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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성 황석두의 생애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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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6 ㅣ No.1136

성 황석두(黃錫斗, 1813~1866, 루가)의 생애와 활동

 

 

본고는 황석두 루가 성인(1813~1866)의 생애와 활동을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조망해본 글이다. 황석두 성인은 교회내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 전해지는 문서와 구전자료들이 매우 풍부한 편이기에, 연구작업에는 오히려 여러 자료들 사이의 다양한 편차를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취사선택을 해야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황석두 성인은 1813년 충청도 연풍의 병방골 부유한 향반(鄕班) 출신으로 부인과는 성관계를 갖지 않고 조카를 양자로 두어 부인을 봉양하게 하고 자신은 다블뤼 선교사 등 여러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순방사목 활동을 보조하거나 저술활동을 돕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의 소원은 신앙의 자유를 맞아 전교를 마음껏 해보는 것과 작은 박해를 맞아 자신의 목숨을 천주를 위해 바치는 순교 등 두 가지 뿐이라고 했다. 그는 페레올 주교의 허락을 받아 신학생으로 3년간 교육을 받았으나 교황청에서 그의 아내가 기거할 수녀원이 조선에 없다는 이유로 사제서품을 불허하자, 신학교육을 그만두게 되었고, 부친 사거 후 기울어가는 가계를 돕기 위해서 세속사업에 투자하다가 오히려 교우들의 빚을 많이 지게 되어 교회에서도 약 4~5년간 추방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1858년 무렵 페롱 신부가 그에게 세속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다짐을 받고 그를 다시 교회활동에 참여케 하면서 그는 약 8년간 여러 프랑스 선교사들의 복사와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다블뤼 주교의 저술활동을 도와주게 되었다. 그는 1866년 충청도 수영의 갈매못에서 동료 4명과 함께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참수형으로 천주께 목숨을 바쳤다. 그의 시신은 그의 양자를 비롯한 집안사람들이 사형장 부근에서 병방골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Ⅰ. 성 황석두 루가 연구의 현황


1. 연구사 개요

 

한국 천주교회의 103위 순교성인 중의 한 분인 황석두 루가(1813~1866)에 대한 그간의 연구업적은 매우 빈약하여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 막 걸음마 단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순교자로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시복(諡福)을 위한 한국 천주교회 차원의 각종 자료수집과 약전(略傳) 작성 등의 과정이 있었고, 1984년 시성을 전후하여 또 한 차례의 자료정리와 전기(傳記) 편찬이 있었고, 교회언론 등에 단편적인 기사가 여러 차례 게재되었지만,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서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1) 그런데 이 분의 연구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스럽고 고마운 것은 2008년 청주교구 연풍성지에서 성인과 관련된 관찬자료와 교회측 기록. 증언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전기자료집을 펴낸 일이다. 이로 인하여 본고를 비롯하여, 앞으로 황석두 성인에 대한 연구활동을 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 자료집을 토대로 하여 계속 보완하고 수정하는 작업만 더하여 가면 소정의 연구성과를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

 

 

2. 자료의 검토와 서술의 주안점

 

황석두 루가와 관련하여 본고에서 주된 참고자료로 삼은 것은 연풍성지에서 펴낸 위 전기자료집이다. 물론 위 자료집에는 서로 배치되는 여러 명의 증언이나 어긋나는 기록들을 분석, 비판하지 않았기에, 다수의 증언과 기록자료들이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는 모든 내용들을 당시의 객관적 상황에 맞게 합리적으로 분석하여 나름대로 가장 사실에 가깝게 황석두 성인의 삶과 죽음, 신앙과 활동의 전모를 사실주의적(事實主義的)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본고의 몫이다. 필자가 분석해본 바에 의하면, 황석두 루가 성인에 대한 생애와 순교, 활동의 면모는 수십 명의 증언자들이 조금씩 서로 다르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퍼즐 조각을 맞추어 가는 작업처럼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황석두 성인과 관련하여 기존에 알려진 자료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기존에 주로 활용된 자료들]

 

▷ 관찬 사료 : 《우포도청등록》(병인2월3일) - 황석두 심문기록

▷ 목격/전문 증언록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 필사본/영인본 1987)

《병인치명사적》, 《병인순교자교구재판록》, 《병인순교자교황청재판록》

▷ 교회 자료 : 《한국천주교회사》(달레 저, 최석우 · 안응렬 역주, 1980),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샤를 살몽 저, 정현명 역주, 2006), 《병인치명일기》

▷ 평해황씨 족보 : 《평해황씨족보》(2002간행), 《평해황씨 검교공파보》(황기환 소장)

▷ 기타 : 유해발굴보고서

 

[기존에 아직 본격적으로 활용하지 않은 자료들]

 

▶ 문집 : 《낙하생전집》 중 천주교 관련 내용들

▶ 선교사서한 : 베르뇌, 다블뤼, 페롱, 조안노 신부의 황석두 관련 기록들

▶ 교리서 : 《천주성교공과》(1862, 서울 목판본), 《신명초행》(1864, 서울 목판본) : 《회죄직지》, 《사본문답》 등

 

이상의 자료들을 토대로 황석두 루가 성인과 관련하여 기존에 알려진 여러 기록들을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정리해보면 다음 표와 같이 매우 다양한 편차를 드러내고 있음이 확인된다.

 

 

 

 

필자는 이와 같은 자료들간의 다양한 편차를 고려하면서 가장 사실에 근접하는 성인의 생애를 기록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사료활용 방침으로 본고를 작성했다.

 

[본고 자료 활용 방침]

 

우선 출생과 어릴 적 행적, 가문 배경 등에 대해서는 장소별로 같은 동네에 산 적이 있는 증인들 증언과 족보와 후손들의 내용 등을 종합하여 정리하였다. 예를 들면 황석두와 홍산 거칠에서 같이 산 적이 있는 김흥칠 마티아의 증언 등을 통해서 성인에 관한 행실을 고찰하고자 한다. 또 무덤 및 성해와 관련해서는 후손들의 무덤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한다. 1980년 7월,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 평해황씨 문중산에서 교회 관계자와 후손들에 의해서 발굴된 유해에는 가슴 위에 두개골, 엎어진 상태, 두개골 속 목뼈일부 등 순교의 흔적이 역력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교리를 배우고 영세하여 복사활동을 할 때의 기록은 황석두와 교유하거나 대면한 이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신앙생활과 교회활동 관련해서는 교구재판 후 순교약전 보완자료에 따라 정리할 예정이다. 김치선 마태오는 황석두에게 한문을 배운 그의 제자로서, 성인의 학문적 소양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증언을 하고 있으며, 시복을 위한 교구재판 후(1918년)에 정리되고 보완된 전기 내용은 성인의 생애의 흐름을 가장 풍부하게 표현하고 있다.

 

형벌, 체포, 이송, 순교 및 이장관련 기록은 목격증인 기록을 중심으로 재정리하였다. 주요 증인들과 그들의 증언에서 사실에 가장 근접한 내용이라고 추정되는 부분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손여선 바오로(체포당시 거더리 거주, 목격증언)

● 박순집 베드로, 이명심 토마스(서울근처~사관청~포도청) 목격 증언

● 이원명 빈첸시오(서울~수영으로 이송당시 양성 소새에서) 목격

● 이치문 힐라리오(순교~1차 이장) 목격 및 참여

● 강 이사벨라 : 순교장면 멀리서 목격(교우들의 외침-하늘로 올랐다-증언)

 

이상에서 언급한 본고의 자료활용 방침은 황석두 성인과 동시대에 교유했거나 접촉을 가진 인물들의 기록과 목격증언들을 중심으로 정리하되, 때로 전문증언들도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서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Ⅱ. 생장과 입교


1. 출생과 거주

 

황석두 성인은 1813년2) 충청도 연풍의 병방골(현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3)의 부유한 향반(鄕班) 가문에서4) 태어났다. 족보에 의하면 그의 집안이 연풍에 살기 시작한 것은 조부 황한굉(黃漢宏) 때부터이다.5) 부친은 황주면(黃周冕, 1771~ ?)으로 무덤이 풍기 고을 동덕 아산에 소재한 것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고, 그의 형 황석기(黃錫基)의 무덤 또한 풍기 산법동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일부 교회 기록에서는 성인이 풍기 출신이라고 증언한다.6) 한편 황석두의 조카인 황기원 안드레아의 딸인 황 마르타는 성인의 종손녀(從孫女)가 된다. 그녀의 증언에 의하면, 성인의 부친이 서울에서 살다가 충주로 내려와 살 때 그곳에서 성인의 삼형제를 낳았다고 한다.7) 또 황석두의 양아들 황천일 요한은 그의 양아버지가 서천 산막골에서 살았다고 증언했다.8) 이러한 기록들은 황석두 성인의 가족들이 고향인 연풍 병방골을 떠나 서울과 충주 남창, 서천 산막골, 풍기, 홍산 부두문, 거칠, 내대, 홍주 신리 등지로 이주해서 살던 사실을 대변해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황석두 성인은 부인과 사이에 성관계를 갖지 않고 수정(守貞)하여 친자식이 없어서 형의 아들 중에서 양자를 취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양자와 관련된 기록이 관찬기록과 교회기록이 서로 달라서 혼란을 야기시킨다.

 

▷ 《우포도청등록》 제22책(영인본 중권 654쪽) ; 병인 10월 초8일,

황기원(黃基元, 요안, 年39) ; 황기원 저는 천주교를 양아버지에게서 배웠고 견진과 영세를 안 주교에게서 받아 이내 세례명을 지었습니다. 저간에 찾아 본 주교, 신부가 5~6인이나 될 정도로 많으니, 천주교에 물든 허다한 사정은 발뺌할 말이 없습니다. 늦게 실토하였습니다.(*黃基元矣身段 矣身聖敎受學於養父 堅陳領洗於安主敎 仍作邪號 這間尋訪之主敎神父 至於五六人之多 則許多染邪情節 無辭發明 遲晩納招是白置)

 

▷ 《좌포도청등록》 제14책(영인본 하권 417쪽) ; 병인 10월 초7일,

죄인 황기원(黃基元, 邪號 安德 안드레아, 년39) ; 황기원 저는 본래 충주 태생으로, 9년 전(=1857년) 서천 산막동 삼촌숙 황석두가에 출계(입양)하여 경신년(=1860년)에 이르러 비로소 양아버지에게서 천주학을 배웠습니다. 서울 남문안 양인 장경일(=베르뇌 주교)에게서 영세하고 곧이어 세례명을 안드레아로 지었습니다. 저의 양아버지가 세 차례나 장경일의 집에 왕래함으로 인하여 마침 양인 안주교(=다블뤼 주교), 박신부(프티니콜라), 병사한 오신부(조안노), 홍신부(랑드르), 등 모두 4명을 보았습니다. 올 봄 옥사(=병인박해)로 본읍에서 체포되어 홍주 진영으로 옮겨보내졌다가 공주 상영(=감영)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아직 천주교를 배척하지 않았을 때 저의 친아버지(황석기)를 만났으니 그분도 체포되어 함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저의 친아버지는 처음부터 천주교를 믿지 않았는데도 그 동생(=황석두)과 그 아들(=황기원 자신) 탓으로 이와 같이 죄도 없이 체포되었으므로 갑자기 제 잘못을 깨닫고 천주교를 배척했습니다. 그리하여 친아버지와 제가 함께 석방되고 며칠 후에 양아버지가 수영에서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차 발상(發喪)을 하려고 하니 저의 친 아버지가 말하기를, “네 삼촌이 무죄하게 병사했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나라에 큰일로 인하여 죽음을 당했으니 발상하는 것은 올바른 예법에 크게 어긋나게 되니 매우 불가하다”하고 가르치므로, 발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삼촌에게 입양한 것도 파양(罷養, 그만둠)했고 지금까지 문을 닫아걸고 바깥출입을 삼가면서 짚신을 삼아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에 이와 같이 체포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된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미 배교한 것이 어제 오늘이 아닌데 지금 이와 같이 질문하심은 천부당 만부당합니다. 다시 천주교를 학습한다는 주장과 다른 나라와 사정을 통한다는 말씀도 만만코 지극히 억울합니다.(*黃基元矣身段 本以忠州胎生 九年前 出系於舒川山幕洞三寸叔錫斗家 至庚申始爲受學於養父處 領洗於京城南門內洋人張敬一處 仍作邪號安德是白加尼 因矣父之往復三次往來於張敬一家時 適見洋人安主敎朴神父病死之吳神父洪神父合四人是白乎所 今春獄事 自本邑捉致矣身移囚洪州鎭營 至公州上營 而尙未背斥之際 逢見矣生父 又爲被捉 偕到是乎所 矣生父則初不邪學 以其弟其子之 如是無罪之被捉 飜然覺悟悔過背斥 則父子蒙放後 不幾日 聞養父伏法於水營之說 將欲發喪 則矣生父言內 汝之三寸無罪而病死則已矣 旣爲國之大事見死 則發喪大違經禮 甚不可是如爲敎 故不爲發喪 仍爲罷養 至于今杜門不出 資生是白加尼不意今者 有此推捉之境 未知何事是喩 旣爲背敎昨非今是 則今此下問 以千不當萬不似之 更習邪學等說 與異國通情之敎 萬萬至寃是白置)

 

이상의 포도청 심문기록만을 살펴볼 때는 황석두의 양자는 1857년경 입양한 형(석기)의 아들 황기원 안드레아(1866년 39세, 1828년생)가 되며, 그는 황석두 성인을 따라 베르뇌 주교의 집에 수차례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조선에 잠입하여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을 5~6명 만나보았고, 성인이 충청 수영에서 참수로 순교하기 며칠 전에, 공주 감영에서 배교하고 그의 친아버지 황석기와 함께 풀려 나왔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관찬기록과는 달리 교회기록에는 형의 아들 중에서 큰 아들(황기원 안드레아)가 아닌 동생(황천일 요한)이 황석두에게 입양했다고 되어 있다.

