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강론자료

2019-08-11.....연중 제19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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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9-08-10 ㅣ No.2317

 

연중 제19주일 (다해)

지혜 18,6-9       히브리 11,1-2.8-19       루카 12,32-48

2019. 8. 11. 이태원

주제 : 내가 중요하게 여길 것은?

사람은 누구든지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 다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라면 자기의 목숨을 유지하는 먹는 일에 관계되는 것이겠지만, 그것을 예외로 하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서 사람의 삶이 만드는 모양은 달라집니다.

 

지난달 4일에 우리나라의 반도체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물질의 3가지를 한국으로 수출하지 않겠다던 일본의 결정에서 시작된 일이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 그 일들이 우리의 사회에 남은 모습은 여러 가지입니다. 일본의 심사를 뒤틀리게 우리나라의 행정부와 대통령이 대법원을 통제하지 못했다면서, 자기 나라의 대통령을 욕하고 탓하는 사람도 있다는 소리는 매우 놀라운 얘기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 나라를 싫어하고 대통령을 욕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사는 곳에서 생긴 일이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대통령을 욕하고 원망하고 그를 욕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요? 그 사람은 그가 사는 나라가 망하고 대통령이 하야하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나라의 대통령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수상을 찾아가서 나를 죽여도 좋을 죄를 내가 지었으니, 그저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를 용서해주시구려!’하고 빌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일본이라는 나라의 수상이 우리의 존재를 무시하면서 뺨을 때렸는데, 맞은 우리가 한 대를 더 맞을까 두려워서, 일본수상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할까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면서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백골난망(白骨難忘)이라고 감사해야할까요?

 

게시판에 붙이는 문서에 '용서는 해도 결과는 남는다(125)'는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제가 쓴 글이니, 제 생각이 옳다고 쓴 것이지만, 사람이 용서한다는 소리를 말하면, 내 삶에 남은 영향과 감정도 사라질까요? 독일은 3년을 지배한 프랑스와 국민에게 수없이 많은 용서를 구했고, 600만 명의 유대인을 독가스실험실에서 죽인 후에 수없이 많은 용서를 청했는데, 우리나라를 3511개월16일을 지배한 일본의 그 후손들은 어째서 용서와 사죄라는 표현을 거부하겠습니까? 문제는 그들이 그렇게 해도 그들을 칭찬하는 무리가 있다는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서글픈 사실입니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그렇지만, 용서했어도 사람의 삶에 남은 감정과 결과도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없애는 것은 개인의 노력이지만, 이러한 일은 세상의 일만이 아니라, 신앙인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신앙인으로 사는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이라면, 혼인잔치에 돌아오는 주인이 한밤중에 돌아오더라도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는 종과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종과 하인이라는 표현을 썼다고해서, 우리가 그 의미와 뜻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흥분해야 할까요?

 

모든 일의 시작과 과정과 결과가 오직 나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거나 걱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로 이루는 것이라면 판단은 달라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지혜서의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바람을 우리가 들었습니다만, 들은 것이 나의 삶에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서 삶은 달라집니다. 사람이 달라지는 일은 내 귀에 오는 말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 행동의 결과입니다. 행동하기 전에 갖추어야 할 올바른 지혜는 무엇이겠습니까?

 

두 번째 독서로 들은 내용에서, 아브라함이 가진 삶의 자세는 하느님의 축복이 가능하게 만든 상황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는 하느님의 축복이 있어야 사람의 삶이 바뀐다고 하지만, 아브라함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은 그의 삶의 자세가 먼저 바뀌자 하느님의 축복이 그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일의 순서를 바꾸면 사람의 품격이 올라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렇게 행동하면 우리가 하느님을 내 뜻대로 조종하려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생각을 앞세우고 실천으로 자기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언제 우리에게 오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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