본), 190~191쪽.

 

56) 김상민, 앞의 논문, 2010, 186~188쪽 참조.

 

57) 앵베르 주교가 앙리 볼로에게 보낸 1838년 12월 1일자 서한(A-MEP, Vol.577, f.514)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399쪽.

 

58) 달레 원저, 앞의 책 상권, 1979, 42쪽 참조.

 

59) 앵베르 주교가 앙리 볼로에게 보낸 1838년 12월 1일자 서한(A-MEP, Vol.577, ff.514~515)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399~401쪽.

 

60) 고려 말 이래 왜구 격퇴와 국경 방어를 위한 화약 무기 개발이 활발해 조선 초기부터 각종 총통(銃筒)이 실전에 배치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조총(鳥銃, 화승총)과 명나라 군대가 가져온 대포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 정부에서도 화승총과 각종 대포의 수입과 제작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서양의 대포가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홍이포(紅夷砲, 네덜란드의 화포를 중국에서 모방 제작한 것)와 불랑기포(佛郞機砲, 포르투갈의 화포를 모방 제작한 것)였다. 특히 조선에 표류했던 벨테브레(Weltevree, 1595~?, 조선명 박연)는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홍이포 제작에 전념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포들은 조선 후기 내내 계속 제작되어 강화도를 비롯한 주요 군사 요새지에 배치되었다. 조광, 앞의 논문, 1997, 487~488쪽 참조.

 

61) 조광, 앞의 논문, 1997, 505~506쪽.

 

62) 1580년대 이후 일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본이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을 조공국으로 만들었다고 이해했다. 정성화, 〈17세기 예수회 역사가 로드리게스의 『일본교회사』에 나타난 한국 인식〉, 《人文科學硏究論叢》 19,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9, 283~284쪽 참조. 반면 마테오 리치 신부처럼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본의 중국 침략을 우려하면서도 조선에 대해서는 외세의 침략에 자신을 방어조차 할 수 없고 중국이 구원해줘야 하는 나약한 조공국가로 인식했다. 정성화, 〈한국 관련 지식의 유럽적 기반과 내용 - 17세기 전반기 예수회 중국 선교사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 《대구사학》 97, 2009, 115~121쪽.

 

63) 전쟁이 끝나고 그 참화에서 벗어난지 한참이 지난 뒤에도 ‘전쟁의 후유증으로 여전히 기난하고 나약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닌다는 점에서 볼 때 현대 한국사에서 ‘6.25동란(한국전쟁)’이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를 규정해왔던 것과 비교해 볼 수 있다. 1950년대 이후 국제사회에서 한동안 ‘한국전쟁’의 이미지가 한국을 따라다녔고, 외국 교과서나 서적 등에 ‘한국전쟁의 사진’이 현재 한국의 모습처럼 소개되는 등 한국에 대한 인식에서 전쟁(의 참화)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타자의 시선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로 규정 당하는’ 오리엔탈리즘적 한국(조선) 인식이 전쟁을 매개로 서양 세계에 소개되었고 지속적으로 존재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북의 분단 상황에서 지속되는 ‘냉전’ 체제가 현재에도 한국사회와 대외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만큼 서양 세계의 조선(한국) 인식에서 ‘전쟁’이 차지하는 역할과 의미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프레데릭 블레스텍스, 앞의 책, 2001, 278쪽, 284~290쪽 참조.

 

64) 앵베르 주교가 파리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APF 13권 75호[1841년], 160)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289쪽.

 

65) 앵베르 주교가 앙리 볼로에게 보낸 1838년 12월 1일자 서한((A-MEP, Vol.577, f.514)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401쪽.

 

66)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 (APF, Vol.13-N.75[1841], f.160~161)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291쪽.

 

67) 앵베르 주교가 파리신학교 지도신부들과 사천, 통킹, 코친차이나대목구에 보낸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A-MEP, Vol.1254, 서한 3번째 쪽)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251~253쪽.

 

68) 정하상이 체포될 당시 대신에게 바쳤던 《상재상서(上宰相書)》에도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몰아 신유년(1801)을 전후해서 많은 신자들의 생명을 뺏은 것에 대해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이 나온다.(정하상 지음, 윤민구 신부 번역, 《상재상서(上宰相書)》, 성·황석두루가서원, 1999, 12~13쪽 참조) 신학생이자 주교를 자기 집에서 시중들었던 정하상의 인식이 앵베르 주교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69) 1839년과 1846년 순교자들에 대해 증언했던 김 프란치스코는 유진길이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과 교류하면서 전교까지 했다고 말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안동김씨 가문에 대한 조선 신자들의 호의적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수원교회사연구소 대조판독 역주,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수원교구, 2012, 78회차 증언(1884. 5.20), 455쪽 참조.