 

▷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1900년 회차 87, 김치선 마태오 증언)

 

황 루가한테 죄인이 세속 글을 배웠기 때문에 압니다. 아내가 있었으나 수정을 지킨 줄로 알고, … 죽은 후에 황 루가의 양아들 황 요한이 그 시신을 거두고 와서 하는 말이 “황 루가 죽은 지가 보름이나 되는데 목을 벤 자리에 피가 붉게 남아 있었고, 얼굴빛이 환하더라”고 하며 참 영적이라고 했습니다. …9)

 

▷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1900년 회차 88, 김흥칠 마티아 증언)

 

황 루가 재건이는 죄인과 한 동네(홍산 거칠)에 살았기 때문에 압니다. 교우 선생한테 성교 말을 듣고 성교를 배우더니 …, 황 루가 시신은 그 조카 황 요한 즉 황루가 양자가 가서 수영에서 파서 홍산 삽티에다 묻었는데 …10)

 

▷ 병인순교자 교황청재판 수속록(1922년도 회차34, 황마르타 증언)

 

… 황석두 루가의 종손녀(從孫샲), 부친은 황(기원) 안드레아로 구교우이며, 모친은 홍 마리아로 신문교우. … (황루가가) 잡힌 후 서울에 갇혔다가 후에 안 주교와 여러 신부와 함께 수영에 와서 치명하였다는 말을 백부 황 예로니모에게 들었는데, 이 사람은 성교 때문에 잡혔다가 배교하고 나온 후 잡힌 자 둘을 살펴봄으로써 알았다고 합니다. … 4월16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신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 삽티에 묻었습니다.11)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황석두를 잘 알고 지내던 신자들(김치선, 김흥칠)이 증언한 교회 기록들은 한결같이 황석두의 양자가 황석기의 아들 황천일 요한이라고 말해준다. 또한 황 마르타가 성인의 종손녀(從孫女)라고 했으므로 그녀의 아버지 황 안드레아는 성인의 조카가 될 뿐 아들(양자)은 아니다. 이같은 증언들과 마찬가지로 황기원 안드레아와 황천일 요한의 친누이인 황 마리아도 황천일 요한을 황석두의 양자라고 증언하였다.12)

 

이처럼 관찬기록과 교회기록은 서로 다르다. 과연 누가 황석두의 양자로 입양한 아들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게 된다. 관찬기록은 분명히 황 안드레아가 스스로 증언한 내용으로 자신이 황석두 성인의 양자였다고 말하지만, 황석두를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교회의 신자들은 성인의 아들이 황천일 요한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관찬기록과 교회기록 중에 하나는 거짓증언(僞證)에 해당된다. 그런데 교회 내 기록 중에 신자들이 거짓으로 증언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관찬기록의 경우 종종 동료 신자들과 선교사 및 교회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거짓증언을 하기도 하며, 이 경우 교우들은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낄 필요가 없게 된다. 이른바 선의의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양자 세우는 풍속을 따져볼 때 대체로 형제의 아들 중에서 장자(長子)는 입양(출계)하지 않고, 차자(次子) 이하에서 어느 한 명을 그의 삼촌에게 입양 들도록 출계하게 된다. 그런데 황천일 요한은 《좌포도청등록》에 의하면 1866년 28세로서 1839년생이 된다.13) 그러므로 그의 형 황기원 안드레아보다 무려 11살 아래의 동생이다. 따라서 당시의 관례로 따져보아도 황기원 안드레아보다는 황천일 요한이 그의 삼촌 황석두에게 입양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황천일 요한은 다음과 같이 포도청 진술에서 황석두 루가 또는 천주교와의 관련성을 애써 부정하려는 듯 양자관계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 《좌포도청등록》 병인 12월 15일, 황천일 년28

 

황천일. 저의 삼촌은 ‘석두’이고 저의 형은 ‘기원’으로 비록 천주교를 신봉하여 사형을 당했다고 하지만, 저는 숙질간 형제간이 각기 다른 곳에 거주했는데, 봄 옥사(병인박해) 이후 홍산에서 저의 삼촌이 예전에 살았던 서천 산막동으로 옮겨갔다가 이렇게 체포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형제간 숙질간이라고 하지만 어찌 유교, 불교와 같이 그 의리(義쐧)가 나누어지는 바가 없겠습니까? 비록 만번 형벌 아래 만번 죽더라도 지극히 원통합니다.(*黃千日段 矣身三寸叔錫斗 矣兄基元 雖曰邪學旣以伏法 矣身則 叔侄兄弟 各居他邑是如可 春獄以後 自鴻山 移接于矣叔舊居舒川山幕洞矣 致有此現捉之境 雖是兄弟叔侄 豈無儒佛之分義乎 雖萬死刑下 極爲至寃是白置)

 

▷ 《좌포도청등록》 병인 12월 24일, 황천일

 

황천일. 저는 처음 공초(공술)에서 유리한 증언(甘呑苦吐之說)만을 하다가 이제야 (사실대로) 진술을 하오니 참으로 죄송합니다. 재작년(=1864년) 경에 이미 처형된 삼촌 황석두에게서 (천주교를) 배워서 이덕경과 더불어 함께 안 주교(다블뤼 주교), 권 신부(페롱 신부)에게로 갔거니와 한동안 천주학에 익숙치 못하여 세례도 받지 못했습니다.(*黃千日段 矣身初招呑吐之說 今是納供 滿滿惶悚 而再昨年分 學於三寸叔伏法之黃錫斗處 與李德景 偕往安主敎權神父處是白乎乃 姑未學熟之致 不爲受洗是白頭)

 

이처럼 황천일 요한은 자신의 삼촌이 양아버지라는 것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처음 공술에서는 천주교와의 관련성을 명백하게 부인했다가 나중에 가서야 조금 배운 데 불과하여 세례도 받지 못한 상태라고 변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황천일의 태도는 그의 형 황기원의 진술과 서로 일치하므로 외견상 관찬기록을 통해서만 본다면 황석두의 양자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의 형과는 달리 천주교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사형을 당한 그의 삼촌이나 그의 형과의 관련성을 애써 부정하여 살길을 도모하고 있음도 드러난다. 따라서 신자들의 교회 내 진술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황기원, 황천일 형제의 진술은 서로의 입장을 고려한 허위진술로 해석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을 듯하다.14)

 

이상에서 살펴본 황석두 루가 가계를 직계 인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평해황씨 검교공파 18世 漢宏(1734~1806년) → 19世 周冕(1771~?년) → 20世 錫斗(1813~1866) → 21世 千日(1839~1866.12)

 

한편 황석두 성인의 생애동안 이주해온 지역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연풍 병방골 → 서울 → 충주 남창(유소년 시절) → 홍산 부두문, 거칠, 내대 →… 풍기 … → 서천 산막골 교우촌(충청, 경상 일대 사목순방 동행) → (서울 주교관 잦은 왕래) → 홍주 신리(다블뤼 주교의 사제관), 거더리(체포지점) → (연풍 병방골 무덤)

 

 

2. 입교과정과 가족전교

 

황석두 성인의 입교과정과 관련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증언이 전해온다. 하나는 그의 한문선생이 교리를 가르쳤다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과거시험을 보러가서 주막에서 만난 과객(선비)의 전교에 호응하여 천주교에 입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여 논지를 전개하거나, 아니면 이 양자를 적절히 혼합하여 서술해나가는 등 모두 3가지의 설명방식이 있었다.

 

우선 과거 길에 주막에서 만난 과객 선비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는 설명방식은, 병인박해 순교자인 손선지 베드로 성인의 손자인 손진도 바오로 등이 진술한 것으로, 황석두가 천주교에 입교하기 전까지는 향촌 부자들 내지 양반 자제들의 일반적 학습 및 출세과정을 답습했다는 사실을 그 전제로 하고 있다.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1899~1900년)에 의하면 황석두가 자주 과거(향시)에 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12~13세에 매양 과시(科試)를 당하면 동접(同接, 동창생) 6~7인을 데리고 형제 두 사람이 입장하여, 하나는 짓고 하나는 써서 동접까지 봐주며, …15)

 

1813년생인 황석두가 과거에 응시한 때를 위 자료에 의거해보면 대략 1824~1825년경으로, 종손녀인 황 마르타의 증언에 입각해본다면, 그의 부친이 서울에서 충주 남창으로 이주한 이후가 된다. 이때부터 황석두는 부지런히 생진과(小科)에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한 것 같지는 않다.16) 그런데 황석두는 과거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폭넓은 학문적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박학(博學)하고자 하여 서양 책을 서로 많이 보다가 입교한 후에는 출입과 손(子孫)을 보지 아니하고 (동정을 지켜) 성교(聖敎, 천주교)에만 힘썼다.17)

 

이처럼 과거 공부를 비롯하여 다양한 서적을 폭넓게 독서하고 있던 황석두였기에 기본적으로는 그의 부친의 소망에 따라서 그가 20대 초반 무렵에도, 충청좌도의 수부(首府)였던 충주에서 치러진 1834년 생진과 향시(鄕試)를 보러 갔을 것이다.18) 그런데 당시 그의 집이 어릴 적부터 살아오던 충주 남창이었다면 굳이 과거를 보기 위해서 객점에 들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객점에서 어떤 선비를 만나서 천주교 학습을 권유받았다는 말19)이 성립하려면, 그 당시(1834년, 황석두 22세) 이미 그의 집이 충주에서 다른 곳(충청좌도 내)으로 이거하여 살았을 것이라고 봐야한다. 손진도 바오로는 연도(시기)는 언급하지 않은 채 황석두가 서울로 과거시험을 보려갔다고 하는데20), 아마도 많은 전승과정을 거쳐 와전된 이야기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향시 소과(생진시)도 합격하지 못한 상태에서 향시 문과(대과)도 치르지 않고 서울로 가서 전시나 회시를 치르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황석두는 소년 시절(12~13세경)부터 충청좌도의 과거(소과 생진시)에 여러 차례 응시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과거 길에 객점에서 묵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관련 진술을 한 사람들의 증언내용은 당시 과거의 절차나 장소 등에 관한 기술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으므로 신빙성이 낮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황석두의 집안에서 자제들을 가르치던 훈장(한문 선생)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문했다고 하는 설명으로,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와 페롱 신부의 증언 등을 통해서 확인되는 서술이다.

 

황 루가는 꽤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집의 재산을 물려주어 보존케 하려고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던 아버지가 온갖 정성을 기울여 길렀다. 루가 자신이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그때 자기의 희망을 보통 관직과 바꾸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그보다 나은 일을 하였으니, 그의 한문 선생의 권고를 따라 천주교로 개종하고,21)

 

황 루가는 연풍 출신이었다. 그는 작은 벼슬을 행사하는 양반 가문이나 매우 부유한 대가족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신자였던 한문 선생을 통해 입교하였다.22)

 

이처럼 달레 신부와 페롱 신부의 기록들은 한결같이 그의 집에서 훈장 노릇을 하던 신자였던 한문 선생의 권유에 힘입어 천주교에 입교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23) 연구자들은 대략 그의 입교 시점을 1832년(20세)부터 1834년(22세) 사이로 추정하고 있는데, 아마도 1832년경에 천주교 서적을 학습하기 시작하여 2년 후인 1834년경에 세례를 받아 정식 교회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24) 이러한 설명 방식은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근거와 가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으로 한문 선생에게 미리부터 천주교 서적을 비롯한 서양서적을 볼 것을 권유받아 천주교리에 접한 경험이 있던 중에 과거 길에 주막에서 만난 신자 선비의 권유로 천주교 신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본격적인 천주교 학습에 들어갔다는 설명방식이다.25) 이러한 설명 방식은 황석두의 지인들이 평소 황석두의 박학풍(博學風) 때문에 서양서적도 많이 읽었다는 지적과도 합치되며, 과거 시험을 치르러 가는 길에서 굳이 객점에서 묵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자 선비들을 만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충분히 가능한 설명방식으로 인정된다.

