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교육ㅣ심리ㅣ상담

[상담] 갈등, 해결하는 게 아니라 관리하는 것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1-14 ㅣ No.975

갈등, 해결하는 게 아니라 관리하는 것

 

 

저의 상담실에는 갈등으로 싸우다 지쳐 이제 더 이상 싸울 힘도 없다거나 아예 헤어질 지경에 이르러 마지막에 상담 한번 받아보자며 찾아오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부부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갈등으로 마음의 문을 닫은 아이, 친구들과의 갈등으로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도 옵니다. 갈등은 집이나 학교만이 아니라 정당, 종교, 인종, 국가간 어디서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50년 가까이 인간관계를 연구한 존 가트맨 박사는 부부들의 갈등은 69%가 “영속적”이라고 합니다. 즉 대다수의 문제는 오래도록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질, 성격, 사고방식, 신념, 가치관, 꿈 등이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갈등은 해결이 아니라 관리해야 합니다. 그럼 먼저 갈등이 왜 생기는지 알아볼까요?

 

가트맨 박사는 인간관계에서 갈등의 원인은 표면상으로는 관점의 차이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 저변에 보이지 않는 ‘감정적 기억’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결혼 15년차인 박찬휘(45세, 가명) 씨와 김세례(44세, 가명) 부부는 명절이나 가족 모임이 있을 때면 늘 언성이 높아지고, 상대로부터 이해 못 받고 공격당하는 기분이 들고, 떠나고 싶을 만큼 압도감에 짓눌리며 절망감에 휩싸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제(본가) 식구 감싸기만 할 뿐 자신의 입장과 심정을 몰라준다고 섭섭해합니다. 남편은 온 가족을 화목하게 하려는 본인의 뜻이 번번이 거부당하고, 오해받고, 질타당하는 것 같아 너무나 화가 나고 절망감이 든다고 합니다.

 

