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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가톨릭연구에 나온 조선천주교회사 기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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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7 ㅣ No.1139

《가톨릭연구》에 나온 조선천주교회사 기사 연구*

 

 

국문초록

 

본 논문은 《가톨릭연구》에 나온 조선 천주교회사 관련 기사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특히 1934년 순교자 성월 특집호에 나온 기사와 50주년 관련 특집호에 나온 교회사 기사들에 대해 중점 분석하였다.

 

1934년 9월호로 발간된 치명자 특집호는 문학 형식의 기사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김구정이 쓴 논설 형식의 기사 안에는 순교 및 교회사에 대해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드러나 있다. 조선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면모와 호교론이 동시에 나와 있다. 조선 가톨릭 세기 반 기념특집 합집호로 나온 1935년 9,10월호는 조선 천주교회의 시작부터 20세기 초까지 나온 교회사 관련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1935년에 나온 특집호에는 앞서 언급한 치명자 특집호에 드러난 두 가지 면모와 더불어 신문화 도입과 근대화를 강조하는 특성이 추가로 나왔다. 그 다음 달에 나온 150주년 기념 행사 특집호에는 일반 신문들의 사설을 소개하였는데, 이 안에는 천주교가 신문화 수입의 공로자라는 관점이 있다.

 

《가톨릭연구》는 초창기 조선천주교회사 역사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면서, 동시대 인물이며 천주교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던 정약용에 대해 주목하였다. 이렇게 정약용에 대한 기사 비중이 높아진 요인은 1930년대 조선학 운동과 연관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같은 시대에 나온 천주교회 잡지인 《가톨릭청년》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잡지 기사의 궁극적 목적은 천주교 선교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천주교가 근대적인 종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실학을 부각시킨 동시대 역사학 경향과 그 맥을 같이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파악한 바에 따른다면 《가톨릭연구》의 교회사 기사는 호교론, 조선 민족의 우월성 강조, 근대화라는 세 가지 면모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Ⅰ. 머리말

 

《가톨릭연구》는 1934년 1월에 《가톨릭연구강좌》라는 이름으로 평양지목구에서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1933년 9월 평양지목구에서 실시한 전교 회장들의 강습회 후 이와 같은 교육을 계속 접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간행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주교회의의 결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洪龍浩 신부는 창간사에서, 이 잡지가 《가톨릭청년》과 《경향잡지》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고유한 역할과 임무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 잡지는 1934년 6월호부터 《가톨릭연구》로 제호를 변경하고, 1937년 1월에 《가톨릭조선》으로 변경하였다가, 1938년 12월 경제적 어려움과 식민 통치에 협력을 강요하는 일제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폐간되었다.1)

 

《가톨릭연구》에 교회사 관련 기사들이 나와 있다. 강좌 형식의 기사, 문학 형식의 기사를 비롯하여 교회사 혹은 순교자들에 대한 별도의 특별호가 나오기도 하였다. 여러 형식으로 나온 교회사 기사들을 통해 당시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교회사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935년에 조선 천주교회 창설 150주년 기념 행사가 평양에서 열렸으며 이와 관련된 특집호가 나왔다. 이 기사들을 분석함으로써 교회사에 대해 갖고 있던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인식과 교회 외부의 시선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연구》가 당시 평양지목구에서 일어난 가톨릭 운동과 연관된 상황에 대해 파악한 연구 성과와 문서 선교라는 입장에서 이 잡지의 창간부터 폐간까지의 역사를 다룬 연구 성과가 있다.2) 그런데 이 잡지에 나온 여러 분야들 중 교회사 분야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룬 연구 성과도 있다.3) 이 연구 성과는 평양지목구에서 교회사 연구를 한 결과물로 나온 것이 《가톨릭연구》의 교회사 기사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 기사의 내용을 세계 교회사와 한국 천주교회사로 구분하였다. 그 중 세계교회사 관련 서술이 꾸준히 나온 것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사 관련 기사들로 무엇이 나왔는지 열거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잡지가 문서 선교를 염두에 두었으며 평양지목구에서 개최한 한국 천주교 수용 15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이 있음을 파악하였다. 평신도들의 주체적인 교회사 서술이라는 사학사적 의미를 제시하였다. 위의 연구 성과들과는 별도로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 운동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면서 《가톨릭연구》의 교회사 관련 기사를 순교 영성의 입장에서 다룬 연구 성과도 있다.4)

 

이 연구 성과들은 《가톨릭연구》에 나온 교회사 기사들을 언급하였으며, 평양지목구의 문서 선교와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 운동과 관련 있다는 점에서 그 기사들의 의의를 찾았다. 그러나 해당 교회사 기사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나 성격 파악 등은 미흡하다. 더구나 평양지목구 내의 연구 활동이라는 관점이나 순교자 현양 운동이라는 관점에 중심을 두다 보니 전체적인 조선 천주교회사 연구 경향에 미친 영향과 의의에 대한 파악이 부족하다. 한편 150주년 기념 행사에 대한 일반 언론들의 보도를 다룬 기사에 대한 분석도 미흡하다. 이 부분은 당시 천주교를 보는 외부의 시선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기에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 논문에서는 《가톨릭연구》에 나온 교회사 관련 기사들 중 조선 천주교회사 관련 기사만을 연구 범위로 정하고자 한다. 그 중에서도 박해 시대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살펴 볼 것이다. 이 중 우선 1934년과 1935년에 나온 연재 기사와 1934년 순교자 성월 특별호에 나온 기사에 대해 파악할 것이다. 이어서 150주년 관련 특별호에 나온 교회사 기사들에 대해 중점 분석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이 잡지에 나온 교회사 기사들에 드러난 교회사 관심 분야와 관점에 대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Ⅱ. 교회사 기사와 순교자 관련 특별호


1. 조선 천주교회사 관련 기사 목록들

 

이 잡지에 나온 교회사 관련 기사에 대해서는 이미 기존 연구에 언급되어 있다. 金九鼎이 연재를 하였다가 나중에 《가톨릭조선》 단계에서는 조천수가 집필을 이어 받은 세계교회사 강좌란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문학 형식의 기사인 〈殉敎講談 良娣宮의 가을〉과 〈殉敎秘史〉 혹은 〈鮮血秘史帛書〉가 연재되었음을 밝혔다. 이 밖에 김성학 아렉수 신부가 서술한 순교 일화와 연극 형식을 통해 김구정이 서술한 〈雲峴宮을 背景한 한 조각 꿈〉이 있음도 언급하였다. 또한 교회사 관련 특집호가 몇 차례 발행되었음도 이야기하고 있다. 전체 한국교회사 관련 특집호로는 1934년 9월호 치명자 특집, 1935년 9,10월호 조선 가톨릭 세기 반 기념특집, 11월호 150주년 기념 행사 특집이 있다. 지방교회사 차원의 특집호로는 1936년 7월호 대구교구 설정 25주년 기념 특집호, 1936년 9월 간도천주교회 소사, 1937년 4월 평양교구 설정 10주년 특집호가 있다.5)

 

이 교회사 기사들은 공간이나 시간을 기준으로 구분해 보면 세계교회사를 다룬 기사와 조선교회사를 다룬 기사, 그리고 조선교회사 중 특정 지역의 교회사를 다룬 기사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조선교회사 전체를 다룬 기사들은 대개 문학 형식이나 특집 기사 형식으로 다루어졌으며 박해 시대 이야기를 중심으로 삼았다. 기존 연구에서는 세계교회사를 다룬 기사들이 호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밝혀 놓았다.6) 또한 특정 지역을 다룬 특집 기사들이 나온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분석을 하였다.7)

 

이러한 기존 연구에서 그 의미를 밝힌 세계교회사 관련 기사와 조선의 특정 지역 교회사 관련 기사를 제외한 교회사 기사에 대해 밝힐 필요가 있다. 특히 이 부분은 박해 시대와 순교자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연구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박해 시대를 다룬 문학 형식의 기사와 특집호에 나온 기사들은 어떠한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을까?

 

박해 시대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 의미를 다룬 기사들만 따로 모아두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나온 순교자들에 대한 기사는 특집호 기사들을 제외한다면 모두 문학 형식의 연재물이다. 〈양제궁의 가을〉과 〈선혈비사 백서〉는 군난 소설이며, 김구정이 쓴 〈순교사극 거룩한 피〉는 연극 형식의 기사이다. 이 중 〈양제궁의 가을〉은 조선후기 정조대의 시파와 벽파의 대립을 통해 천주교의 순교문제를 쉬운 내용으로 이야기하였다. 〈선혈비사 백서〉는 《황사영백서》 작성과 관련된 조선천주교회사 내용을 알려주고 있다.8)

 

그런데 이 군난 소설 형식의 두 연재물은 신유박해가 있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군난 소설을 통하여 당시 조선 천주교회나 평양 지목구에서 조선대목구 설정 이전의 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군난 소설 형식의 연재물만 가지고는 이 잡지가 가지고 있는 교회사와 순교자에 관한 입장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또한 순교 기록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 드러나 있지 않다. 물론 〈선혈비사백서〉는 《황사영백서》를 배경으로 하였다. 하지만 해당 기록을 모티브로 삼아 만든 소설 형식의 이야기일 뿐 기록을 소개하고 분석한 기사라고 하기 어렵다.