 

이상에서 황석두 루가가 입교한 과정과 동기에 대해서 살펴본 바를 종합해보면, 그의 한문선생(훈장)의 영향과 과거 길에 만났을 신자 선비의 권유 등에 힘입어 주로 한문으로 된 서학서(천주교서)를 학습함으로써 천주교의 진리를 발견하고 이에 몰입한 결과 영세를 받기에 이른 것으로 보이며 그 시기는 대략 20대 초반인 1830년대 전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황석두 루가로부터 한학을 배웠던 김치선 마태오는 성인이 영세하기 위해 “사본문답”(四本問答)을 배워 익혔다고 했다.26) 《사본문답》은 1830년대 앵베르 주교의 입국 이후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1864년 목판본으로 베르뇌 주교가 최초로 간행하였으며, 영세자에게 꼭 필요한 세례, 고해, 성체 등 3성사와 견진성사를 합쳐서 4가지 근본되는 요리라고 일컫으며 그밖에도 여러 가지 천주교리를 설명한 책이다. 개항기에 가면 한국 천주교회는 견진을 제외한 3가지 성사 즉 세례성사, 고해성사, 성체성사를 “3본요리”로 규정하고 모든 예비자들이 영세하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할 주요교리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황석두 성인의 입교과정과 연결된 가족 전교(傳敎)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면, 대부분의 관련 자료들이 세속적 출세관에 집착한 부친을 천주교에 입교시키기 위해서 한동안 벙어리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명기하고 있으며, 가끔 부친이 성인의 천주교 학습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했다는 증언도 나온다.27) 황석두 루가를 누구보다도 높게 평가했던 페롱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주교에 입교한 그는 그의 처를 입교시키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때 벌써 과부가 되었던 처제도 입교시켰다. 그러고 나서 그의 아버지를 입교시키려고 애써서 항상 그랬듯이 온순하게 그의 아버지에게 영혼 구원에 대해서 생각할 것을 여러 차례 권했으나, 자식들 중에 가장 총명한 루가가 관직을 얻는 데 성공하여 가문을 일으키기를 기대했던 부친은 루가의 입교에 분노하여 그의 권고에 대해 욕설과 가혹행위로 회답하였다. 결국 루가는 꽤나 묘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는 원(願)을 발하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가 “부친이 입교할 때까지 더 이상 한마디도 말하지 않겠다고 결단을 내린 것만은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꽤 오랫동안, 1년인지, 18개월인지,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랫동안 벙어리로 지냈다. 그러던 중 한번은 의원이 그에게 침을 놓는데 너무 아프게 하자, 그는 의원에게 그만하도록 청하였다. 마침내 황 루가의 부친은 입교하였다.28)

 

페롱 신부는 황석두 성인의 부친이 과거를 포기한 그의 아들에게 대단히 격노했음을 말했다. 그러면서 온유한 성인의 전교노력을 번번히 무시하고 오히려 박해로 일관했다고 기술했다. 성인이 벙어리 노릇을 한 것은 그의 부친의 완고한 마음을 되돌려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하고자 하려는 성인의 굳센 의지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달레 신부의 책에서도 위 페롱 신부의 인용문과 대동소이하게 설명한다.

 

(황석두는) 식구 몇 사람도 개종시켰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파산의 위협을 당하는 데 겁이 나서 아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학대를 하였다. 루가는 그것을 훌륭한 인내심으로 참아 받다가 입을 열기만 하면 아버지가 모욕적인 언사를 하게 되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의 개종을 얻기 전에는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2년 동안 벙어리 노릇을 하였다. 집안에서는 그가 병이 든 것으로 생각하고 별의별 약을 다 써서 그 때문에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는 꿋꿋이 견디어 나갔고,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그가 청하는 은혜를 내려주셨다. 아버지가 천주교인이 되고 그가 개종하니, 온 집안이 개종하게 되었다. 때는 1839년(기해년)의 박해 후였다.29)

 

이상과 같이 황석두 루가 성인이 부친의 모진 학대, 특히 언어의 폭력에 대해 효과적으로 저항하면서 부친의 완고한 마음을 돌려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벙어리 노릇을 꽤 오랜 시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인의 이 같은 벙어리 노릇 기간에 대해서는 증언들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달레 신부는 2년 동안이라 했고, 페롱 신부는 1년 또는 1년 반, 또는 그 이상이라고 했으며, 그 외에도 몇 개월부터 3년까지 다양한 증언들이 나오는데30), 이는 사실 성인의 생애에서 극단적인 인내와 희생의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지인(증인)들의 다소 부주의한 발언들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 절대적 기간을 단정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하지만 성인이 벙어리 노릇을 보통의 상례와는 달리 꽤 오랫동안 했으며 그 기간 중에도 자기 누이와는 모든 일을 의논하기 위해 말을 했다는 증언31)도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이상에서 황석두 루가 성인은 입교 직후에 바로 처와 처제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전교를 시작하여, 부친을 입교시키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벙어리 노릇을 한 결과 부친을 비롯한 전 가족을 모두 영세 입교시키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Ⅲ. 교회활동


1. 복사 및 회장

 

황석두 성인이 신앙에 입문한 것은 1830년대 초반으로 그의 나이 20대 초반 무렵이었고, 20대 후반 쯤인 1839년 기해박해 이후에는 부친을 비롯한 온 집안 식구들을 천주교로 개종시켰다. 그렇다면 언제쯤부터 교회활동에 나섰는가? 일단 그 시점은 최소한 기해박해 이후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입국한 이후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즉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 호를 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을 모시고 조선의 신자 뱃사공들과 함께 황해를 횡단하여 조선 땅에 도착한 1845년 10월, 그의 나이 33세 이후 어느 시점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들을 참고로 살펴볼 수 있다.

 

▷ (달레) … 페레올 주교가 도착하자 루가는 포교지의 일에 전심하였다.32)

 

▷ (포도청등록 진술) … 저는 본래 연풍 태생으로 유업(儒業)에 종사했습니다. … 안 주교는 교화황 다음인데, 그를 만난 지 이제 18년이 됩니다. 그를 스승처럼 섬기기는 하지만 역시 스승으로만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주교는 본래 정한 곳이 없이 동서로 다녔는데, 저는 가는 곳마다 그를 따라 공경하고 모셨습니다.33)

 

▷ (순교약전 보완자료) … 내가 우리 스승과 열두 해 동거를 하였는데, 어찌 스승을 버리고 살겠습니까? 즉든지 살든지 주교와 함께 가겠습니다.34)

 

▷ (병인순교자 29위 약전) … 황 루가가 무오년(=1858년)부터 여러 신부와 두 분 주교의 복사를 하였는데, 덕행이 아름다우므로 모든 이가 다 귀하게 여겼다.35)

 

이상의 언급들에 근거하여 살펴볼 때 황석두 성인이 다블뤼 주교를 처음 만난 것은 병인박해로부터 18년 전인 1848년 전후가 되는데, 이 무렵에 페레올 주교와도 이미 만난 것으로 보인다. 성인의 교회활동은 페레올 고(高) 주교께 봉사활동의 의지를 표명한 후, 고 주교가 그의 수정(守貞)을 조건으로 신학교 교육을 받을 것을 명하면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 때는 대략 1849년 전후로 여겨지며36), 다블뤼 신부가 신병을 치료차 순방활동을 멈추고 여러 곳을 이동하면서 임시 신학교를 개설하 여37)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이때 황석두 성인은 다블뤼 신부에게 가서 1852년 9월 이후까지 대략 3년 내외의 신학교육을 배웠으나 그의 아내가 머물 수녀원이 없다는 이유로 교황청에서 황석두가 신품을 받는 데 요긴한 면제규정을 허락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신학교 교육이 중단되었다.38) 이와 동시에 그가 신학생으로서 그의 가족과 주변 친지들을 비롯한 교회 내외에서 조금씩 봉사활동을 해온 일도 중단된 듯하다. 이와 관련된 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 (달레) … 페레올 주교는 그(황석두)를 신부로 만들 생각을 하였으니, 그의 아내가 그와 헤어져서 절제생활을 하기로 동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정식으로 세워진 수녀원이 없으므로 교황청에서는 신청된 허락을 주는 것이 적당치 않다고 판단하였다. 루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루가의 형이 서투른 관리로 오래지 않아 집의 재산을 탕진하여 … (루가가) 여러 가지 불행한 투기를 하였으나 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을 파산시키는 것밖에 성공한 것이 없었다. 선교사들은 그들이 황 루가와 맺고 있던 관계가 그에게 어느 정도의 신용을 마련하여 주지 않을까 염려하고, 또 돈을 꾸어 쓰는 사람들에게 함정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에게 출입을 금하였다. 이 일종의 추방이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1858년에 페롱 신부는 루가에게 그의 모든 사업을 포기하도록 결심시키고, 한문 선생으로 채용하였다. 그런 다음 황 루가는 차례로 조안노(P. Joanno, 吳 베드로) 신부와 베르뇌 주교의 회장이 되었다가 마침내 다블뤼 주교의 책 저술과 교정을 도우라고 주교에게 소속되었다.39)

 

▷ (페롱 신부 증언) …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 황 루가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돈을 빌려 여러 가지로 투기를 해보았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빌린 돈을 잃는데 더 재능이 있었으니, 그가 신부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신자들이 그에게 돈을 빌려줄 것을 염려한 다블뤼 주교는 그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나의 첫 사목활동에서 황 루가를 알게 되었고, 심지어는 그를 복사로 삼고 싶은 바람이 있었으나, 그 전에 우선 다블뤼 주교와 상의하고 싶었다.40)

 

▷ (순교약전 보완자료) … 그 부친이 문교(聞敎)하여 차차 온 집안이 모두 열심히 수계를 하고, 루가는 집안이 수계하는 것을 보고 말도 하며 집안과 다른 사람을 많이 가르쳤다. 연소할(즉 수정할) 마음이 있어 고 주교께 여쭈니 주교께서 “아내가 있으나 차차 교황께 여쭐 것이니 하여 보라” 하셨다. 안 주교하고 몇 해를 공부하다가 아내가 있으므로 파위(罷位)하고 나서 그럭저럭 시간이 다하여 육신의 일을 취하여 남의 돈을 많이 얻어 실수하였다. 그후 신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일을 버리고 하지 말아라”하시니, 일체 놓고서 장(베르뇌) 주교의 복사를 몇 해 하였고, 권 신부의 복사도 몇해 하고, 오(조안노) 신부의 복사도 몇 해를 하였다. 그후 안 주교의 복사도 하면서 전량을 얻어 한 푼도 쓰지 않고 남의 재물을 없앤 것을 보원하였다. 안 주교의 하의가 있어 자기는 자식이 없어 조카를 양자로 하여 자기 아내와 함께 살게 하고, 1년이면 혹 한번 집에 가보아도 내외의 모양이 도무지 없이 수정하고 지내며 외인 권화를 많이 하였다. 안 주교와 항상 의논하여 책도 많이 베끼고 열 달을 지내더니 평생 세상을 정세로 지내더니 병인년 군난이 대기하여 …41)

 

▷ (병인순교자 29위 약전) … 황 루가가 무오년(=1858년)부터 여러 신부와 두 분 주교의 복사를 하였는데, 덕행이 아름다우므로 모든 이가 다 귀하게 여겼다.42)

 

위의 자료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황석두 루가가 부친을 비롯한 온 가족에게 전교하여 입교시킨 후, 인근에도 전교를 많이 하였고 그 와중에 고 페레올 주교를 만나서 교회에 봉사할 결심을 피력하였으며, 페레올 주교의 배려로 다블뤼 안 신부에게서 약 3년 동안 신학 교육을 배운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학생으로 있다가 타의에 의해 신학교육을 중단하였으며, 그의 부친이 선종하고 집안의 재산을 맡은 그의 형(석기)이 파산을 하고 그 자신도 세속사업을 하여 많은 빚을 지게 되자, 마침내 안(다블뤼) 신부가 일종의 봉사금지령 내지 교회직분 추방령을 내렸다. 그 시점은 그가 신학교를 그만 두었을 것으로 보이는 1852년 9월 이후 늦어도 페레올 주교의 선종(1853.2) 및 다블뤼 신부가 신학교를 떠나는 1853~1854년 무렵 사이로 여겨지며, 이때부터 페롱 신부가 입국하여 그를 자신의 복사로 삼기 위해 다블뤼 부주교와 상의하던 1858년(무오년) 무렵까지 대략 4~5년 동안 그는 교회 일을 떠나 있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달레 신부가 10년 이상이나 추방이 지속되었다고 한 것은 과장이다. 1849년 연말 전후부터 대략 3년간 내외로 다블뤼 신부와 여러 곳을 이동하면서 신학을 공부하던 기간을 고려하고, 1858년 페롱 신부에 의해서 새롭게 교회일꾼으로 부름 받은 사실 등을 고려할 때 그 기간은 대략 4~5년 정도에 불과했다. 한편 황석두 성인은 《순교약전보완자료》에서 열두 해(=12년) 동안 그의 스승인 안(다블뤼) 주교와 생활을 같이 했다고 증언했고, 다블뤼 신부를 만난 지는 18년이 된다고 했으므로, 성인이 정식으로 교회 일을 맡게 된 신학생 시절(=1849년 연말 전후)부터 계산하여 병인박해로 순교(1866.3)하기 전까지 모두 16여 년의 기간이 되는데 이중에 약 4~5년의 추방기간을 제외하면 대략 11~12년의 기간이 나온다. 이 기간은 1849~1853, 1854년(신학생 시절 3년 + 다블뤼 주교 밑에서 봉사하던 1~2년)과 1858~1866년(페롱 신부를 비롯하여 조안노, 베르뇌, 다블뤼 등을 차례로 모시고 회장과 복사 등으로 활동한 시절 8년)으로 구분될 수 있다. 물론 회장과 복사 등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초반에는 페롱 신부, 그 다음에는 조안노 신부, 베르뇌 주교 등의 복사 겸 회장을 차례로 했는데, 이 기간 중에도 다블뤼 주교와는 계속 연락을 하면서 교유(交遊)를 했을 것으로 보이므로, 황석두 자신은 이 기간도 다블뤼 주교와 만남을 지속한 기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블뤼 주교는 1856년 베르뇌 주교가 제4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입국할 무렵을 전후하여 교회서적을 번역, 저술, 간행하고 순교자 행적조사 등을 포함한 교회사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초반에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상당한 도움을 받았으나, 최 신부가 1861년 6월 병으로 선종하자, 그 다음부터는 황석두 루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고찰을 토대로 황석두 루가의 교회활동을 시간순으로 정리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도표화할 수 있다.