이들은 상담사인 제게 묻습니다. “박사님, 저 사람 성격 좀 바꿔주실 수 없을까요? 전문가로서 누구의 관점이 옳은지, 누가 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지 말씀해주세요!” 하지만 이것은 성격 차이의 문제가 아니고 옳고 그름의 판단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있을 때는 두 개의 주관적 현실이 있고 둘 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정당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화해와 치유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답은 라포포트식 “평화를 위한 대화법”입니다. 라포포트 박사에 대해 약간의 배경을 소개합니다. 그는 원래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였지만 나치의 박해를 피해 뉴욕으로 이주한 뒤에 학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시카고 대학에서 당시로는 아주 특별한 “생물학의 수학”이라는 접학문을 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관심과 조예가 깊어 폭넓은 학식과 깊이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1960년대 월남전이 일어나자 교수로서는 최초로 반전 운동을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캐나다 토론토 대학으로 적을 옮겨 동서고금의 방대한 전쟁사를 검토하다가 평화와 파멸의 공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에 따르면 갈등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파멸이고, 다른 하나는 상생 평화이며, 이는 우연이나 운이 아니라 정확히 예측 가능한 공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공식은 놀랍게도 매우 단순하지만 민족, 종교, 정파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심지어 부부 사이 갈등에도 적용됩니다. 파괴와 파멸로 가는 공식은 간단합니다. 각자가 자기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상대에 대한 비난, 경멸, 방어, 담쌓기가 무기로 등장하며, 상대의 입장과 감정을 무시하고 간과하면 더 비극적이고 파괴적으로 상승일로에 접어듭니다. 불신, 적대감, 공격심, 복수심이 서로 증폭되면서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 결국 둘 다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화로 가는 공식은 어떤가요? 일단 양쪽 다 자기주장을 잠시 보류하고, 상대의 입장과 관점을 상대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려는 마음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상대의 말 속에 담긴 감정까지 경청해야 하며, 이것이 공감의 시작입니다. 즉 공감적 경청을 하는 것인데, 이때 중요한 것은 평화는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둘 다 진정 화해와 평화에 도달하고자 하는 진실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속임수, 약점 잡기, 우위 선점하기, 뒤통수 치기 등의 이기려는 속셈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상대를 이해하려는 뜻을 갖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대화를 할 때 듣는 사람의 자세만큼이나 말하는 사람의 책임도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즉 상대에게 비방, 비난, 조롱 투로 말한다면 듣는 쪽이 경청할 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화자(말하는 사람)는 청자(듣는 사람)가 공격이나 경멸당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철저히 ‘나-전달법’으로 자신의 주관적 경험, 감정, 기억을 부드럽고 예의 있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들은 사람이 온전히 잘 경청했다는 사실을 ‘거울식 반영법’으로 확인해주면서 수긍이나 납득이 되는 부분을 말해준 뒤 화자와 청자의 역할을 바꿔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순서도 중요하지만 “과정” 또한 매우 중요하기에 말투, 눈빛, 자세, 억양, 몸짓 등 비구어적으로도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박찬휘 씨와 김세례 씨는 이 방법으로 15년간 쌓인 적대감을 녹여내고 평화를 찾게 되었습니다. 박찬휘 씨는 홀어머니의 장남으로 여동생 둘의 가장 역할에 충실하던 자신의 입장을 잠시 내려놓고 아내의 말을 처음으로 “아내의 입장”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결혼 준비 때부터 신혼, 임신, 출산, 육아 기간 동안 자신이 남편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외로움, 섭섭함, 황당함, 소외감, 슬픔, 분노 등의 감정적 기억들을 하나씩 말했습니다. 남편은 그동안 매번 깨진 레코드판처럼 되풀이하던 원망이라 여기고 귓등으로 듣고 반격하던 방식이 아니라, 아내의 입장에서 참으로 고달프고 외로웠겠다고 수긍해주었습니다. 이어서 남편 또한 그동안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양쪽으로부터 오해받고 공격당해왔던 감정적 기억들을 천천히, 하나씩 말했습니다. 물론 아내를 비난하는 말투는 전혀 아니고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보고 느낀 대로만 담담히 말했던 것이지요. 아내는 자신만 힘들었던 게 아니라 남편 또한 참으로 민망하고, 죄스럽고, 불편하고, 힘들었겠다는 것을 비로소 남편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연민이 느껴졌습니다.

 

둘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꽁꽁 얼었던 마음이 녹아 하나로 깊이 연결됨을 확인했습니다. 이후 그들은 같은 상황을 전혀 새롭고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이 같은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니, 어머니, 아내, 남편, 자녀가 모두 큰 가족의 일원이며 서로의 노고와 가치를 깊이 고마워하게 된 것입니다.

 

이야기를 사회로 확장해봅니다. 우리는 지난 몇 해 동안 보수와 진보, 남과 북, 한국과 일본 등 다차원적으로 갈등 속에 지쳐가고 있습니다. 서로 싸우고 헐뜯고, 자기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은 모두가 파멸로 가는 지름길임을 라포포트는 모든 전쟁사를 통틀어 공통된 결론으로 강조합니다. 평화로 가려면 내 입장과 주장을 잠시 보류하고 상대의 입장을 듣고, 공감하며 수긍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모두가 성장하고 번영하는 평화의 길입니다. 부모가 다툴 때 아이들은, “누가 잘났건 옳건 우린 둘 다 싫고 괴로워요. 제발 사이좋게 지내세요.”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두 파로 치열하게 다투는 정치 지도자에게도 국민이 바라는 것은, “서로 잘났다고 싸우지 말고 국민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세요!”가 아닐까요?

 

* 최성애 - HD행복연구소 소장이자 국제 가트맨 관계치료 수련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정서적 흙수저와 정서적 금수저』 『행복 수업』 등이 있다.

 

[생활성서, 2019년 11월호, 최성애]



1,483 2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