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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 교회사 여행: 초세기 그리스도인의 모습(1-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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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4 ㅣ No.860

[세계 교회사 여행] 초세기 그리스도인의 모습(1~3세기) (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의 말씀이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강둑에서는 세례가 베풀어졌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고립된 채로 살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즉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 그리스도교의 조직을 만들어 냈다. 집회 장소가 필요했고, 미래의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예비 신자 교리 교육을 이수해야만 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성찬례를 거행했는데 그 결과 성찬례에 대한 규칙들이 하나씩 등장했다.

 

초대 교회 때 그리스도인들은 부유한 그리스도인의 큰 집에 모여서 기도했다. 동방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조용하고 은밀한 곳을 집회 장소로 사용했는데 이 경우에 주로 그 집의 제일 높은 곳을 사용했고, 서방에서는 집 거실을 주로 사용했다. 세례 장소로는 목욕탕이나 세면대를 이용했는데 원래 ‘세례대’라는 말이 처음에는 연못과 침수 세례를 의미했다. 얼마 후에 야외나 정원, 공동묘지에 있는 폐쇄된 장소에서 만났고 2세기 말부터는 집을 오직 전례 장소로만 사용하도록 기증했다. 실질적으로 교회 건물이 건축된 것은 3세기 중엽으로부터, 가장 오래된 교회 건물은 유프라테스에 있는 두라 에우로푸스의 가정 교회다(250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이미 그리스도교를 위해 기증된 건물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박해 초기에 교회 건물을 모두 파괴하도록 명했다.

 

그리스도교 입교를 위해 예수의 제자들은 유다교에서 물려받은 전통 관습에 따라 물에 잠기는 것(침수)을 채택했다. 제자들은 개종과 정화라는 전통적인 의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결정적으로, 세례는 성령을 통해서 재생을 가져다주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계명을 지키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선포해야만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같은 신앙고백의 내용이 아주 짧고 간단했다. 오늘날과 달리 중앙 집권적으로 조직화되지 않았던 초대 교회에서는 세례의 준비 과정과 예식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서로 다르고 다양했다. 세례의 준비 과정인 ‘예비 신자 교리 교육’ 기간에는 교의와 윤리에 대한 내용을 주로 가르쳤다. 그 내용은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문답식으로 되어 있었다. 교리 문답은 복음의 내용을 전달받고 깨우친 사람들이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예비 신자 교리 교육의 각 단계마다 기도와 교사의 안수가 행해졌다. 예비 신자 교리 교육의 마지막 단계에서 세례 후보자들은 그동안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 진척 과정을 알아보는 시험에 통과해야 했다. 마지막 준비 과정인 성주간의 모임에서 성금요일에 함께 단식을 하고 성토요일에는 안수와 이마, 귀, 코에 십자 표시를 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파스카 한밤중인 부활 성야에 세례 예식이 거행되었다. 주교가 마지막으로 안수를 해 주고 도유를 해 주면 세례자들은 다시 옷을 입었다. 이것은 오늘날 견진성사의 근원이 되었다. [2017년 4월 23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초세기 그리스도인의 모습(1~3세기) (2)

 

 