 

▷ 교회활동 준비단계(1839~1849년 ; 가족입교, 이웃전교,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의 만남 등)

 

▷ 신학교에서 수학, 봉사하던 시절의 교회활동(1849년 연말~1853, 1854년 전후 4~5년간 : 신학교에서 다블뤼 신부에게 신학교육(최소 1849.12~1852.9)을 받다가, 이후 신학교육을 그만두고 다블뤼 신부의 옆에 머물면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한 투기 등 세속사업도 병행하던 시절)

→ 이후 4~5년간(1853, 1854~1858년) 교회직분에서 추방됨(성찰 및 자숙기간)

 

▷ 본격적인 교회활동(1858~1866년, 8년간 ; 페롱, 조안노, 베르뇌 주교의 복사 및 회장을 거쳐 1860년대 초반 이후 다블뤼 신부의 복사 겸 회장으로 있으면서 저술활동 보조)

 

황석두 성인의 교회활동에 대해서는 대부분 칭찬이 자자하지만, 신학생 시절로 추정되는 초창기 교회활동 시기에는 교회 일과 무관한 투기(投機) 등 세속 일을 병행하면서, 교회 내외의 따가운 눈총과 비난도 함께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 성품은 교중에 소문나기를 겸손과 도리가 많다고 하며, 복사 노릇을 잘한다고 합니다.43)

 

▷ (병인순교자 29위 약전) … 황 루가가 무오년(=1858년)부터 여러 신부와 두 분 주교의 복사를 하였는데, 덕행이 아름다우므로 모든 이가 다 귀하게 여겼다.44)

 

▷ (다블뤼) 주교는 내게 대답하기를, “황 루가는 아주 소중한 사람인데, 그래도 그에게 나무랄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의 상업적인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황 루가를 내 복사로 취하기 전에 나는 그에게 모든 사업을 그만두고 다시는 돈을 차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도록 요구했다.45)

 

▷ 나(페롱 신부)는 그를 2년 내지 3년간 복사로 곁에 두고 있었으나, 그에게 나무랄 점은 전혀 없었다. … 베르뇌 주교는 (황 루가가) 복사로서는 교구에서 가장 훌륭한 복사를 두고 있는 것이라고 회답하였다. 실제로 서로 그(황 루가)를 끌어가려고 야단이었다. … 베르뇌 주교나 다블뤼 주교 어느 쪽에서도 황 루가에 대한 불만의 소리는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46)

 

▷ 그후 안 주교의 복사도 하면서 전량(錢싖)을 얻어 한 푼도 쓰지 않고 남의 재물을 없앤 것을 보원하였다. … (황 루가가) 항상 말하기를, “내가 전에 남의 재물을 많이 없앴으므로 한탄으로 지냈다” 하더니 복사로 다니면서 여간 전량이나 생기면 먹지 아니하고 남의 돈을 갚았다. 수계하는 법이 고신 극기와 겸손 인내와 표양 범절이 놀랍고 주교께 순명함을 조금도 틀림이 없이 잡힐 때까지 지내며 순명하고 묵상으로 열 달을 보냈다.47)

 

이상의 평판을 통해서 볼 때 황석두 성인의 초창기 봉사활동, 즉 다블뤼 신부의 신학생으로 있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권화하거나 교리를 가르치는 등의 일을 할 적에는 투기와 같은 세속 일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신자들에게 많은 부채만 지게 되어 신자들의 원망이 자자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평판이 매우 악화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1853~1854년경에는 마침내 선교사들에게 접근하는 것조차 금지당한 것이다. 그러다가 1858년 페롱 신부가 그에게 세속의 모든 사업을 단절하고 채무도 다시 얻지 말라고 충고한 뒤 페롱 신부의 복사로 약 2~3년 봉사하게 했는데, 이때부터 이전의 세속적인 다소 무책임한 상업, 투기 활동을 일체 그만두었음은 물론이고, 복사활동 중에 생기는 돈과 식량은 오로지 그동안 진 부채를 갚는데 사용할 정도로 절검하면서, 남들에게 상당한 금전적 피해를 준 자신의 방탕한 삶을 회개하고 보속(보상)하는데 진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오히려 교회 내 신자들의 평판이 다시 예전처럼 좋아졌음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황석두 루가의 복사활동과 회장 활동은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부주교 다블뤼 주교를 비롯하여 페롱 신부 등 그가 순명으로 섬기며 보좌했던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그의 복사행적을 살펴보았던 그의 지인, 신자들로부터도 호평을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겸손하고 절검하였으며 또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사는 데에 열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저술 및 번역 보조

 

황석두는 1860년대 초반 이후 베르뇌 주교의 복사를 거쳐, 마침내 다블뤼 주교의 저술, 번역사업을 보좌하였는데, 1862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당시 조선교회의 모든 서적들, 즉 《셩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1권1책, 교리서), 《텬쥬셩교공과(天主聖敎功課)》(4권4책, 조만과, 모든 주일과 축일 첨례를 위한 경문, 성로선공, 묵주신공, 미사참례규식 등을 포함), 《텬쥬셩교예규(天主聖敎例規)》(2권2책, 의식서, 장례의식과 절차, 병자권유 선종준비 등에 관한 내용 포함), 《신명초 (神命初行)》(2권2책, 신앙생활 입문서), 《회죄직지(悔罪直指)》(1책, 고해방법), 《령셰대의(領洗大義)》(1책, 영세준비), 《셩찰긔략(省察記略)》(1책, 양심성찰서), 《쥬교요지(主敎要旨)》(1책, 외교인을 위한 천주교 간략소개서), 《텬당직노(天堂直路)》(1책, 신심서), 《셩교절요(聖敎切要)》(7성사 설명서), 《쥬년쳠례광익(週年瞻禮廣益)》(4권4책, 연중축일 소개 및 성인전) 등 10여종 이상의 교회서적들을 번역, 저술하는 데에 황석두 루가가 상당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48) 지금까지 알려진 황석두 관련 기록들 중에서 이들 교회 서적 중에서도 《회죄직지》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주목된다.

 

▷ 황 루가 회장은 장(베르뇌) 주교를 돕게 되어 주교와 함께 《회죄직지》 발간에 기초 원고를 썼다. 그리고 그후 다시 안 주교를 도와서 번역 출판과 그 교정에 힘을 기울였다.49)

 

▷ 황 루가를 장(베르뇌) 주교 복사로 다닐 때에 서울에서는 만나보고 시골 공소 때에도 만났습니다. 그때에 황 루가가 《회죄직지》를 교우들에게 풀어 성사를 잘 예비하도록 했는데, 안 주교 복사할 때에는 못 만나보았습니다.50)

 

이처럼 황석두 루가가 고해성사(告解聖事)를 잘 볼 수 있도록 교우들에게 《회죄직지》에 대한 상세한 풀이를 할 수 있었던 사실은 그가 신학생을 그만둔 후, 세속 일(투기와 채무)에 관여하여 다블뤼 주교에 의해서 일종의 추방령(교회직분금지령)이란 처분을 당하여 약 4~5년간 스스로 반성하고 자숙했던 일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황석두 성인은 이 성찰과 자숙의 기간 동안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 위해 필요한 양심성찰과 더불어 고해성사를 위한 철저한 준비로서 《회죄직지》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공부(학습)했을 것이기 때문에, 훗날 복사로서 선교사를 따라 교우촌(공소) 순방에 나설 때 교우들에게 자신있게 이 《회죄직지》의 내용을 자세하고 이해하기 쉽게 풀이(설명)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Ⅳ. 순교와 영성


1. 체포와 심문과정

 

황석두 성인은 음력 병인년 1월 25일(양력 1866년 3월11일) 충청도 홍주의 신리(아랫거더리)에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될 때 자원해서 함께 체포되어, 위앵(閔, 루가) 신부, 오메트르(吳 베드로) 신부 등과 함께 경포의 호송을 받아 서울로 가서 음력 2월3일(양력 3월19일) 포도청에서 두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고 음력 2월7일(양력 3월23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윽고 충청도 수영이 있는 보령에서 음력 2월14일(양력 3월30일 예수수난 성금요일)에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동료 4명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황석두 루가 일행의 체포와 이송, 심문, 처형과정에 대해서는 무수한 교회 내 증언이 있지만, 조금씩 그 상황 설명이 다르므로, 직접 당시 상황을 목격한 목격증언이나, 목격증언을 직접 듣고 진술한 1차 전문증언 등을 중심으로 체포~처형의 각 과정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기술해보면 다음과 같다.

 

㉮ 체포과정

 

▷ (달레교회사) … 세 선교사가 그들의 감방 노릇을 하는 방에 모여 있었다. 자기들의 원정과 서양인들이 순순히 굴복한 데서 만족을 얻은 포졸들은 그들에게 매우 정중한 대우를 하였다. 그들은 결박하지도 않고 (그 당시에는) 마을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으며, 또 그들(선교사들)의 청을 들어 잡았던 신자들을 놓아주었다. 풀려난 신자들은 위앵 신부의 복사 외에 (다블뤼 주교의 집주인) 손 니콜라오, (포졸들의 길잡이로 동원된) 신학생 박만억 필립보, 다블뤼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였다. 그러나 황 루가는 떠나기를 거절하고, 자기의 스승인 동시에 아버지인 분을 따라가겠노라고 선언하였다.51)

 

▶ (목격증언) … 안 주교께서 잡히실 때에 황 루가가 포교들에게 성교 도리를 벽파하니 포교들이 다 옳다고 하였고52)

 

▶ (목격증언) … 신리는 안 주교께서 계시던 곳으로 … 황 루가는 안 주교의 복사로 있을 때에 (제가) 매일 보았습니다. … 황 루가는 주교 잡히실 때에 따라가려고 하자 포교들이 오지 말라고 때렸으나 굳이 따라가 서울까지 갔습니다. 나와 그 때에 있던 여러 교우들이 다 보았습니다.53)

 

다블뤼 주교 등 세 명의 선교사와 황석두 루가가 경포들에게 체포되던 과정을 직접 목격한 신리의 거주민 손여선 바오로에 의하면, 황석두 성인은 그 와중에 포교들에게 천주교리를 가르쳐주고 그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굳이 놓아주고자 애를 썼던 포졸들의 만류를 한사코 거절하고, 그들에게 구타까지 당하면서도 끝내 자원해서 자신의 영적 스승이자 아버지로 섬기는 다블뤼 주교를 따라갔다. 그러므로 황석두 성인의 체포는 온전히 자원(自願, 自首)에 의한 것으로 포졸들의 만류와 구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억지를 부려 체포행렬에 합류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 서울로 이송과정

 

▶ (목격 및 1차 전문증언) … 포교가 가로되, “그렇게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오너라” 하였습니다. 황 루가는 홍주까지 봇짐 지고 따라갔다가 홍주에서 등어리(집둥우리, 집둥지) 타고 서울로 갔다고 합니다. 죄인이 (황 루가가) 신리에서 나가는 것은 보았으나, 포교하고 수작하는 말은 못 듣고 동네 어른들에게 들었으며, 홍주에서 등어리 타고 서울로 갔다는 사정은 남에게 들었습니다.54)

 

▷ (달레 교회사) … 포졸들은 서울길을 떠나기 전에 거더리에서 이틀을 묵었다. 그들은 잡힌 사람들에 대해서 정중하고 친절한 태도를 취하였고, 여러 차례 그들에게 행하여진 권고를 기꺼이 듣는 것 같았다. 다블뤼 주교는 그들의 태도에 만족하여 집에 가지고 있던 엽전 몇 백 닢을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 증거자들을 서울로 압송할 때 결박은 하지 않고 오라를 어깨에 걸고 전 넓은 모자를 씌웠었다. 거룩한 기쁨이 그들의 얼굴에 나타나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모여든 모든 외교인이 매우 이상히 여겼다. 평택 읍내에서 포졸들은 선교사들에게 고기가 들어있는 훌륭한 점심식사를 대접하였다. 그러나 그날은 소재(小齋)날 이었으므로 선교사들은 식사를 들려 하지 않았다. 포졸들은 이상히 여겨 그 이유를 묻고는 천주교 법규를 지키기 위하여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자기들이 알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양해를 구하고 급히 다른 음식을 준비하게 하였다.55)

 

▷ (순교약전 보완자료) … (황루가가) 홍주 읍내로 들어가서 읍인에게 무수히 강론하니, 듣는 자들이 “천주학을 못할 것으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구나!” 하는 자가 많았다. 서울로 올라올 때 신창 고을에 들러 또 도리를 벽파하니 거기서도 듣는 자들이 옳은 도리로 알더라. 서울로 올라가서 주막 주막에서 도리를 벽파하니 처음에 듣는 자는 모두 옳게 들었다. 포교가 말하기를, “아무리 옳을지라도 너무 옳다고 하니 듣기 싫다”하고 …56)

 

▶ (목격 및 1차 전문증언) … 잡혀서 서울로 올라오실 때에는 남문 밖에서 보니, 말 위에 집둥우리(죄인을 태워 운반하던 도구) 타시고 몽두(蒙頭, 죄인의 머리에 덮어씌우는 가리개의 일종) 쓰시고 행차칼[枷] 쓰시고 손에 수갑이 채워져 오시는데, 민 신부와 오 신부와 황 루가와 장 회장 등도 함께 같이 하고 왔습니다. 안 주교와 두 분 신부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고서 오시고, 조선 교우는 몽두를 쓰지 않고 행추칼만 썼습니다. 서울 서소문으로 들어왔는데 나라에 가례(嘉禮)가 있었기 때문에 나라 분부에 대원군이 있는 운현궁으로 내리라 하여 거기 가서 사관청(士官廳)으로 갔습니다. … 사관청에 하루 갇혔다가 포청에 사흘 동안 갇힌 후에 시골로 치명하러 내려갔습니다. 이 사정은 교우에게도 듣고 친구에게도 들었습니다.57)

 

