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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21: 지상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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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0-22 ㅣ No.408

[추기경 정진석] (21) 지상의 천국


그저 기도와 공부만 할 수 있으니 “신학교가 천국”

 

 

「경향잡지」에 실린 진석의 번역본 ‘피묻은 옷을 입은 성녀 마리아 고레띠’. 당시 신학대학장 한공렬 신부와 경향잡지사 사장 윤형중 신부가 상의 끝에 역자명을 생략한 상태로 글을 실었다.

 

 

1954년 3월, 진석은 드디어 신학교에 입학했다. 첫날 첫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진석은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난 시간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명동에서의 어린 시절, 중앙중ㆍ고등학교 시절, 6ㆍ25 전쟁 중의 우여곡절이 생생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신학교에 와 있었다.

 

“인생은 참으로 신비롭구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음 한구석에선 하느님께서 함께 계셔주셨다는 생각에 감사의 마음이 솟구쳤다. 조용히 십자성호를 긋고 속으로 기도를 했다.

 

“하느님! 저를 이곳에 불러주시기 위해 저를 죽음의 고비에서 여러 번 건져주셨습니다. 사실 저는 벌써 죽은 목숨입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써주십시오. 신학교에 들어오게 하셨으니 사제가 되고 사제로 죽을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제 어머니도 돌보아주세요. 아멘.”

 

기도와 함께 단잠에 빠진 진석은 어느새 울리는 기상 종에 눈을 떴다. 당시 신학생들의 일과는 아침 6시 기상으로 시작됐다. 세면 후 성당에 가서 아침 기도와 묵상을 하고 미사를 봉헌했다. 오전 4시간의 수업 후 정오경엔 성당에서 오전 생활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고, 기도하고 점심을 먹었다.

 

 

신학교 생활은 마치 수도원 생활 같아

 

오후도 수업이나 자습 등 연구 시간이었다. 혹은 휴식을 취하거나 운동, 청소, 공동 작업 등을 하기도 했다. 오후 6시가 되면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삼삼오오 마당이나 산책로를 돌며 묵주기도를 바쳤고, 그 후에 성당에 들어가 공동으로 저녁 기도를 바쳤다. 기도가 끝나면 성당에서 개인 기도를 하거나 영적 독서, 묵상을 하기도 하고, 자기 공부방으로 돌아가 자습을 하다 정해진 시간에 전체 소등을 하고 취침했다. 매일 묵주기도 후 그 이튿날 아침 식사 때까지는 대침묵을 지켜야 했다. 신학교 생활은 전 학생들에게 아침 새벽부터 잠들기 전까지 하루도 예외 없이 군대에 버금가는 공동생활이었다.

 

신학교는 일반 학교와는 규율과 체계가 판이했다. 일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공부 시간에만 학교에 가지만, 신학생들은 방학 때를 제외하고는 입학하자마자 온종일 신학교 안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 신학교 숙소 생활은 수도원 생활과 거의 같다.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신학교 생활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서로가 상대방을 배려하고 협조해야만 잘 지낼 수 있다.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사람이 신학교에 입학하더라도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그 과정을 지탱하기 어렵다.

 

소신학교 과정을 마치지 않은 신입생들은 1년 동안 별과에서 공부해야 했다. 진석도 별과에서 공부했다. 같은 반 학생들은 10여 명 남짓이었다. 그중에는 박상래, 김택구 신학생도 있었다. 별과 학생들은 한 해 동안 라틴어만 공부했다. 당시에는 신학교의 모든 수업이 라틴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철학과 신학 강의를 듣기 위해 라틴어는 필수적이었다.

 

간혹 라틴어가 어려워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 버거워하거나 짜인 계획에 맞춰 살아가는 공동생활을 힘들어하는 학생도 있었다. 진석은 다행히도 초등학교 때 일본어로 수업을 받았고, 명동성당 복사로 신부님을 도우며 라틴어도 약간 익혔다. 또한 미군 통역을 했기 때문에 영어를 사용하는 데 불편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운 덕분에 언어로 어려움을 겪진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외국어를 배우는 요령을 터득한 진석은 라틴어를 배우는 것이 오히려 즐거웠다.