 

그래서 《가톨릭연구》라는 잡지가 담고 있는 교회사 관심 분야와 관점에 대해 분석하기 위해서는 특집호로 발간된 1934년 9월호와 1935년 9, 10월 합본호의 기사 내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신유박해라는 특정 시대만을 다룬 문학 형식의 기사만으로는 전체적인 교회사 관점에 대해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기사가 교회사 및 박해 시대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반적인 교회사에 대한 관점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특집호 안에는 다양한 형식의 교회사 기사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파악을 통해 이 잡지가 박해 시대 교회사에 대해 가지는 관점을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2. 치명자 특집호(1934년 9월호)

 

1934년 9월호로 발간된 치명자 특집호는 주로 시, 소설, 연극, 수필 등 문학 형식의 기사가 대부분이다. 기존의 연재물인 〈양제궁의 가을〉과 이 호에서 연재를 시작한 〈순교비사 백서〉(다음 호부터 〈선혈비사 백서〉)를 비롯하여 여러 문학 형식의 기사가 나왔다. 소설 형식 기사는 복자 유대철에 대해 다룬 〈殉敎童話 어린犧牲〉이 있다. 시가 형식 기사는 〈79位福者 瞻禮를 마지하면서〉, 〈내魂은 살련다〉, 〈낫익은 두處女〉, 〈漢詩四首 祝79位致命福者〉, 〈永遠의 별〉 등이 있다. 연극 형식 기사는 병인박해를 다룬 〈운현궁을 배경한 한조각 꿈〉이 있다. 또한 수필 형식의 기사로는 〈가톨릭이여 勇敢하여라〉라는 글이 있으며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간단히 다룬 〈殉敎逸話〉와 기행문 형식으로 쓴 〈우리의 聖地를 차저서〉라는 글이 있다.

 

이러한 문학 형식의 순교자 관련 기사가 담고 있는 순교에 대한 관점은 바로 이 잡지의 앞부분에 나온 논설 형식의 기사 안에 드러나 있다. 김구정이 작성한 〈二千萬民衆에게 朝鮮福者를 鼓吹함〉과 홍용호 신부가 쓴 〈九月號를 보내면서〉가 그러한 형식의 기사이다. 그리고 시복 과정에 대해 설명한 〈福者는 엇더케 되는 것인가?〉라는 기사도 있다. 이러한 기사들과는 별도로 조선 천주교회사의 각 사건을 일별로 정리한 〈朝鮮殉敎史日曆〉도 있다.

 

기존 연구에서도 이 치명자 특집호에 실린 기사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였다. 이 중 김구정이 쓴 〈이천만민중에게 조선복자를 고취함〉이라는 사설에서 조선 천주교회사와 조선 사회와의 관련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한편, 이 치명자 특집호가 여러 형태로 순교사를 기념하고는 있지만 본격적인 역사 서술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다는 한계성도 가지고 있음을 언급하였다.9)

 

기존 연구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치명자 특집호의 기사들이 문학 형식과 논설 형식의 기사이기 때문에 역사 서술로 보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형식의 기사 안에도 역사를 보는 관점이 있을 것이다. 특히 사설 형식의 기사에는 순교에 대한 역사적 관점이 들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중 김구정의 사설 〈이천만민중에게 조선복자를 고취함〉에 드러난 순교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다.

 

조선의 순교자는 천주교를 위하야 죽은자들이라고해서 천주교를 신봉치 안는 사람은 그들의 위공을 본체마는체하며 그 긔념을 일종 종교적 경사로만 넉여 예사로 안다면 너무나 조선민족은 자존심을 스사로 유린하는 것이다. 조선 순교복자들이 천주교를 밋다가 죽엇든 엇더케되여 죽엇든 만일 이민족에게 무슨 공헌이 잇섯다면 구터히 종교인 비종교인의 분변을 지울것업시 자손된 그민족은 그들을 공경할 것이 아니냐 … 보잘것업는 오늘날의 조선이 세게적으로 널리 소개되고 구년전에 전세게각국의 대표자 수만명이 로마에 모혀서 조선사람의 초상 압헤 머리를 숙이며 《조선복자 안드레아와 모든 치명자여 우리를 위하야 비르소서》 하고 존경의 중심인물을 정한 것이 엇지 조선반만년력사에 초유한 장면이 아니냐.10)

 

여기서 김구정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시복식 당시 세계 곳곳에서 모인 이들이 조선 순교 복자들의 초상화 앞에 경의를 표한 것은 조선의 반만년 역사 앞에 없었던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서술하였다. 이와 더불어 순교자 공경이 천주교라는 특정 종교의 영광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 민족 전체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결국 이 기사에서 김구정은 가톨릭 신앙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그 우월한 신앙을 용감하게 실천한 조선 순교자들을 드높임으로써 조선 민족의 우월성도 같이 강조하였다.

 

한편 교회가 보편적 참 진리라는 점을 순교자들이 순교를 통해 증거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필자의 이말이 무슨 사상이니 주의이니 하고 날는 형제에게나 가톨닉에 대한 적대심을 가진 각종교파에서는 되지안는 수작을 한다고 코우슴을 친다기보다 욕을 할것이다마는 나는 그러한 사람들이 부인할수업는 二천년의 력사를 눈압헤 보여주리라 한가지의 주의와 사상으로 二천년을 하로갓치 나려오는 그 무슨 단결이 잇다면 그것을 가톨닉외에는 잇느냐는 말이다. 이천년이란 력사는 그리 평단한 긔록이아니다. 가톨닉이 출생하든 그당초부터 가톨닉의 주의와 사상은 세게의 적이되고 어느 민족을 물론하고 충돌의 모통이돌이 되엿다. … 군란과 순교를 생명으로한 가톨닉은 베드루의 반석우헤 만세一게의 통일과 단결을 일치안코 모든 세긔와 온세게를 정복하야 오늘날 개선의 행진라팔이 이십세긔 사상수라장으로 향하야 울녀가고잇다. 우리의 복자들은 이러한 대사상을 이에 수입식혀 이민족에게 참된 행복과 문화를 베플기에 희생이 되엿다. 조선 사람의 피로 세운 조선의 가톨닉은 물론 그 거륵한 피의 원동력을 밧어 놀납게 자랄것이지만, 사상란에 고민하는 동포여! 불행에 진 조선아 조선순교복자의 열을 가슴에 밧어라! 그리고 그 거운 열로 모든 병든 사상과 주의를 불사로라. 그는 참된 행복이 올 것이다.11)

 

이 글 안에는 순교 복자들의 신앙 증거가 교회를 반대하는 모든 사상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순교 복자들의 피를 통한 증거가 조선 천주교회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이야기하며, 교회에 반대하는 모든 사상이나 주의를 배척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사상적으로 방황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참 신앙으로 귀의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가톨릭만이 참 진리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이 기사는 호교론적인 논조를 가지고 있으며, 선교열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이러한 김구정의 사설 안에는 그가 순교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다음과 같이 드러나 있다. 우선 가톨릭 신앙을 통해 조선 민족의 우월성이 더욱 확실해 졌다고 하는 관점이 있다. 이어서 가톨릭 신앙만이 참 진리라고 하는 호교론적 관점이 동시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이어지는 홍용호 신부의 글 〈九月號를 보내면서〉 안에도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조선 이 나흔 수천명의 세게적용사 그중에서도 그 강용이 세게의 력사적 유례를 짓밟은 七十九위 초인적 장수! 저들의 승리의 월계관이야 엇지 한 라도 빗츨 일으리잇가. 영원히 한결갓치 찬란하리이다. 그러나 특별이 九월 二十六일 그 얼마나 저들의 찬현한 업적이 왼인류우헤 광휘를 발하는 날이리잇가. 저들이 살던 이 의 산수는 옛과 오늘이 다름업시 의연히 창연하야 업는 침믁을 직히고 잇슴니다만 九월 二十六일 이날만은 성신을 능가하는 찬란한 광휘를 발하고 자긔의 이초인간적 성웅들의 용력과 광영을 응변하지 아늘수 업스리이다.12)

 

이 글에서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순교자들의 위대함을 찬양하면서, 조선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면모와 순교를 통해 가톨릭 신앙이 진리임을 증거했다는 호교론적인 면모가 같이 드러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면모를 동시에 드러낸 논조들은 이 잡지에 수록된 문학 형식의 기사 중 일부분에서도 드러나 있다. 수필 형식의 기사인 〈가톨릭이여 勇敢하여라〉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와 있다.

 

치명자들의 아들들이여!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여! 그대들이 누구의 집에서 나고 뉘에서 살아가고 잇느냐 영원한 배정이어이야! 그대들을 조선의 가톨닉으로 만드럿슴을 아는가? 그대들은 항상 조선의 가톨닉들이다 영원히 봉인된 이 의 치명자의 아들들이여 위대한 선조들의 유혈을 지금도 그대들의 피줄에서 차저내겟는가 놋 차저내겟는가 혁혁히 빗나든 조상의 옛집이 그대들의 손에 틔락한다면 그 잔현한 업적을 일허버리는 원한이 뉘게 사맛치랴 천년의 종사를 하로에 쓸어트린대로 이는 오직 일모 손실의 비례이다.13)

 

이 수필에는 조선인이자 가톨릭 신자인 점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논조가 드러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조선 민족의 우월성 강조와 호교론을 동시에 표현한 글이다. 특히 ‘조선의 가톨닉’이라고 강조하는 면에서 그러한 관점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시가 형식의 기사 안에도 조선인이라는 관점과 가톨릭 신자라는 관점이 동시에 들어가 있다.