이상 홍주에서 서울로 이송되어 간 과정에 대해서 두 명의 목격증언 겸 전문증언자의 진술 등을 열거하여 보았다. 이 증언과 달레의 기록 등을 통해서 보면, 황석두 일행은 홍주에서 서울로 갈 때까지는 비교적 융숭하고 정중한 대접을 받았고, 또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가 등이 곳곳에서 군중들에게 천주교 도리를 설명할 때 포졸들도 경청하곤 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황석두 성인의 설교는 너무나 강직하고 오랫동안 되풀이되는 특징이 있어서 일부 포교는 싫증과 거부반응을 보이기까지 했다. 한편 호송된 이른바 사학죄인들의 얼굴에는 몽두를 씌워 가렸으며, 행추칼을 채우고 수갑도 채웠으며, 붉은 오랏줄로 몸을 결박당한 채 짚둥우리 위에 타고 이동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황석두 루가는 어떤 연유로 해서 적어도 서울 입성할 무렵부터는 몽두를 쓰지 않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 포도청 등에서의 심문 및 재판과정

 

▷ (달레 교회사) … 서울에 도착하여 증거자들은 구류간에 갇히었다. 그들이 당해야 하였던 신문과 고문에 대한 정확한 사항은 하나도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들이 선배들처럼 의금부(義禁府)로 이송되지 않았다는 것과 조선말을 완전히 알고 있던 다블뤼 주교가 관장들 앞에서 자주 오랫동안 천주교의 변호를 폈다는 사실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아마 이 이유 때문에 그리고 그가 천주교의 가장 높은 스승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가 다른 동료들보다 더 자주 더 심하게 다리에 몽둥이질을 당하고 곤장과 몽둥이로 찌르는 형벌을 당해야 하였다. 나흘 째 되는 날 그들의 사형선고가 내려졌다.58)

 

▶ (우포도청등록 심문진술) … 제(황석두)가 받아들인 성교는 1866년 전에 천주께서 강생하여 전한 것입니다. 천하로 하여금 이 학문을 행하도록 한다면 교화의 지극한 다스림이 가히 이루어져서 스스로 깨달음이 깊어지고 스스로 얻음이 밝히 드러날 것이니, 비록 도거(刀鉅, 칼과 톱 등 행형도구) 아래 죽더라도 미혹되거나 변함이 없는 도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제 만일 나라의 법을 범하여 신체가 형벌을 받게 된 것을 불충, 불효라고 하신다면 다만 지만했다고 공술하겠습니다. 헤아려 처분하소서.59)

 

▷ (페롱 신부의 전문증언) … 그(황석두)가 형벌을 받았으며, 그것도 그의 동료들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인데, 그는 처형 순간에 더 이상 걷지도 못하였다. 그가 형벌을 거듭 받은 이유는 그가 체포된 이후에도 또 법정 앞에까지 가서도 교리를 설파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문초를 받던 중 어떤 순간에도 그의 강직함이 다소라도 나약해졌으리라고 추측을 할 만한 말은 한 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60)

 

▷ (순교약전 보완자료) … (포교가 황석두를) 포청으로 데려갔는데, 포장이 문목 형벌로 혹형하였으나 감수 인내하고 잘 참는 것을 보고 말하되, “황가는 서양인보다 더 형벌을 잘 받는다” 하고서, “천주학에는 아주 (도) 통한 사람이로다”라고 하였다.61)

 

▷ (관찬기록 : 비변사등록) … ◯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두 포도청의 계목을 보니 서양사람 안토니[安敦伊], 오 베드로, 민 유아눅가, 사학(邪學)인 황석두(黃錫斗)가 모두 죄를 시인하여 공초를 냈는데, 그들을 머물러 살게 해주고 서로 화답하여 응한 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굳게 숨기고 있으니[牢諱], 묘당에서 품처하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의 교화시키기 어려운 습성은 종자 이하의 종자로서 다른 부류의 다른 풍속이 중외(中外)로 가득하여 인심을 그르치게 하였으므로 이미 주벌(誅伐)을 면할 수 없는데, 국경을 넘어들어 온 죄뿐만이 아니라 황가가 공초한 교활하고 흉특한 말에 이르러서는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벼울 것이니, 모두 군문(軍門)에 내주어 효수하여 백성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모두 포도청에서 공충도(公忠道) 수영에 압송하게 하여 효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62)

 

이상의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황석두 일행은 서울에 들어가서 첫날에는 운현궁 근처의 사관청에 가서 하룻밤을 묵었고 그 다음날부터 3일간 포도청(구륫간)에 갇혀서 심문을 받았으며, 그때마다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가 등이 천주교와 교회를 옹호하는 답변과 진술을 많이하여 관장 등 척사론자들의 미움을 사서 심한 태형과 다리 주뢰 등을 받았기에 나중에는 더 이상 걷지 못할 지경까지 형벌로 몸이 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심문이 4일 만인 2월 23일 사형판결로 귀결될 때까지 황석두 루가는 한 순간도 배교하지 않고 떳떳이 담대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당시 위정자들(심문관)들이 황석두의 주장(진술)이 교활하고 흉특하여 만번 죽여도 모자란다고 한 것은 그가 충효사상을 대군대부의 논리를 매개로 천주신앙과 연결 지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을 글로 기록한 일종의 “신앙고백서” 내지 “호교론”이 당시 대원군에게 제출되었지만, 대원군이 이를 무시하였고, 교회 내에도 그의 이 글이 전해지지 않음으로 인해서 더 이상 황석두 성인의 가톨릭 사상을 해명하기가 어려운 점 매우 안타깝게 생각된다.63)

 

㉱ 충청 수영으로의 호송 및 형집행 대기 과정

 

▶ (목격증언) … 병인년 2월 초순에 죄인(이원명 빈첸시오)이 주교, 신부, 교우가 치명하러 내려간다고 하기에 양성 소새(현 평택시 소사동)에 가서 보았습니다. 가까이에서 보지 못하고 멀리서 보니, 안 주교, 오 신부, 황 루가와 장 회장 등이 손을 앞으로 수갑하고 머리에 무슨 보를 쓰고 집둥지 타고 가시는데, 메고 가는 사람이 한 여남은 명이 되고, 다른 하인도 여럿이고 군사는 몇 명이나 되는지는 똑똑히 모르고, 그 모양으로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64)

 

▷ (1차 전문증언) … 서울에서 죽이지 않고 수영으로 죽으러 내려갈 때에 죄인 부친이 보니 안 주교와 신부 두 분께서 말을 타시고 머리에 꾀갈(꼬깔, 몽두) 쓰고 내려오시더라고 했습니다.65)

 

▷ (달레 교회사) … 다섯 순교자는 말을 타고 수영으로 압송되었다. 몽둥이질로 부수어진 그들의 다리는 유지(油紙, 기름종이)로 싸서 헝겊 몇 조각으로 잡아매었다. 머리에는 노란 모자(몽두)를 쓰고 목에는 오라가 걸려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넘쳤고, 여러 번 포졸과 구경꾼들이 놀라는 가운데 성영(聖詠, 시편)을 읊고 성가를 부르며 열렬한 감사의 기도를 하느님께 드렸다.66)

 

▷ (전문증언) … 서울에서 황 루가와 안 주교와 같이 홍주로 내려와 있을 때 홍주 영장이 포교들에게 말하길, “저 황가는 수영으로 함께 보내지 않으면 어떠하냐?” 하자 황 루가의 말이“그게 무슨 말이요? 사제간에 어찌 떨어질 수가 있다는 말이오?” 하고 홍주에서 주교와 함께 수영으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주교께 심부름이든지 담배 피워 드리는 것이든지, 항상 복사노릇을 하더라 하며 수영에 가서는 수영 아전들에게 밤낮으로 성교 도리를 벽파하니 아전들 말이 “저런 양반은 위의 영(令)이 유연하여 살렸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67)

 

▷ (전문증언) … 주교와 신부 세 분은 장청(將廳) 아랫방에 앉으시고 조선 교우들은 윗방에 앉히고, 다담(셇啖)을 올린즉 두 교우는 먹지 아니하고 안 주교와 오 신부는 떡국을 잡수시고 민 신부는 얼마 잡수시지 않았습니다. … 그 날이 수난 대재날이라 주교 말씀이 “내가 오늘 오전에 죽을 터인데 한낮이 다 되어 가니 어서 결박하고 어서 죽여달라” 하며 호령하매 그 말을 듣지 않는데, 말들 하기를 “지금 죽을 놈들이 어서 죽여 달라고 한다” 하고 참소에 나갈 때 거리가 거의 십리 상거가 되는지라. 짚둥우리를 타고 나가다가 중로에서 술재라 하는 고개에서 민 신부가 슬픈 모양으로 머리를 숙이고 흥흥 소리를 내며 우시고 …68)

 

▷ (1차 전문증언) … 또 죽이기 전에 차담상을 차려주니 다른 교우들은 안 먹으나 황 루가는 팔을 걷어붙이고 다른 교우들을 향해 “천주께서 주시는 음식을 마지막으로 먹읍시다” 하고 먹었느니라.69)

 

▷ (전문증언) … 고마 수영에 가서 안 주교와 함께 치명할 때 데리고 가던 포교에게 돈을 달라고 하며 말하기를, “지금은 내가 죽으니 이 돈을 내게서 못 받겠으나 이 다음에 내 시신을 거두러 오는 사람한테 받아라”고 한 후, 그 돈을 받아서 음식을 사며 따라오던 사람과 구경꾼에게 나누어주라 하였다고 합니다.70)

 

▷ (전문증언) … 서울에서 수영으로 치명하러 내려오실 때, 거리에서 황 루가가 성교 도리를 벽파하니 듣는 외인들이 말을 잘한다고 황 루가를 칭찬했다 합니다.71)

 

이상의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서울에서 400여리나 떨어진 보령 수영까지 황석두 루가 일행이 호송되어 오는 모습은 서울로 압송되는 광경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몽두 쓰고 오랏줄을 목에 걸고 짚둥우리 타고 이동하는 것과 즐겁고 기쁜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교를 준비하는 사형수들의 표정은 서울로 상경할 때와 동일했다. 달랐던 것은 그들의 다리뼈가 주장질과 주뢰질 등으로 부수어져 기름종이로 싸서 헝겊으로 동여맨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서울의 포청 심문에서 얼마나 주장질을 당했는지 황석두는 형장에서 거의 걷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황석두는 곳곳에서 특히 홍주 관아의 포교들에게 선교를 하였고, 다블뤼 주교는 예수수난 대재일인 성금요일에 반드시 사형시켜 달라고 관원들을 재촉하면서 단단히 죽음을 각오했었다. 황석두 일행이 차담상을 받아먹는 광경에 대해서는 증언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음도 알 수 있는데, 대부분의 증언들에서 황석두 루가가 가장 기쁘게 천주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순교와 매장

 

㉮ 행형 과정(순교장면)

 

▶ (목격증언) … 병인 2월16일(음력 2월14일의 잘못) 예수 수난 대재날(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치명하러 법장으로 나가시는 것을 보니, 앞에는 창과 기를 든 군사가 나아가고 그 다음에 풍류를 갖추는 풍악장이가 늘어서서 가고 그 뒤에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황 루가, 장 회장이 집둥지 타고 나아가고 마지막에 수사가 따라 나갔습니다. … 법장의 이름은 보령 갈매못이라 하는데 수사가 있던 수영에서 한 10리가 되고 또 강가입니다. 죄인이 처음 만나서 법장까지 따라갔습니다. 법장에 이르러 수사는 높은 장막을 치고 앉고 군사들은 좌우로 가운데를 비워주고 서 있고 (사형수들의) 상투에 명패 하나씩 달았는데,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장주기는 똑똑히 써있는 줄 알고 안 주교라 썼는지 안 안토니오라 썼는지는 똑똑히 생각나지 않으며, 신부들과 장 회장은 어떻게 썼는지 모르고, 황 루가 명패는 죄인이 그 시신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모릅니다. 죽이기 전에 얼굴에 회를 발랐는지 죄인이 먼 데서 보았기 때문에 똑똑히 모르며 옷을 다 벗기고 죽였는지는 똑똑히 모르나 시신 찾을 때에 보니, 옷 하나 없이 발가벗겨져 있었습니다. 먼저 안 주교께서 칼을 받으셨는데 목이 반쯤만 베어지고 죽지 않으시고 몸이 한번 뛰었습니다. 목을 찍기는 공주 희광이가 찍었는데, 그렇게 목을 반만 찍고 수사에게 가서 찍는 수공으로 돈 400냥을 달라고 하니까 수사가 주겠다고 허락하였습니다. 다시 안 주교의 목을 찍으니 목이 온전히 끊어지고 다른 신부 두 분과 교우 둘은 대번 칼에 죽었습니다. …72)

 

▶ (목격 및 1차 전문증언) … 안 주교와 황 루가가 치명하러 나가실 때에 따라가 보았는데, 그때에 고마 수영 방갓 동네에 살았습니다. 방갓 동네에서 안 주교께서 치명하시던 자리까지 5리도 안됩니다. 그때 나는 안 주교와 황 루가 치명하실 때 머리 벨 때까지 있었는데 모인 사람들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던 소리만 지금 겨우 생각납니다. … 오라버니 말이 안 주교와 황 루가가 치명하시기 전에 음식상을 차려 드렸는데, 황 루가가 안 주교께 권하여 드시게 하였다고 말 들었습니다. … 오라버니에게 말 듣기를 안 주교와 황 루가가 치명할 때에 목에서 흰물이 피보다 많이 방울방울 나오는 것을 보았다 함을 들었습니다.73)

 

▶ (목격 및 1차 전문증언) … 안 주교께서 수영으로 치명하러 오실 때에 ‘방갓’이라는 동네에서 구경하였습니다. 치명하실 때에 사람이 많아서 다른 것은 못보았고 다만 희광이가 칼을 듣고 춤추는 것을 보았으며, 나중에 장대에 머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 안 주교와 황 루가가 치명한 후에 베인 머리를 그릇에 담아서 사또에게 보이는 것을 보았고, 모여 있던 사람들이 좋은 곳으로 갔다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74)

