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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죄 이야기 - 사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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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8-19 ㅣ No.1014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죄 이야기 - 사욕


사욕은 죄짓게 만드는 인간의 내재적 성향

 

 

찬미 예수님.

 

너 중심으로 파스카하기 위한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걸림돌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죄’일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죠. 그리고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의식 때문에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를 주저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처럼 죄라는 것은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무시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죄를 심리 차원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파스카를 향한 영성과 심리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죄란 무엇이며 우리는 왜 자꾸 죄를 짓게 되는 것일까요? 

 

교회는 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죄란 이성과 진리와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이다. 죄는 어떤 것에 대한 비뚤어진 애착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다. 죄는 인간의 본성에 상처를 입히고 인간의 연대성을 해친다. 죄는 ‘영원법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위나 욕망’이라고 정의되어 왔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849항) 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죠. “죄는 하느님에 대한 모욕이다. 죄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맞서며, 우리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다. 최초의 죄와 마찬가지로 죄는 선과 악을 알고 규정하는 ‘하느님처럼’(창세 3,5) 되겠다는 헛된 의지로 하느님께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850항)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만으로는 우리가 왜 죄를 짓게 되는지 아직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죄가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자꾸만 양심을 거스르게 될까요? 우리는 왜 자꾸 하느님께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며 자기를 사랑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으로 교회는 죄와는 구별되는 ‘사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성적인 면과 연관되어 ‘정욕’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사욕은 그 자체로 죄는 아닙니다. 다만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죄를 짓게 하는 내적인 움직임, 곧 ‘하느님을 지향하지 않고 악으로 기울어지는 인간의 내재적 성향’으로 이해되죠. 성경에서도 인간의 이러한 성향을 드러내는 대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사건 이후, 하느님께 제물을 드리는 노아의 제사에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생각하시죠.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창세 8,21) 이처럼 성경의 저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반대하여 자기 자신을 주장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성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전통 신학에서도 이러한 사욕을 영성생활에 저항하며 거스르는 인간의 모든 ‘본성적 경향’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이런 본성적 경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왜 하느님을 지향하지 않고 자꾸만 악으로 기울어지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을 우리는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심리학적 고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탕이 되는 것은 다시금 인간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삼분법적 이해이지요.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을 지향하는 영의 차원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인 몸의 차원과 심리적인 정신/마음 차원을 함께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세 차원은 각기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한 사람의 삶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요. 그런데 하느님을 따라 너 중심으로 가게 하는 영 차원의 움직임과는 달리 몸 차원과 정신/마음 차원에서 자동으로 나를 향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 조건입니다. 윤리적으로 선/악을 따질 대상이 아니라 원래 타고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당장 내 배가 고프면 다른 사람의 허기보다는 내 먹을 음식을 찾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누군가 나보다 더 사랑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보면서 마음속에 부러움과 질투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누구나의 마음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영의 차원에서는 너 중심으로 움직이라고 일러주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은 당연히 나를 위하는 방향으로 움직여가려는 것이죠. 결국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이상, 나를 향하는 움직임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타고난 경향성인 것입니다. 이 경향성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다만 이를 따라서 움직일 때, 곧 우리 몸의 욕구와 마음의 욕구를 따라서 실제로 움직일 때 그 말이나 생각, 행위가 죄가 되는 것이죠.

 

죄와 사욕을 심리적인 차원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욕을 이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지닌 기본적인 경향성으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자기지향성과 죄를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질투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까요? 나보다 더 사랑받는 이를 보면 내 안에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나죠. 이 마음은 나를 자꾸 죄로 기울게 부추깁니다. 그리고 이 부추김을 따라서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헐뜯거나 일부러 불친절하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나 행동은 분명 죄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꾸만 내 안에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죄스러워하고 그런 마음들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간절하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죠. 몸과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상 우리 안에서 없어질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투, 시기의 마음을 근본적인 내 마음의 경향성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 내 안에 또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내가 지금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구나’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깨닫게 되면 그다음엔 내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를 찾게 됩니다. 지금 내 마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듣고 그를 건강하게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이런 부추김을 따라서 움직이지 않도록 더 조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 마음을 채우려는 유혹은 더 쉽게 뿌리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욕은 우리 안에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를 죄로 기울어지게 하죠. 하지만 내 안에서 사욕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것을 나의 당연한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러면서도 그 부추김에 따르지 않으려고 깨어있는 것, 이것이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입니다.

 

*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신문, 2017년 8월 20일, 민범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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