 

1934년 9월의 치명자 특집호의 기사는 주로 문학 형식의 기사와 논설 형식의 기사 위주로 나왔다. 특히 문학 형식의 글이 많이 나와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역사 서술 형태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김구정이 쓴 논설 형식의 글 안에 순교 및 교회사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이 두 가지로 드러나 있다. 조선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면모와 호교론적인 면모가 동시에 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우선 호교론적인 논조의 사설을 통해 가톨릭 신앙만이 참 진리라는 점을 역설하고 선교열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참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를 용감히 지켜낸 조선 신자들의 우월성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인들이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민족의 발전을 위한 최선임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의도를 신자들에게 더 쉽게 전달해 주기 위하여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읽기 쉬운 문학 형식 기사 위주로 특집호를 편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Ⅲ. 조선 천주교 창설 150주년 관련 기사


1. 조선 가톨릭 세기 반 특집호(1935년 9,10월호)

 

‘조선 가톨릭 세기 반 기념특집’ 합집호는 한국 천주교 수용 150주년과 시복 10주년을 학술적으로 기념하는 모임이 어느 곳에서도 없었다는 이유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이 특집호는 조선 천주교회의 시작에서 현재까지의 전 역사를 총망라하여 담고 있다. 이는 조선 천주교회의 과거를 돌이켜보며 앞날의 계획을 세울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14) 이러한 기획 의도에 맞게 이 특집호 안에는 다수의 교회사 관련 기사들이 나와 있다. 앞선 교회사 관련 기사들이 문학 형식 중심이었다면, 이 특집호 기사들은 본격적인 역사 서술의 형태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잡지 안에 있는 교회사 및 순교자에 대한 역사적 관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특집호의 권두사와 사설에 나와 있는 논조에 대해 파악을 한 후, 특집호의 교회사 관련 기사들의 주요 관심사와 관점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1) 권두사와 사설의 논조

 

《가톨릭연구》의 조선 가톨릭 세기 반 특집호 앞 부분에 당시 평양지목구장인 목이세 요안(J.E. Morris) 신부의 권두사가 나왔으며, 뒤이어 사설도 나와 있다.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를 다룬 특집호인 만큼 권두사와 사설에는 이 특집호를 발간한 취지와 더불어 나름의 역사적 관점도 드러나 있다. 이 특집호에서 교회사 중 순교자에 대한 부분을 비중 있게 다룰 것이기에 순교의 의미에 대해 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특집호의 권두사 마지막 부분에는 순교자 현양에 대한 의미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아 우리의 조상들은 무수한 희생으로 우리들에게 지극히 보배로운 유업을 전하여 주엇다. 들어난 순교자, 숨은 치명자의 무수한 무리들의 위대한 행실은 저들이 천주의 충신들이엿슴을 증명하엿다. 그러매로 이제 마음이 바른 모든 이들은 저들을 두고 기리기리 추억하기를 즐겨할지니, 하믈며 저들의 직접 후예인 우리 가톨릭이 엇지 저들을 긔렴치 아니하고 저들과 갓흔 열성으로 성교회 발전을 힘쓰지 아니하면 엇지 맛당한 후예라하랴? 아마도 우리는 저들과 갓흔 참혹한 희생을 당하지 안을 것이다. 저들이 우리의게 친 유전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는 그들의 친 전통을 치말고 교회를 위하야, 우리 신앙을 위하야, 광영스러운 희생을 앗기지 말진저!15)

 

조선 천주교회의 신자들이 순교자들이 후예임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자격을 갖춘 신자답게 신앙 생활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면모는 이어서 나온 사설에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현대는 비록 외적으로 우리의 밋음을 공격하고 우리의 종교를 박해하는 구적은 업다할지라도 보다더 무섭고, 보다더 령악한 원수들이 항상 우리를 공격하고 잇슴을 다르야할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침범하는 원수 우리 자체내에서 발생하야 우리의게 해독을 주는 무형한 구적이 그수를 헤일수업스니 엇지 외적박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아니며 신앙자유시대의 태평을 구가하는 성대라고 방심할 수 잇을 것이랴? 위험을 늣기지 못하고 원수의 를 친우의 충성된 권면으로 아는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업도다. … 우리 안으로브터 우리를 엄습하는 우리의 불신, 연약함, 게으름, 무시, 무성의 등을 박멸하고, 박그로 처드러오는 패악한 사조, 페풍, 악덕, 패륜, 속세의 체면 등, 갓가지 죄악을 폭파식혀 우리의 영광스러운 개선의 행로를 승승장구 식히야 할 것이다. 용감한 선조의 용감한 자손이 되고 열혈의 치명자들의 피는 순교자들이 되기를 결심하고 우리압헤 길게노인 희망의 압길을 영광스럽게 빗내야 할 것이다.16)

 

이 사설 안에도 실천적인 면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박해의 시대가 아닌 신앙의 자유를 얻은 태평성대라 할지라도 신앙 생활을 위협하는 내적인 위험 요소들이 많음을 강조하면서, 이를 순교자들의 용기를 본받아 이겨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 시기는 신앙 자유를 얻은 지 최소 50년 이상 지난 때였으며, 79위 시복식이 있은 지도 10년이 지나는 시점이었다. 순교자들에 대한 현양의 열기가 다소 식어가는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 열성도 해이해졌을 것이라는 조선 교회 내부의 인식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가톨릭 운동이 일어나고 있던 상황에서 순교자들에 대한 현양을 통해 신앙 열기를 이어가려는 의도로 이러한 논조의 사설을 발표했을 것이다.

 

이렇듯 권두사와 사설은 순교자들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현시점에서 조선 천주교회가 발전한 바탕에 순교자들이 있음을 강조하고,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순교자의 후예임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하여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의 신앙 실천을 부각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이어서 살펴 볼 교회사 기사 안에도 순교자에 대한 강조와 신앙 실천 촉구가 있을 것이다.

 

2) 교회사 기사들에 대한 분석

 

이 특집호는 150주년이라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 150년 동안 조선 천주교회가 걸어온 길에 대해 정리하였다. 앞서 살펴 본 권두사와 사설의 논조에서 나타났듯이 곧 나오게 될 교회사 기사가 순교자와 그들이 거쳐 왔던 역사에 주목할 것은 당연하다. 

 

김구정은 〈一世紀半을 回顧함〉이라는 기사를 작성하여 150년 동안 조선 천주교회 역사를 요약 정리하였다. 그리고 〈三大迫害 斥邪綸音〉을 국한문혼용체로 게재하여 당시 교회를 박해한 조선 조정의 입장에 대해서도 알렸다. 왜 박해가 일어났는지에 대한 원인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 이 기사를 실었을 것이다. 또한 〈朝鮮가톨릭著述家와 그 著書〉라는 기사를 통해 박해 시대와 그 직후 조선 천주교회 내에서 나온 저술들과 이를 쓴 사람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였다. 여기서 대표적 저술가로 주문모 신부, 정약종, 정약용, 베르뇌 주교, 정하상을 거론하였다.

 

그런데 이 특집호는 이미 확정된 기해 병오박해 79위 순교 복자와 당시 시복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병인박해 24위 순교자 시대를 벗어난 시기의 교회사에도 관심을 드러내었다. 조선대목구 설정 이전 초창기 조선 교회사와 신앙 자유를 얻기 시작한 시기의 교회사에 대한 기사도 나왔다.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시기에 대해서도 다루기 시작하였다.

 

조선대목구 설정 이전 교회사를 다룬 기사는 志園이 쓴 〈朝鮮가톨릭有史以前〉과 편집실에서 작성한 〈朝鮮가톨닉創建偉人傳〉과 尹禮源 신부가 쓴 〈茶山先生의 行路를 追憶함〉이 있다. 마지막으로 〈夫婦童貞 殉敎者 李루갈다의 獄中手記〉를 게재하였다. 이 중에서 〈조선가톨닉창건위인전〉과 〈다산선생의 행로를 추억함〉은 조선 천주교회 창설 주역으로 알려졌으나, 순교 여부가 불확실하며 배교자로 평가받는 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조선가톨닉창건위인전〉에서는 이승훈, 李檗, 권일신에 대한 약전과 더불어 그들의 재판 기록도 수록하였다. 이들에 순교 여부나 신앙심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이 차례대로 나와 있다.

