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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13: 방콕 도착, 플로랑 주교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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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21 ㅣ No.906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13) 방콕 도착, 플로랑 주교를 만나다


참신앙 위한 희생 두려워 않는 방콕 신자들을 만나다

 

 

- 소조폴리스의 명의 주교이며 샴대목구장인 마리 에스프리 플로랑 주교.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7년 6월 4일 마침내 임지인 방콕에 도착했다. 이 날은 성령 강림 대축일이었다. 1826년 12월 11일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선교 임지를 배정받고 마카오를 떠난 지 6개월 보름여 만에 선교지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리고르 왕의 배려로 리고르에서 방콕까지 배를 타고 갈 수 있었다. 그해  5월 20일, 브뤼기에르 신부 일행을 태우고 출항한 배는 항해 17일 만에 겨우 방콕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와 일행 6명은 항해를 하는 동안 선내 부엌에서 지내야만 했다. 부엌은 불결했다. 통풍이 제대로 안 돼 온종일 연기로 꽉 차 있었고 도마뱀과 파리 떼가 설쳐댔다. 게다가 병자 3명이 더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한센병을 앓고 있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한증막 같은 부엌에서 숨이 막혀 견디다 못해 밖으로 나갈라치면 곧바로 샴 대사의 비난이 쏟아졌다. 대사는 그에게 “온갖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거룩한 교회의 사제가 우상숭배자들의 눈에 띄어 명예를 잃는 것은 치욕스럽다”고 힐난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연옥이 따로 없었다”(1827년 6월 20일 자 편지)고 했다.

 

브뤼기에르 신부 일행은 리고르왕의 배려로 리고르에서 배를 타고 17일간의 항해 끝에 방콕 항에 도착했다. 사진은 1864년 당시 방콕 항의 모습. 출처=브리티시 라이브.

 

 

방콕 항에 마중 나온 신자들과 함께 브뤼기에르 신부는 주교관으로 갔다. 주교관은 네 개의 들보로 지붕을 바친 보잘것없는 초가였다. 가구라야 침대로 쓰는 판자 하나, 나무 의자 몇 개뿐이었다. 샴대목구장 마리 에스프리 플로랑(Marie Esprit Florens, 1762~1834) 주교가 주교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낡은 자색 수단을 입은 주교는 천에 초를 입힌 모자를 쓰고 맨발 차림이었다. 64세인 그는 브뤼기에르 신부를 보자 기뻐 어찌할 줄 몰라했다.

 

소조폴리스 명의 주교인 플로랑 주교에 관한 자료는 안타깝게도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제3대 조선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와 같은 프랑스 아비뇽교구 보클뤼즈현 출신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 연구의 권위자인 조현범(토마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유감스럽게도 이분에 관해 나온 자료가 없다”면서 “파리외방전교회 회원 명부에 있는 간단한 약력 그리고 브뤼기에르 주교 자료집에 나와 있는 편지 한 통 정도가 전부”라고 했다.

 

플로랑 주교는 검소했다. 옷이라고는 낡은 수단 한 벌 뿐이었다. 주일이나 평일이나 주교의 차림새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플로랑 주교는 프랑스와 교황청에서 지원받은 얼마 안 되는 선교 기금을 사제들과 신학생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썼다.

 

플로랑 주교는 학덕이 있고 사목 경험이 풍부한 브뤼기에르 신부에 대만족했다. 브뤼기에르 신부를 보자 플로랑 주교는 선종한 페코 신부의 이야기를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앵베르 주교의 절친한 친구였던 페코(1786~1823)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1820년 샴대목구에 파견됐다. 그는 앵베르 신부와 파리에서부터 페낭까지 함께 왔고 1823년 선종할 때까지 페낭에서 사목했다. 그는 지나는 곳마다 열성과 재주로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그는 리고르 지방으로 가자마자 왕의 환대를 받아 성당 짓는 것을 허락받을 만큼 친화력이 있는 선교사였다.

 

당시 샴의 전통 가옥. 방콕에 있던 샴대목구 주교관은 4개의 들보에 지붕을 얹은 초가였다.

 

 

플로랑 주교는 브뤼기에르 신부에게 ‘인도의 정원’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며칠 전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랑글루아 신부에게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샴대목구는 샴과 케다(말레이시아 북서부 지역), 파라, 리고르 왕국의 모든 지역과 라오스 왕국 일부를 관할했다. 

 

오늘날 태국은 물론 말레이반도와 그 북쪽 모든 지역이 해당한다. 이렇게 광활한 교구를 노쇠한 프랑스인 주교 1명과 본토인 사제 3~4명이 사목하고 있었다. 본토인 사제들은 사목 경험이 부족해 일일이 주교의 지도를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당시 방콕에는 4개의 성당이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샴대목구는 선교사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선교지였다. 아마도 불교와 이슬람의 교세가 강한 게 그중 한 이유였을 것이다.

 

샴 왕국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다. 불교 국가임에도, 말레이 반도 일부에선 주민 대부분이 무슬림인데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자들은 공개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4개의 방콕 성당에서는 품위를 갖춘 장엄한 전례가 거행됐고 화려하고 장중한 성체 거동 행렬도 했다. 방콕 신자들은 사제를 존경했고 “참신앙을 위한 희생은 고통스럽지 않다”고 고백할 만큼 열심이었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랑글루아 신부에게 1827년 2월 4일 자로 보낸 편지에서 “방콕 신자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 유럽에서 신앙심이 좋다는 이들이 방콕 신자들을 만나본다면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를 것”이라고 칭찬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5월 21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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