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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지학순 주교 25주기: 삶과 신앙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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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3-12 ㅣ No.1089

[지학순 주교 25주기] 삶과 신앙을 돌아보다


“독재에 맞서 들어올린 민주주의 횃불, 오늘을 비추다”

 

 

- 지학순 주교 문장.

 

 

올 3월 12일로 선종 25주기를 맞은 고(故) 지학순(다니엘) 주교(1921~1993)의 삶과 신앙을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말은 ‘빛’이다. 교회 안에서는 물론 한국사회 전체의 인권과 사회복지 분야에서 지학순 주교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고 다른 빛을 이끌어 내는 첫 빛으로 살았다.

 


인권의 ‘빛’으로

 

2015년 5월 31일 원주교구 설정 50주년 감사미사에 앞서 140여 명의 원주교구 연합 성가대와 10여 명의 임마꿀라따 선교무용단 단원들은 칸타타 ‘빛이 되라’를 선보였다. ‘빛이 되라’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대 원주교구장으로 28년간 재임하며 농민과 도시빈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한 지 주교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었다. 교구 설정 50주년 행사에서 지 주교의 일대기를 다룬 칸타타를 공연했다는 데서 그가 원주교구는 물론 한국교회와 사회 전체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지 주교는 1965년 3월 원주교구가 춘천교구로부터 분리, 설정되면서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뒤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의 폭압에 정면으로 맞서 저항하며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 1971년 10월 원주교구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과 함께 원주 원동성당에서 3일간 열었던 ‘사회정의 구현과 부정부패 규탄대회’는 한국교회가 정치적 발언에 뛰어든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지 주교는 1973년 11월에는 서울 YMCA에서 반독재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지식인 선언’에 서명, 참여하면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감시의 눈초리를 받았으며 마침내 1974년 7월 6일 해외에서 귀국하던 김포공항에서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고 만다.

 

1975년 2월 17일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된 후 이틀 뒤인 19일 환영인파와 원주 시가지를 걷고 있는 지학순 주교.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주교회의는 지 주교 연행에 항의하며 같은 해 7월 10일 “정의의 실천은 주교들의 의무”라는 내용의 발표문을 내고 지 주교 지지를 선언하자 정부는 이튿날 지 주교를 풀어줬다. 한 차례 고초를 겪은 지 주교의 정의와 인권을 향한 외침은 오히려 더 커졌다. 그는 1974년 7월 23일 오전 서울성모병원(현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마당에서 “유신헌법은 진리에 반대되고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며 공판을 위해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출두할 수 없다”는 양심선언과 사건과 관련된 비망록을 내외신 기자와 신자들 앞에서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에 충격을 던진 이 양심선언으로 지 주교는 그날 바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그해 8월 9일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 선고가 내려지자 전국적으로 사제들과 평신도들의 양심선언, 유신철폐와 인권회복을 촉구하는 기도회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1974년 9월 24일에는 1970~80년대 암울한 군사정권 아래서 민주화의 등불 역할을 맡았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원주 원동성당에서 결성되기에 이른다. 

 

정의구현사제단 결성으로 지 주교 석방과 인권회복을 요구하는 시국선언과 기도회는 더욱 거세게 전국적으로 이어졌고 1975년 2월 17일, 지 주교는 800여 명의 환영인파가 몰려든 가운데 서울구치소를 나와 2월 19일 10개월 만에 원주교구로 복귀했다. 지 주교는 1993년 선종하기까지 원주교구장으로 봉직하며 험난한 민주화의 길을 헤쳐 나가는 한국사회에서 정신적 지주로 존재했다.

 

젊은 시절 지학순 주교(앞쪽)와 김수환 추기경.

 


사회복지 분야에도 족적 남겨

 

지 주교가 한국교회와 사회에 남긴 또 하나의 커다란 발자취는 사회복지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사회복지에 대한 지 주교의 기여는 복지기관 설립과 운영뿐만 아니라 군사목과 교육사업에까지 두루 미쳤다. 

 

그가 사회복지 사업에 남다른 열정을 가졌던 이유는 북한(평안남도 중화군 청학리)에서 태어나 해방과 분단, 6·25전쟁이라는 격동기에 남한으로의 탈출과 체포, 수감, 재탈출, 참전과 부상 등 죽음을 넘나드는 체험을 통해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지 주교는 원주교구장 착좌 후 우선적으로 육영사업의 필요성을 느껴 1967년 9월 원주에 진광중고등학교를 설립해 청소년들의 전인적 교육에 힘썼고 1968년에는 천주교 군종신부단 총재로 취임했다. 1970년 3월 학교법인 진광학원 안에 협동연구원을 설치해 강원도 내 신용협동조합을 보급, 육성했던 사업은 가톨릭교회 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자적 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1982년 1월 원주 가톨릭센터에 가톨릭의원을 개설해 빈민들의 결핵치료를 도왔다. 1984년에는 한국가톨릭맹인선교회와 한국가톨릭아동복지협의회 담당 주교로 사목했고, 1988년 6월 사회복지법인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를 설립해 사회복지 사업의 기반을 튼튼히 다졌다. 

 

실향민이기도 했던 지 주교는 1985년 9월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사업에 참가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1987년 4월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고문을 맡아 민족화해와 통일운동에 힘을 쏟았다.

 

 

1974년 7월 23일 양심선언 후 서울성모병원 마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 바치고 있는 지 주교.

 

[가톨릭신문, 2018년 3월 11일, 박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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