 

一八○一년 二월 초九일에 승훈도 려산에서 체포되여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아레 군중압헤서 목버힘을 밧엇스니 는 一八○一년 二월 二十六일아오 그의 나히 四十五세엿더라. 그가 표면상으로는 번연한 치명이엿다마는 그의 령혼은 세 번재 배교한 죄를 뉘웃고 이 강산을 나갓는지 의문이다. 필자는 우리의 종도 리베드루의 통분한 이장면을 금치 못하고 뭇을 던지며 오직 그의 초년 공훈만을 천추에 전하며 절하노라.17)

 

덕조는 약한 인간의 육정을 이기지 못하야 드러나게 배교는 하지안엇으나 교회와 관게를 코 동지자들과 교제를 아주 허바렷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밧아 통곡체옵하고 음식의 구미를 일허 신체가 쉬약하게 되엿스나 그의 신앙은 회복되지 못하얏다. 옛날에 그리고 강하엿든 용긔는 업서젓고 부세영화를 비웃든 청백한 그의 심리도 사갈가치 숨어드는 가족과 친척의 유인에 포로가 되어 벼슬을 탐하고 명예를 도모하엿스나 결국 을 일우지 못하고 一七八六년 새봄을 당하야 그의 썩어진 령혼을 담은 육체에는 무서운 염병이 침로하엿다. 앗갑다. 그는 三十三세를 일기로 하고 회개하는 표도 업시 갓스니 그의 공적은 반도강산에 혁혁히 남아잇것만 뭇노라 그는 지금 어데서 살고잇느냐?18)

 

교를 전함에 그 열성과 신앙을 고백함에 그 굿셈과 형벌을 밧음에 그 인내, 그 어데를 보던지 조선천주교의 긔초인물이 된 것만은 자랑이나 악마의 유혹을 지 이기지 못하고 을 밧구어 앗갑게도 죽엇스니 그의 영화로운 치명의 면류관과 승리의 발마가지는 밧지못하엿도다.19)

 

이 글에서는 이승훈, 이벽, 권일신의 마지막에 대해 매우 아쉬워하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들이 조선 천주교회에 많은 공훈을 세운 이들이기는 했지만 인간적인 나약함을 이겨내지 못한 모습에 대해 안타까워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조선 천주교회의 기초를 닦은 일까지 폄훼되어서는 안 됨을 강조하고 있다. 비록 순교자로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공로자로 평가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편 윤예원 신부가 쓴 〈다산선생의 행로를 추억함〉에는 다산 정약용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나와 있다. 다산에 대한 윤예원 신부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아 그러면 오날지 우리에게 밋츤 신덕의 열매는 엇던 분들의 은공인가? 물론 저 고명한 학자들의 거운 설교와 양반대가들의 흘린 피의 결정이라 아니할수업다. 정다산선생으로 말하면 우리 교회 아니라 당시 국가와 사회에서도 실로 제一가는 영웅이엇다. 금년 선생이 작고하신 一백돌을 당하매공의 一생행로를 추억하며 몃마대 늣긴바를 쓰고저한다.20)

 

선생은 북창 배소에서 十八년 동안에 온갖 고초를 감수하시면서 하로도 천주를 이즌 업시 열심수게 하엿스며 자긔 배교한 글을 생각하고 항상 통회하며 서간으로 교우들에게 자긔의 악한 표양에 대하야 용서를 청함이 한두 번이 아니엿다. 그러나 이는 다른 사람이 억지로 그리된 것이니 사람의 은밀을 살피시는 인자하신 천주 의심업시 그를 용서하섯슬 것이다.21)

 

정약용의 배교는 그의 본의가 아니었으며, 나중에 이를 뉘우치고 회개하였다는 논조가 이 기사 안에 드러나 있다. 오히려 그를 조선 천주교회 창설과 정착의 공로자로 평가하고 있다.

 

한편 이 특별호의 후반부에 가서는 신앙 자유를 얻기 시작한 시기부터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韓末風雲과 가톨릭〉, 〈府大夫人 閔氏의 受洗實記〉, 〈濟州道 虐殺事件과 本堂沿革〉이 해당 시기의 역사를 다룬 기사들이다. 특히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교안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 기사에서 분석한 교안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一九○一년에 밧게 본도에서는 처음 민란이 이러낫다. 그 민란의 사유는 여러 가지나 그중 요한 것만 긔재하면 리조 五백년말에 문약정치의 페가 이섬에도 밋첫스니 즉 윤리와 도덕은 쇠하고 탐관오리들은 자긔사복만 채우고저 하엿고 사회제도는 차레가 업게되여 관장도 정치에는 눈이 어둡고 사리에만 눈이 밝앗든 시대에 이섬에 전에 업든 봉세관 한병호가 부임하야 어업세와 각동리 공유지에 미신으로 밧들든 수목과 신당과 목장과 국유지를 도민과 교우들에게 팔은사실이잇다. 그를 매수한 교우들은 자긔들의 소유가 되엿슴으로 외인들이 신위로 바든 수목과 신당을 채벌 파괴하엿스니 일로인하야 동리외인과 교우사이에는 각금 갈등이 잇섯다. 그 교우중에는 열심교우도 만엇지마는 그반면에 유명무실한 교우와 아직 사리를 모르는 예비자들도 만헛는데 이런 자들이 비리와 불법의 행동을 만히하엿다.22)

 

이 기사는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원인 중의 하나로 일부 교우들의 악한 표양도 한 몫을 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선 사회의 악습과 폐해가 근본적 원인이었음도 내세우고 있다. 조선의 전근대 사회 제도에 대한 비판과 함께 천주교 신자들이 그에 맞는 표양을 가져야 함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박해가 끝난 후에도 조선에 천주교가 정착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음도 제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천주교가 신문화 도입을 통하여 조선 사회에 역사적인 기여를 하였다는 평가를 한 기사도 있다. 〈가톨닉은 조선문화의 선도자〉라는 기사는 천주교가 다음의 6가지 일로 조선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一. 진리와 참 종교는 스사로 사람의 정신을 개발하며 의지를 견고케하며 량심을 바르게하는 신비한 능이 잇는 것이다.

二. 가톨릭교는 조선에다 상호부조하는 박애정신과 인류애의 사상을 주입식혓다.

三. 사친경장의 도를 시대를 라 가르첫다.

四. 고리대금과 사긔협잡갓흔 폐풍을 가톨릭은 교정하기에 힘썻다.

五. 조선의 제일 악풍이엿든 축첩제도와, 조혼, 강혼, 이런 폐풍을 곳치기 위하야 혼배성사의 신성을 절대 주창하엿고 신도들 사이에는 이 폐풍을 전연 투절식히기 위하야 혼인년긔를 정하며 엄중한 처벌로써 그위반되는 것을 막어왓다.

六. 미신타파이다. 제일선에서 봉화를 든 것이 이 미신타파이다.23)

 

이어지는 기사인 〈朝鮮의 新文化는 어데서 뉘가〉라는 기사도 앞의 것과 비슷한 논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천주교가 조선의 신문화에 기여한 3가지 일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一. 조선의 보배요 세게의 자랑인 한글 부흥운동은 전연 가톨릭의 은공이다.

二. 계급타파인 인도주의를 조선사람의 머리에 박어준 그것이다.

三. 녀권(女權)을 회복 식혔다.24)

 

기존 연구에서도 이러한 면을 언급하였다. 즉 천주교가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하면서, 신자들이 열성적인 신앙을 본받고 천주교회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열성적 희생적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25) 기존 연구에 나온 바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기사는 천주교의 역사가 천주교만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의 역사와 같이 하였음을 주장하려는 논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실학자인 정약용을 부각시킨 기사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천주교가 조선 사회의 실질적 발전에 기여를 하였음을 내세운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이 특집호의 기사들은 주로 사설이나 소논문 형식이다. 하지만 전기나 문학 형식을 지닌 기사들도 일부 있다. 〈조선가톨닉창건위인전〉과 〈다산선생의 행로를 추억함〉은 분명한 전기 형식의 기사이다. 〈한말풍운과 가톨릭〉, 〈부대부인 민씨의 수세실기〉는 실제 역사를 다룬 기사이면서도 문학적인 요소도 일부 가미한 기사이다. 그리고 원사료 성격의 순교 기록을 직접 인용한 기사도 있었다. 〈夫婦童貞 殉敎者 李루갈다의 獄中手記〉는 그 제목 그대로 이순이의 서간을 실었다. 그리고 교회 측의 기록은 아니지만 박해 이후에 조선 정부에서 발표한 척사윤음도 게재하였다. 기존의 정기간행물에 나왔던 보도 형태가 거의 모두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직접적인 사료 소개 기사뿐만 아니라 전기 형식 혹은 소논문 형식의 기사를 통해서도 순교 기록에 나온 내용을 전파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1934년 9월 치명자 특집호에 조선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면모와 호교론적인 면모가 같이 들어가 있음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1935년에 나온 특집호에는 앞서 나온 두 가지 면모와 더불어 신문화 도입과 근대화를 강조하는 면모가 추가로 나왔다. 문학 형식의 기사들을 통하여 기존에 알려진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파함으로써 호교론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또한 정약용을 비롯하여 초창기 조선 천주교회사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조선 민족이 천주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우월성을 가졌음을 드러내었다. 이와 더불어 천주교의 전래가 신문화 도입과 근대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점을 〈가톨닉은 조선문화의 선도자〉와 〈朝鮮의 新文化는 어데서 뉘가〉라는 기사를 통해 강조하였다. 결국 이 특집호 기사 안에는 호교론, 조선 민족의 우월성 강조, 근대화라는 주제가 들어가 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이 특집호는 교회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선 초창기 교회사 인물에 대해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시도함으로써 조선교회사의 연구 관심 분야를 확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관심 분야 확대 안에는 조선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시도와 교회를 옹호하려는 시도가 동시에 나왔다. 또한 천주교회가 조선 사회를 새롭게 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으며, 이러한 근대적인 특성이 천주교 선교를 정당화 시킬 수 있는 역사적 근거 임을 제시하였다.

