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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교회 역사 속 성인들의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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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1-19 ㅣ No.1798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 교회 역사 속 성인들의 ‘회심’


하느님 향한 ‘회심’으로 구원 역사에 기여

 

 

‘교회의 역사는 회개와 성화의 역사’라고 불린다. 그만큼 수많은 순교자와 성인 성녀, 그리스도인들이 ‘회심’을 통해 하느님 사랑에 눈을 떠 완덕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맞아 그 사건과 의미를 살펴보고, 아울러 교회 역사 안에서 회심으로 변화한 성인들 이야기를 알아본다.

 

 

사울에서 바오로가 되다

 

때는 서기 33년경. 현재 터키 동남부 지역, 킬리키아 타르수스(Tarsus) 출신의 ‘사울’이라는 젊은이는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도중에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 그는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기는’(사도 8,3) 등 그리스도교 박해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하늘에서 빛이 비치는 가운데 예수의 목소리를 들었던 사울은 한순간에 삶이 완전히 달라지는 체험을 한다. 사흘 동안 앞을 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마치 보속의 시간을 보내듯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던 그는 예수가 보낸 하나니아스를 통해 눈을 뜨게 되고 세례를 받아 이방인의 사도로 거듭난다. 

 

세례를 받고 나서, 사울이라고 불렸던 바오로는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밝혔다. 박해자에서 탈바꿈돼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이가 된 것이다. 유다 민족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활발히 전도했던 그는 특히 세 차례에 걸친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통해 지중해 곳곳에 예수를 전했다. 

 

그의 ‘회심’은 이처럼 예수 부활 후 한동안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에만 알려졌던 그리스도교를 민족적이고 지역적 종교에서 인류 전체를 향한 보편 종교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만큼 바오로의 회심이 구원 역사 안에서 지니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으로 대표되는 성인의 회심은 그야말로 드라마다. 북아프리카 타가스테(Tagaste) 출신인 그는 어머니 성녀 모니카를 통해 그리스도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나 북아프리카의 수도 카르타고로 유학을 떠난 후 동거 생활을 통해 아들을 낳고 마니교에 빠지는 등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이탈리아 밀라노로 이주해서 성 암브로시오(339~397) 주교 강론을 들으며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조금씩 깨우쳐 갔던 성인은 신플라톤 철학을 통해 ‘로고스-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고, 또 바오로 서간을 읽으며 인간이 하느님 은총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느 날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는 말을 반복해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치니 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그는 이때 “모든 의문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확인의 광명이 그를 가득 채웠다”고 고백했다. 성인은 387년 부활 전야에 어머니 모니카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후 391년 37세 나이로 사제가 됐으며 397년 히포의 주교가 됐다. 성인은 교부 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전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불린다.

 

 

성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창설자로서 가난을 사랑하고 가난한 삶을 강조했던 성인은 한센병 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하느님 자비를 체험하고 이를 통해 일생을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투신하게 된다.

 

포목상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풍족하게 자랐던 그는 기사의 꿈을 키웠다. 스무 살 가량이 되어 아시시와 페루자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 생활을 경험했던 성인은 귀향 후 열병으로 병상에서 지냈다. 이때 세상의 덧없음을 느끼며 많은 심경의 변화를 겪지만, 기사의 꿈을 저버리지 못하고 교황군에 입대하려던 중 일련의 계시를 본다. 이를 계기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회개하는 삶에 관심을 가진다.

 

어느 날 마주친 한센병 환자는 이처럼 그간의 삶 속에 자리 잡은 세속적인 고집이 하나 둘 무너지던 시점에서 성인을 하느님 안에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사건이었다. 근본적으로 그를 변화시키고 본격적으로 회개의 삶에 발을 내딛게 하는 계기였다.

 

역겨움과 혐오감을 누르고 한센병 환자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고 애긍을 베풀었던 성인은 이를 두고 후일 유언장에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다”고 토로했다. 

 

이후 성인은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여라”는 계시를 듣고 자신의 소명을 자각했다. 수도회를 설립하고 복음 선포를 위한 선교 활동에 나서며 모든 지역과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 애썼다. 또 평생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관상하며 살았다. 너그러움과 단순함, 신과 인간을 향한 헌신, 자연에 대한 사랑과 진실한 겸손 등의 모습을 보였던 성인을 두고 비오 11세 교황은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고 불렀다. 그는 중세기에 나타난 가장 사랑받는 성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228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성 이냐시오

 

성인은 스페인 로욜라 성에서 귀족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스페인 왕실 재무상 집에서 위탁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젊은 시절은 명예를 얻으려는 욕망과 머리와 옷 등 외모에 대한 관심으로 허영과 사치를 일삼는 시기였다. 

 

세상의 헛된 욕심을 추구하며 지내던 성인은 군에 입대해서 프랑스군과 교전 중 다리 부상으로 병상에서 지내게 된다. 치료를 마치고 회복기에 접어들었던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에 대한 책을 접하면서 차츰 깨달음을 얻는다. ‘기사’로 살고자 했던 욕심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며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인들 모범을 따르는 삶에는 기쁨과 평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자는 세상에 속한 것들이고 후자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자각이었다. 

 

이즈음 성인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고 이 환시에서 큰 위안을 받았다. 아울러 육적인 것을 따르던 자신의 행실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다. 이는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그리스도께 봉사하고자 하는 강렬한 심정으로 로욜라를 떠난 그는 몬세라트 수도원에서 머물며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나누고 대신 포대로 싼 두루마기를 걸쳤다. 기사의 상징인 장검과 단검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제단에 바쳤다. 

 

이후 15㎞ 정도 떨어진 만레사 마을 근처 동굴로 거처를 옮긴 성인은 기도와 극기, 명상에 몰두했다. 또 구걸로 생계를 꾸리고 고행을 하며 그리스도의 길에 함께하려 애썼다. 그리스도교 영성사에 큰 영향을 끼친 「영신수련」은 이때 그 바탕이 이뤄졌다.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의 첫걸음으로 다른 이들을 돕기로 한 그는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해 건전한 학문의 지식을 보충해야 함을 깨닫고 약 11년간 학문에 정진했다. 공부를 마치고 1537년 46세에 사제품을 받은 성인은 뜻을 함께하는 동반자들과 새로운 사도적 수도 단체 설립을 구상하고 1540년 예수회를 창설했다.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가톨릭신문, 2019년 1월 20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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