전례와 기도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마다 함께 모여서 주님의 부활을 기념했다. 태양의 날(주일)은 한 주간의 첫날이고, 안식일은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인데, 그리스도께서는 한 주간의 첫날에 새롭게 창조하셨다. 그리하여 태양의 날은 여덟 번째 날이나 시간의 완성을 뜻하게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 재림의 표지가 되었다. 주님의 부활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장엄하게 기념하는 날이 있었다면, 그것은 부활 축일이었다. 처음에는 부활 축일을 동방의 그리스도인들만 기념했고,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은 매 주일을 기념했다. 그러다가 결국 2세기 말에 이르러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활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 부활 축일을 지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일부 동방 교회에서는 유다교의 전통을 고수하여 니산 달(히브리 달력의 첫 번째 달) 14일에 부활 축일을 지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로마 교회를 포함한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일요일에 부활 축일을 지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찬례라고 일컫는 최후 만찬을 거행하는 것은 그들이 주일과 장엄한 부활 축일을 지내는 예식의 핵심이었다. 최후 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기념하고 함께 나눴다. 신약 성경은 ‘빵을 쪼개는 예식(성찬례)’이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해 거의 말해 주지 않는다. 플리니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을 심문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거행하던 이 식사(성찬례)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우리는 유스티누스의 작품에서 성찬례에 기본적인 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본적인 틀은 오늘날의 성찬 전례에서도 발견된다. 강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가르침으로, 강론이야말로 최초의 예비신자 교리 교육이었다. 교회는 강론을 통해서 구약 성경과 예수의 인격 사이의 연결성을 강화했고 동시에 윤리적인 내용을 권고했다. 또한, 히폴리투스는 성찬 기도의 골격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데, 그것에 따르면 성찬 기도 때에 자유기도가 허용되었다. 성체를 영하는 신자들은 자신의 손바닥에 축성된 빵을 받았다. 주교가 신자들에게 성체를 주면서 “천상의 빵,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면, 신자들은 “아멘.”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관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체를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 보관해 두었다가 식사 전에 영했는데, 그들은 성체에 치유의 능력이 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은 세례를 통해서 죄를 용서해 준다. 그러나 예수는 훨씬 폭넓고 다양한 방법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죄인들을 추방하는 권한을 열두 제자들과 교회 공동체에 주었다. 2세기, 《디다케》는 신자들에게 기도하기 전과 성찬례를 거행하기 전에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도록 권고했다. 죄를 고백하라는 《디다케》의 권고는 일상생활에서 저지른 모든 잘못에 대해 고백하라는 뜻이었다. 이 같은 내용이 야고보 서간에도 나온다(야고 5,16 참조). 세례를 받은 이는 누구든지 중 죄를 지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2세기에 접어들어, 교회는 중죄(배교, 살인, 간음 등)는 일생에 단 한 번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리고 참회를 통해 다시 새로워짐으로써 참회는 세례와 같은 효과를 지니게 된다고 했다. [2017년 5월 14일 부활 제5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초세기 그리스도인의 모습(1~3세기) (3)



정착되어 가는 교회 직무

여러 세기를 거쳐 오면서 여러 가지 직무가 교회 안에 정착되어 갔다. 하지만 그 직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발전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또한 직무와 관련된 용어들도 아주 다양했으며, 지역과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서로 달랐다.

최초의 신앙 공동체는 이중적인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하나는 예수와 함께 생활했던 열두 사도의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유다가 죽은 후에 형성된 집단인데, 이들은 히브리어를 말하는 팔레스티나 공동체를 관리했다. 스테파누스에 의해 임명된 일곱 명의 부제단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그리스계 유다교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공동체를 관리했다. 스테파누스의 순교를 필두로 시작된 박해로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하여 그들이 선교사가 되었고, 이때부터 공동체가 생겨나는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조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공동체와 유다교에서 파생된 다른 공동체들은 유다교 공동체를 자신들의 모델로 삼았다. 장로단 또는 장로들이 이 공동체들을 이끌었는데 예루살렘에서는 야고보 사도가 장로단의 십자가였다. 열두 사도들은 자신들이 가는 곳마다 공동체를 세웠다. 안티오키아에서는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선교 활동을 하는 선교사들이 카리스마적인 직무를 수행했는데, 그들은 이 직무를 평생토록 지녔던 것 같다. 비록 열두 사도는 아니었지만, 이들도 역시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마찬가지로 사도였다. 당시에는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해설하는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성경에 조예가 깊은 일종의 그리스도교 랍비인 박사들도 있었다. 선교사들은 자신이 여행한 지역에 지역 공동체를 창설하고 각 지역 공동체의 백성을 돌보도록 지도자를 임명했다. 모든 직무자들을 임명할 때에는 기도와 단식을 한 다음에 그들에게 안수를 해 주었다.

