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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21: 페레올 주교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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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22 ㅣ No.1600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21) 페레올 주교 선종


페레올 주교 ‘과로사’, 당시 조선 교회 성직자들의 숙명

 

 

- 제3대 주선대목구장 장 조제프 페레올 주교는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해 1853년 2월 선종할 때까지 8년간 조선에서 사목했다. 사진은 페레올 주교 초상. 조선 입국전 그린 것으로 중국식 복식에 변발을 한 것이 특이하다.

 

 

제3대 조선대목구장 장 조제프 페레올(Jean Joseph Ferreol, 1808~1853) 주교가 선종했다. 1853년 2월 3일 밤 10시께 서울 주교관에서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안타깝게도 페레올 주교 선종과 관련한 최양업 신부의 글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사목 보고서 형식으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와 홍콩 극동대표부에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 중 1852년도와 1853년도 서한이 유실된 상태다. 아마도 1853년도 9~10월께 쓴 그의 편지에 페레올 주교의 선종 소식을 알리지 않았겠나 짐작만 할 뿐이다. 현존하는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의 선종과 관련한 내용은 1854년 11월 4일 동골에서 홍콩 극동대표부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 단 한 줄 실려 있다. “공경하올 페레올 주교님의 선종으로 우리가 실의에 빠져 슬퍼하고 있을 때 새 선교사 한 분이 입국해 우리한테 오시는 것을 볼 수 있게 돼 얼마나 기쁘고 큰 위안이 됐는지 모릅니다.”

 

페레올 주교 선종과 관련한 1차 사료는 다블뤼 주교(1853년 당시 신부)의 편지가 현재로선 유일하다. 샤를르 달레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의 페레올 주교 선종 내용도 다블뤼 주교의 편지에 기초하고 있다. 

 

페레올 주교는 1852년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낸 지 얼마 안 돼 중병에 걸렸다. 누적된 피로가 원인이었다. 당시 조선 교회 성직자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신자들을 만나러 가야 할 곳이 많아서 눈과 얼음이 덮인 산들을 가로질러 매일같이 걸어 다녀야 했기에 오래지 않아 녹초가 됐다. 최양업 신부조차 두 번의 사목 방문에 지쳐 병이 날 지경이었다. 당시 조선의 사제들에게 무엇보다 휴식이 필요했다.

 

“백약이 무효합니다. … 저는 완쾌되리라고 더 이상 기대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곧 닥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다블뤼 신부가 페레올 주교를 대필해 1852년 9월 20일 서울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쓴 편지)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 중병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서울 주교관으로 달려왔다. 그는 며칠간 주교 곁에서 간호하다 병세가 호전되는 것을 보고 사목 여행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페레올 주교의 병은 재발했다. 이번에 다블뤼 신부가 주교에게 병자성사를 줬다. 그는 위급 시 곧장 주교에게 갈 수 있도록 서울 근교 교우촌을 돌며 사목을 계속했다. 

 

페레올 주교는 병석에서도 교구장 직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다블뤼 신부에게 대필을 부탁해 홍콩 극동 대표부에 여러 명의 조선인 신학생을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에 보낼 것이라 보고했다. 또 조선 선교 자금을 위험성이 있는 곳에 투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에게 자기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후임 교구장을 빨리 뽑아줄 것을 청했다.

 

- 페레올 주교는 생전에 앵베르 주교나 김대건 신부 무덤 옆에 묻히길 원했다. 사진은 미리내 성지 김대건 신부 무덤 곁에 있는 페레올 주교 묘소.

 

 

1852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페레올 주교는 “위급하지 않다. 우선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푸는 일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며 “곧장 달려오지 말고 교우들을 방문해 성사를 집전하면서 오라”고 당부했다. 자신보다 신자들을 더 사랑한 페레올 주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페레올 주교의 복사로부터 위중하다는 편지를 받고 다블뤼 신부는 주교의 당부를 어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교우촌 방문을 중단하고 서둘러 서울로 갔다. 1852년 2월 5일 그가 주교관에 도착했을 땐 페레올 주교는 이미 이틀 전에 선종했다. 페레올 주교는 운명하는 순간까지 함께 조선 땅을 밟은 동료인 다블뤼 신부를 무척 기다렸다고 한다. 그는 다블뤼 신부와 생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운명했다. 

 

다블뤼 신부의 주도로 페레올 주교의 장례 절차가 시작됐다. 그가 도착한 2월 5일 밤 고인의 시신에 제의를 입히고 주교관을 씌웠다. 그런 후 자정 무렵 남들이 모르게 더 외진 신자 집으로 시신을 옮겼다. 이튿날 아침 미사를 봉헌한 후 주교의 시신을 입관했다. 옻이 두껍게 칠해진 소나무 관에는 벨린나의 명의 주교이며 조선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페레올 주교의 시신은 땅이 꽁꽁 얼어붙어 바로 매장할 수 없었다. 한 신자가 그의 시신을 맡아 2개월 동안 보관했고 4월 11일이 되어서야 그것도 한밤중에 다블뤼 신부가 참여한 가운데 매장했다. 생전 페레올 주교는 자신의 선임자인 앵베르 주교나 김대건 신부 옆에 묻히길 원했다. 서울 삼성산에 있던 앵베르 주교의 무덤에는 접근이 어려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안성 미리내 김대건 신부 무덤 옆에 안장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월 22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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