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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34: 처음부터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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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22 ㅣ No.429

[추기경 정진석] (34) 처음부터 다시


여름엔 냉방기 없이 살고 옷장엔 낡은 옷 몇 벌뿐

 

 

- 1972년 진천본당을 사목 방문한 정진석 주교가 본당 아이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

 

 

정진석 주교는 청주교구 자립과 사목체계 확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인 교구장 임명으로 메리놀외방선교회가 일정 부분 담당했던 교구의 재정이 크게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재정 자립’이 교구의 첫 번째 과제가 됐다. 이후 1970년대 내내 교구와 각 본당은 자립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사제 양성이 시급했다. 조선 교회의 본토인 사제 양성에 힘쓴 모방 신부의 지혜가 새삼 감탄스러웠다.

 

 

우리 힘으로 사제 키우자 

 

정 주교는 가는 곳마다 성소 계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 자녀들을 우리 힘으로 키워 사제로 만들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신부님들, 그리고 신학생 여러분! 사제 직무는 확실히 일반 신자의 사도직과 구별되고, 사제는 신앙의 증거자가 돼야 합니다. 저는 사제 한 명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습니다. 봉사의 삶이야말로 우리 사제직의 행복이고 보람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정 주교는 타 교구 학생이라도 학비가 없어 학업에 어려움을 겪으면 청주교구로 입적시켜 공부를 시킬 만큼 사제 양성에 욕심을 냈다. 인세 등 개인적으로 모은 사재를 사제 양성 기금에 모두 털어 넣을 정도였다. 사제 없이는 교구장도 교구를 원활하게 사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제 양성에 정 주교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투신했다.

 

- 1971년 수동성당에서 유치원생이 꽃다발을 들고 다가오자 정진석 주교(가운데)가 메리놀회 사제들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반기고 있다.

 

 

사제는 주교의 협력자로서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다. 사제는 복음의 전파자로서, 교회의 목자로서,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사제의 직무와 생활이 추구하는 궁극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정 주교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신학생들의 품성을 중요하게 여겼고 성덕을 증진하는 것이 교구 성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주님 은총과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기도만이 주님의 힘을 얻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게 해준다고 믿었다.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리고 교구 구성원을 만날 때마다 사제 양성을 위한 기도를 청했다. 그는 성심을 다했다.

 

정진석 주교는 가능하면 사제들이 자신의 탈렌트를 활용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사제들이 하고 싶은 사목이라면 교회법이나 교회 전통에 어긋나지 않는 한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교구 사목을 위해 사제들을 믿어줌으로써 교구장과 믿음과 신뢰를 쌓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세세하게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제들이 점차 교구장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 같았다. 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사제 양성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도왔다.

 

1970년 12월 청주교구 소속 삭발례 수품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실 신학교에 들어가 품을 받고 사제가 되는 과정은 짧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신학대학에 들어가 군 복무까지 마치고 모든 과정을 수료하려면 족히 10년은 걸린다. 많은 지원자를 보내도 오랜 기간 잘 육성하지 못하면 탈락자도 많은 것이 사제 양성이다. 정 주교의 열정과 독려에 사제들과 신자들의 생각도 바뀌어갔다. 

 

정 주교는 한발 더 나아가 가난한 교구에서 생활하려면 교구장 본인부터 가난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제들이 교구장의 말을 따를 리 없기 때문이다. 정 주교는 가능한 한 지출을 줄이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우선 방의 냉난방부터 조절했다. 이런 습관이 몸에 배어 나중에도 더운 여름날에 냉방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정 주교의 옷장은 텅 비어 있었다. 옷은 고작 몇 벌이었고 서류 가방도 하나로 수십 년을 쓸 정도였다. 자신뿐 아니라 주변에도 종이 한 장 낭비하지 않도록 당부했다. 

 

특히 그는 이면지를 쓰는 것을 중요시했다. 이는 습관으로 굳어졌는데, 교구의 한 사제는 첫 보고서를 드릴 때 무척 혼이 났다고 한다. 정 주교가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종이를 뒤로 넘겨 이면지를 사용했는지 먼저 봤던 것이다. 그리고 왜 이면지를 사용하지 않았느냐고 한소리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또 이면지가 아닌 새 종이로 출력한 보고서를 드렸는데, 정 주교는 그때도 이면지 사용을 이야기하려 했다. 그래서 그 신부가 그냥 손으로 쓰는 용지는 이면지가 괜찮지만 인쇄기로 출력하는 데 이면지를 사용하면 오히려 기계가 고장 날 수 있다고 하니 그대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에는 이면지 사용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 주교는 합리적인 이유라면 자기 생각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가정 운동 전개

 

정진석 주교는 교구장 착좌 직후 교구 사제와 신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교구 상황을 파악하는 데 힘썼다. 그는 1971년과 1972년에 ‘신앙 강화의 해’를 사목 지표로 내세웠다. 정 주교에게 사목 목표의 첫 주제는 신앙이었다. 교회 안팎에서 신앙을 위협하는 요인들이 점점 더 증가하는 상황을 고려할 때 무엇보다 신앙을 점검하고 강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정 주교는 신자들이 신앙의 위기를 겪게 되는 것은 ‘약한 신앙’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신앙을 강화하는 방법은 교리나 성경을 잘 아는 것이라 생각했다. 신자들의 재교육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본당을 방문해 견진성사 등을 주례하거나 미사를 집전할 때면 주로 교리 내용을 녹여 강론했다. 

 

1973년에는 ‘처음부터 다시’라는 사목 지표를 발표했다. ‘처음부터 다시’라는 것은 그전의 사목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초심을 잃지 말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자는 의미였다. 이때는 특히 외짝 교우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 ‘성가정 운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정 주교가 강조한 신앙 내실화와 복음화 사업, 가정의 중요성은 이후의 사목 방향에서도 근간을 이뤘다. 정진석 주교의 착좌는 청주교구 사목의 제2기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1970년 착좌 이후 3년 동안의 과도기를 거쳐 1974년부터 교구 행정 체제를 개편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 주교는 교회법 규정에 맞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르침에 따라 교구 행정 체제를 확립하고자 박차를 가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월 22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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