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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신심서적 다시 읽기: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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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10 ㅣ No.305

[신심서적 다시 읽기]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은 인간의 삶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오래된 테마가 아닌가 싶다. 먼저 낱말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찾아본다. 원칙은 ‘많은 경우에 적용되는 근본 법칙’이고, 변칙은 ‘원칙, 규정에 벗어난 법칙’이며, 반칙은 ‘법칙이나 규정에 어그러짐’으로 풀이 하고 있다. 오늘날의 인류는 원칙을 지키는 일이 매우 가치 있는 일이고, 인간의 품위를 높이는 일로서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정도의 높은 도덕적 양심적 수준에 도달해 있다. 다른 관점에서 우리들은 원칙만을 지키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 또 변칙이 난무하는 곳에서는 서로 신뢰하기 어려워 불안하고 고통스럽지는 않을까? 그리고 반칙만 있는 세상에서는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 않을까?

 

몇 가지 예를 보자. 밭농사에서 철에 맞춰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며 자라기를 기다렸다가 수확하는 것은 원칙을 지키는 일이고, 박의 뿌리에 수박을 접붙여 키우며 돌연변이로 생겨난 뛰어난 종자를 보편화하는 것은 변칙에 속하고, 잡초를 뽑고 독한 농약을 치는 행위는 땅이나 동식물의 입장에서는 반칙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가축 기르기에서 소나 돼지에게 양질의 먹이를 주면서 심리적 안정을 갖도록 하여 무럭무럭 자라도록 먹이를 주고 돌보는 원칙을 지켜야 하고(처음부터 잡아먹을 목적으로 키우는 행위는 속임수가 들어가지만), 종자를 개량하는 것은 변칙을 하는 것이고 달걀이나 우유를 모아 판매하고 마침내 가축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반칙이다. 철따라 이동하는 물고기 떼가 오기를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은 원칙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물이나 낚시라는 함정을 이용해 그들을 잡는 것은 반칙에 해당되며 인공적으로 양식하는 것은 변칙에 해당될 것이다.

 

스포츠에도, 예술 활동에도, 인간의 삶에도, 경제활동에도, 신앙생활에도 원칙, 변칙, 그리고 반칙이 어우러져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지 아니한가? 간음하다 잡힌 여자(요한 8,3-11) 이야기에서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하였는데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 여기서도 원칙과 변칙과 반칙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세례를 받고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도 인생에 섞여드는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의 굴레를 벗어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신앙생활도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한다. 그저 감사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수행하며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바치는 기도서가 지혜를 강조한 잠언이나 지혜서 또는 집회서로 구성되지 않고 시편으로 이루어진 것은 시편이 원칙과 변칙과 반칙이 뒤섞인 인생의 진면목을 좀 더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구약성경이 교훈적인 내용만이 아니라 나약한 인간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에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리라.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 인간에 대한 사랑과 속임수, 전쟁과 평화 등 인간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영역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전하는 예수님의 삶에 도전과 파국이 있고 드라마틱한 사랑과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살이의 자취들이 풍부히 들어있기 때문에 강력한 매력이 있다. 그분은 파격적인 말과 행동의 변칙과 반칙 안에 언제나 사람들과 하느님,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의 원칙을 고수하시지 않았는가? 우리의 삶 곳곳에 스며있고 서로 교묘히 조합되어 삶이 되게 하고 역동적이게 하는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이 하나의 과제로 남는다. -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 전헌호 신부 저 / 도서출판 장락

 

 

‘신심서적 다시 읽기’ - 2년 간의 연재를 마치며

 

가톨릭신문에서 신심서적 읽기운동을 폈다. 이는 책 읽는 교회, 성숙한 신앙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독서운동이며 자신의 삶을 성찰함을 돕고자 한 것이었다. 이 운동에 동참하려고 본당에서는 매월 선정도서를 구매하고 회원 20여 명이 월 2회 독후감 나눔 행사를 했었다. 참 좋은 시간이었다. 여러 종교가 있고 종교인도 수없이 많은데 “왜 나라가 이 모양인가?”라는 걱정을 가끔 듣기도 하지만…. 가톨릭 신자만 하더라도 약 5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이 세상은 뭐가 달라지고 있는가? 가정이나 사회에서 신앙인으로서 살고 있는가를 묻고 그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우리는 한 순간도 성찰의 삶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무인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하느님께 우리는 시련과 고통을 없애달라고 매달리기보다 그 삶의 무게를 견뎌내고 짊어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가? 주일미사에 몸만 참여하는 것으로만 신자의 의무를 지킨다고 생각하는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한 성체조배나 묵주기도를 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우리는 신앙을 위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십계명 중 넷째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임은 다 잘 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에게 존중과 공경을 받을 수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고 용서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기억하면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또 아이는 어쩌다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면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하다. 성경읽기 또한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함이다. 성경을 천천히 읽고 묵상(되새김)하고, 기도하고, 관상(일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과연 어떻게 하고 있는가? 회원 모두는 신심서적 읽기를 통하여 참 좋은 은총의 시간을 얻었다고 회고한다.

 

교회 안에서 가톨릭 신자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며 복음적 생활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어떻게 키울까? 신심도서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 (곽은경·백창화 저)에서 읽은 예화다. 페루의 빈민촌 리마의 시장에서 올리비에 신부가 눈 깜짝할 사이 바닥에 나가 뒹굴더니 지니고 있던 카메라와 지갑을 날치기 당했다. 그 곳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미구엘 신부가 수많은 인파에다 대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미구엘 신부다. 당신들이 공격해서 탈취해 간 소지품은 우리 집을 방문한 손님의 것이다. 그러니 꼭 돌려주기 바란다.” 아침이 되자 잃어버렸던 물건이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참 기적이다. 이는 신부님께서 신앙인의 삶을 사셨고 주민들에게 헌신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신심서적 읽기는 무조건 남는 장사란 생각이 든다. 알게 모르게 자양분을 섭취하고 우리의 신심을 길러주지 않을까? 세례 때의 그 신심만으로는 어린이의 신앙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려는 신앙인으로서 ‘향기’ 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동안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와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과 늘 주님의 크신 은총 안에 머무르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신심서적 읽기’는 이번 호로 끝을 맺습니다. 그동안 신심서적 읽기를 애독해주신 여러분과 좋은 책을 선정하시어 글을 써 주신 강찬중 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월간빛, 2016년 12월호, 강찬중 바오로(대명성당,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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