 

 

2. 150주년 기념 행사 특집호(1935년 11월호)

 

《가톨릭연구》 11월호에는 평양에서 열린 천주교전래 150주년 기념 행사 특집호로 나왔다. 이 특집호에는 〈天主敎朝鮮傳來百五十年紀念 祝賀大會狀況記〉, 〈紀念慶祝大會에 關한 全國內外新聞重要記事抄集〉, 〈祝賀式 諸祝辞文抄〉, 〈大會片片雜錄〉 등의 기사가 있다. 이 기사들은 150주년 기념 행사에 대한 보도이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교회사 관련 기사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교회의 지난 발자취를 기념하는 일을 다루었다는 면에서 교회사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조선 천주교 사료 전람회에 대해 주목하였다. 이 사료 전람회가 순교의 역사를 설명해주며, 박해 당시의 옛 모습을 이해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하였다.26) 이 사료 전람회에 대한 11월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축하식을 마치고 그길로 사료전람회가 개관되여 목주교각하의 안래로 몬저 래빈제씨의 참관이 잇섯고 열엇고 그후 三四일간 일반에게 공개하엿다. 이 전남회는 규모가 그리 크지 못하엿스나 우리에게는 처음되는 것이오 의미 심장한것으로써 박해 당시의 옛를 여지업시 다시 말해주는 것이엿고 百五十년간 조선 가톨닉이 거러온 길을 다시 촉수케 하는 것이엿다. 참으로 보베로운 순교자들의 유물도 적지 안엇고 극히 중대한 긔록, 력사적서류, 신긔한 지도 등과 순교자들의 초상화 등이 수백점에 이르럿섯다. 개관 이래 매일 참관자의 발이 허지지 안엇고 특별히 력사연구에 힘쓰는 학도들이 만히 와서 보앗스며 특히 중등, 전문학교 교수들이 만헛섯다. 그 중에는 서책등의 구매를 요구하는 이도 잇섯고 노트와 연필을 들고 분주히 무엇을 긔록하는 이도 만히 보엿다.27)

 

사료 전람회에 대해 언급한 기사는 그렇게 많거나 상세하지 않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천주교의 역사를 알려 주는 책들과 유물들을 직접 접한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다소 부각시켜 교회사에 있어 중요한 일이었음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교회사와 관련된 기사는 사료 전람회에 대한 언급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사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기사는 〈기념경축대회에 관한 전국내외신문중요기사초집〉이다. 왜냐하면 이 기사 안에 당시 일반 신문들이 보도한 조선 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점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 행사에 대한 일반 신문들의 보도와 반응은 〈기념경축대회에 관한 전국내외신문중요기사초집〉이라는 제목으로 이 잡지에 나왔다.28) 여기에서 인용된 신문들의 기사가 나온 시기는 9월과 10월이며, 기사 건수는 《朝鮮日報》 6건, 《東亞日報》 4건, 《平壤每日新聞》 3건, 《每日申報》 5건, 《京城日報》 1건, 《朝鮮中央日報》 3건이다.

 

이 기사들 중에 9월자 기사들은 150주년 행사가 있을 것이라는 공고의 성격이 있다. 그리고 10월자 기사들은 150주년 행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보도이다. 여기서 천주교회사에 대한 언급과 평가를 한 기사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10월자 사설 2건과 연재 기사 1건과 보도 기사 1건이다.

 

1930년대 주요 일간지가 천주교에 대해서 보도한 기사는 이미 기존 연구에서 다룬 바가 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931년과 1935년에 각기 천주교의 조선교구 창설 100주년 그리고 전래 150주년을 계기로 그 역사적 공헌을 기사로 다루었다고 밝혔다. 특히 이 일간지들이 천주교가 신문화 수입, 사회적 폐습 교정, 교육 및 자선 사업, 한글 보급에 기여한 바에 대해 보도한 사례들을 분석하였다.29) 여기서는 150주년 기념 행사와 관련하여 《가톨릭연구》에서 인용한 기사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동아일보》 10월 2일자 조간에는 ‘천주교와 조선’이라는 제목의 社說이 실렸는데, 여기서는 조선 천주교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朝鮮文化史上에 重大한 貢獻을 한 것을 認定하노니 그는 階級을 打破하는 思想을 길러주엇다는 것이고 여러가지 새文化를 輸入하게 하엿다는 것이다.30)

 

한편 《조선일보》 10월 3일자 ‘천주교전래 백오십주년’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도 조선의 천주교 순교 역사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吾人은 天主敎의 敎理의 現代的意義에 對하야 奴奴하려는 者아니다. 오즉 社會的으로 評價할

에 가톨닉敎의 極히 嚴格한 克己의 精神과 秩序과 戒律과 모든 信仰의 形式內容이 崇嚴한 神에의 歸依의 觀念으로써 支配되는 點에 잇서서 文明國의 모든 宗敎中에잇서서 中樞的인 信仰世界를 形成하고 잇다는 것은 儼然한 事實이다. … 自己가밋는 眞理를 爲하여는 生命을 睹하야 그 信條에 忠實하고 준이 從容히 困難과 迫害를 넘어 나아가든 朝鮮天主敎의 數만흔 그殉敎者의 態度에서 우리는 배흘바가 만타고 생각한다.31)

 

《동아일보》 사설은 천주교가 조선에 신문화를 전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한편 《조선일보》 사설은 자신의 교리를 지키기 위해 곤란과 박해를 마다하지 않는 천주교 신자들의 행동을 본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동아일보》 사설은 신문화 수입이라는 관점으로 본 반면에 《조선일보》 사설은 천주교인들의 용감한 행동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한편 두 신문은 조선 천주교회사에 대한 서술을 기사에 게재하였다. 《동아일보》는 10월 2일자 조간 2면에 ‘신문화수입에 린 성혈’이라고 시작하는 제목의 기사에서 조선 천주교회 전래와 박해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였다. 《조선일보》는 10월 1일부터 14일까지 ‘천주교조선전래 백오십년 회고’라는 제목의 기사를 연재하여 150년 간에 걸친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그런데 이 두 신문의 기사는 조선 천주교회가 조선의 역사에 가지는 의의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다시한번 과거 一세긔반 조선안헤 천주교가 진파되는데는 얼마나 만흔 순교자가잇섯고 그들의 흘린 성혈(聖血)이 오늘조선의 신문화 건설과 얼마나 크게관련되어잇는가를 도라볼  실로저 一만여천주교도 학살의 페이지에 이르러다시금 감개가 일지안흘수업다.32)

 

구교인 《카톨릭》교가 조선에 전해진것도 작년으로써 百五十年년 곳 한세긔반이라는 장구한 광음이 자연히 흘러젓스니 과거암흑시대 내지 려명시긔에 처해잇든 당시의 조선사회에서는 천주교의 전례가 一반민중과 특권계급에게 대하여 一대경종인 동시에 봉화(烽火)의 역활(役割)을 한 것은 부인치못할 엄연한 사실이며 존재엿섯다. 더구나 천주교는 민족과는 물론정부와도 중대한 관계를 가지어 조선력사상에 허다한 관계와 사건을 만드러 노앗슴은 두말할 것도 업지만 신문화(新文化)의 수입 자선사업(慈善事業) 문자보급(文字普及) 등 만흔업적과 공훈을 든리운것도 천주교에서는 자랑이래도 조곰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33)

 

기존 연구에서는 이 《동아일보》의 기사가 순교자의 희생을 높이 기리면서 이들의 희생이 신문화 수입에 바탕이 되었음을 강조한 것이라고 분석하였다.34) 그런데 이는 《조선일보》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나온 10월 1일자 기사에는 신문화 수입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10월 3일자 기사는 천주교 신자들의 용기에 중점을 두었다. 결국 《조선일보》도 《동아일보》와 마찬가지로 순교자들의 희생을 신문화 수입의 바탕으로 본 관점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두 신문 모두가 천주교의 역사적 의의를 신문화 수입에 두고 있다. 특히 《조선일보》는 10월 1일부터 14일까지 연재한 기사의 서두에 천주교 전래가 조선 역사에 끼친 지대한 영향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였다. 그런데 이 신문들이 천주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신앙적인 면보다는 신문화 수입이라는 문명개화적인 면에 있다. 물론 《조선일보》 10월 3일자 사설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용감한 신앙을 찬사하는 말이 나와 있는 등 신앙적인 관점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신앙적인 면보다는 주로 근대화라는 관점에서 천주교를 바라본 관점의 비중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1930년대에 들어서 신간회가 해산되고 정치투쟁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자 다시 ‘문화혁신론’을 들고 나오면서 1920년대에 일어난 신문화건설운동 재개를 제창하였다. 1932년 4월 18일자 사설 〈문화혁신을 제창함〉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문화의 혁신은 민족운동, 정치운동, 경제운동 기탄 온갖 운동의 새로운 기초를 마련하는 운동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신문화의 보다 철저한 수용을 위한 문화운동을 주창한 것이다.35)

 

이러한 분위기에서 당시 일반 신문들이 천주교 창설 150주년 기념 행사를 보도한 관점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신문들은 이 행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사실 보도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하였다. 그런데 사설을 쓴 이들이 천주교회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얻은 출처는 천주교 관련 잡지에 나온 교회사 관련 기사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교회사 관련 기사들은 그동안 축적되어 왔던 순교 기록들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설들도 종래에 전해져 온 순교 기록들의 간접적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천주교 관련 잡지의 기사를 접한 이들 중 천주교 신앙이 없는 이들은 근대 문명 수입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존 연구에서도 주요 일간지가 천주교의 사상적, 종교적,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공헌에 관하여 기사화해서 보도했음을 밝혔다.36)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위의 사설들에서 천주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바로 신문화 운동이라는 당시의 분위기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천주교가 서양에서 들어 온 외래종교라는 인식에 기초할 때, 신문화 수입의 초석을 닦은 공로가 있다는 평가가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Ⅳ. 1930년대 역사학 및 천주교회사 서술 경향과의 연관성


1. 동시대 역사학 경향과의 관계

 