2~3세기로 접어들면서 직무들이 발달해 갔으며, 처음에는 ‘감독 장로’라는 직책이 있었다. 그러다가 ‘감독 장로’들 가운데에서 지도자를 선출했고, 얼마 후 그 지도자에게 ‘감독’이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그리하여 감독은 ‘장로단’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리고 낮은 직무에 해당하는 부제는 주교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세 가지 직무인 주교, 사제, 부제다. 이때부터 주교 단일체제, 즉 사제단에서 완전히 분리된 주교가 등장한다.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는 순례 직무자들은 점차 사라지고 사도들(열두 사도의 후계자)은 한 지역에 머물렀는데, 그들이 이 무렵에 주교단에 흡수되면서 열두 사도들의 후계자로 간주되었다. 2세기 초에는 주교만이 성찬례를 거행하고 강론을 하며, 세례를 베풀고 죄를 사해 주었다. 사제들은 단지 주교의 보조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아프리카와 같이 특별한 지역에서는 주교회가 증가하고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몇몇 큰 도시들에는 전례 장소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전례장소에 사제들이 파견되어 그들 나름의 특정한 책무를 수행했다. 성직자를 서임할 때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안수 기도였다. 그러나 다른 직무자들의 경우 안수 대신 자기들이 봉사할 때 사용할 물품을 받았다. 예를 들어, 독서자들은 성경을 받았다. [2017년 5월 21일 부활 제6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초세기 그리스도인의 모습(1~3세기) (4)



사제직무와 여성의 직무

신약성경에 나타난 공동체의 직무자들은 주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들은 기도를 주관하고 빵을 나누는 예식을 거행하고, 교회 직무를 수행했다. 이 직무자들은 유다교의 사제나 이방 종교의 사제와는 달랐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사제직을 가졌고 예수는 그들 중에서 최고의 대사제였다. 그러나 교회는 구약성경을 읽고 거기에서 영향을 받고 또 다른 종교와 비교해 가면서, 점차 그리스도교의 직무자들에게 전례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는 다른 종교의 사제들이 하는 역할과 같았다. 그래서 히폴리투스는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들을 언급할 때 사제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사제라는 단어가 갖는 이중성을 설명해 준다. 즉, ‘사제’는 어원학적으로 장로를 의미하지만, 실질적으로 예식과 관련된 거룩한 직무를 책임 맡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한편, 키프리아누스와 같은 주교들은 독신으로 지냈지만, 모
든 성직자에게 독신제는 의무가 아니었다. 바오로는 복음을 더욱 잘 전하기 위해 결혼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가 결혼에 대해 일반적인 규정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성직자의 결혼에 대해 언급하는 성경 구절은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3장 2절과 티토에게 보낸 서간 1장 6절뿐이다. “‘감독(원로)’은 한 여자만을 아내로 맞아야 한다.” 교부들은 전통적으로 이 구절을 두 번 결혼한 남자에 대한 서품 금지와 혼자된 사제의 재혼 금지로 해석했다. 일부 교부들은 이 구절이 결혼하고자 하는 주교에게도 적용된다고 보았다. 서방교회나 동방교회에는 기혼 남자에 대한 서품 금지 규정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기혼 사제에게 성관계를 절제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사제 서품 때 독신 서약을 했다가 나중에 결혼하더라도 반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금욕과 동정의 중요성으로 인해, 독신 사제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그리고 기혼 사제는 성관계를 절제하는 것이 더욱더 사제다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를 따랐던 여자들이 등장한다. 당시 그들은 복음과 예언을 선포하는 책임을 맡았다(로마 16,1-3). 그러나 남자들이 맡은 직무와 관련해서 비슷한 점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여자들의 적극적인 역할이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한편, 여러 공동체에 과부들에 관한 지침이 있었다(1티모 5,3-16). 과부들은 여자와 관련된 여러 가지 봉사와 기도에 전념했다. 즉 병자 방문과 같은 일을 했다.

또 한가지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특이한 사실이 있다. 초세기에 여성 부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3세기의 시리아 교회는 ‘여부제’에 대해 분명하게 증언한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주교는 자신과 함께 구원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협력자로서 정의의 관리자들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는 직무상의 남녀평등 차원이라기보다 남성 부제가 수행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이교도들 때문에 여자들이 사는 집에 남성 부제를 보낼 수 없었다. 그런 경우 주교는 여부제를 보냈다. 여부제는 여자들에게 필요한 직무를 남성 부제와 동등하게 수행했고 안수도 받았다. 그리고 ‘동정녀’들이 가끔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동정녀들이 직무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과부들의 역할과 여부제들의 역할과 동정녀들의 역할이 서로 중첩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2017년 6월 11일 삼위일체 대축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초세기 그리스도인의 모습(1~3세기) (5)



