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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가르멜 여자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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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2 ㅣ No.633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3) 가르멜 여자 수도원 (상)


교구에 둥지 튼 지 40년된 공동체

 

 

- 천진암 성지 계곡에 자리한 천진암 삼위일체 맨발 가르멜 여자 수도원 전경.

 

 

경기도 광주 퇴촌면 천진암로 1203-1번지.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 계곡에 자리한 천진암 삼위일체 맨발 가르멜 여자 수도원(원장 김용선 수녀, 이하 수도원). 올해는 수도원이 수원교구에 둥지를 튼 지 40년이 되는 해다. 현재 교구에서 아빌라의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을 따라 사는 유일한 가르멜 수도 공동체다.

 

‘가르멜’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당신께로 부르시는 카르멜 산을 말한다. 이스라엘 하이파 동남쪽에 있다. 가르멜 수도회의 뿌리는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Elijah)다. 기원전 950년 경 엘리야 예언자가 카르멜 산에서 은수 생활을 했던 것에서 수도회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 피아첸자(Piacenza)의 한 순례자 기록에 따르면 카르멜 산에 은수자들이 모여 살며 이미 570년경 수도원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이때 은수자들이 영성 모토로 삼았던 것은 ‘엘리야 정신의 계승, 발전’, ‘성모 신심을 자기 영성으로 하기’, ‘거룩한 독서의 전통 뿌리내리기’였다.

 

이후 예루살렘 총대주교 성 알베르토가 성 브로카르도 수사에게 수도회 첫 규칙서를 제정해 주었다. 규칙서에 따르면 13세기 초, 수도자들이 엘리야의 우물 근처에 살면서 한 수도원장 통솔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는 수도회 설립에 대한 최초의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규칙서에는 또 수도자들이 은수 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절제와 단식, 침묵을 지켰다고 명시돼 있다.

 

13세기 팔레스티나 최북단 항구 아코의 주교였던 드뷔트뤼는 팔레스티나에 라틴 왕국이 설립된 후인 12세기에 순례자들과 수도자들이 카르멜산에 정착한 것을 기록했다.

 

이처럼 엘리야의 정신을 따르는 후계자들은 자신을 성모님께 봉헌하고 은수 생활을 하며 공동체를 이뤘다. 중세 가르멜 수도자들에게도 카르멜 산은 엘리야 예언자의 삶과 연관된 다양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소였다. 그들은 엘리야가 우상 숭배를 척결한 일,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쇄신한 일, ‘비’로 상징되는 하느님 자비와 은총이 천상에서 내리도록 줄곧 기도한 일에 주목했다.(열왕기 상권 18장 이하)

 

알베르토 규칙서는 1226년 호노리오 3세 교황에 의해 회칙으로 인준됐는데, 가르멜 수도자들은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팔레스티나 라틴 왕국이 쇠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게 됐다.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수도회는 1247년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이 회칙을 완화하고 탁발 수도회로 인준하면서 사도직에 종사하게 됐다. 이로써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유럽 각지에 철학원과 총학원을 설립했다. 스콜라 시대에 들어와서는 독자적으로 학교를 설립했다.

 

문예 부흥 시기에 중요한 인문주의자들을 배출했던 수도회는 그러나 종교 개혁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한편 수도회 개혁으로도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수도회는 강한 신비적 경향을 띤 수도회로 변모됐으며 본래의 은수자적 모습을 갖췄다. 아빌라의 데레사가 세운 수도원들에서는 은둔과 관상 생활이 영위됐고, 십자가의 요한에 의해 탁발승들 사이에서도 개혁이 시작됐다. 이 개혁 그룹들은 본래 가르멜회에서 독립하여 또 하나의 수도회를 설립했다. 이것이 맨발의 가르멜회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1월 12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4) 가르멜 여자 수도원 (중)

 

 

- 가르멜의 영성은 한마디로 기도 영성이다. 우리가 숨을 쉬는 것처럼 모든 언행과 지향 등이 기도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천진암 가르멜 여자 수도원 경내의 소화 데레사 성녀 동상. 천진암 가르멜 여자 수도원 제공.

 

 

16세기에 시작된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 운동은 17세기에도 계속됐고 유럽 각 지역으로 퍼지며 개혁 수도원들이 나타나게 됐다. 그러자 총 참사회는 1650년 새 회헌을 마련해서 수도 생활에 관상의 성격을 다시 강조했다. 이런 계속된 개혁과 쇄신 운동은 수도회에도 활력을 줬다.

 

가르멜의 마리아 신심에 관한 여러 저서가 나타난 것도 이 시기다. 그 결과 수도회에서는 복되신 동정녀에 대한 신심을 확산시키게 됐고 가르멜산 성모의 갈색 스카풀라는 교회 안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마리아 신심의 하나로 꼽히게 됐다.

 

가르멜 수도자들은 초기부터 ‘성모 신심을 자기 영성으로 하기’를 영성 모토로 삼으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형제들’이란 이름으로 명명됐다. 이들은 유럽으로 이전하면서도 이 특성을 함께 옮겨갔다. 1263년 교서에서 이미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를 수도회의 수호자로 불렀다.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선교 활동이 위축되면서 수도회 발전도 주춤하게 됐으나 19세기 중기부터 다시 부흥해서 1904년 새 통일 회헌이 발표됐다.