 

70) 파리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APF 13권 75호[1841년], f.164)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291쪽.

 

71) 달레 원저, 앞의 책 중권, 183~185쪽 참조. 달레 신부가 인용한 다블뤼(Daveluy)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Notes pour I'histoire des Martyrs de Coree)》(f.339)에서 다블뤼 주교는 앵베르 주교와 달리 순조와 그의 아들 세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즉 1827년 박해 때 비교적 관대한 조치를 취한 것은 국왕[대리하던 효명세자]이었고, 국왕은 백성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하였다. 조선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조선 언어에 익숙하고 다양한 정보를 분석할 수 있었던 다블뤼 주교와 달리 짧은 체류 기간에 일부 신자들의 정보에만 의존했던 앵베르 주교의 상황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72) 앵베르 주교가 앙리 볼로에게 보낸 1838년 12월 1일자 서한(A-MEP, Vol.577, f.514)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401쪽.

 

73) 앵베르 주교가 앙리 볼로에게 보낸 1838년 12월 1일자 서한(A-MEP, Vol.577, f.517)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411쪽.

 

74) 앵베르 주교가 앙리 볼로에게 보낸 1838년 12월 1일자 서한(A-MEP, Vol.577, f.513)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397쪽.

 

75) 조선국과 프랑스국 사이에 선교사가 매개자가 되겠다는 발상은 1865년경에 추진된 흥선대원군과 당시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와의 협상 논의에서도 나타나는데, 그 원형을 앵베르 주교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76) 프리깃(fegate) 함은 18~19 세기에 유럽에서 활약했던 돛대가 세 개인 함선인데, 특히 해군에서 주력 전투군함인 전열함(戰列艦)에 비해 빠른 속도를 이용하여 정찰 · 경계 · 호위 등의 역할을 했다.

 

77) 앵베르 주교가 마카오 극동대표부의 르그레주아 경리부장 신부에게 보낸 1835년 8월 1일자 서한(AMEP, Vol.449, ff.1409~1410) ;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77~79쪽.

 

78) 1790년대부터 조선 신자들에 의해 주창된 서양 선박 요청[이른바 ‘대박청래(大舶請來)’]은 서양의 공식 사절단과 사제들이 조선 조정에 신앙자유를 요청하고 유용한 서양 문물도 전파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청은 1811년 서한이나 1825년 서한에서도 제기되었을 정도로 조선 신자들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앵베르 주교의 위 제안은 이러한 대박청래 운동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차기진, 〈조선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성직자영입과 양박청래에 대한 연구〉, 《교회사연구》 13, 1998, 67~68쪽. ; 고을희, 〈정조대 서양 선교사와 양박 영입 시도〉, 《교회사연구》25, 2005, 311쪽. ; 최석우 지음, 앞의 책, 부록 Ⅵ, 2012, 206~211쪽 참조.

 

79)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서양인 선교사들은 선교지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도덕적이고 애타주의적인 사명감이 넘치는 동시에 그 내면에는 서구문명의 우월감과 선교 제일주의가 뿌리 깊게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김상민, 앞의 논문, 2010, 193쪽 참조.

 

80)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 기록에 나타난 샴과 중국〉, 《동국사학》 49, 2010, 153~154쪽.

 

81) 앵베르 주교의 서한 중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 1통만이 《전교회 연보》에 게재되었다. 하지만 본 논문 Ⅲ장과 Ⅳ장에서 논의된 내용 대부분이 이 서한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주교가 수집한 조선 정보와 부정적 평가는 잡지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서설은 조선 파견 선교사들이 보낸 보고서를 분류별로 정리한 것인데 누구의 보고서를 인용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내용을 비교해 보면 달레 신부가 조선의 역사나 대외관계 부분을 서술할 때 앵베르 주교의 서한들을 비중 있게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82) 조현범, 위의 논문, 2010, 141쪽.

 

83) 조현범, 앞의 책, 2002, 60쪽.

 

84) 예를 들어 조선에서 병풍을 이용하여 한 방에서 남녀를 구분하는 방법을 높이 평가하고 사천대목구 목평신학교의 베롤 신부에게 이 방법을 써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459쪽 참조. 또 ‘미신(이단)’으로 기피되었던 조선의 풍습들, 이를테면 혼인식에서 기러기를 사용한다든가 비신자가 제사 뒤에 돌리던 과일과 음식을 받는 것에 대해 앵베르 주교는 융통성 있는 해석을 내려 신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고 있었다. 《앵베르 주교 서한》(역주본), 369~375쪽 참조. 이런 문제들에 대해 앵베르 주교는 원칙주의자였던 모방 신부와 의견 충돌이 있기까지 했다.

 

[학술지 교회사학 vol 9, 2012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190677&Page=13&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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