《가톨릭연구》에는 문학 형식의 연재 기사는 물론 몇몇 특별호를 통해서 나온 다양한 교회사 기사들이 있다. 이 교회사 기사들에 대한 사학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에서 밝혀 놓은 바가 있다. 우선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 특히 교회의 현재 상황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추구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민족과 천주교와의 밀접한 상호관련성을 강조하면서 천주교의 역할을 중시하였다는 점을 밝혔다.37) 무엇보다도 평신도들로 하여금 교회사 연구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는 점도 부각시켰다.38)

 

이렇듯 신문화 도입과 관련한 천주교 역할을 부각시킨 것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특히 《가톨릭연구》 1935년과 9.10월호와 11월호의 관련 기사들을 분석하면서 천주교가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을 파악하였다. 천주교가 미신을 타파하고 썩은 도덕을 바로잡고, 남녀의 차별이나 상전과 노비 제도를 없애고, 조혼과 온갖 음란한 폐습을 바로잡았으며, 자선기관을 설립하여 그리스도의 박애 사상을 전하며, 한글을 다시 살려낸 공로가 있다고 말한 점을 제시하였다.39)

 

그런데 초창기 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일어난 이유와 더불어 정약용에 대한 기사가 나오게 된 요인에 대해서는 집중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이는 천주교가 조선에 신문화를 도입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관점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바로 대표적인 실학자로 알려진 정약용과 천주교의 연관성을 강조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약용에 대한 기사가 다수 나온 것은 단지 교회 내 필요에 의해서만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시의 역사 연구 경향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당시 정약용에 대한 연구 경향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우선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1930년대에 정약용에 대한 역사적 관점을 어떠했는가?

 

1930년 전반기는 조선학 운동이 강력히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다. 이 조선학은 당시 민족주의 진영에 속한 인사들에게 널리 수용되어 갔다. 이들은 일부 사회주의 계열에 속하는 인사들과 연대하여 조선학 운동이라는 민족문화진흥운동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문화적 저항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 조선학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개혁 사상 특히 정약용에 대한 관심이 선명하게 드러났다.40)

 

1931년에 崔南善은 《조선역사》에서 실학을 조선후기 몇몇 저술가들의 독특한 연구방법으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1934년에 이르러 ‘實學派’라는 용어가 등장하였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많은 학자들의 저술을 실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 시기에 실용성, 정확성, 민족의식 등에 대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는 믿음이 확산되었다. 당시의 한국학자들은 조선왕조의 실학자들을 모범으로 삼았다. 실학자들의 방식은 본받을 대상일 뿐 아니라, 이들의 성과도 일본의 식민정책과 근대화정책의 억압 아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20세기 한국인의 행동지침으로 간주되었다.41)

 

또한 1934년에 이르러 다산서세백주년기념이 본격적으로 착수되어 《與猶堂全書》가 간행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하여 조선학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후기의 개혁사상에 대한 관심이 급격이 강화되었다. 조선후기의 학풍이 서양의 근대적 사상과 대비 고찰되었고, 당시 조선의 사회적 요구와 관련하여 조선후기 개혁사상에서 근대성의 개념이 강조되었다. 정약용의 사상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출현하게 된 시점도 이때였다.42)

 

《가톨릭연구》에서 정약용에 대한 기사 비중이 높아진 요인은 이러한 학문 연구와 관심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초창기 조선천주교회사 역사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면서, 동시대 인물이며 천주교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던 정약용에 대해 더 주목하였다. 초창기 조선천주교회사와 실학이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조명한 것이며, 그 중심 인물로 정약용의 역할을 부각시켰다. 물론 이 잡지 기사의 궁극적 목적은 선교를 위한 것임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천주교가 근대적인 종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실학을 부각시킨 동시대 역사학 경향과 그 맥을 같이 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경향잡지》와의 비교

 

《가톨릭연구》에서 교회사 기사를 게재한 1930년대 이전에도 《경향잡지》에 교회사 관련 기사가 있었다. 이제 《경향잡지》에 나온 교회사 관련 기사들에 대해 살펴 본 후에 《가톨릭연구》 기사들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경향잡지》의 전신인 《보감》에는 제1호부터 제277호까지 〈대한성교사기〉라는 고정란이 있었다. 〈대한성교사기〉에 담긴 내용은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의 한글 번역본이다. 이 기사에는 조선 천주교회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과 순교자들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 선교사들의 활동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신자들은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에 관한 전반적인 상황과 순교자들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43)

 

1919년 3월부터 9월까지 11회에 걸쳐 〈병인일기〉라는 기사가 연재되었다. 이는 병인박해 순교자 26위에 대한 약전이다.44) 1919년 3월호인 417호부터 ‘병인년 군난에 치명신 쥬교 二위와 신부 七위와 밋 죠션교우 十七위의 적’이라는 부제를 달고 〈병인일기〉라는 기사가 427호까지 연재되었다.

 

1920년부터 1931년까지 꾸준히 교회사와 관련된 기사가 연재되었다. 1920년 9월 453호부터 11월 458호까지 《상재상서》 한글 번역본이 연재되었다. 1923년 2월 512호부터 1925년 4월 563호까지 순교자들에 대한 관찬 자료들을 정리한 기사가 3부에 걸쳐 연재되었다. 〈조선 치명자 사적에 대하여 참고문적〉, 〈병오년 치명자 사적에 대하여 중요한 참고문적〉, 〈병인년 치명자 사적에 대하여 중요한 참고문적〉의 순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미 앞 장에서 언급하였듯이 1928년 10월 648호에서 1930년 1월 678호까지 《황사영 백서》 원문과 번역문을 실은 〈아륵산델 황 진사 사영의 백서〉라는 기사가 연재되었으며, 1930년 2월 679호부터 3월 681호까지 〈가백서〉가 연재되었다. 1929년 5월 661호부터 1931년 5월 709호까지 79위 순교 복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실은 기사인 〈조선 치명복자의 행적〉이 연재되었다.45)

 

1936년 11월부터 1937년 2월까지 김대건 신부의 서한 중에 있는 순교자에 대한 보고서를 번역하여 연재하였다. 그 해당 기사는 〈복자 김안드레아 김 신부의 조선 성교사에 대한 보고〉와 〈1839년 서울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행적〉이다. 물론 이는 김대건 신부의 해당 서한을 모두를 연재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1937년 2월 848호에 나온 앵베르 주교 약전과 모방, 샤스탕 두 신부의 언급까지만 게재하였다.46) 이 기사 역시 순교자 관련 사료 소개의 성격을 지녔다.

 

이렇게 창간 당시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의 《경향잡지》의 교회사 관련 기사들을 살펴 보면 교회사 관련 사료들을 번역 소개하는 기사들의 비중이 높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교회사 관련 기사 중 사료 소개 기사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문학 및 전기의 성격을 가진 기사도 있었다.

 

우선 문학 형식의 기사로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연극 형식으로 다룬 〈김신부의 치명 성극〉이 1921년 11월 481호부터 1922년 7월 497호까지 연재되었다. 연극 대본 형태의 기사가 먼저 나온 것이다. 한편 1928년 11월 650호부터 1929년 4월 660호까지 연재된 〈군난 때 미담〉은 美談 형식의 기사로 박해시대 때 일어난 일들 중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연재하였다.

 

이러한 미담 형식의 기사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에서 다루었다. 즉 이 기사가 나온 배경은 1928년을 전후해서 일어난 조선 천주교회의 현지화 정책, 1925년의 조선 천주교회 순교자 79위 시복식을 전후해서 고조된 순교자 및 순교성지에 대한 관심, 무엇보다도 조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순교자의 삶을 기록해 온 전통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기사들이 군난 시절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핵심 주제로 신앙에 대한 열정, 고난을 피한 일화, 외교인이 세례 받게 되는 이야기, 신부들의 고생담 등을 주요 내용으로 삼았다고 파악하였다. 또한 일반 천주교인들의 평범한 일상에 주목하였으며, 비극적 결말 혹은 비장감보다 언어 유희와 대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흥미와 감동을 주었으며, 신앙의 지혜를 서사화하고자 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47)

 

이후 교회사 관련 문학 형식 기사가 한 동안 나오지 않다가 1935년 1월에 발간된 797호부터 다시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 호부터 9월 813호까지 〈군난때 향긔〉라는 기사가 연재되었다. 이 기사는 예전에 연재하였던 〈군난 때 미담〉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미담 기사이다. 이러한 미담 기사 연재된 후에, 10월 815호부터 그 다음해 822호까지 〈해미치명자유해〉라는 기사가 연재되었다. 그리고 1936년 10월부터 11월까지 3회에 걸쳐 〈조선천주교회 명인〉이라는 전기 형식의 기사가 연재되었다. 이 연재 기사들은 이벽, 인은민, 권철신에 대한 약전의 성격을 가졌다.

 

《경향잡지》의 교회사 관련 기사는 사료 소개 기사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번역 연재함을 통해서도 교회사의 흐름을 신자들에게 인지시켜 줄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교회사와 관련된 미담 형식의 기사들도 게재함으로써 교회사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불러 일으키려고 하였다.