 

▷ (후손의 전문증언) … 문초한 것은 모르나 치명하시기 전에 각위(各位)에게 큰 상을 드려 잡수시게 하니, 주교 잡수시지 아니하매 황 루가가 권면하여 가로되, “천주 내신 만물을 오늘 마지막 잡수시라” 하여 함께 잡수신 후, 얼굴에 회칠을 하고 귀에 살을 꿰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기구(기도)하신 후에 주교 칼을 받으신 후, 민 신부 칼을 받으시고, 그 다음에 오 신부 칼을 받으시고, 그 다음에 황루가 칼을 받으시고, 그 다음에 장 요셉이 치명하셨는데, 치명하신 날은 정월 13일이더라.75)

 

▷ (전문증언) … 교우들이 이야기하기를, 안 주교는 법장(사형장)에서 형벌을 받으실 때에 얼굴빛이 변하지 않으셨으나, 오 신부와 민 신부는 얼굴빛이 변하고 또한 겁이 나서 떠는 빛이었습니다. 황 루가가 즉시 가서 신부 두 분께 권하여 가로되, “신부, 왜 이렇게 겁을 내십니까? 천국과 지옥이 여기 잠깐에 달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부들이 겁이 없어지고 얼굴빛이 그 전과 같았다고 하고, 치명은 칼을 받아 참수 치명하셨다고 합니다.76)

 

▷ (달레 교회사) … 신자 몇 명이 구경꾼들 틈에 끼여 들었는데, 그들이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최후 순간에 관장이 서양 신부들에게 땅에 엎디어 절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한다. 다블뤼 주교는 그에게 서양식으로 인사하겠다고 말하며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관장은 자존심이 상하여 그들을 자기 앞에 땅에 엎드리게 하였다. 다블뤼 주교가 맨 처음에 참수되었다. …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일격을 가한 후 망나니는 일을 중단하였다. 그것은 그 비열한 자의 계산에서 온 것이었다. … 마침내 흥정이 이루어지고 칼질을 두 번 더하여 순교자에게 영광을 안겨주었다. … 다른 증거자들은 각기 한번으로 충분하였다. 처형에 앞서 비열한 잔인을 극도로 발휘하여 다블뤼 주교의 옷을 완전히 벗겼다. 다른 증거자들에게는 바지를 남겨두었다.77)

 

▷ (전문증언) … 참소에 내려와 주교께서 먼저 치명하시므로 공주 희광이가 내려와 거행할 때 반쯤 벤즉 몸을 움직여 뒤틀고, 희광이가 “예전(禮錢)을 달라” 하고 베지 아니한 즉 보령 원이 400량을 주기로 정한 후 신부와 교우는 한 칼에 다 베고, 들리는 말에 보령 원이 그것저것 쓴 돈이 800냥이라 하고78) …

 

▷ (1차 전문증언) … 서울에서 희광이가 내려올 예정이었으나 내려오지 않자, 보령 백정놈을 붙잡아다 죽이라 하니, 그 백정놈은 한사코 죽이기 싫다고 했습니다. 안 주교는 너무 늦는다고 매우 걱정하시니 병인 2월 17일(2월 14일의 잘못) 수영 장날에 장기대에 동여맸습니다. 안 주교는 그 백정놈이 서툴렀기 때문에 두 번 찍혀서 치명하시고 다른 신부와 교우는 다 대번 칼에 치명하였다고 합니다. 죄인의 부친이 광천장에까지 친히 보았다고 합니다.79)

 

▷ (1차 전문증언) … 어떤 신부인지는 모르나 황 루가와 같이 치명하는데 희광이가 그 신부의 목을 치다가 반만 치는 것을 황 루가가 보고 “네 이놈, 단칼로 치지 못하겠느냐” 하였느니라80)

 

▷ (1차 전문증언) … 예수 수난 대재날에 고마 수영에 가서 치명할 때 먼저 안 주교, 그 다음에 오 신부, 그 다음에 황 루가가 자기 손으로 목을 목침으로 괴고 치명하고 마침내 장 회장이 치명하였다는데 다 참수 치명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은 친히 보았던 교우 고 선생에게 들었는데, 그 사람이 그때에 신창 남방재에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또 다른 교우에게도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81)

 

▷ (1차 전문증언) … 병인년에 안 주교께서 … 황 루가와 함께 참수 치명하시니 “목을 베어 장기대(대장의 깃발을 달아놓는 나무)에 매달아 두었다”라고 하는데, 이 치명 이야기는 친히 보았던 외인 표가에게도 듣고, 거기 살 때 보던 죄인의 육촌한테도 들었습니다.82)

 

이상의 목격증언들과 이에 버금가는 신빙성이 있는 1차 전문증언들을 토대로 황석두 루가가 순교하던 그때와 그 장소의 광경들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행형준비 - 군대 위엄을 과시함 : 병인 2월14일(양력 1866년 3월30일, 예수수난성금요일)에 충청(고마) 수영에서 10리쯤 떨어진 갈매못(갈마진두) 모래사장에서, 충청수사가 지휘하는 200명의 군사들이 창과 깃발을 들고 좌우로 도열하고 가운데를 비워두고 충청수사는 높은 단위에 착석함. 이때 주위에는 풍악장이들이 대기하고 있음.] → [다담상 베품 : 사형수들에게 이승의 마지막 잔칫상을 차려주자, 황석두의 설득으로 모두가 음식을 먹음] → [판결문 낭독 *관련 사료에서는 발견되지 않음] → [큰절 강요 : 사형직전에 수사가 사형수들에게 조선식으로 자신에게 큰절을 하기를 요구했으나 다블뤼 주교가 거절하고 서양식으로 절함. 이에 수사가 강제로 무릎을 꿇게 하고 큰절을 하게 함.] → [조리돌림 : 군사들이 둘러선 한 가운데에 사형수 5명(다블뤼, 오메트르, 위앵, 황석두, 장주기)을 끌어다가 얼굴에 회칠을 하고, 귀에 화살을 꽂은 후 손을 뒤로 묶고 양쪽 겨드랑이에 나무 작대기를 끼워서 형장에 모여든 군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조리돌림.] → [희광이의 칼질 개시 : 사형수들이 장기대에 상투를 잡아매인 채 목침 위에 엎드려 칼을 받을 상태가 되자, 공주(보령)에서 온 희광이가 다블뤼 주교부터 칼을 내리침 ] → [희광이의 예전 요구와 흥정 지연 : 단 칼에 목이 반쯤만 잘린 상태에서 예전(품삯)을 요구하며 행형을 중지하는 바람에 다블뤼 주교의 몸이 전율하면서 펄쩍 뜀. 이 광경을 바라본 황석두가 희광이에게 비겁한 장난을 그만두라고 꾸짖고 단칼에 처형해줄 것을 요구함.] → [희광이의 칼질 재개 : 수사가 400량을 예전으로 줄 것을 약속하고 희광이가 다시 다블뤼 주교의 목을 내리쳐 완전히 목을 베고, 그 다음에 신부 2명, 그 다음 네 번째로 황석두 루가의 목을 내리침. 황석두는 단칼에 목이 잘려 떨어짐] → [수급(首級)확인 : 잘려진 머리를 그릇에 담아 수사에게 확인해 보임] → [효수경중(梟首警衆) : 5명의 사형수의 상투에 매단 명패와 함께 잘린 수급(머리)를 모두 장깃대에 높이 매닮으로서 효수경중(梟首警衆 ; 목을 베어 높이 메달아 군중에게 공포의식을 조성함)의 공식적 의식이 끝남.] → [교우들의 외침과 기원 : 순간 둘러선 군중들 사이에 낀 교우들이 “좋은 곳으로 올라가셨다”고 외침] → [군대 및 군중 해산 : 시신을 모랫사장에 버려둔 채 군중들을 해산시킴]

 

㉯ 시신 매장 및 이장과정

 

▷ (달레 교회사) … 처형에 앞서 비열한 잔인을 극도로 발휘하여 다블뤼 주교의 옷을 완전히 벗겼다. 다른 증거자들에게는 바지를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밤에 몹쓸 놈들이 와서 (바지마저) 벗겨갔다. 시체들은 4일간을 그대로 버려진 채 있었는데, 그동안 그 지방에 많이 있는 개나 까마귀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그 근처에 사는 외교인들이 바로 형장에 모래를 파고 시체들을 묻었다. 몇 주일 후 황석두 루가의 배교한 가족들이 와서 그의 시체를 파갔다.83)

 

▷ (후손의 목격 및 전문증언) … 시체는 각각 묻고 성명을 써서 무덤 앞에 박았더라. 4월 13일에 시신을 본집으로 모셔올 때, 시체가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고 얼굴 화색이 생시 같아서 매맞은 상처는 다 나아서 딱지가 있고, 귀에 살 박았던 흔적이 있더라. 시신을 홍산 삽티에 안장하였고, 치명하시던 해에 56세(*54세의 오류)더라. 치명하실 때에 친히 본 외인의 말이 흰 무지개 다섯이 하늘을 뚫고 나감을 모든 외인들이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고 하니라. 정읍군 내장면 신서리 황 마르타는 위에 치명하신 사실을 친히 보지는 못하고 친히 본 사람에게 듣고, 또 들은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들음이요, 평생 행위는 여러 번 분명히 들었으며, 치명하신 후 시체는 친히 보았기로 증인이 됨.84)

 

▷ (목격 및 전문증언) … 죽은 후 얼마 안 되어 법장 근처에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세 분 시신은 한 무덤에 외인들이 묻고, 또 황 루가, 장 회장 두 시신은 다른 무덤에 함께 그 외인들이 묻었습니다.85) … 황 루가가 치명한 후에 그 시신을 외인들이 그 법장 근처에 장 회장 시신과 한 무덤에 묻었는데, 그 일가들이 주교와 신부의 시신을 찾아가기 전에 파간 줄만 알고 어디에 어떻게 장사지냈는지 모르며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 황 루가 장사는 어떻게 무슨 예절로 하였는지 모르며, 안 주교, 오,민 신부, 장 회장 시신은 여러 번 옮겨 장사할 때에는 외인들 모르게 하느라고 아무 예절 없이 연도도 하지 않고 공경하는 예절도 없이

하였습니다.86)

 

▷ (1차 전문증언) … 죽은 후에 황 루가의 양아들 황 요한이 그 시신을 거두고 와서 하는 말이 “황 루가 죽은 지가 보름이나 되는데 목을 벤 자리에 피가 붉게 남아 있었고, 얼굴빛이 환하더라”고 하며 참 영적이라고 했습니다.87)

 

▷ (전문증언) … 그 치명자 장사 말은 별로 못 들었으나 황 루가의 시신은 제 조카가 파서 어디에 갔다가 장사하였다고 하고 …88)

 

▷ (1차 전문증언) … 황 루가 시신은 그 조카 황 요한, 황 루가 양자가 가서 수영에서 파서 홍산 삽틔에다 묻었는데, 자리는 모릅니다. 그 황 루가의 시신을 장사할 때에 최학완이라는 신문교우도 갔었는데 장사한 후에 죄인에게 말하기를, “황 루가가 아마 2월 달에 죽고 장사할 때는 4월 그믐께나 5월 초승인데 죽은 지 여러 달이 되었어도 황 루가 시신을 보니 산 사람의 빛도 그렇게 고울 수가 없더라” 하며 시신 빛이 매우 고왔다고 했습니다. 무슨 예절로 한 지는 몰라도 시신들이 다 온전하게 묻혔습니다. 죄인의 이모부가 하루 저녁에 보니, 달 근처에 푸른 무지개가 섰는데, 그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더니 후에 알아보니까 그날 주교, 신부, 교우가 수영에서 치명하시던 날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영적 말은 못 들었습니다.89)

 

▷ (1차 전문증언) … 시신은 죽은 후 며칠 동안 모래로 묻었는데, 각각 성패를 써서 놓았기 때문에 며칠 후에 나의 백부(황 예로니모)가 가서 찾아왔고 남은 시신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4월 16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신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 사피(즉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 거기서 시신을 가지고 오려고 파니, 시신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고 또 목의 피는 새로 흐르는 것 같더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황 루가가 치명한 후 흰 무지개 다섯이 시신 있는 곳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더라고 하는 말을 백부에게 들었습니다.90)

 

▷ (목격 및 전문증언) … 안 주교와 황 루가의 시신은 치명 후 3일 동안이나 강변에 있었는데, 그 후에 산에 묻었고 나는 그 무덤까지 보았습니다. 그후 여러 날 후에 또 산에 갔었는데 무덤 파간 자리가 있기에 어머니께 주교 무덤을 누가 파갔더라고 하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까지 들었습니다.91)

 

▷ (1980년 7월 9일, 오전 7시 방곡리 선산에서 성인 유해발굴 : 기록자 오기선)92)

 

이상의 시신 수습과정과 이장 관련 내용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1866년 3월30일(음2월14일) ; 갈매못 모래사장에 효수경중(梟首警衆) 상태로 황석두 성인 등 5명의 시신이 방치되어 있음

 

● 1866년 4월3일(음2월18일) 저녁 : 지역 외인들이 와서 황석두 루가의 시신을 장주기 회장의 시신과 함께 한 구덩이에 묻음

 

● 1866년 4월13일 전후 : 순교한 지 약 보름 만에, 황석두의 양자 황 요한 등이 시신을 형장 부근 가매장지에서 파내어 홍산 삽틔에 옮겨 장사지냄

 

● ??년 : 후손들이 장주기의 시신을 연풍군 병방골 가문의 선산으로 이장함.