 

그뿐만 아니라 굶기도 다반사였던 전쟁통에 추위에 떨면서 가마니를 이불 삼아 잠들던 때를 생각하면 신학교는 진석에게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따뜻하게 잘 곳도 마련해 주고, 때 되면 먹을 것 챙겨주고, 그저 기도와 공부만 할 수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더구나 전쟁을 겪고 난 이 나라는 자기 한목숨 부지하기도 빠듯한 곳이었다. 남을 배제하고 자기 것만 챙기는 이기주의에 찌든 이들이 넘쳐났다. 살기 위해서는 서로 물고 뜯어야 하는 세상에서 신학교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고 나누는 신학생들은 세상이 당연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행하고 있었다. 진석의 눈에는 하나같이 천사로 보였다.

 

별과를 마치고 철학과 1학년에 올라오니 최창무, 김병도 신학생이 있었다. 그들과 철학 2년, 신학 4년까지 합해 6년을 함께했다. 진석은 이전의 라틴어 공부까지 총 7년을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진석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조금 많은 데다 서울대 공대를 다니다 신학교에 입학했기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이 차가 나도 가능하면 친구처럼 지내려고 애를 썼다.

 

1954년 봄 서울로 복귀한 혜화동 신학교에 입학하였을 당시 전교생이 80명 정도였다. 다행히 1955년 이후 신학생이 매년 평균 20여 명씩 증가했다. 교수 신부님들과 신학생들이 함께 살았던 낙산 기슭의 신학교에서 진석은 일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1957년 대신학교 개교 10주년 때 기념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정진석 신학생. 서울대교구 제공.

 

 

윤형중 신부의 조언에 따라 글쓰기 계속

 

그 무렵에도 진석은 글쓰기를 계속 이어갔다. 재미도 있었지만 진석에겐 특별한 존경의 대상이었던 경향잡지사 사장 윤형중 신부가 “무엇이든 계속 쓰라”고 조언한 이유도 있었다. 윤 신부는 진석이 입학 전 번역한 ‘성녀 마리아 고레티’ 원고를 1953년 7월 복간된 「경향잡지」에 실을 첫 연재물로 결정한 분이었다. 물론 「경향잡지」에는 저자의 이름은 생략한 채 실렸다. 신학생이 책을 번역하고 출간하면 혹시라도 그의 성소에 지장을 주지 않을지 염려한 윤 신부와 신학대 학장 한공렬 신부의 배려 때문이었다.

 

진석 역시 신학교 생활 중에는 번역을 한 줄도 하지 않고, 오로지 신학교 생활에만 몰두했다. 이 때문에 신학교 동료들은 물론 진석도 자신의 글이 세상 밖에 나와 읽히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1955년 학장 신부님의 방에서 건네받은 「경향잡지」 10여 권과 잡지에 실린 자신의 원고를 엮어 만든 책자를 받고서야 번역본이 세상에 나온 걸 알게 됐을 정도였다. 물론 책의 저자로는 윤 신부의 성함이 적혀 있었다.

 

진석은 방학 중에만 좋은 책을 골라 번역일에 매달렸다. 당시에는 「경향잡지」에 마땅한 원고가 없었던 때라 자신의 원고가 그대로 실릴 수 있었다고 진석은 생각했다. 당시 「경향잡지」는 20여 쪽 남짓한 분량이었는데, 교황님의 회칙이나 신부님들의 6ㆍ25 체험기, 그리고 크고 작은 교회 소식 등이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외국 교회의 유명한 서적을 번역한 원고는 귀중하게 대접을 받았다.

 

꼼꼼한 윤형중 신부는 진석의 원고를 빠짐없이 잡지에 실어 줬다. 원고가 묵혀지지 않고, 쓰는 대로 출간된 것은 진석에게 큰 행운이고 영광이었다. 특히 윤형중 신부가 누구인가. 유물사관을 접한 진석이 흔들릴 때, 명동성당에서의 열정적인 신앙 강의로 믿음을 잡아준 분이 아니겠는가. 특별한 존경을 지닌 분과의 큰 인연은 진석에게 참으로 감사한 선물이었다.

 

지상 천국에서 진석은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목자로서 성장해 나갔다. 자주 부르게 되는 신학교 교가는 재학생뿐 아니라 졸업생 전체에게도 항상 깨어 있도록 촉구하는 나침반과 같았다. 진석도 교가를 부를 때마다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을 느꼈다. 그 느낌은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변함이 없다.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의 그느르심 아늑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베리따스(Veritas)….”

 

[평화신문, 2016년 10월 23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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