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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그들에게 그해 성탄절은 추웠지만 따뜻했네(메러디스 빅토리 호와 라루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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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04 ㅣ No.493

[세상 속의 교회 읽기] 그들에게 그해 성탄절은 추웠지만 따뜻했네

 

 

-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위)와 흥남 부두의 피난민들.

 

 

6.25 전쟁 당시 파죽지세로 진격을 거듭하던 미군 병력은 1950년 11월 하순 두만강을 지척에 두고 개마고원 일대에서 갑작스레 전쟁에 끼어 든 중공군이라는 벽에 부딪쳤다. 밀려오는 중공군 때문에 도리 없이 후퇴를 결정했다. 그리고 미군 해병 제1사단은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2주간에 걸쳐 장진호 근처에서 함흥, 흥남 지역으로 병력을 철수, 이동하는 긴박한 작전을 전개했다. 이것이 세계 전쟁사에 세계 3대 겨울철 전투 중 하나로, 미 해병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는 장진호 전투다.

 

미 해병 1만2천 명은 중공군 7개 사단 병력에 포위된 채로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추위와 끊임없이 몰려드는 중공군의 인해전술 속에서 전멸 직전까지 몰렸으나 결국에는 포위망을 뚫고 후퇴에 성공했다. 이 작전의 목적지인 흥남 부두에는 군대와 민간인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들을 배로 실어 나르는 또 다른 작전이 펼쳐졌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1951년의 ‘1.4 후퇴’다. 이때 군인들과 군수물자는 물론이고 민간인 9만여 명이 흥남을 벗어났다.

 

그래도 부두에는 아직 1만4천여 명의 피난민들이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배는 7600톤 급 화물선 한 척뿐이었다. 항공유를 비롯한 군수품을 실어 나르는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였다. 화물선이었기에, 이 배의 승선 정원은 47명이었고 배의 화물을 다 내던진다 하더라도 태울 수 있는 인원은 고작 2500명 남짓이었다.

 

배의 선장은 겨울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부두를 메운 피난민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결정에 수많은 생명이 좌우되는 순간이었다. 1950년 12월22일 밤, 선장이 마침내 입을 뗐다. “태울 수 있는 데까지 태워 보라.” 그리하여 무려 1만4000명이 ‘물건 쟁여지듯이’ 배에 올라탔다. 어린 아기를 업은 아이부터 노인까지 군수품을 실을 예정이던 화물칸은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빈 공간마다 사람이 탔다. 배에 오른 사람들은 살았다고 안도하며 호들갑을 떨기보다는 몸을 웅크려서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고요한 밤바다에 포탄 소리와 파도 소리만이 들려왔다.

 


피난민 1만4000명을 태우고 흥남 항을 출발

 

이튿날, 배는 흥남 항을 출발했다. 배와 닿기만 하면 언제든 터질 수 있는 기뢰 수천 발이 설치되어 있는 바다를 배는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난방 시설은 물론 화장실이며 먹을 것조차 없는 배 위에서 피난민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한겨울 추위를 견뎌 냈다. 하지만 항해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넷이나 되는 생명이 새로 태어났다. 미국인 선원들은 아기들이 태어난 순서대로 아는 한국어 단어를 떠올려 ‘김치 1,2,3,4’라고 이름을 붙였다.

 

마침내 선원들과 피난민들의 눈에 육지가 들어왔다. 부산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뒤늦게 흥남을 떠나온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배는 다시 남서쪽으로 진로를 돌렸다. 다음날, 배에서 또 한 아이가 태어났다. ‘김치 5’였다. 배는 거제도 장승포 항 근처 바다 위에서 멈췄다. 목숨을 건 항해는 끝났다. 그리고 그들은 1950년 성탄절을 그렇게 맞았다.

 

피난민들은 여러 해가 흘러서야 자신들이 타고 온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 호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살 수 있게 해 준 선장을 새삼스럽게 기억했다. 한국과 미국 정부 또한 이 놀라운 기적을 이끌어낸 배의 선장, 흥남 부두의 은인을 기려서 훈장을 수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고마운 선장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때 그는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해서 마리노(Marinus) 수사가 되어 있었다. 뒤늦게야 이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그는 할 도리를 했을 뿐이라며 한사코 거절하다가, 결국에는 수도회 장상의 명에 순명하여 훈장을 받았다.

 

이 선장은 이때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마음 깊이 체험했고, 이를 계기로 전쟁이 끝난 1954년 미국 뉴욕에 있는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했다. 수도회 입회 전 그의 이름은 레너드 라루(Leonard P. Larue, 1914-2001)였다. 그리고 라루 선장, 아니 마리노 수사와 한국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마리노 수사가 속해 있던 수도원이 입회자가 없어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를 한국의 성 베네딕토 왜관 수도원이 2001년에 대신 맡게 되었다. 고령의 수사는 한국의 수도자들을 만나 한국과 흥남 부두에 얽힌 인연을 회상하며 자신의 입회 동기를 들려주었다.

 

- 라루 선장(좌), 마리노 수사.

 

 

“때때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숱한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내게는 그해 성탄절에 그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서 주님께서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해에 선종한 마리노 수사는 이런 말도 남겼다.

 

“하느님을 사랑한 것은 최고의 로맨스였고, 하느님을 추구한 것은 최고의 모험이었으며, 하느님을 만난 것은 최고의 성취였습니다.”

 


라루 선장은 수도원에 입회해 마리노 수사가 돼

 

군수물자 대신 1만4005명의 생명을 실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거제도에 도착한 날은 아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예수 성탄 대축일이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이 사건을 ‘성탄절의 기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같은 민족끼리 총구를 겨누던 가슴 아픈 상황에서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난 기적이었다. 그리고 이 기적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당시 배에서 태어난 새 생명 ‘김치 1,2,3,4,5’는 아니지만, 태어난 지 10달 된 아기 하나가 이 배에 탔는데, 이 아기가 사제가 되었다. 또 같은 배에 탔던 15살 소녀는 수도자가 되어 날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기도한다. 또한 당시의 선장이 누구였는지를 알게 된 뒤로는 마리노 수사가 성인이 되기를, 그리고 군수품보다 사람의 생명을 먼저 생각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기적을 보며 생명을 경시하는 우리 사회가 반성하기를 기도한다.

 

지난여름 미국을 방문한 한국의 대통령은 첫 일정으로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방문한 자리에서 장진호 전투와 관련된 자신의 비화 하나를 털어놓았다. 그가 메러디스 빅토리 호라는 미국 화물선을 타고 월남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오래된 가요를 통해서 익히 아는 70년 전의 1,4 후퇴에 얽힌, 퇴역한 지 오래인 미국의 화물선 배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얽힌 하느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섭리를 새삼 읽어낸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12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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