 

● 1980.7.9. : 오기선 신부와 수안보 성당 로벨토 릴리 신부와 관계자, 후손 황원기 회장(예산본당) 등이 병방골의 무덤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수안보 성당으로 옮김.

 

 

Ⅴ. 성 황석두 루가의 신앙과 향후 연구과제

 

황석두 성인에게는 평소 두 가지의 소원이 있었다고 한다.

 

평상시에 길을 갈 때에도 항상 염경이요, 상해(항상) 하는 말이 “광양(廣揚 ; 신앙의 자유를 누림)이 되어 마음대로 권화(勸化, 전교)해보고, 칼 받고서 치명(致命, 순교)할 두 가지 밖에 다른 소원은 없다”고 하였다.93)

 

성인에게는 마음껏 전교를 할 수 있는 신앙자유의 날이 하루 속히 다가오기를 바라는 것과, 작은 군란을 통해서 천주님께 자신의 목숨을 봉헌하는 것, 즉 위주치명(爲主致命, 순교)하려는 것 두 가지 소원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두 가지 뚜렷한 소원은 인생의 목표였는데, 전교(봉사)활동과 순교의지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순교 직전까지 박해자를 비롯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천주교회의 교리를 가르치고 검소하고 겸손한 행실로 몸소 가르침을 실천해 보여줌으로써, 한결같이 순교의 길로 올곧게 나아간 것은 바로 이같은 그의 두 가지 소원의 불가분한 관계를 잘 말해준다. 이처럼 철저한 순교정신에 입각하여 그의 신앙은 매일의 기도와 묵상으로 착실하게 다져졌고, 이것이 그의 부지런한 교회활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매일 닭이 울면 즉시 일어나 대월(對越, 묵상)하되 날이 밝으면 파하며, 안 주교와 함께 고경(古經)과 많은 책을 번역도 하였고, 전교할 때에 모시고 다녔다.94)

 

황석두 루가 성인의 순교는 평소의 순교원의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순교 직전 포도청 심문에 의하면, 성인은 “천주님은 ‘대군대부(大君大父)’시므로 천주님을 잘 받들어 섬기는 것이 충효(忠孝)의 도리”라고 설파했다.95) 그런데 이같은 그의 순교원의는 그가 한때나마 교회 신자들에게 재정적 어려움을 끼친 것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보속의 노력과도 일정한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황석두 성인이 예비자와 신자들에게 《회죄직지》의 내용을 잘 설명하여 고해성사를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는 일화는 이러한 그의 경험을 통하여 성찰의 중요성과 보속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성인은 매일 묵상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대화하는 데 힘썼으며, 부인과는 서로 합의하에 수정(守貞)하여 동정부부(童貞夫婦)로 살았고 부친의 선종 후 한때 경영하던 세속 일에서 완전히 단절하여, 전교순방과 예비자 권유, 교회서적 번역, 저술 등 교회 일에만 전념하였다.

 

안 주교의 하의(下意, 지시)가 있어 자기는 자식이 없어 조카를 양자로 하여 자기 아내와 함께 살게 하고(=아내를 봉양하게 하고) 1년이면 혹 한 번 집에 가보아도 내외의 모양이 도무지 없이 수정(守貞)하고 지내며 외인 권화를 많이 하였다. 안 주교와 항상 의논하여 책도 많이 베끼고 … 평생 세상을 정세로 지내더니 …96)

 

다블뤼 주교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다블뤼 주교만큼이나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여 마침내 그 스승과 함께 교회 일에 전심전력하다가 그 스승과 함께 영원한 천국으로 동행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본고의 한계 내지 향후 황석두 루가 성인에 관한 연구의 과제를 간략히 적어본다.

 

첫째, 성인에 관한 교회내의 기록들은 매우 많다. 이에 비해 관찬기록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매우 드물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찬기록과 교회기록들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고, 교회 기록 내에서도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다양한 편차를 지닌 기록과 증언들이 난립해있다. 본고에서 이러한 다양하고도 산만한 기록과 증언들을 “사실주의”(事實主義)라는 관점에서 나름대로 자료들간의 등급을 매기고 시비를 분별함으로써, 객관적인 상황에 근접한 자료들만을 선별하여 황석두 성인의 삶과 죽음, 생애와 활동을 재구성해보았다. 그러나 본고의 이 작업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서는, 또 연구성과의 축적이 어느 정도의 기준점에 도달하게 된다면, 본고에서 필자가 본 것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과 비판이 얼마든지 가능하리라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학규와 황석두의 관계에 대해서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는데, 황석두 루가의 가톨릭사상과 천주교리 인식의 특징을 본격적으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의 가톨릭 입문과정에서 절대적 영향을 끼쳤을 인도자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또한 순교 직전 서울의 포도청에서 그가 작성하여 올린 “신앙고백서” 내지 “호교론”은 아직까지 학계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마치 정하상 성인이 체포되어 올린 “상재상서(上宰相書)”에 비견되는 황석두 성인의 “상대원군서(上大院君書)”는 아직도 그 행방을 모르고 있어 안타깝다.

 

둘째, 황석두 성인이 필생의 스승으로 섬겼던 다블뤼 주교와 함께 번역하거나 저술하고 교정, 간행했던 수많은 교회서적들 특히 186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간행된 교리서, 신심서, 기도서, 의식서 등의 내용을 보다 면밀히 분석하여, 과연 그 교회서적들의 어떤 부분이 황석두의 지식과 신심의 영향을 받은 부분인지 하나씩 해명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교회서적을 통해서 황석두의 천주교리 인식과 신앙심의 면모가 밝혀지게 되면 본고에서 추구해본 사실주의적 인물연구의 수준을 한 단계 뛰어넘어 본격적인 사상사 연구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황석두 성인의 철저한 순교신심과 겸손한 봉사정신, 철저한 선교의지의 사상사적 구조와 교회사적 의의가 하루빨리 해명되기를 기대해 본다.

 

* 이 논문은 2013년 9월 28일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서 개최된 제1회 순교자의 삶과 신앙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한국순교복자수도회의 연구지원비를 받아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참고문헌]

 

1. 선교사 서한자료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페레올 주교 서한》 수원교구 역사총서③, 2012년 12월28일.

 

2. 시복재판관련 기록 및 교회증언록

《병인치명사적》

《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

《박순집증언록》

《병인순교자 시복재판기록》 Ⅰ, 1899. (교구재판록)

《병인순교자 시복재판기록》 Ⅱ, 1921~1922. (교황청재판록)

 

3. 연구논문

김근수, 〈연풍성지와 홍석두 루가 성인의 믿음〉, 《괴산문화》 10, 괴산향토사연구회, 2002.

 

4. 연구자료집

양업교회사연구소 편, 《황석두 루가 성인 전기 자료집》, 천주교 청주교구 연풍성지 발행, 2008.9.30.

 

5. 단행본 전기류

(저자) 김일환, 강석경, 강숙인, 유기송, 오기선, 정안빈 등, 《아아 병인년 : 황석두, 우세영, 정의배 편》, 성 황석두루가서원, 1995년.

(책임감수) 오기선 신부, 류홍렬 박사, 《103위 순교성인들의 생애 3》, 성 황석두 루가서원, 1984.5, **해당쪽수 : 101-115.

아드리앙 로네, 폴 테통베 지음, 안응렬 옮김, 《한국순교자 103위전》, 가톨릭출판사, 1984.1, **해당쪽수 : 384-429.

 

6. 언론(신문/잡지)에 게재된 단편적인 글

〈복자 황석두 루가 약전〉, 《경향잡지》 1207호, 1968.10.

〈신앙의 고향(연풍)〉, 《경향잡지》 1278호, 1974.9.

〈충북 연풍 성지〉, 《경향잡지》 1302호, 1976.9.

〈순교복자 현양대회〉, 《경향잡지》 1304호, 1976.11.

〈연풍 성지 순례〉, 《경향잡지》 1313호, 1977.8.

〈순교자 현양대회 성료〉, 《형제들의 소리》, 1979.9.30.

〈대한가톨릭학생전국협의회 6차 성지순례〉, 《형제들의 소리》, 1981.8.30.

〈연풍성지 5성인상과 반석 축성〉, 《가톨릭신문》 1523호, 1986.9.21.

〈청주교구 떠나는 메리놀회 정안빈 신부〉, 《평화신문》 758호, 2004.2.1.

〈메리놀회 정안빈 신부 은퇴 미사〉, 《평화신문》 761호, 2004.2.22.

〈괴산 연풍 순교성지 상징마크, 로고 확정〉, 《평화신문》 807호, 2005.1.23.

〈청주교구 충주지구 순교자 현양대회〉, 《가톨릭신문》, 200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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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체적인 간행물(논저)의 목록은 본고의 말미에 첨부된 〈6. 참고논저〉에 정리되어 있다.

 

2) 《우포도청등록》 병인 2월3일 ; 죄인 황석두, 54세, 사호 뉘가. 1866년 순교 당시 54세였으므로 역산하면 1813년생이 된다. 그러나 1918년에 작성된 병인순교자 29위 약전 “황루가 재건”에는 성인이 갑술년(=1814년) 생이라고 되어 있으며, 《병인순교자교구재판록》 첨부자료(순교약전 보완자료 중〈황 루가〉에는 순교당시 56세로 나온다) 《황석두 루가 성인 전기자료집》(양업교회사연구소 편, 2008) p.87. 이러한 기록들 중에서 포도청에서 체포되어 심문당할 때 본인이 직접 말한 나이(1866년 54세)가 가장 사실에 가까운 기록으로 인정된다.

 

3) 《병인순교자교구재판록》 첨부자료(순교약전 보완자료) 《황석두 루가 성인 전기자료집》(양업교회사연구소 편, 2008) p.84 ; “황 루가는 본디 충청도 연풍 병방골 사람이라.” 또한 황석두 루가와 절친하였고, 성인의 도움을 받아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를 사목 순방하던 페롱 신부도 “황 루가는 연풍 출신이었다”고 증언했으며, 그의 집안이 작은 벼슬을 행사하는 양반 가문이나 매우 부유한 대가족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위 자료집 p.77) 그러나 황석두를 안다고 증언한 사람들에 따라서는 그의 출생지가 충청도 충주, 제천, 황간 또는 경상도 풍기, 청풍 희여골 등이었다고 다양하게 증언한다. 성인의 견진대자였던 문선량 필립보는 성인이 제천 사람이라고 했으며(전기자료집 82쪽), 경기 양성 미리내 출신의 이원명 빈첸시오는 성인을 충청도 황간 사람이라고 했다(전기자료집 82쪽). 성인의 종손녀 황 마르타는 성인이 충주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김흥민 사도요한은 성인을 청풍 희여골 사람이라고 했다. 이러한 증언들은 나름대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나 대개는 불충분한 전문지식 또는 단편적인 근거에 입각한 불완전한 추정 등에 의거한 것으로 출생지 뿐아니라 생장지 및 거주지와 관련해서도 해석할 여지가 있는 발언들이다.

 

4) 페롱 신부는 “황 루가는 연풍 출신으로서, 그의 집안이 작은 벼슬을 행사하는 양반 가문이나 매우 부유한 대가족 집안 출신이었다”고 증언한다.(위 자료집 p.77). 또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220번에 의하면, 황석두의 부친이 서울에서 살다가 충주 고을의 이방(아전)으로 내려왔다고 한다.(전기자료집 44쪽)

 

5) 《平海黃氏 檢校公派譜》 권1, 2002, 47쪽

 

6) 족보에 의하면, 성인 가문의 무덤들은 연풍 병방골(성인의 삼촌 周肯, 성인 자신, 성인의 조카 一源 등의 묘) 외에도 풍기 동덕 아산(부친 周冕의 묘)과 풍기 산법동(성인의 형 錫基의 묘) 등에 산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풍기도 황석두 가문의 주요한 근거지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이처럼 세거(世居)하던 성인의 부친과 형의 무덤이 연풍 병방골에 없고 풍기 고을에 그것도 여기저기에 산재한 것은 어떤 연유로 해서 성인의 가족들이 중년 이후에 고향 병방골을 떠났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성인의 전교로 인해서 부친을 비롯한 전 가족이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되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자료집에 錫基가 錫斗의 동생이라고 본 것은 족보의 생년기록 오타를 근거로 한 것이지만(자료집 49쪽), 족보상 오른쪽에 등장하는 석기가 왼쪽에 기재된 석두의 동생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교회증언 등에서도 그의 형의 아들(황천일 요한)을 양자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음(*앞의 순교약전 보완자료, 자료집 p.85)을 통해서 볼 때, 황석두 성인에게는 황석기라는 형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일부 교회 기록에 성인이 삼형제 중 셋째라고 하거나, 삼대독자라고 한 기록(병인순교자 교황청재판록 1921년도 회차9, 손진도 바오로의 증언)은 족보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7) 《병인순교자 교황청재판록》 1922년도 회차34, 황 마르타의 증언(자료집 95쪽) 및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220번 ; 그러나 이러한 증언들은 족보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족보에는 황석두와 그의 형 황석기 등 2명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평해황씨족보(2002년 간행) 및 황기환 소장의 평해황씨 검교공파보, 앞의 전기자료집 50쪽 등 참고.

