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강론자료

마태오복음 6,24-34 두 주인 (2017. 2. 26. 연중 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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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7-02-23 ㅣ No.2164

그때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두 주인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한 주인을 미워해야만 다른 주인을 사랑할 것이며, 한 주인에게 충성하면 다른 주인은 업신여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slave)’주인(master)’과 늘 붙어 있으면서 그가 가는 곳으로 따라가야만 한다. 이런 이유로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하늘나라의 제자는 오직 하느님을 따르되 세상의 가치는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은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며, 욕망은 허상이다. 욕망은 죄를 낳고 죄는 죽음을 낳는다.(야고보서 1:15) 따라서 돈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끈다. 이에 반해 하느님은 성령을 통하여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돈과 하느님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하느님과 돈을 동시에 섬기려는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려는 종과도 같다. 세상의 종은 자신의 주인을 섬기기 위하여 반드시 다른 주인을 미워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종은 반드시 돈을 미워하고 하느님께 충성하는 종은 반드시 돈을 멸시한다. 반대로 돈을 사랑하는 종은 반드시 하느님을 미워하고 돈에 충성하는 종은 반드시 하느님을 멸시한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이끌리는 것이며 충성은 상대방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영적 생명을 누리며, 이로 말미암아 돈에 점점 초연하게 된다. 하늘나라의 스승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람을 사랑하되 돈을 멸시한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거짓 스승은 돈을 사랑하되 사람을 멸시한다. (참고로 분명히 말해두면, 하늘나라의 제자는 또한 하늘나라의 스승이다. , 하늘나라의 진리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삶을 통하여 진리를 세상에 드러낸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얼마간의 돈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돈 모으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거나, 돈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은 죽음의 행실이다. 돈은 결국 욕망이라는 허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참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따르는 종이 되어 하느님의 칭찬을 받아야만 한다. 세상에서는 종이 주인에게 봉사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주인이 종에게 봉사한다. ,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베풀어주신다. 또한 예수의 제자는 아버지를 본받아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하늘과 땅을 통틀어서 살아있는 존재는 오직 하느님과 그분의 자녀들뿐이다.

 

예수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큰 사업을 벌이는 종교지도자들이 널려있다. 그러나 사람의 어리석은 꾀로 하느님의 정정당당한 지혜를 가릴 수는 없다. 결국 어리석은 꾀에 넘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살까, 또 몸에는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시오. 아무런들 목숨이 음식보다 귀중하지 않겠습니까? 또 몸이 옷보다 귀중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의 새들을 보시오. 저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수확을 하여 창고에 보관하지도 않지만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저것들을 돌보아 주십니다. 여러분은 새들보다 귀중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목숨을 걱정한들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왜 옷을 걱정합니까? 들의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시오. 저것들은 일하지도 않고 옷을 짓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솔로몬 왕은 그 많은 재물을 지니고도 저 꽃들 중의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습니다. 들의 풀들은 오늘 여기에 있다가 내일이면 잘라져서 화덕에 태워집니다. 그것들을 입혀주시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어련히 잘 입혀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믿음이 없습니까?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 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 이교도들은 늘 이런 것들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에게 이 모든 것들을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니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마음을 쓰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다른 모든 것들도 곁들여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걱정하지 마시오. 그날은 그날대로 충분한 걱정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매일 닥치는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충분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몸의 생명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옷은 외부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보다 목숨이 중요하고, 옷보다 몸이 더 귀중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목숨은 영적 생명, ‘은 영적 자아를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물론 이 둘은 같은 것을 달리 말한 것뿐이다. 영적 생명을 기르기 위해서는 망덕과 애덕이 필요하고,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영적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신덕이 필요하다.

 

는 양 날개를 펼쳐서 공중을 자유로이 날아다닌다. 새의 양 날개는 욕정(재물)과 욕망(명예)을 상징한다. 세상 사람들은 욕정과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자유로움을 느낀다. 이를 육적 자아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영적 자아의 양 날개는 망덕과 애덕이다. 새의 욕정과 욕망을 채워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망덕과 애덕을 실천하는 당신의 아들에게 신적인 생명과 지혜를 내려주신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먹을 것마실 것이다. 새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육정의 자유를 누리며 살다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생명 활동을 멈추고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에게 육신의 생명을 넘어서는 영적 생명을 주고 계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신의 생명보다 영적인 생명을 우선적으로 돌보아야만 한다.

 

은 지혜를 상징한다. 하느님의 지혜는 신덕이다. 들꽃의 아름다움은 사라지는 겉모습에 불과하지만 신덕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솔로몬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 ‘들꽃은 세상을 가리킨다. 사람의 지혜로는 세상을 알 수 없다. 물론 사람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욕정과 욕망으로 재단한 부분적인 지식이다. 욕정과 욕망은 허상이므로 욕정과 욕망에 근거한 지식 또한 허상이다. ‘솔로몬의 지혜 < 들꽃 < 신덕으로 비교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는 신덕의 권능을 강조한다. 신덕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모두 포용하고 다스림으로써 참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하느님께서 하찮은 새와 들꽃조차 먹여주시고 꾸며주신다. 그것들은 일도 하지 않고 수고를 들이지도 않는다. 하물며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생명과 자유와 지혜를 내려주시는 데에 어떤 조건을 붙이시거나 대가를 바라실 리가 없다. 하늘나라에 참여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인생은 그 자체로 행복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에게 먹고 마시고 입을 것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덤으로 얹어주신다. , 인생의 모든 사건이 영적 생명을 북돋우는 양식으로 변화한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도들은 그저 육신을 돌보는 일밖에 모르지만 스스로 하느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영적인 생명을 돌보아야만 할 것이다.

 

매일 매일의 삶에는 육정을 포기하기에 앞서 겪는 걱정거리와 육정의 고집에서 오는 괴로움이 있게 마련이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매일 매일의 걱정거리와 괴로움을 이겨냄으로써 영적 성장을 이루며 아버지를 닮는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아버지께서 아들의 육신을 보살펴주실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그날그날(=오늘)’에 충실함으로써 내일을 완전하게 대비한다. 현재에 충실하지 않고 앞날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의 사건을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람은 누구나 바로 오늘 밤에 죽을지도 모른다.

 

<첨언>

의 상징은 창세기의 다음 구절과 관련이 있다. “주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짐승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그들을 입히셨다.”(창세기 3:21) 이에 앞서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창세기 3:7) 무화과나무 잎은 사람의 지혜를 상징한다. (무화과나무 잎은 손바닥처럼 다섯 갈래로 되어 있는데, 성서에서 5는 육정의 숫자이다.) 하느님께서 입혀주신 짐승 가죽 옷은 믿음을 상징한다. 사람은 믿음으로 짐승의 처지를 벗어나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차지한다. 사람은 겸손하게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그에 따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얻는다. 놀라운 역설이며 믿기 어려운 비약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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