 

《가톨릭연구》에 나온 교회사 관련 기사들은 《경향잡지》에 나온 사료 소개 기사들을 바탕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경향잡지》의 기사들은 사료 소개에 중점을 두었으며, 각 사건에 대해 평가나 분석에 있어서는 미흡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연구》 특별호에 나온 교회사 관련 기사들은 각 사건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와 분석을 하고 있다. 《경향잡지》 교회사 기사가 사료 소개 위주였다면 《가톨릭연구》 교회사 기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해석하는 단계까지 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가톨릭연구》도 경향잡지와 마찬가지로 문학 형식의 기사와 미담 형식의 기사를 게재하였다. 1934년과 1936년 사이에 연재한 〈양제궁의 가을〉과 〈선혈비사 백서〉는 군난 소설 형식의 기사이다. 치명자 특집호로 나온 1934년 9월호에는 〈순교일화〉라는 미담 형식의 기사가 있다. 비슷한 시기 《경향잡지》에 미담 형식의 기사들이 다수 나왔다는 점에서 볼 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경향잡지》는 1930년대 이전부터 조선천주교회사 관련 기사들을 크게 사료 소개 형식과 미담 형식으로 게재하였다. 이는 《가톨릭연구》의 교회사 기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담 형식의 기사들을 실은 것은 물론, 사료 소개 형식을 넘어서서 이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단계까지 올라갔다고 볼 수 있다.

 

 

3. 《가톨릭청년》과의 비교

 

《가톨릭연구》에서 교회사 기사가 나온 1930년대에 같이 발간된 《가톨릭청년》에도 교회사 관련 기사가 나왔다. 이 기사들 중에 피숑 신부가 작성한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작성한 교회사 논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피숑 신부의 교회사 논문에 대해서는 이미 기존 연구에서 밝혀 놓은 바가 있다.48) 그러면 이 잡지에 나온 기사가 《가톨릭연구》에 나온 기사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비교해 보고자 한다.

 

이 두 잡지는 초창기 조선천주교회의 역사와 관련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재평가를 시도했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다산 정약용에 대한 기사에 큰 비중을 둔 것도 비슷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가톨릭연구》에서는 정약용에 대한 다수의 기사를 게재하였다. 이는 《가톨릭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가톨릭청년》 1935년 9월호 기사인 〈茶山先生의 逝世百年을 마지하며〉에 정약용이 배교하였다가 결국에는 회개하였음을 언급하였다.49) 이어서 1935년 11월호에 피숑 신부가 쓴 〈丁茶山의 信仰與否〉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달레가 정약용에 대해 평가한 것을 번역한 《보감》 109호의 기사를 인용하였다.50) 이 후 1936년 4월호에는 다산특집 기사가 5편 게제되었다. 〈茶山小傳〉, 〈茶山先生의 逝世百週年을 맞이하여〉, 〈丁茶山과 朝鮮가톨릭草創期〉, 〈茶山의 流配所 長鬐 尋訪記〉, 〈茶山의 遺跡을 康津에 찾어〉라는 제목의 기사들이다.51) 《가톨릭청년》 1935년 9.10월호에 나온 윤예원 신부의 〈다산선생의 행로를 추억함〉에도 《보감》 109호의 기사를 인용하며 정약용의 신앙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52)

 

그러한 면에서 《가톨릭청년》도 《가톨릭연구》와 마찬가지로 당시 역사학 연구 경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톨릭청년》에 나온 교회사 기사에 대해 가지는 기존 연구의 평가에 대해 알아보고, 이와 비교하여 《가톨릭연구》에도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지 파악해 보고자 한다.

 

우선 《가톨릭청년》이 일종의 문화적 민족주의의 방향을 취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당시 일제에 비타협적이었던 민족주의자들이 ‘조선문화재건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조선의 천주교 지도자들도 이러한 부분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일제하 조선 가톨릭 지성들이 갖고 있던 문화적 민족주의는 무장투쟁 지향적 민족주의 운동과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음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가톨릭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의 주류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지만, 조선 문화 내지는 천주교 신앙을 통해서 확인되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민족적 자부심은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면서 당시 조선 천주교회가 순교자 현양을 위해 힘을 썼던 데에는 이러한 사상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대표적 지식인으로 《가톨릭청년》의 편집위원 가운데 하나인 장면 박사를 거론하였다.53)

 

반면에 이 잡지의 교회사 기사 안에 피숑 신부의 선교 사관이 드러나 있다고 파악한 연구 성과도 있다. 이는 피숑 신부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가 교회사를 서술하면서 철저한 사료 비판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역사 방법을 동원하였지만 민족, 국가, 사회라는 틀보다는 ‘선교사’라고 하는 더 큰 틀을 중시하였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가 용산 신학교 재직 시절에 세계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얻은 교회사적 안목과 스스로 ‘한국인’임을 자처하며 복음 선포의 사명을 다한 선교사로서의 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54)

 

또한 피숑이 교회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종합적인 견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파악한 연구 성과도 있다. 정치적 영향 일변도의 설명을 거부하고 문화사적 입장까지 고려하였으며 순교자에 대한 단순한 서술에 그치지 않고, 교회의 일을 다루는 방향으로 확대하였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세계사적 시각에서 조선 교회를 설명하려는 입장을 가졌다고 파악하였다.55)

 

그런데 이 잡지의 교회사 기사 특징을 한 가지 면모로만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문화적 민족주의를 내세웠다고 하는 장면에게도 드러난다. 그의 궁극적 목적이 문서 선교에 있다는 점은 이미 기존 연구에 드러나 있다. 1933년 9월호에 장면이 서술한 〈殉敎의 意義와 價値〉라는 기사56)에 그러한 면모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조선 천주교회사의 순교 전통을 강조하면서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전폭적인 노력으로 주의 복음을 크게 선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을 제시하였다.57) 결국 장면의 교회사 인식에도 선교를 목적으로 하였지만, 그 방법론은 복합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가톨릭연구》에 대한 평가에도 적용할 수 있다. 《가톨릭청년》과 마찬가지로 정약용에 관한 기사가 다수 나왔다는 점에서 문화적 민족주의로 평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한편으로 이 잡지가 평양지목구에서 문서 선교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기존의 평가에 비추어 볼 때 선교 중심의 관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세계교회사 기사를 연재하였다는 면에서 세계사적 시각에서 조선 천주교회를 설명하려는 입장도 같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가톨릭연구》에 나온 교회사 관련 기사들이 가진 특성으로 호교론, 조선 민족의 우월성 강조, 근대화라는 세 가지 면모를 제시한 바가 있다. 그런데 《가톨릭청년》에 나온 해당 교회사 기사들과 이 잡지의 편찬에 참여했던 장면 등의 인식 등을 살펴 볼 때, 《가톨릭연구》가 가진 세 가지 면모에 집중한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두 잡지에 나온 교회사 기사들이 당시 조선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던 교회사에 대한 인식과 관심사를 드러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Ⅴ. 맺음말

 

조선 천주교회사 특히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가톨릭연구》 기사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 잡지는 박해 시대 조선 천주교회사와 관련하여 〈양제궁의 가을〉과 〈선혈비사 백서〉라는 군난 소설을 연재하였다. 이 연재기사는 교회사 및 박해 시대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문학 형식의 기사이기에 이 잡지가 담고 있는 교회사의 관심 분야와 관점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오히려 특집호로 발간된 1934년 9월호와 1935년 9, 10월 합본호에 다양한 형식의 교회사 기사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1934년 9월호로 발간된 치명자 특집호는 기존의 연재 기사와 마찬가지로 문학 형식의 기사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김구정이 쓴 논설 형식의 기사 안에는 순교 및 교회사에 대해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드러나 있다. 조선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면모와 호교론적인 면모가 동시에 나와 있다. 그러한 의도를 더 쉽게 전달해 주기 위하여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읽기 쉬운 문학 형식 기사 위주로 특집호를 편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 가톨릭 세기 반 기념특집 합집호로 나온 1935년 9,10월호는 조선 천주교회의 시작부터 있었던 교회사 관련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1935년에 나온 특집호에는 앞서 언급한 치명자 특집호에 드러난 두 가지 면모와 더불어 신문화 도입과 근대화를 강조하는 특성이 추가로 나왔다. 천주교의 전래가 신문화 도입과 근대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점을 〈가톨닉은 조선문화의 선도자〉와 〈朝鮮의 新文化는 어데서 뉘가〉라는 기사를 통해 강조하였다. 그다음 달에 나온 150주년 기념 행사 특집호에는 일반 신문들의 사설을 소개하였는데, 이 안에는 천주교에 대해 신문화 수입의 공로자라는 관점이 있다.

 

《가톨릭연구》는 초창기 조선천주교회사 역사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면서, 동시대 인물이며 천주교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던 정약용에 대해 주목하였다. 이렇게 정약용에 대한 기사 비중이 높아진 요인은 1930년대의 조선학 운동과 연관이 있다. 이 시기의 한국학 연구자들은 실학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그 대표적 인물로 정약용을 부각시켰다. 당시 천주교회도 초창기 조선천주교회사와 실학이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이 부분을 조명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 인물로 정약용의 역할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경향은 같은 시대에 나온 천주교회 잡지인 《가톨릭청년》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물론 이 잡지 기사의 궁극적 목적은 선교를 위한 것임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천주교가 근대적인 종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실학을 부각시킨 동시대 역사학 경향과 그 맥을 같이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앞선 시대에 나온 《경향잡지》의 교회사 관련 기사와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 잡지는 교회사와 관련하여 사료 소개 형식의 기사와 문학 및 미담 형식의 기사를 게재하였다. 《가톨릭연구》와 《가톨릭청년》과는 달리 분석이나 평가를 한 기사가 드물다. 하지만 《경향잡지》가 게재한 사료 소개 형식의 기사는 다른 잡지들의 교회사 기사에 근거 자료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가톨릭연구》에 투고한 필자들은 이러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당시 역사학 연구 경향의 영향을 받아 교회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기사를 썼을 것이다.