 

8) 《좌포도청등록》 병인 12월 15일, 황천일(년28)

9) 위의 전기자료집 p.69

10) 같은 전기자료집 pp.71-72

11) 같은 전기자료집 pp.95-96

 

12) 서종태, 〈병인박해와 절두산 순교자들〉 《교회사연구》 20집(2003.6.30.) pp.96-97 이에 의하면 황기원 안드레아에 대한 포도청등록 두 곳의 세례명이 안드레아, 요한 등으로 서로 다르게 나오는 이유도 황기원의 의도적인 거짓말로 해석한다. 필자 또한 이에 동의하며 형(황기원)이 동생(황천일)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동생의 세례명인 요한을 자신의 세례명처럼 진술한 것으로 생각한다. ; 《병인치명사적》 23권 041 〈황 요한〉요한은 황 루가의 양자라. … 증인은 그 누이 온양 마리골 사는 황 마리아니 나이 59세라.

 

13) 《좌포도청등록》 병인 12월 15일(영인본 하권 431~432쪽)

 

14) 연구자들의 입장도 나뉜다. 오기선 신부는 황기원이 황석두의 양자라고 하며, 방상근, 서종태 박사는 황천일이 황석두의 양자라고 한다. 오기선, 류홍렬 책임감수 《103위 순교성인들의 생애》 제3권 102쪽, 110쪽, 115쪽(성 황석두루가서원, 1984.5), 방상근, 〈황석두(1813~1866)〉 《한국가톨릭대사전》 9818쪽(한국교회사연구소). 서종태, 〈병인박해와 절두산 순교자들〉 《교회사연구》 20집(한국교회사연구소, 2003.6.30.) pp.96-97

 

15)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첨부자료 〈순교약전 보완자료〉 “황 루가”(앞의 전기자료집 p.84)

 

16) 다만 한두 자료에서 황석두를 ‘진사’ 또는 ‘생원’으로 부르고 있지만(《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93, 이국서 바오로 및 〈순교약전보완자료〉 “황루가” 위의 전기자료집 각 74, 85쪽). 그러나 대부분의 지인들은 그를 생원이나 진사로 부르고 있지 않으며, 생진시에 합격했다는 증언(기록)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17)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첨부자료 〈순교약전 보완자료〉 “황 루가”(앞의 전기자료집 p.84)

 

18) 위 자료집에는 1834년 당시 충청도의 향시가 공주에서 치러졌다고 한다.(자료집 46쪽 각주51번) 그러나 일반적으로 충청도는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등과 마찬가지로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져 각각 향시를 따로 치렀다.

 

19) 《어둠을 헤친 사람들 : 24위 병인순교자전》(성바오로출판사, 1968년) 〈복자 황석두 루가 회장〉 앞의 전기자료집 46쪽

 

20)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57, 손진도 바오로의 증언 ; 《병인순교자 교황청재판록》(1921~1926년) 1921년도 회차9, 손진도 바오로 증언에는 황석두가 경상도 사람으로 서울에서 과거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고 되어 있다.(위의 전기자료집 91쪽). 이 진술에서는 또 황석두가 황 판서의 증손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족보에서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21) 달레 원저, 최석우 · 안응렬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권(1980, 분도출판사) pp.429~432

22)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페롱 신부의 증언〉 “황재건 루가”(앞의 전기자료집 p.77)

 

23) 이와 관련하여 앞의 전기자료집에서는 황석두 성인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주던 한문 선생은 낙하생 이학규(1770~1835년)였다고 추정했다.(자료집 46쪽 각주 52번 ; 동 61쪽, 각주16번) 이학규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같은 평창 이씨로서 이가환이 외삼촌이며, 문재가 뛰어나서 정조의 〈규장전운〉 편찬에 참여한 사람이다. 또한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도로 몰려서 경상도 김해로 유배되었다가 1824년 해배되어 말년을 충주 부근에서 살았다. 따라서 그가 충주에 가서 훈장노릇을 했을 시기와 황석두가 한문을 배워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때는 서로 일치하며, 충분히 실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가 남긴 《낙하생전집》 등에서는 천주교와 관련된 어떤 직접적 언급도 남아있지 않으므로, 쉽사리 황석두의 한문 선생이 이학규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24) 위의 자료집 19쪽 각주 11번, 77쪽 각주 30번 참고

25) 《103위 순교성인들의 생애》(오기선 신부, 류홍렬 박사 책임감수, 성황석두루가서원, 1984.5) 중 pp.101~115

26)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87 김치선 마태오의 증언, 위의 전기자료집 69쪽

 

27) 손진도 바오로의 증언들,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57(전기자료집 61~62쪽)과 《병인순교자 교황청재판록》 회차9(전기자료집 91~92쪽) 등에는 부친이 황석두 성인을 벼룻집으로 때리고 작두에 목을 넣을 것까지 요구하였다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부친을 회개시키기 위한 성인의 인내심을 다소 과장되게 표현한 것들로 다른 지인들의 증언에서는 일체 나타나지 않고 있으므로 일종의 과장 내지 와전으로 생각된다.

 

28)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페롱 신부의 증언〉 “황재건 루가”(앞의 전기자료집 pp.77~78)

29) 달레 원저, 최석우 · 안응렬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권(1980, 분도출판사) pp.429~432

 

30) 이명심 토마스는 몇 달 동안이라고 했고(《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90(앞의 전기자료집 73쪽), 이원명 빈첸시오는 1년이라고 했으며(《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122(앞의 전기자료집 82쪽), 손진도 바오로는 3년이라고 했다.(《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57(전기자료집 61~62쪽)과 《병인순교자 교황청재판록》 회차9(전기자료집 91~92쪽)

 

31) 《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부록 〈순교약전 보완자료〉 “황 루가”(앞의 전기자료집 84쪽)

32) 달레 원저, 최석우 · 안응렬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권(1980, 분도출판사) p.429

33) 《우포도청등록》 병인 2월 3일 황석두, 54세 사호 뉘가(영인본 하권 pp.392~393)

34) 《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부록 〈순교약전 보완자료〉 “황 루가”(앞의 전기자료집 87쪽), “황 루가 재건”(동 89쪽)

 

35) 《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부록 〈순교약전 보완자료〉〈1918년 병인순교자 29위 약전 ; 황 루가 재건〉(앞의 전기 자료집 89쪽)

 

36)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서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보낸 1849년 12월 4일자 서한에 36세의 금욕생활을 하는 기혼자의 사제서품 청원에 대한 허락요청이 보인다.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페레올 주교 서한》 수원교구 역사총서③, 2012년 12월28일, pp.546-549

 

37) 페레올 주교가 1850년 11월 5일자로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보낸 라틴어 서한에 의하면, “허술한 작은 신학교가 있습니다. 이 신학교에서 지금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양성되고 있으며, 이들은 라틴어와 한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신학교는 정해진 장소를 가지고 있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고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페레올 주교 서한》 수원교구 역사총서③, 2012년 12월28일, p.567

 

38) 이와 관련하여 페레올 주교가 서울에서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보낸 1852년 9월 18일자 서한에, “최근에 1851년 7월에 발송된 추기경님의 서한을 받았습니다. … 동시에 제가 의심하던 몇몇 질문에 대한 답변도 받았습니다. … 성좌에 의해 결정된 것은 무엇이든 반대하지 않고 겸손되이 받아들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편지를 쓴 1852년 9월 전후에는 황석두 루가에게 신학교육을 중단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페레올 주교 서한》 수원교구 역사총서③, 2012년 12월28일, pp.596-599

 

39) 달레 원저, 최석우 · 안응렬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권(1980, 분도출판사) pp.429~430

40) 《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페롱 신부의 증언〉 “황재건 루가”(앞의 전기자료집 p.78)

41) 《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부록 〈순교약전 보완자료〉 “황 루가”(앞의 전기자료집 87~88쪽)

 

42) 《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부록 〈순교약전 보완자료〉 〈1918년 병인순교자 29위 약전 ; 황 루가 재건〉(앞의 전기 자료집 89쪽)

 

43) 《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11, 이덕인 시몬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55쪽)

 

44) 《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부록 〈순교약전 보완자료〉 〈1918년 병인순교자 29위 약전 ; 황 루가 재건〉(앞의 전기 자료집 89쪽)

 

45) 《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페롱 신부의 증언〉 “황재건 루가”(앞의 전기자료집 p.78)

46) 《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페롱 신부의 증언〉 “황재건 루가”(앞의 전기자료집 pp.78~79)

 

47) 《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부록 〈순교약전 보완자료〉 “황 루가”(앞의 전기자료집 86쪽), “황 루가의 치명사정 빠진 것이라”(동 87) 

 

48) 다블뤼 주교가 비록 조선에서 21년간 선교활동을 한 베테랑 선교사로서 누구보다도 조선의 풍속과 언어 등에 익숙했지만, 조선 지식인 수준의 한문실력과 동양고전 지식을 갖추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조선 사회의 각종 민속, 속담, 풍속 등을 세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최양업, 황석두 등과 같은 조선인 지식인의 협조가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황석두 루가가 다블뤼 주교의 명의로 된 각종 한문서적 한글 번역작업과 한글로 저술된 교회서적들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앞으로의 과제에 속한다.

 

49) 이병영, 《어둠을 헤친 사람들 ; 24위 병인순교자전》(성바오로출판사, 1968) 〈복자 황석두 루가 회장〉

50) 《병인박해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21, 박순집 베드로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57쪽)

51) 달레 원저, 최석우 · 안응렬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권(1980, 분도출판사) pp.428~429

52)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96 강치화 가롤로 증언(*전기자료집 77쪽)

53) 《병인순교자 교황청재판록》 회차11 손여선 바오로의 증언(*전기자료집 92~94쪽)

54)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11 이덕인 시몬의 증언(*전기자료집 55~56쪽)

55) 달레 원저, 최석우 · 안응렬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권(1980, 분도출판사) pp.430~431

56)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첨부자료 〈순교약전 보완자료〉 “황루가의 치명 사정 빠진 것이라”(앞의 전기자료집 pp.87~88)

57)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16, 박순집 베드로의 증언(*전기자료집 56~57쪽)

58) 달레 원저, 최석우 · 안응렬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권(1980, 분도출판사) p.431

59) 《우포도청등록》 병인 2월3일 죄인 황석두 재초(再招)

60)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페롱 신부의 증언〉 “황재건 루가”(앞의 전기자료집 p.79)

61)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첨부자료 〈순교약전 보완자료〉 “황루가의 치명 사정 빠진 것이라”(앞의 전기자료집 p.88)

62) 《비변사등록》 고종3년 병인2월7일 ; 동일자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도 참고.

 

63)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21, 박순집 베드로의 증언(전기자료집 pp.57~58) ; 좌우 포장한테 문목을 받을 때에 문목 형벌은 어떻게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문목한 후에 루가가 포장들에게 말하기를, “소인이 부모의 은혜로 글자나 배웠으니, 글 한 개를 지으면 어떠하오리까?”라고 하자, 포장이 말하기를, “오냐, 그러면 올라와서 글을 지어라.”하였다. 루가가 올라와 지필을 받아 글 한 발을 잘 지어 바치자 포장들이 그 글을 받아보고 서로 말하되, “이 글을 대원군 대감께 올려야 하겠다”하더니 과연 봉한 후에 올렸다. 대원군이 이글을 받아보고 이르되, “글을 참 잘 지었다만, 이미 죽이기로 결단한 사람이니 쓸 데 없다” 하더라고 하는 사정을 죄인이 포교 중에서도 듣고 교우한테도 들었습니다만, 그 글이 무슨 글인지는 모릅니다. …

 

64)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123 이원명 빈첸시오의 증언(*전기자료집 83쪽)

65)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95 임여행 베드로의 증언(*전기자료집 75쪽)

66) 달레 원저, 최석우 · 안응렬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권(1980, 분도출판사) p.434

67)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88(*전기자료집 71쪽)

68)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194번 이치문 힐라리오의 증언

69)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209번 이 안토니오의 증언

70)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43 김천여 실베스테르의 증언(*전기자료집 59쪽)

71)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 75 최순관 토비아의 증언(*전기자료집 63쪽) 

72)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83, 이치문 힐라리오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p.65)

73) 《병인순교자 교황청재판록》 회차86, 강 이사벨라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p.97)

74) 《병인순교자 교황청재판록》 회차87, 강 마리아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p.99)

75)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220, 종손녀 황 마르타의 증언(*전기자료집 45쪽)

76)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10, 이덕인 시몬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p.55)

77) 달레 원저, 최석우 · 안응렬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권(1980, 분도출판사) pp.434~435

78)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194, 이치문 힐라리오의 증언(*전기자료집 36쪽)

79)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95, 임여행 베드로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p.76)

80)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209, 이 안토니오의 증언 (*전기자료집 43쪽)

81)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123, 이원명 빈첸시오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p.83)

82)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94, 문학수 마티아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p.75)

83) 달레 원저, 최석우 · 안응렬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권(1980, 분도출판사) p.435

84)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220, 종손녀 황 마르타의 증언(*전기자료집 45쪽)

85)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83, 이치문 힐라리오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pp.65~66)

86)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84, 이치문 힐라리오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p.67)

87)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87, 김치선 마태오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p.69)

88)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45, 김성도 치릴로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p.60)

89)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회차88, 김흥칠 마티아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p.72)

90) 《병인순교자 교황청재판록》 회차34, 황 마르타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pp.95-96)

91) 《병인순교자 교황청재판록》 회차86, 강 이사벨라의 증언(*앞의 전기자료집 pp.98~99)

92) 앞의 전기자료집 pp.103~109

93)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부록 : 순교약전 보완자료(*앞의 전기자료집 p.85)

94)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부록 : 순교약전 보완자료(*앞의 전기자료집 p.85)

95) 《우포도청등록》 병인2월3일〈황석두 54세 뉘가〉

96) 《병인순교자 교구재판록》 부록 : 순교약전 보완자료(*앞의 전기자료집 p.87)

 

[학술지 교회사학 vol 10, 2013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원재연(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212800&Page=10&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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