교회를 위협하는 불안과 분열

그리스도교의 일치가 위협을 받을 때도 있었다. 교회의 일치를 가로막는 것들로는 전례 논쟁, 배교자들을 용서하는 문제에서 야기된 논쟁 그리고 주교직에 대해 개인적인 경쟁 관계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저지른 논쟁이 있다. 그런데 이런 것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게 교회의 일치에 해를 끼친 것들이 따로 있었다. 2세기 중엽에 교회는 교의 문제로 인해 심한 몸살을 앓았다. 교의 문제는 결국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는 집단으로까지 발전했다. 과연 이런 집단들도 교회의 지체들인가? 참된 신앙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것은 교회를 크게 위협하는 문제였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자신들만의 고유한 예식과 신학을 지키려고 했다. 그들은 할례를 준수하면서 유다교의 전통에 따라 일부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유일신 사상을 고수하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한낱 인간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가 세례 때 하느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했다(그리스도 양자설). 그들은 자신들의 편협된 사고에 갇혀 있다가 결국 얼마 후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두 번째로 ‘영지주의’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리스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물질과 전신(몸과 영혼)이 서로 대립한다고 주장하면서 악의 문제에 집착했다. 그들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해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부정하고 비밀 단체를 통해 전수되어 내려오는 비밀스러운 지식(영지)이 주는 매력에 끌렸고, 이 지식이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이들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세 번째로 ‘마르키온 이단’을 들 수 있다. 이레네우스에 따르면, 마르키온은 성경에서 창조주 하느님과 육화에 대한 내용을 모두 삭제했다. 왜냐하면 마르키온은 물질과 몸을 악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마니교’를 예로 들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출신인 마니(216~277)는 이란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받아들여 완전한 이원론을 주장했다. 마니에 따르면, 세계의 역사는 선(빛)의 신과 악(어둠)의 신이 싸우는 거대한 전쟁이다. 인간은 악한 물질로 둘러싸인 빛의 파편으로 이루어졌다. 이 빛의 파편들은 수많은 정화 작용이나 재육화(再肉化)과정을 거친 후에 선의 왕국에서 다시 결합되어야 하는데, 예수가 바로 이 방법을 보여 주었다. 마니 자신은 바로 예수의 사도요, 새로운 파라클리토(성령)였다. 이러한 집단들은 제법 성공을 거두었다. 왜냐하면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깊은 고뇌의 문제들을 파고들어서 일종의 해답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몇몇 영지주의자들은 참된 종교 문제를 찾는 일에 매진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가끔은 상반되기도 했다. 또한 엉성하게 배치되거나 증명되지 않은 잡동사니 같은 소문들로 뒤엉켜 있었다. 어쨌거나 이로 인해 토대가 뒤흔들릴 정도로 심각한 위험에 처한 교회가 이들 집단을 마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2017년 6월 18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초세기 그리스도인의 모습(1~3세기) (6)

 

 