 

종합해 보면 《가톨릭연구》의 교회사 기사는 호교론, 조선 민족의 우월성 강조, 근대화라는 세 가지 면모를 담고 있다. 그런데 조선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한 부분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민족주의적인 관점과 다른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 시대에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를 한 점과 차후에 천주교가 발전한 점을 조선 민족의 우월성과 연관시키려한 것이다. 조선 민족이 우월성은 천주교 수용과 발전을 통해 드러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가 조선의 신문화 도입이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관점도 이러한 논리와 연관되어 나타났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한 민족주의와 천주교에서 생각했던 관점의 차이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앞으로 다루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이 민족주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른 종교와 어떤 차이가 있는 지도 후속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가톨릭연구》가 문서 선교에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해서도 차후에 다루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보다 후대에 나온 김구정의 군난 소설과 《경향잡지》 연재 군난 소설인 윤의병 신부의 〈은화〉와도 비교 분석하는 작업도 후속 연구에 다룰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기초자료

 

《가톨릭연구》

《가톨릭청년》

《경향잡지》

《조선일보》

《동아일보》

 

2. 단행본

 

D. Baker, 김세윤(역), 《조선후기 유교와 천주교의 대립》, 일조각, 1997.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박찬승, 《언론운동》,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3. 논문류

 

강석진, 《한국 천주교 순교자신심과 순교자현양 운동사 연구》,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가톨릭운동〉, 《교회사연구》 1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한국사학사보》 11, 한국사학사학회, 2005.

김수태, 〈1930년대 천주교 평양교구의 문서선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7,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6.

김윤선, 〈천주교 박해 체험의 서사화〉, 《우리문학연구》 44, 우리문학회, 2014.

김정숙, 〈피숑의 조선 천주교회사 연구〉, 《교회사연구》 4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노용필, 〈1930년대 ‘한국사회에 미친 천주교의 영향’ 논의〉, 《한국근현대사연구》 27, 한국근현대사학회, 2003.

양인성, 〈일제하 장면의 교회 활동〉, 《교회사연구》 4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5.

유종순, 〈병인박해 순교자의 시복수속 자료〉, 《교회사연구》 6,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윤세민, 〈한국 최장수 잡지 ‘경향잡지’ 연구〉, 《한국출판학연구》 51, 한국출판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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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광, 〈일제하 장면의 역사인식과 조선교회사 서술〉, 《경기사학》 5, 경기사학회, 2001.

조 광, 〈개항기 및 식민지시대 실학연구의 특성〉, 《조선후기 사상계의 전환기적 특성》, 경인문화사, 2010.

조한건, 〈서양 선교사의 한국교회사 연구: 피숑 신부를 중심으로(1)〉, 《교회와 역사》 41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조한건, 〈서양 선교사의 한국교회사 연구: 피숑 신부를 중심으로(2)〉, 《교회와 역사》 418,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

 

1)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428-430쪽.

 

2)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가톨릭운동〉, 《교회사연구》 1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김수태, 〈1930년대 천주교 평양교구의 문서선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7,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6.

 

3)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한국사학사보》 11, 한국사학사학회, 2005.

4) 강석진, 《한국 천주교 순교자신심과 순교자현양 운동사 연구》, 가톨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5)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한국사학사보》 11, 한국사학사학회, 2005, 90-96쪽.

6)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91-92쪽.

 

7) 대구교구에 대해 다룬 이유는 대구 출신인 김구정의 활동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파악하였으며, 평양교구가 한국천주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재점검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평양교구 특집호를 만들었다고 하였다.(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96쪽.)

 

8)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93쪽.

9)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93-94쪽.

10) 〈이천만민중에게 조선복자를 고취함〉, 《가톨릭연구》 9월호, 1934, 4-5쪽

11) 〈이천만민중에게 조선복자를 고취함〉, 《가톨릭연구》 9월호, 1934, 5-6쪽.

12) 〈九月號를 보내면서〉, 《가톨릭연구》 9월호, 1934, 8쪽.

13) 〈가톨릭이여 勇敢하여라〉, 《가톨릭연구》 9월호, 1934, 45쪽. 

14)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95쪽.

15) 〈권두사〉, 《가톨릭연구》 9,10월호, 1935, 3쪽.

16) 〈사설〉, 《가톨릭연구》 9,10월호, 1935, 9-11쪽. 

17) 〈조선가톨닉창건위인전〉, 《가톨릭연구》 9,10월호, 1935, 47-48쪽.

18) 〈조선가톨닉창건위인전〉, 《가톨릭연구》 9,10월호, 1935, 55-56쪽.

19) 〈조선가톨닉창건위인전〉, 《가톨릭연구》 9,10월호, 1935, 59-60쪽. 

20) 〈다산선생의 행로를 추억함〉, 《가톨릭연구》 9,10월호, 1935, 77-78쪽.

21) 〈다산선생의 행로를 추억함〉, 《가톨릭연구》 9,10월호, 1935, 82쪽.

22) 〈濟州道 虐殺事件과 本堂沿革〉, 《가톨릭연구》 9,10월호, 1935, 178-179쪽

23) 〈가톨닉은 조선문화의 선도자〉, 《가톨릭연구》 9,10월호, 1935, 165-167쪽.

24) 〈朝鮮의 新文化는 어데서 뉘가〉, 《가톨릭연구》 9,10월호, 1935, 171-172쪽.

25)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가톨릭운동〉, 《교회사연구》 1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220쪽.

26)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94쪽. 

27) 《가톨릭연구》 11월호, 1935, 21-22쪽.

28) 《가톨릭연구》 11월호, 1935, 31-62쪽.

29) 노용필, 〈1930년대 ‘한국사회에 미친 천주교의 영향’ 논의〉, 《한국근현대사연구》 27, 한국근현대사학회, 2003.

30) 《동아일보》 10월 2일자 조간, 1면; 《가톨릭연구》 11월호, 1935, 41쪽.

31) 《조선일보》 10월 3일자 조간, 1면; 《가톨릭연구》 11월호, 1935, 42-43쪽. 

32) 《동아일보》 10월 2일자 조간, 2면; 《가톨릭연구》 11월호, 1935, 43쪽.

33) 《조선일보》 10월 1일자, 4면; 《가톨릭연구》 11월호, 1935, 51쪽.

34) 노용필, 〈1930년대 ‘한국사회에 미친 천주교의 영향’ 논의〉, 《한국근현대사연구》 27, 한국근현대사학회, 2003, 109쪽.

35) 박찬승, 《언론운동》,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15-116쪽.

36) 노용필, 〈1930년대 ‘한국사회에 미친 천주교의 영향’ 논의〉, 122쪽.

37) 김수태, 〈1930년대 천주교 평양교구의 문서선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7,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6, 269쪽.

38)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103쪽.

39)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가톨릭운동〉, 220쪽.

40) 조광, 〈개항기 및 식민지시대 실학연구의 특성〉, 《조선후기 사상계의 전환기적 특성》, 경인문화사, 2010, 284-285쪽.

41) D. Baker, 김세윤(역), 《조선후기 유교와 천주교의 대립》, 일조각, 1997, 221-222쪽.

42) 조광, 〈개항기 및 식민지시대 실학연구의 특성〉, 300쪽. 

43) 강석진, 《한국 천주교 순교자신심과 순교자현양 운동사 연구》, 가톨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208쪽.

44) 유종순, 〈병인박해 순교자의 시복수속 자료〉, 《교회사연구》 6,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325쪽.

45) 윤세민, 〈한국 최장수 잡지 ‘경향잡지’ 연구〉, 《한국출판학연구》 51, 한국출판학회, 2006, 298-299쪽.

46) 《경향잡지》 848, 1937, 110-111쪽. 

47) 김윤선, 〈천주교 박해 체험의 서사화〉, 《우리문학연구》 44, 우리문학회, 2014, 458-459쪽.

 

48) 조한건, 〈서양 선교사의 한국교회사 연구: 피숑 신부를 중심으로(1)〉, 《교회와 역사》 41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조한건, 〈서양 선교사의 한국교회사 연구: 피숑 신부를 중심으로(2)〉, 《교회와 역사》 418,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김정숙, 〈피숑의 조선 천주교회사 연구〉, 《교회사 연구》 4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49) 《가톨릭청년》 28, 1935, 44쪽.

50) 《가톨릭청년》 30, 1935, 29-30쪽.

51) 《가톨릭청년》 35, 1936, 46-83쪽.

52) 《가톨릭연구》 9,10월호, 1935, 59-60쪽.

53) 조광, 〈일제하 장면의 역사인식과 조선교회사 서술〉, 《한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0, 200-201쪽.

 

54) 조한건, 〈서양 선교사의 한국교회사 연구: 피숑 신부를 중심으로(2)〉, 48-49쪽.

55) 김정숙, 〈피숑의 조선 천주교회사 연구〉, 107쪽.

56) 《가톨릭청년》 4, 1933, 5쪽.

57) 양인성, 〈일제하 장면의 교회 활동〉, 《교회사연구》 4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5, 114쪽.

 

* 이 논문은 2017년 인천가톨릭대학교 교내연구비 지원에 따라 수행한 연구임.

 

[학술지 교회사학 vol 14, 2017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김규성(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22364&Page=4&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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