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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본당순례: 더욱 굳건해진 사랑의 공동체 사파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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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4-04 ㅣ No.713

[본당순례] 더욱 굳건해진 사랑의 공동체 사파동 성당

 

 

창원과 김해에 걸쳐있는 불모산(佛母山) 중턱에 본시 성스러운 분들이 머무는 절이라 해서 ‘성주사’(聖住寺)라고 불리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신라 흥덕왕 10년(835년)에 도력으로 왜구를 무릴리친 무염(無染) 국사를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는데 창건 당시 곰도 도왔다고 해서 흔히 ‘곰절’이라 불린다. 이 절에서 불음(佛音)을 알리는 동종(銅鐘)을 타종할 때면 그 소리가 들리는 지역을 가음(可音)동이라 하고, 그 밖의 중생들이 사는 지역을 사바세계라 해서 ‘사바동’이라고 부르다가 ‘사파동’이 되었다는 야사가 전해오는데 우연하게도 1천백 년이 훨씬 지난 지금, 중생들이 산다는 사파동에 가음지역에 있는 가음동성당에서 분가된 사파동성당이 있으며 곰절 ‘성주사’와는 오랫동안 결연을 맺고 있다.

 

 

사파동성당의 역사를 요약하면

 

우리나라의 경제발전과 함께 1974년 4월, 창원지역이 대규모 중공업 중심의 기계공업기지를 조성하기 위한 ‘산업기지 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전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기회의 땅인 창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당시 개발중심 지역이었던 창원군 상남면 지역의 유일한 가톨릭 공동체였던 상남공소는 1977년 용지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안민공소와 창곡공소를 본당 관할로 두면서 이 지역 가톨릭 신앙공동체를 확장하는 불씨가 되었다. 그 후 창원공단조성이 본격화 되면서 용지본당의 신자수가 급격히 늘어나, 가음동성당을 봉헌하게 되었다. 급기야 1989년에는 창원시 인구가 30만으로 늘어나자 장기적 안목에서 아파트 지역인 사파동에 성당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사파동성당의 총 공사비는 6억 5천만 원으로 당시로서는 꽤나 큰 금액이었지만 모(母)본당이었던 가음동성당을 주축으로 반송, 중동, 양곡성당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성당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콘크리트 구조물이 붕괴되는 사고까지 발생하는 등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접한 자매교구인 오스트리아 그라츠교구가 2억 원이라는 거금을 지원했다. 당시 자금이 부족하고 실의에 찬 우리에게 큰 용기를 주는 단비였음을 돌이켜 보면, 그분들이 보여준 그 감사함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드디어 1989년 6월 24일 1,277석 규모로 우리 교구에서 가장 큰 성전이 봉헌되었다. 당시와는 달리 지금은 상가와 접해 있어 외관적으로 돋보이지는 않지만,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있는 대리석으로 조각된 성모상이 잘 가꾸어진 화단의 꽃들과 함께 우리를 반긴다. 계단을 오르면 본당설립 25주년을 기념하면서 모신 ‘세례자 요한’ 주보성인상도 많은 신자들의 손 기름이 묻어 반짝거리는 왼쪽 발등을 살며시 드러내 보이며 우리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사파(四派)가 된 아픔속의 성장

 

역사가 깊은 다른 본당과 비교하면 그렇게 오래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설립 32년을 맞이하는 동안 6분의 사제와 13분의 수도자를 배출할 수 있는 은총을 듬뿍 받은 공동체이다. 대희년인 2천년에는 무려 445명이나 세례를 받기도 했다. 소년꾸리아를 포함한 6개 꾸리아, 82개 쁘레시디움에 820여명이 넘는 레지오 단원이 활동하면서 우리 교구에서 처음으로 본당 단독 꼬미시움을 창단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2007년에는 본당에서 사목한 유영봉 야고보, 이형수 블라시오 두 분의 신부님이 함께 몬시뇰로 서임되는 등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축복 속에 성장하였다.

 

그러나 도시의 팽창과 함께 신자수가 지속적으로 늘어나 주일미사만 7대를 봉헌하게 되면서 2005년 1월 15일 본당은 또 다시 새로운 역사의 장을 펼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공동사목’이다. 즉, 한 성당을 4곳의 사목지역으로 나누어 흔히 말하는 ‘한 지붕 네 성당’이라는 특별한 사목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복음사가의 이름을 따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지역으로 지역중심의 공동사목을 실시하였으나 다시 지역단위를 독립된 성당으로 승격시켜 사파동, 신월동, 창원상남동, 토월동성당으로 4개의 본당체제로 바꾸었다. 이를 계기로 신자들과 본당사제 간에 만남의 기회가 많아지고 본당별 신자들의 결속도 돈독해지는 등 사목의 질적인 가치는 높아졌다. 시간이 흐르자, 한 성당 건물 안에서 본당이 다른 4개 본당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함께하면서 발생되는 보이지 않는 벽이 증폭되었다. 어느덧 하나의 공동체로 동질감을 확보하기에는 한계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로 인한 부작용 또한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더욱 굳건해진 공동체

 

이렇게 되자 4개 본당신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공동사목에 대한 의견을 묻게 되었다. 그 결과를 토대로 교구장 주교님의 결정에 따라 꼭 10년 만에 다시 하나의 공동체인 ‘사파동성당’으로 환원되었다. 그 당시 신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호가 ‘우리는! 하나다!“였다. 어쩌면 10년 동안 각기 다른 본당신자로 마주치면서 서로가 많이 불편하였기에 하나로 되는 것 또한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다행히 본시 하나였던 공동체라서 그런지 사파공동체는 빠른 속도로 일치하고 단합되면서 지금은 비 온 뒤의 땅처럼 한때 소원했던 형제애가 더욱 굳건해지고 있어 말 그대로 ’사파‘(沙巴)가 사파(四派)가 되었다가 다시 사파(沙巴)로 되돌아왔다는 것을 체감하게 한다.

 

이제 사파동성당도 옛날 같지만은 않다. 본당 설립 당시 3,40대의 젊은 청년들은 어느 듯 7,80대가 되어 새삼 세월의 흐름을 절실하게 한다. 청년들의 옥타브 높은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300명이 넘던 주일학교 학생들도 이제는 절반도 안 되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의 축복 속에서 모든 신자들이 더욱 일치하는 ’사파공동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성숙된 하느님 백성이 되려는 기도의 공동체, 스스로가 한 형제 · 자매가 되려는 일치의 공동체, 스스로가 봉사하려고 하는 나눔과 배려의 공동체가 될 것을 확신한다. 앞으로 20년도 채 남지 않은 2039년 6월 설립 50주년이 되면, 25주년을 기념하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의 증거물들을 모아 묻은 ’타임캡슐‘을 기쁜 마음으로 열어 볼 수 있기를 기대하여 본다.

 

[2020년 4월 5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톨릭 마산 2-3면, 한일문 하상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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