신앙의 규칙과 성경의 정경화

2세기 말 리옹의 이레네우스 주교는 자신이 저술한 『이단 반박』에서 오류라고 판단되는 몇 가지 잘못된 교설들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어디에서 참된 교회와 교의를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단들을 나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전승에 의탁해야만 한다. 사도들의 전승은 교회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전해내려 왔고, 신앙의 규칙 기원은 교회 안에서 주교들과 장로들의 계승을 통해서 사도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문에 이레네우스는 일부러 베드로와 바오로에서 시작되는 로마 교회 주교들의 명단을 밝힌다. 스미르나 교회와 에페소 교회에서도 역시 주교들의 기원은 사도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레네우스는 깊은 감동에 잠겨, 자신이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주교가 ‘주님을 직접 뵌 요한 사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자신이 들은 적이 있다.’라고 회상한다. 이렇게 해서 결국 이레네우스 자신의 기원도 역시 폴리카르푸스를 통해서 예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레네우스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계승, 즉 사도들의 전승을 벗어난 성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사도 전승을 벗어난 성경이 어떤 것인지 말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2세기 초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라고 특별히 강조하던 작품들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2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는, 유다인들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구약성경이라고 말하는 성경, 즉 영감 받은 책들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구약성경을 읽었는데 그들은 구약성경을 예수의 도래를 미리 예언한 예언서로 간주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을 히브리 민족의 역사로 보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약성경 안에서 예수에 관한 내용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말할 때 사도들의 증언과 사도들을 직접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인용했다. 이런 증언들은 원래 구두로 진술되었다. 그런데 사도들이 죽거나 사라지자, 사람들은 사도들의 작품을 기록해 둘 필요성을 느꼈고 작품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사도들을 그 작품의 저자로 간주했다. 그리고 작은 집단들에서는 토마스, 야고보, 바오로, 베드로 복음서와 같은 자신들 나름의 복음서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복음서의 숫자가 많아지자, 각 공동체들은 복음서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찾아 나섰다. 그 기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도성’이었다. ‘사도성’은 ‘고대성’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때 위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결국 2세기에 성경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이레네우스가 주장한 바와 같이, 4복음서만이 모든 교회가 공인하는 복음서이고 그밖에 다른 복음서는 없다는 것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4복음서는 네 명의 사도들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레네우스가 인정한 다른 성경들도 역시 네 사도들의 작품이었다. 네 사도들은 바로 마태오, 베드로, 바오로, 요한이다. 2세기 중엽에 나온 또 하나의 저술로 18세기에 발견된 것이 있는데,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무라토리 단편』이라고 불리는 이 저술도 이레네우스와 비슷한 정보를 제공한다. 하지만 상당한 반대와 논란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요한 묵시록, 유다서 같은 작품들이 정경으로 인정되었다. 그런가 하면 일부그리스도인들은 『디다케』나 『헤르마스의 목자』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책(성경)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2세기 말, 교회는 신약성경에 대한 정경 목록을 규정했다. [2017년 7월 2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교황 주일, 연중 제13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초세기 그리스도인의 모습(1~3세기) (7)



신학의 탄생

그리스도교 교의가 싹트기 시작하자,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가르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그들은 정경으로 인정한 작품들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계시를 완성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이 같은 내용을 성찬과 세례 후보자에게 실시하는 예비신자 교육에서 구두로 설명했다. 이런 직무를 맡았던 주교들, 사제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이들이 저술 활동을 통해 최초의 신학자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안티오키아의 이냐티우스 주교가 쓴 일곱 통의 편지가 있다. 2세기 초, 이냐티우스는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 사이의 교의적인 일치를 지켜 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는 단지 인간의 형상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냐티우스는 예수의 참된 육화를, 예수는 참으로 역사상의 인물이었고 참된 사람이었음을 강력하게 변론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성찬례를 통해서 하나로 일치된 공동체 안에서 이 예수를 만난다고 했다. 이레네우스는 평화의 사도로서 중재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단반박》과 《사도적 가르침의 논증》에서 거짓 계시를 반박하면서 신학을 전개했다. 《사도적 가르침의 논증》은 성경에 대한 교리 교수법이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태생인 오리게네스(185~253)는 신자들을 가르치고 설교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알렉산드리아의 데메트리우스 주교는 그에게 예비신자 교리학교의 교장직을 부탁했고, 이 학교는 최초의 예비신자 교리 학교였다. 그는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레아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규모가 큰 그리스도교 도서관을 세우고 그곳에서 가르치며 성경을 주석하고 가르치는데 일생을 바쳤다.

말년에 몬타누스 이단에 빠진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와 카르타고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비난했지만, 그는 아주 뛰어난 논쟁가이자 신학자였다. 그는 하느님과 관련해서 ‘삼위일체’와 ‘위격’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고 그리스도교 신학에 라틴어를 도입했다.

키프리아누스(200~258)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윤리적인 해방을 발견했다. 그는 사제가 되었고,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로마의 주교와 이단자와 배교자에게 베푼 세례가 과연 유효한가 하는 문제로 서로 첨예한 갈등과 긴장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이단자가 비록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고 하더라도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카르타고 교회의 입장이었고 로마 교회는 이단자가 이미 세례를 받았기에 첫 세례가 유효하다는 입장이었다.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작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기도, 자선, 의복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루었고 박해로 흔들리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했다. 교회의 일치야말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표지이며, 이 일치는 신자들을 사목하는 주교 등의 일치에 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 [2017년 7월 9일 연중 제14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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