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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녀원 창가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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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21 ㅣ No.603

[수녀원 창가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잠들어 있던 맛의 기억

 

문득 지금 자신이 경험한 것이 아주 오래전에도 겪어 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 여긴 내가 언젠가 한번 와 본 적이 있어!’ ‘저 사람은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아.’ ‘아, 이 맛은 전에 먹어본 맛 같은데?’ 이런 기억은 대개 의지적이라기보다 비의지적인 기억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러한 비의지적인 기억을 다룬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마들렌 과자’ 이야기가 바로 그 예이다. 어느 추운 날 주인공은 뜨거운 차에 마들렌 과자를 적셔 입에 넣는다.

 

그 순간 언젠가 그것과 똑같은 맛을 경험한 적이 있었음을 직감한다. 차에 적신 과자의 그 맛이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맛의 기억을 일깨운 것이다.

 

그는 그 맛이 콩브레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낼 때 레오니 고모의 방에서 맛보던 그 차와 과자의 맛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되살아난 그 기억으로 그와 관련한 지난날의 삶이 송두리째 복원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것이다!

 

이렇듯 기억은 어느 날 불쑥 우리 앞에 고개를 내민다. 프루스트가 경험한 과자의 맛처럼 말이다. 그 미각의 체험을 통해 유년기의 기억을 되찾은 프루스트처럼 지난날의 경험은 그저 지나간 게 아니라 현재가 되어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소금기 어린 바다 냄새

 

우리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어느 장소에 갔을 때 문득 떠오르는 기억 말이다.

 

내게는 ‘소금기 어린 바다 냄새’가 그런 기억 가운데 하나다. 나는 비릿한 바다 냄새를 맡으면 어릴 때의 기억이 되살아 나곤 한다.

 

강릉이 고향인 나는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에 즐겨 가곤 했다. 동해에 가까이 다가가면 비릿한 바다 냄새가 코끝에 느껴졌다. 그 비릿한 내음을 맡으며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저 너머를 바라보노라면 무언가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나를 압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수평선 저 너머까지 광활하고 넓은 바다는 내게 하느님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게 해 준 것 같다.

 

그러고 난 뒤 삶에서 경험한 크고 작은 시련과 고통이 씨줄 날줄로 엮였다. 바다와 같은 그분 안에서 파도를 타며 넘어가기도 했고, 때론 그 속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했다. 그러한 삶의 경험은 하느님을 중심축으로 해석되었고 나는 조금씩 그분의 사랑에 맛을 들였다.

 

누군가가 한 말이 기억난다. “사랑한다는 것은 미래에 올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오래 발효한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마음속에 오래 발효된 것들, 그건 바로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고통과 아픔, 절망과 슬픔과 같은 삶의 여러 굴곡 속에서 서서히 발효가 이루어진 것일 게다.

 

우리가 겪는 역경을 누룩처럼 발효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다름 아닌 ‘사랑’이 아닐까? 부딪히면서 깨지고 부서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시간’을 발효시키는 것은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리라.

 

돌이켜 보건대 내게 그 누룩의 역할을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사랑’이다. 나는 그 사랑을 통해 내 삶에 굽이굽이 굴곡진 세월을 건너올 수 있었다. 그리고 삶의 명암을 넘어 영원을 향해 시선을 두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누룩’이 내 삶에 드리운 어두움과 고통을 발효시켜 주었기 때문이리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는 건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게 된 동기를 천식의 고통 속에서 죽음과 싸우는 벼랑 끝에서 구축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지병은 그에게 구원의 실마리가 되어 주고 자신의 내면 세계를 더 깊이 바라보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작가로서의 자기 소명을 발견하고 그 부름에 응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결국 자신의 예술 활동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것이다.

 

그렇다! 우리네 삶에 드리운 고통은 우리를 구원에로 안내하는 하나의 방향키가 된다. 프루스트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죽은 뒤에도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고 고백하듯이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그 모든 순간이 영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시간이 영원을 품고 있음을 깨닫는 데에는 우리 자신을 믿어 주고 사랑해 주는 체험이 필요하다. 우리를 믿고 신뢰하며 기다려 주는 이가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살면서 겪는 모든 것을 그 사랑의 힘으로 발효시킬 수 있으리라.

 

현대인의 삶이 갈수록 더 팍팍해져 간다. 그렇다는 것은 이를 적셔 줄 ‘물’이 필요하다는 뜻이리라. 주변을 돌아본다. 많은 이가 지쳐 있고 힘들게 살아간다. 나도 힘든데 너에게 무엇을 건네주랴!

 

하지만, 없는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손을 건네면 놀랍게도 어느새 내 삶이 촉촉해지는 것을 느낀다. 건네는 행위 그 자체가 우리를 촉촉이 적셔 준다는 것을 삶에서 배운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는 건 잃어버린 사랑의 물꼬를 다시 튼다는 의미겠다. 서로를 향해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잃어버린 우리의 시간을 되찾게 해 주기에 충분한 까닭이다.

 

부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생명까지 건네신 그분의 사랑을 다시금 기억한다. 성체 거양 때 사제는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고 선포한다. 우리는 그 순간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고 되새긴다.

 

오월의 신록이 눈부시다! 저 하나하나의 잎들도 겨울의 한파를 견디어 내고 모진 비바람을 뚫고 세상에 나오기까지 수많은 관계망 속에서 사랑의 누룩이 필요했으리라.

 

지금 우리에게 눈부신 신록의 잎들도 언젠가는 시들어 말라버리겠지. 그러나 우리는 그 하나하나의 잎이 영원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안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랑을 품고 있고 그 사랑은 영원을 이어주는 그 무엇이기에.

 

* 최현민 엘리사벳 - 사랑의 씨튼 수녀회 수녀. 종교대화씨튼연구원장이며 「영성생활」 편집인이다. 일본 난잔대학 종교문화원과 벨기에 루뱅대학교에서 연구원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8년 5월호, 최현민 엘리사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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