 

가르멜의 영성은 한마디로 ‘기도 영성’이다. 우리가 숨을 쉬는 것처럼, 모든 언행과 지향 등이 기도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의식하지 않고 들이쉬는 숨이 생명과 연결돼 있듯이 그래서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 것과 같이 기도를 멈추면 죽은 신앙과 같다는 의미다.

 

레오 13세 교황(재임 1878~1903)이 당시 가르멜 수도회 총장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가르멜 정신을 잘 드러낸다.

 

“가르멜에 기도 정신을 퍼뜨리고 장려하십시오. 이를 위해서는 3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침묵, 고독, 고행입니다. 만일 이것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기도란 없으며 기도 없는 가르멜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하고 항상 초심으로 이끌었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완덕의 길」에서 “한 해, 두 해, 십 년이 걸리더라도 저 자신의 무기력으로 인해 관상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엘리야 예언자를 수도 생활의 스승으로 삼는 수도자들은 그 은수자적 삶과 정신을 이어받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순명하며 그분 안에 구원의 희망을 두는 신앙을 생활화하는 것이며, 하느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정신을 단련하는 것이다. 아울러 공동 전례 생활을 근본으로 삼고, 믿음ㆍ희망ㆍ사랑을 실천하며 주어진 사도직에 충실하며 진실한 수덕에 정진하고 있다.

 

그 관상의 정신은 성경을 토대로 한 하느님 말씀을 수도회 삶의 바탕으로 삼는다. 또 수도 생활 자체를 하느님께 맡기면서 극기와 침묵을 실천하는 체험을 소명으로 삼는 데에 특징이 있다. 가르멜 수도회는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서 신비를 느끼는 ‘자유인’이 되는 삶을 으뜸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20년 1월 19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5) 가르멜 여자 수도원 (하)


한국교회 발상지에서 삶 봉헌하고 기도

 

 

- 수도자들이 제병을 제작하고 있다. 천진암 가르멜 여자 수도원 제공.

 

 

가르멜 수도회의 한국 진출은 1939년 7월 이뤄졌다. 프랑스 맨발의 가르멜 여자 수도회 소속의 맥틸드와 마들렌 수녀가 내한하면서다. 이듬해 1940년 4월 혜화동에서 수도 생활이 시작됐고, 한 달 뒤 다시 3명의 수녀가 입국하면서 인원은 5명으로 늘어났다. 당초 수녀원을 지을 계획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고국으로부터 원조가 끊어지자 그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울대교구로부터 현재의 가톨릭대학교 부지 일부를 지원받으면서 수녀원 건립 계획은 탄력을 받았고 1941년 7월 16일 낙성식을 하기에 이른다.

 

수녀원은 세워졌으나 일제 치하에서 일본 경찰로부터 감시와 조사를 끊임없이 받아야 했다. 생활고까지 겪으며 초기의 입회자들을 귀가시켜야 하는 어려움에 맞부딪혔다.

 

해방되고 1946년에는 입회를 기다려오던 지원자 10여 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수녀회는 또다시 큰 시련에 직면한다. 마들렌 수녀는 납치돼 북으로 끌려간 뒤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다.

 

마들렌 수녀는 「귀양의 애가」를 통해 전쟁과 납치, 죽음 등 당시 외국인 수녀들이 마주해야 했던 참상과 체험을 남겼다. 이들은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기도와 침묵으로 죽기까지 그 참혹한 상황을 참아내며 데레사 영성을 완성하고 한국인들의 성화를 위해 기꺼이 씨앗이 됐다.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수녀들은 1953년 다시 혜화동 수녀원으로 귀환했다. 포로 생활 후 본국에서 쉬고 있던 앙리에트 수녀와 마들렌 수녀도 재입국하면서 수녀원은 안정을 찾아갔다.

 

전쟁 속에서 움텄던 가르멜 영성의 싹은 그 후 부산(현재 밀양), 대전, 천진암, 충주, 고성,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꽃을 피웠다. 아울러 오스트리아 가르멜 수녀들이 대구 가르멜을 창립하였고 이는 상주 가르멜로 이어졌다. 이렇게 현재 한국에 8개, 외국에 1개의 가르멜 수도원이 고유의 영성을 심어가고 있다.

 

천진암 가르멜 여자 수도원은 수원교구 요청으로 1980년 6월 4일에 설립된 교황청립 봉쇄 관상 수도원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 천진암이 지닌 얼을 이어받아 우리 겨레의 복음화와 사목자들의 성화를 위해 자신들을 내어놓는다. 기도와 침묵, 희생, 극기의 샘이 되는 수도 생활을 통해 한국교회에 활력이 넘치는 피를 공급하고 ‘제물의 삶’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특별히 기도와 봉사로 제작되는 제병 작업은 8단계 공정 과정을 거쳐 각 본당과 교회 기관에 발송되고 있다. 이런 모든 일과 기도의 지향은 세상 구원이다.

 

천진암 가르멜 여자 수도원의 평일미사는 오전 7시에, 주일미사는 오전 7시30분에 봉헌된다. 원하는 이들은 언제든 수도 공동체와 함께 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 아울러 미사와 개별 면담을 통해 기도 지향을 함께한다. 수도원 측은 “새해에 영성 생활의 진보를 원하는 신자들은 기도하는 것을 습관처럼 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워보라”고 권했다.

 

개별 면담은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가능하다.

 

※ 문의 031-762-5951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2월 2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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