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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63: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사벳의 생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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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28 ㅣ No.833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63)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사벳의 생애 ③


가르멜 성소 자랄수록 어머니 시름도 깊어져

 

 

- 가족 그리고 친지들과 함께한 사춘기 시절의 복녀 엘리사벳(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춘기 시절의 엘리사벳

 

복녀 엘리사벳이 남긴 작품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지인들과 나눈 편지입니다. 복녀는 죽기까지 대략 340통의 편지를 썼으며 이를 통해 많은 사람과 교감하고 자신의 삶과 영성을 나눴습니다. 우리는 주로 이 편지를 통해 엘리사벳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복녀가 디종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는 1901년 8월 전까지 쓴 80여 통의 편지를 보면 몇 가지 특징적인 모습이 두드러져 드러납니다. 

 

편지로 보게 되는 당시 엘리사벳의 가정은 중상류층에 속했습니다. 엘리사벳은 품격 있는 어머니의 지인들을 비롯해 친척들 사이에서 제법 교양 있는 아가씨로 성장했습니다. 중상류층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파티나 댄스에 참석하곤 했으며 여러 기회에 피아노 연주를 통해 한껏 흥을 돋우는 분위기 메이커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인들과 크로켓이나 테니스 같은 고급 스포츠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여흥에 참여하면서도 엘리사벳의 마음은 언제나 주님의 현존에 대한 자각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내적으로는 늘 주님을 향해 있었고 그만큼 그런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거리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첫 영성체로부터 시작된 주님을 향한 영적 여정, 그리고 14살에 체험한 가르멜 수도 생활을 향한 내적 부르심을 엘리사벳은 늘 마음 깊이 간직하며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를 거쳐 갔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창조주께 매료되다

 

그 시절 엘리사벳이 쓴 많은 편지에는 여러 기회에 걸쳐 가족과 함께했던 다양한 여행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엘리사벳 가족은 주로 프랑스 남부 지역을 많이 여행했는데, 거기에는 엘리사벳 가족과 친분이 두터운 예전 본당 신부님들, 친지들, 친구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름 방학이나 부활, 성탄 방학을 이용해서 많은 여행을 다니며 여러 지인과 맺은 관계를 돈독히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행을 통해 다양한 자연경관들을 보면서 엘리사벳의 마음속에는 이렇듯 아름답고 신비스런 자연을 만드신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생각이 깊게 자리 잡아 갔습니다. 당시 엘리사벳이 여행하며 썼던 여러 편지에는 자신이 보고 방문했던 아름다운 자연경관들에 대한 감탄이 담겨 있으며, 무엇보다 그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주로 여행한 지역은 프랑스 남서부의 스페인 접경지대에 위치한 피레네 산맥 근처의 아름다운 도시들로 루르드, 타르브, 포, 바욘느 그리고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 인근에 있는 안시, 제네바, 그레노블처럼 그림 같은 도시들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통해 각성된 엘리사벳의 깊은 예술적인 감수성은 그 시절 보았던 아름답기 그지없는 자연경관들을 통해 한층 더 성숙해 갔으며 무엇보다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깊이 매료돼 갔습니다. 예컨대 엘리사벳은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며 영원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높이곤 했습니다. 그가 바라본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주님께로 인도해 주는 안내자와 같았던 셈입니다.

 

 

가르멜 성소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봉헌

 

이렇듯 사춘기의 엘리사벳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지인들과의 만남, 음악, 파티와 댄스 그리고 여행을 통해 더없이 행복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의 마음 깊은 곳에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영원을 향한 갈망이 깊어 갔으며 그래서 그에게 사춘기는 동시에 영적인 도약을 위한 내적 투쟁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14살에 가르멜 수녀가 되겠다는 부르심을 느낀 이후로 엘리사벳은 사춘기 내내 이 소망을 키워 갔습니다. 1894년부터 가르멜에 입회하는 1901년까지는 이런 가르멜 성소가 자라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춘기를 거치며 소녀에서 어엿한 아가씨로 거듭나는 가운데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자신의 정배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사랑에 온전히 응답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워 갔고 무엇보다도 이를 가르멜 영성 안에서 성숙시켜 갔습니다. 

 

엘리사벳은 주님의 사랑에 대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응답은 자신을 통째로 그분께 봉헌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철저한 봉쇄와 침묵 속에서 한 생애를 자신의 정배께 온전히 봉헌하고자 열망했던 엘리사벳의 가르멜 수도 성소가 지닌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에게 가르멜이란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귀속시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 시절 엘리사벳의 뇌리에 늘 후렴구처럼 자리 잡았던 화두는 자신을 예수님께 통째로 내어드리는 것, 그분을 만나기 위해 기도에 전념하는 것, 그리고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중재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이 디종 가르멜에 입회하기 1년 전에 썼던 「내적 일기」에는 이런 원의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저는 아직 이 세상에서 1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많은 선행을 하며 이 시기를 잘 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 안에 가르멜 수녀의 마음을 만들어 주소서. 내면에서부터 그것을 살아낼 수 있고 또 그러길 원합니다. 나의 하느님, 제가 온전히 당신의 것이라는 게 이 얼마나 감미로운지요” (「내적 일기」138). 

 

이렇듯 사춘기 시절의 엘리사벳은 이미 세속에서부터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진 가르멜 수녀이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가르멜에 입회하기까지 엘리사벳은 어머니의 반대라는 난관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28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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