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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가사 속 하느님 나라 이야기: 옥중제성과 순교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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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2-12 ㅣ No.1068

[천주가사 속 하느님 나라 이야기] ‘옥중제성’과 순교 영성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목격 증언록」(회차 87)에 따르면 ‘옥중제성’(獄中提醒)은 이문우 요한 성인(1809-40년)이 옥중에서 지었다고 전해 온다.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집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 고아가 되어 서울 남의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그 뒤에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재혼하지 않고 교회 일에 힘썼다.

 

이문우는 모방 신부 곁에서 복사를 섰고 박해로 옥에 갇힌 교우들을 돕는 한편,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냈다. 그러다 그 또한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포장이 배교하기를 회유하자 그는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정이니 어찌 굳이 죽으려 하겠습니까? 그러나 국명을 따르면 만물을 내신 대군대부(大君大父)를 배반하는 것이니 죽어도 그런 일은 못 하오. 다시 묻지 마십시오.”(「기해일기」)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이문우 성인은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배교한 교우들을 일깨워 순교의 길로

 

‘옥중제성’은 배교한 교우들을 일깨워 순교의 길로 인도하고자 지은 노래이다. 여러 이본 가운데 교회에서 공적으로 사용한 「시복자료본」 소재의 천주가사는 4음보 65행으로 이루어졌다.

 

우매하다 군난(窘亂)이여 천상과거(天上科擧) 뵈심이라

인인선악(人人善惡) 포폄하네 실허진가(實虛眞假) 분명하다

세욕지고(世辱至苦) 어떠하냐 지옥고지(地獄苦至) 그림자라

예수수난 생각하면 만의하나 다못되네

애주애인(愛主愛人) 열심하니 수십여인 먼저간선(揀選)

불쌍하다 낙방거자(落榜擧子) 저영혼을 어찌하나

금년명년 우리생전 무심중에 찾으시리

열심사주(事主) 예비하여 엄형고초(嚴刑苦楚) 달게받세

예수고상 성교도리(聖敎道理) 많이많이 생각하세

 

1-9행에서는 박해의 옛말인 군난이 바로 ‘천상의 하느님 나라’로 가기 위한 과거를 치르는 것과 같다고 노래한다. 세상의 욕됨과 고난이 지옥의 고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로 든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신 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수난을 묵상하며 그런 예수님을 닮아 지금 옥에 갇혀 당하는 형벌을 달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하느님을 열심히 섬기지 아니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되새기지 못한다면, 과거에 낙방한 불쌍한 선비처럼 될 것이라 전한다. 과거에 급제하여 화관을 쓰고 금의환향하는 영광을 누릴 수 없는 가련한 처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천상 복락으로 향하는 참행복의 길

 

이어 성인은 옥에 갇혀 고초를 당하는 교우들에게 죽으면 땅에 묻혀 구더기의 밥이 될 육신의 고통을 잊으라고 권고한다.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들은 죽음 이후에 맞닥뜨릴 엄한 심판에서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십자가를 기리며 하느님께 기도하고 선을 행하며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진복팔단의 참행복을 누릴 것이라 힘주어 강조한다.

 

수고없이 복을받나 예수고상 본을받소

군난중에 더욱열심 주모인자(主母仁慈) 사랑하리

열심열심 열심하면 성신지총 도우시리

이리하고 간구하면 성회아문(聖會衙門) 보우하리

초성통회(超性痛悔) 정개(定改)하고 만사불사 범죄말게

충신효자 열사들도 고사하고 죽었나니

아무려면 한번죽네 위주(爲主)하여 못죽을까

 

이어지는 36-42행에서는 천상 복락을 받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의 수난을 본받고자 할 때 복락을 누릴 수 있으며, 박해받는 중에도 열심히 성모님을 사랑하고 간구하면 성령의 은총으로 난관을 이겨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자 결심하는 한편, 군주, 부모,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효자, 열사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위해 죽고자 하는 치명 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선벌악의 가르침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치명자의 열정이여 아름답다 빛이나네

보천하에 몇만사람 위주치사(爲主致死) 몇이신고

이런일이 드물거든 귀한이를 감사않나

바라나니 은혜로다 성교회를 보전하기

주모은혜 무한하다 가지가지 생각하라

착히살다 착히죽어 주와함께 일생사세

사주구령(事主救靈) 하는법은 세고(世苦)밖에 또있는가

 

 

제 영혼이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마지막 53-65행은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아름답고 빛나는 일이며 이러한 귀한 순교를 당하는 것이야말로 감사할 일이라 노래한다. ‘선생선사’(善生善死)하여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곧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것은 세상의 고난을 달게 받아 목숨을 내놓는 것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지금 당하는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한 이들을 향한 따끔한 일침이다. 만물을 내신 하느님을 배반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는 함께 옥에 갇혀 있는 이들을 향한 격려이자 자신을 향한 다짐이기도 하다. ‘천당길이 좁다하니 먼눈팔다 실수’(17행)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인 것이다.

 

이처럼 ‘옥중제성’은 현세의 즐거움이 아니라 내세의 복락을 염두에 두고 선하게 살다 종국에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현세보다 내세에 무게 중심을 둠으로써 자연스럽게 종말론적 영성과 긴밀한 연관을 지니게 되었다.

 

이 천주가사를 읊으며 교우들은 박해의 모진 역경에 용감하게 맞서 기꺼이 순교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 신앙 선조들이 입에 달고 다녔던 사말 천주가사들을 통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에 목숨을 걸고 사는지를 곱씹어 본다. 세상의 즐거움과 하느님 나라의 행복, 찰나의 삶과 영원한 생명 가운데 어느 쪽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지 묻게 된다.

 

순교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기어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가고자 하는 항구한 결의와, 지쳐서 쓰러지려 할 때 자비하신 하느님과 성모님, 그리고 수호천사와 성인들에게 간구하는 기도, 천상의 하느님 나라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 심판 · 천국 · 지옥이라는 사말 교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 대해 오늘 새삼 성찰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곧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현세에서 하느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육화론적 영성의 기반이 되기에 더욱 절실하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간절함을 지니고 사는지 되새겨 본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3)

 

* 한 해 동안 ‘천주가사 속 하느님 나라 이야기’를 써 주신 김문태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 김문태 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이며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기획조정위원장을 맡고 있다. 중국 선교 답사기 「둥베이는 말한다」, 장편 소설 「세 신학생 이야기」 등을 펴냈으며, 「천주가사」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경향잡지, 2019년 12월호, 김문태 힐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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